한국불교의 역사

2007. 6. 9. 22:36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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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역사
인도문화권을 넘어서 중앙아시아의 사막지대에 전파된 불교는 또다시 동쪽의 중국에 전래되기에 이르렀다.
중국에 전래된 불교는 유교나 노장사상 등의 고유사상과 융합하여 독자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중국불교는 동아시아 전지역 즉 한국, 일본, 발해, 베트남 등으로 전파되어 동아시아 문화권을 형성하였다.
동아시아 불교권의 공통점은 한역 대장경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역 대장경을 근본 경전으로 삼고 교리의 연구나 발달도 한역경전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은 중국, 한국, 일본불교가 공통적이다.
한국불교의 사상적인 특징은 통불교(通佛敎) 즉 종합불교라고 할 수 있다. 신라 원효의 불교사상은 화엄, 법상, 삼론, 정토가 서로 융합되고 회통된 것이다. 이러한 통불교적 성격은 한국불교의 전통이 되었다. 보조국사 지눌은 교선(敎禪)일치의 종풍을 수립하고 교학과 좌선을 하나로 종합시켰다.
한국불교의 정치적, 사회적 특징은 호국불교라고 할 수 있다. 불교가 처음 전래된 것은 대략 4세기 경으로서 왕실의 귀의를 받아 호국적인 성격이 강하였다. 신라 진평왕 23년에 시작한 법회에는 백고좌강회(百高座講會)와 팔관재회(八關齋會)가 있다.
백고좌법회는 <인왕반야바라밀다경>의 설을 따라 내란과 외환 등의 악운을 물리치고 왕실과 국가 안전을 기원하기 위하여 행한 법회였다.
팔관재회는 재가신도가 팔계(八戒)를 받고 하루 낮과 밤 동안 그것을 지키는 불교의식이었으나 신라에서는 전사한 병사들의 명복을 빌거나 토속신을 섬기는 의식으로 행해졌다. 이러한 이념이 가장 강하게 나타난 것은 원광의 세속오계(世俗五戒)이다. 이후 이러한 호국 불교적인 전통은 계속 이어져 고려시대에는 침입한 몽고에 대항하여 적국항복의 원이 담긴 대장경이 조판되었다. 부처님의 가호를 기원하며 조판된 <고려대장경>이 그것이다.
조선시대 임진왜란 때에는 서산, 사명 등의 승려들이 전투에 참가하여 나라를 지키기 위하여 싸웠다. 신라의 호국정신이 조선시대까지 그 맥을 이어간 것이다.

* 삼국(三國)시대의 불교

고대 삼국은 주로 자연신을 섬기는 고유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신앙은 불교가 전래되면서 큰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하늘과 해님을 대상으로 했던 천신이나 명천(明天)을 환인(桓因) 또는 천제(天帝)라는 불교적 인격신으로 정착시켰으며, 또 창공이나 영성(靈星) 등의 숭배가 인간 수명와 화복을 주재한다는 북두 칠성신앙으로 되고, 하천이나 해수 및 농경에 관계된 모든 신의 숭배는 용왕신 신앙으로, 산악 숭배는 산왕신 신앙으로, 가옥신은 조왕신앙 등으로 정착되었다. 지금까지의 자연신적 신앙이 불교화되고 모든 신과 이에 대한 신앙이 불교신앙의 범주 안에 들어오게 되었다. 이는 불교라는 외래종교가 기존의 고유신앙을 흡수하여 새롭게 전개된 것이다.
삼국은 중국으로부터 불교를 받아들였으므로 삼국의 많은 학승들이 중국으로 가서 구법(求法)활동을 하였고, 또 그곳에서 많은 활약을 하였으며, 혹은 중국학자들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당시 중국불교의 영향으로 삼국시대에는 삼론(三論)을 비롯한 여러 교학의 학자가 많았으며 화엄, 법화, 열반 등의 경전도 성하였다. 특히 백제에서는 독자적인 율전(律典)을 마련하였다. 이러한 초기의 불교는 삼국에서 성대하게 발전하였다.
고구려의 불교 : 고구려에 불교가 전해진 것은 소수림왕 2년(372) 전진의 왕 부견(符堅)이 승려 순도(順道)로 하여금 불상과 불경을 전하게 한 데서 비롯되었다. 374년에는 승려 아도(阿道)가 왔으며, 이듬해 왕은 초문사(肖門寺)를 세워 순도를 머물게 하고, 또 이불란사(伊弗蘭寺)를 세워 아도를 머물게 하였다. 391년에는 왕이 ꡐ불법을 믿어 복을 구하라ꡑ고 하교하였고, 이어 광개토왕은 즉위 2년(392)에 평양에 아홉 개의 절을 창건하였다. 396년에는 동진에서 담시(曇始)가 불경 수십부를 가지고 요동에서 교화한 후 삼귀계(三歸戒)를 주고 장안으로 돌아갔다.
장수왕 때 중국으로 간 승랑(僧朗)은 그 곳에서 삼론학을 연구하여 학문적인 체계를 세웠고, 섭산 서하사의 주지가 되었다. 그 때 그의 명성을 들은 양 무제는 우수한 학승 10명을 뽑아 승랑에게 수학하게 하였는데 그 가운데 승전(僧詮)이 가장 뛰어나 그의 법을 이었다. 595년에 일본으로 간 혜자(慧慈)는 성덕태자의 스승이 되었고, 담징(曇徵)은 불교와 오경(五經), 색칠하는 법 그리고 종이와 붓 만드는 법을 전하였다. 또 652년에 일본으로 간 혜관(惠灌)은 백제 관륵의 뒤를 이어 일본 제2대의 승정이 되었고, 삼론학을 널리 전파하여 일본 삼론종의 시조가 되었다.
백제의 불교 : 백제에는 고구려보다 12년 뒤인 384년에 인도의 승려 마라난타(摩羅難陀)가 동진에서 옴으로써 불교가 전해졌다. 그는 이듬해 남한산에 절을 짓고, 10명의 승려를 배출하였다. 그 후 392년에 왕은 고구려에서와 마찬가지로 ꡐ불법을 믿어 복을 구하라ꡑ고 하교하였다. 526년에는 인도에 유학갔던 겸익(謙益)이 범본 논서와 율부를 가지고 인도 승려 배달다(倍達多)와 함께 돌아왔다. 율부 72권이 번역되자 담욱(曇旭)과 혜인(惠仁) 두 승려는 그에 대한 주석서 36권을 저술하였다. 552년에는 일본에 불교를 전하였고, 577년에는 불경과 율사를 일본으로 보냈으며, 602년에는 관륵(觀勒)이 천문, 지리, 역서 등을 전하였다.
신라의 불교 : 눌지왕 때 고구려를 거쳐온 묵호자(墨胡子)에 의해 지방에 불교가 전해졌다. 그 후 법흥왕은 불교를 수용하려고 하였으나 고유신앙을 받들던 귀족들의 반대로 실패하였다. 그러나 불교로서 강력한 왕권을 확립하려고 했던 법흥왕은 527년 이차돈의 순교를 계기로 불교를 배척하던 귀족들의 세력을 누르고 불교공인은 선포했다.
544년에는 흥륜사의 완공과 더불어 출가를 국법으로 허락하였고, 549년에는 양으로 유학갔던 각덕(覺德)이 불사리를 가지고 귀국하였다. 그리고 551년에는 승통 혜량(惠亮)이 처음으로 백고좌강회와 팔관회를 개최하였다. 565년에는 진으로 유학갔던 명관(明觀)이 1700여권의 경론을 가지고 돌아왔다. 또한 566년에는 황룡사를 비롯하여 기원사, 실제사 등의 사찰이 건립되었다.
특히 황룡사는 신라 최대의 사찰로서 신라불교의 중심이 되었고 그 곳에 장육존상(丈六尊像)을 봉안하고 9층탑을 건립하였다. 그리고 진흥왕은 불교를 근간으로 하여 청소년의 수련 단체인 화랑도를 창설하였다. 이 단체의 최고 우두머리는 국선이었고, 그 아래에 각각 소단체의 우두머리인 화랑이 있어 한 무리의 낭도를 거느렸는데 낭도에는 한 사람의 승려 낭도가 있어 국선을 보좌하였다.
또 576년에 귀국한 안홍(安弘)은 <능가경>과 <승만경> 등을 가지고 왔고, 600년에는 원광(圓光)이, 605년에는 담육(曇育)이 귀국하였다. 원광은 589년 진에 가서 <열반경>, <섭대승론> 등을 배우고 귀국하여 <여래장경사기>, <대방등여래장경소>를 지어 불교의 새로운 지식을 신라에 전했다.
자장(慈藏)은 당에서 7년간의 유학을 마치고 643년에 귀국하였다. 그는 분황사와 홍룡사에 머물면서 <섭대승론>과 <보살계본>을 강의하였다. 그리고 대국통이 되어 교단의 질서를 확립하였고 황룡사에 9층탑을 건립하여 불교 신앙의 심화를 통해 국가의 안전과 평화를 기원하였다. 자장은 통도사를 창건하고 금강계단(金剛階段)을 만들어 계율을 널리 설함으로써 많은 백성들이 불교를 신봉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하였다.

* 통일신라시대의 불교

한반도의 동남쪽에 치우쳐서 삼국 중 가장 입지조건이 불리하고 약소하던 신라가 태종 무열왕 7년(660)에는 백제를, 문무왕 8년(668)에는 고구려를 평정하고 그로부터 6, 7년 사이에 당의 세력을 몰아내어 최초의 통일국가를 형성하였다. 지금까지 왕실과 귀족을 중심으로 전개된 불교는 통일신라시대에 고유신앙과 결합하면서 민중 속으로 깊게 파고 들어갔다. 통일신라시대 불교의 전성기는 30대 문무왕에서 36대 혜공왕까지이며, 그 이후는 침체기라고 할 수 있다.
원효는 일심(一心)과 화쟁(和諍) 그리고 무애(無碍)사상을 제창하였고, 665년에 당에서 귀국한 혜통(惠通)은 밀교를 전하였으며, 671년에 당에서 귀국한 의상은 676년에 부석사를 창건하고 화엄을 널리 전파하여 해동화엄의 초조가 되었다. 691년에 귀국한 승전(勝詮)은 당의 현수 법장이 지은 <화엄경탐현기> 등을 의상에게 전하였다. 성덕왕 때에는 봉덕사를 건립하여 국가와 백성의 안녕과 번영을 기원하는 인왕도량(仁王道場)을 베풀었고, 또 751년에는 김대성이 불국사와 석굴암을 창건하였다.
경덕왕 14년(755)에는 분황사에 약사여래를 조성하였다. 이 당시의 신앙형태는 특정한 부처나 보살에게 국한되지 않고 여러 불보살을 한꺼번에 믿고 예배하거나 아미타불, 약사여래 또는 미륵이나 지장보살, 관세음보살 등을 자유롭게 선택하여 신앙하는 것이 일반적인 풍토였다. 그와 함께 약사여래, 아미타불, 미륵불, 석가모니불을 사방불(四方佛)로 신봉하는 사방불신앙도 나타났다. 이처럼 경덕왕 때부터는 교학연구보다는 불보살에 대한 영험담이 성행하여 불교는 점점 타력신앙적인 경향으로 전개되었다.
또 경덕왕 때에는 왕실이나 귀족들을 위한 사찰이나 불탑, 불상 등의 조성이 성행하였다. 이러한 사찰을 원찰(願刹)이라 하였는데, 특히 왕실의 원찰에는 담당하는 관청을 설치하거나 국가에서 관료를 파견하였다.
태현(太賢)은 유식학에 정통하여 <성유식론학기>를 저술하였고, 진표(眞表)는 지금까지의 교화활동과는 다른 점찰법회(占察法會)를 크게 일으켰다. 이 법회는 중국에서 편집된 것으로 추정되는 <점찰선악업보경>에서 설하고 있는 내용을 중심으로 한 참회의식이다.
점찰법회는 불교가 토착화되는 과정에서 고대사회부터 행해졌던 주술과 점복이 불교의 참회법과 결합된 의식이다. 그러나 혜공왕 이후부터 불교는 점차 침체되어갔다. 그러한 가운데 830년에 당에서 진감(眞鑑)이 귀국하여 쌍계사를 중심으로 선법을 전파하였다.
9세기로 접어들면서 수용되기 시작한 선은 이미 진덕여왕 무렵에 법랑(法朗)이 중국 선종 제4조인 도신의 선법을 전래하였고, 이어서 신행(神行)은 신수의 북종선을 전래하였으나 수용되지 못하였다. 선이 신라에서 성행하게 된 것은 마조 문하의 선법을 지장(智藏)으로부터 전해 받은 도의(道義)와 홍척(洪陟)이 귀국한 이후의 일이다. 그 후 계속 당에서 남종선을 전수 받은 유학승이 귀국하면서 고려에 이르러 구산선문(九山禪門)을 형성하게 되었다.


* 고려시대의 불교

한국불교사에서 가장 큰 변화를 일으킨 것은 고려시대의 불교이다. 현재 한국불교의 성격이 이 때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신라말에 전래되고 수용된 선은 고려에 와서 독자적인 전재를 하여 구산선문으로 완성되었고, 현재 조계종의 원류가 이 시대에 형성되었다.
그리고 신라에 없었던 천태종이 성립되었고, 선종과 함께 교종도 발전하여 선교양종(禪敎兩宗)의 체제가 갖추어졌다. 태조의 호국신앙이 계승되어 국가의 안녕과 복을 비는 법회가 빈번하게 개최되어 불교의식이 가장 성행하였다. 또 외적의 침입을 부처님의 가피력으로 물리치기 위해 대장경을 판각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계율을 어기는 일부 승려들이 민심을 현혹시켰고, 불교교단의 확대와 함께 지나친 사찰의 건립은 많은 피해를 초래하기도 하였다.
신라말에 이르러 귀족간에 왕위쟁탈이 계속 일어나 왕실의 세력이 지방에까지 미치지 못하였다. 이러한 정세를 틈타 지방에서는 호족들이 세력권을 형성하였고, 민중은 거듭 반란을 일으켰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백제의 옛 영토에는 견훤이 후백제를, 북방에는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였다. 신라는 이 두 나라 사이에 끼어 쇠망의 길을 걷고 있었다. 고려는 926년 발해를 멸망시켰고, 이듬해 왕건은 후백제를 멸망시켜 한반도를 통일하였다.
태조 왕건은 건국 초기부터 민심을 수습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불교를 건국 이념과 국가신앙으로 정착시켰는데, 이는 호국신앙의 전통을 계승한 것이다. 또 도선(道詵)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그의 풍수지리설과 도참설에 의거하여 많은 사찰과 불상, 탑을 건립하였다. 태조는 도선의 사상을 그대로 신봉하여 즉위 원년(918)에는 팔관회를 개최하여 연례행사로 규정하였고, 도읍을 송악으로 옮기고 그 곳에 10개의 사찰을 창건하였다. 그리고 유언으로 훈요십조를 내렸는데 이 가운데 3조가 불교에 관련된 것이다.
제4대 광종은 즉위 2년(951)에 태조와 그의 왕비인 유씨의 명복을 빌기 위해 대봉은사와 불일사를 창건하였고, 958년에는 과거제도를 채택하면서 이에 준하여 승과제도를 실시하였다. 광종 또한 태조와 마찬가지로 호족을 비롯한 적대세력을 저지하여 왕권을 구축하기 위해 963년에 귀법사를 창건하고, 이곳에 구호기관인 제위보를 설치하여 각종 법회를 개최하였다. 이는 귀법사의 균여(均如)와 탄문(坦文) 등을 통하여 호족 세력에 반발하는 민중을 포섭하여 개혁을 지지해주는 사회기반으로 삼기 위한 것이었다.
968년에는 자신의 죄를 소멸하려는 뜻에서 홍화사, 유엄사, 삼귀사를 창건하였고, 이 해에 혜거(惠居)를 구사에, 탄문을 왕사에 임명함으로써 국사와 왕사를 제도화하였다. 특히 당시 불교계의 큰 과제였던 선교 융합을 시도하였으나 광종 이후에는 중단되었다.
제8대 현종은 12세에 승려가 되어 숭교사, 신혈사에 머물다가 강조(康兆)의 정변으로 목종이 폐위되자 왕위에 올라 고려왕조의 기틀을 다지는데 주력하여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정비하였다. 현종 1년(1010)에 거란의 침입으로 왕은 나주까지 피난을 가게 되었다. 이 때 부처님의 가피력으로 적을 물리치고자 대장경 판각에 착수하여 제작된 5000여권을 부인사에 보관하였다. 또 이 시기에는 승려들을 궁중으로 초대하여 음식을 공양하는 반승(飯僧)이 연례행사로 베풀어졌다. 이러한 불교행사와 대장경 판각 등은 국난을 극복하려는 호국정신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제10대 정종 12년(1046)에 처음으로 경행(經行)이라는 의식을 행하였다. 경행이란 질병이나 재앙을 물리치기 위한 불교행사로서 대중을 세 무리로 나누어, 맨 앞 받침대에 <인왕반야경>을 올려놓고 걸어가면, 그 뒤에서 승려들이 <인왕반야경>을 독경하고, 그 뒤에는 관리와 백성들이 뒤따르면서 개경의 거리를 도는 의식이었다. 그러나 불교의식이 성대해지면서 점차 사치와 타락의 기운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제11대 문종 10년(1056)에는 부역을 피할 목적으로 출가하여 돈을 모으고 농축업을 하는 승려들이 늘어나자 이들을 환속시키고 모든 사찰에는 계율을 잘 지키는 승려들만 머물도록 하는 칙명을 내렸다. 문종 19년에 왕은 넷째 아들을 출가시켰는데 그가 바로 대각국사 의천(義天)이다. 문종 때에는 수많은 법회나 불사가 성행하여 불교의식이 전성기를 이루었다. 한편으로는 승려들의 사치와 부패도 심하여 일부 유학자들의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 대각국사 의천  

의천은 선종 2년(1085)에 송으로 가서 천태와 화엄을 배우고 이듬해 귀국하여 흥왕사에 머물면서 교장도감을 설치하고 나라 안팎의 불서를 수집하여 속장경을 간행하였다. 그리고 숙종 2년(1097)에 자신을 위해 건립된 국청사에서 처음으로 천태교학을 강의하였다. 또한 숙종 4년(1099)에는 처음으로 천태종 자체 내에서 승과를 실시하였고, 숙종 6년에는 국가에서 천태종 대선(大選)을 행함으로써 의천이 개창한 천태종은 하나의 종파로 공인되었다. 그러나 미신적 주술로써 민심을 현혹시키는 승려들이 계속 늘어났고, 반승을 비롯한 기복적인 불교행사가 끊이지 않았다.
제17대 인종 때에도 기복, 주술적인 불사만을 빈번히 행하여 궁정에는 승려들이 가득하였고, 사찰에서는 자주 연회를 베풀었다. 또 서경출신으로 중앙 정계에 진출하여 왕의 고문에 추대된 묘청(妙淸)은 풍수지리설과 도참설에 의거하여 서경천도를 주장하였으나 개경의 김부식 등 사대주의자들의 반대로 좌절되자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반란은 성공하지 못하고 부하의 배신으로 죽임을 당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묘청의 난을 계기로 개경의 문신들이 득세하여 무신이 차별을 받게 되자 의종 24년(1170)에 이의방은 정중부, 이고 등과 합세하여 무신정변을 일으켜 의종을 폐위시켰다. 명종 4년에 이의방은 승려 종참과 정중부의 아들 균에게 살해되었다.

◇ 보조국사 지눌  

이러한 혼란 속에서 보조국사 지눌은 조계산 수선사를 중심으로 정혜결사(定慧結社)를 결성하여 새로운 선풍을 일으켰다. 그는 제자들을 지도할 때에 <금강경>, <육조단경>, <화엄경>을 중심으로 강의하였는데 이는 한국 선종의 전통이 되었다. 지눌의 제자인 수선사 제2세 진각국사 혜심(慧諶)은 <선문염송>을 편찬하였다. 이 책은 공안 1125칙을 불경이나 조사의 어록에서 발췌한 다음 그에 대한 요지를 제시하고 송(頌)을 붙인 것이다.
제23대 고종 재위 46년 동안에는 거란과 몽고의 침략으로 호국적인 기복불교가 더욱 성행하였다. 현종 때에 판각하였던 대장경판이 고종 19년(1232) 몽고군에 의해 불타버리자 16년에 걸쳐 다시 새겨 재조대장경을 완성하였다. 제25대 충렬왕 히우 몽고의 지배하에서 자주적인 발전 역량을 상실했던 불교계는 격심한 타락과 분열, 대립의 양상을 보였다.
제31대 공민왕 때에 보우(普愚)는 임제종을 도입하여 선문의 새로운 조류를 형성하였고 그와 동시대의 인물로 임제종의 법맥을 이은 승려로는 경한(景閑)과 나옹(懶翁)이 있다. 경한은 무심선(無心禪)을 제창하였고,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본으로 알려진 <불조직지심체요절>을 저술하였다. 보우의 문하에서는 혼수, 찬영 등이 배출되었고, 나옹의 문하에서는 자초, 축원, 법장 등의 고승들이 배출되어 조선 초기 불교의 명맥을 이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는 불교를 비판, 배척하는 배불운동이 크게 일어나고 있었다. 정도전은 이론과 실제의 두 가지 면에서 대대적인 불교배척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당시 불교도의 윤리적 타락에 관한 비판은 조인옥에 의해서도 신랄하게 전개되었는데 그 주된 내용은 불교도들의 물욕과 음욕을 밝히는데 집중되었다.

* 조선시대의 불교

고려말부터 거세게 일기 시작한 배불(排佛)의 기세는 조선시대에 이르러 한층 거세졌다. 태조는 조구(祖丘)를 국사에, 자초(自超)를 왕사에 임명하고 많은 불사를 행하였으나 한편으로는 승려의 증가를 막기 위해 도첩제를 엄격하게 행하였다.
태종은 배불정책을 과감하게 단행하여 궁중의 불사를 폐지하고 전국에 242개의 사찰만 남겨두고 그 이외의 사찰을 모두 폐지하였으며 동시에 거기에 소속된 토지와 노비를 몰수하였다. 또 왕사와 국사제도를 폐지하고 11종의 종단을 7종으로 축소시켰다.
세종은 다시 7종을 통폐합하여 선교양종으로 하였고, 승록사를 폐지하고 흥천사를 선종의 본사로, 흥덕사를 교종의 본사로 하였다. 세조는 간경도감을 설치하여 불경을 한글로 번역하여 간행하였다. 이에 불교는 활기를 띠는 뜻했으나 성종, 연산군, 중종 등의 시대를 거치면서 다시 수난을 당하였다. 그러다가 명종 때에 문정왕후가 섭정하면서 고승 보우(普雨)를 중용하여 선교양종을 부활시켜 선종의 본사를 봉은사로, 교종의 본사를 봉선사로 하고, 승과제도를 다시 시행하였다. 그러나 문정왕후 이후 탄압이 계속되자 불교는 산 속으로 운둔하여 겨우 그 명맥을 유지하였다.
무학 자초(無學 自超)는 조선시대의 최초이자 최후의 왕사이다. 18세에 출가하여 1353년에 원에 가서 인도승 지공과 고려승 나옹을 만나고 1356년에 귀국하였다. 그 후 나옹의 선법을 전수하고 여주 고달산에 초암을 짓고 은거하다가 태조가 즉위하지 왕사에 임명되었다. 자초의 법을 계승한 승려가 득통 기화(得通 己和)이다. 21세에 관악산 의상암에 출가하였고, 주로 화암사에서 수행하였다. 1414년에는 평산 자모산 연봉사에 작은 거실을 마련하여 함허당(涵虛堂)이라 칭하고 <금강강오가해설의>를 강의하였다. 특히 <현정론>을 저술하여 불교를 배척하던 유생들의 불교에 대한 그릇된 견해를 반박하였다.
보우(普雨)의 호는 허응(虛應) 또는 나암(懶庵)이다. 15세에 금강산 마하연암에 출가하여 금강산 일대에서 수행하였다. 1548년에 강원감사의 천거로 문정왕후의 신임을 얻어 봉은사 주지가 되었다. 1551년에는 선종판사(禪宗判事)가 되어 선종과 교종을 부활시키고, 봉은사를 선종의 본사로, 봉선사를 교종의 본사로 지정하였다. 또 도첩제를 부활시키고, 1552년에는 연산군 때 폐지되었던 승과제도를 부활시켰다.
그러나 유생들을 이러한 불교정책의 폐지를 요구하는 상소문을 계속 올렸다. 1555년에 보우는 모든 직책을 사양하고 춘천 청평사에 은둔하다가 1560년 다시 선종판사와 봉은사 주지를 맡았다. 1565년에 문정왕후가 죽자 율곡을 비롯한 유생들이 곧바로 보우의 탄핵과 불교정책의 폐지를 강력하게 상소하여 명종은 그를 제주도로 귀양보냈다. 이듬해 선교양종과 도첩제와 승과제도는 폐지되어 불교인들은 흩어졌지만 짧은 기간 동안 승과에서 휴정, 유정 등 많은 고승들이 배출되었다.
청허 휴정(淸虛 休靜)은 서산(西山)인 묘향산에 주로 머물렀으므로 서산대사라고도 한다. 9세에 어머니를, 10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평안도 안주 군수를 따라 한양으로 와서 12세에 성균과에 입학하였다. 15세에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낙방하여 지리산으로 들어갔다. 거기서 숭인(崇仁)을 만나고 다시 영관(靈觀)에게 3년간 수학하였다. 27세(1546)에 지리산을 떠나 오대산, 금강산에서 수행하였다. 휴정은 33세 되던 해인 1552년에 새로 부활한 승과에 합격하여 대선(大選)이 되었다.
이 해를 전후로 조선사회에는 큰 변화가 있었다. 조선 왕조에서 가장 불교를 배척하였던 중종에 이어 인종이 즉위하였으나 1년도 못 가서 세상을 떠났다. 1545년 명종이 12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르자 그의 어머니인 문정왕후가 정사를 대신하면서 불교 부흥정책을 추진하여, 1551년에 선교양종을 부활시키고 보우를 선종판사에 임명하였다. 이어 도승제와 승과제도를 부활시켰는데 휴정은 이 승과에 합격하였던 것이다. 승과에 합격한 지 3년만에 휴정은 교종의 모든 일을 관장하는 총책임자인 교종판사가 되었고, 3개월 후에는 선종판사도 겸임하게 되었다. 그러나 2년 후 양종판사를 사양하고 금강사으로 들어갔다. 40대 후반에서 60대 후반에 이르는 동안 휴정은 묘향산을 중심으로 제자들을 지도하였다.
그가 73세 되던 해,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평안도 의주로 피난한 선조는 국난을 타개하기 위해 휴정을 팔도선교십육종도청섭에 임명하였다. 이에 휴정은 묘향산에서 나와 전국 승려들에게 총궐기를 호소하는 격문을 방방곡곡에 보내어 승군을 모집하였다. 그리하여 평안도 순안의 법흥사를 본거지로 하여 1500여명의 승군이 모였고, 그의 제자 유정도 1000여 명의 승군을 이끌고 관동지방에서 와서 도청섭의 승군과 합세하였다. 유정은 승군의 대장이 되어 일선에서 실전을 지휘, 평양성을 탈환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웠다. 2년 후 휴정은 그의 제자 유정과 치영 등에게 모든 일을 맡기고 묘향산에 들어갔다. 85세 되던 해인 1604년 정월 묘향산 원적암에서 대중들을 불러 법을 설하고 결가부좌한 채 입적하였다.
저서에는 <선가귀감>, <선교결>, <선교석>, <청허당집> 등이 있다. 휴정의 제자 1000명 가운데 뛰어난 제자가 70여명이었고, 그 중에서도 사명 유정, 편양 언기, 소요 태능, 정관 일선은 사대파(四大派)를 형성하였다. 휴정과 그 문하에 의해 조선불교는 획기적인 전환기를 맞이하였다. 교리적으로 분열되어 있던 많은 종파들을 통합하였고, 산 속에서 하나의 선풍을 형성하여 그 법맥을 이어 나갔다.
사명 유정(泗溟 惟政)은 13세에 황악산 직지사에 출가하였다. 1561년에 승과에 합격하여 직지사 주지를 역임하고, 1575년에는 봉은사 주지를 사양하고 묘향산으로 들어가 휴정의 문하에서 수행하여 그의 법을 이어받았다. 임진왜란 때 세운 공로로 선교양종판사에 임명되었고, 임진왜란 후 강화사절로 일본에 파견되었다.
편양 언기(鞭羊 彦機)는 11세에 출가하여 휴정의 문하에서 수행하고 그의 선법을 이어받았다. 그의 시문이나 선교에 대한 법문은 매우 간결하고 쉬운 것이 특징이다. 선과 교에 대해서는 휴정의 관점을 이어받았다.
선은 부처님의 마음을 전한 것으로 최상의 근기를 가진 중생은 들어갈 수 있지만 그러한 중생이 많지 않으므로 임시로 교를 빌린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교는 근기가 낮은 중생이 선에 들어갈 수 있는 문이라고 하였다. 모든 경전은 중생의근기에 따라 다양하게 설한 것이므로 처음부터 소승, 대승과 깊고 얕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가르침은 결국 하나로 귀결되는데 그것은 곧 자신의 청정한 성품이라고 하였다.
이 성품을 깨닫는 방법에는 화두, 자신의 성품에 대한 관조, 염불이 있다고 하였다. 소요 태능(逍遙 太能)은 13세에 백양사에 출가하였다. 부휴 선수에게 수학한 후 묘향산 휴정의 문하에 들어가 20여 년동안 수행하여 그의 선법을 이어받았다. 휴정의 제자 중에서 편양 언기와 함께 선의 양대 고승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의 문하가 소요파를 형성하였다.
정관 일선(靜觀 一禪)은 15세에 출가하여 <법화경>에 심취하였고, 이어 휴정의 문하에서 수행하여 그의 법을 이어받았다. 임진왜란 때 승려들이 전쟁에 참여하는 것을 보고 승려의 본분이 아니라고 개탄하고 유정에게 글을 보내 ꡐ전쟁이 끝났으니 빨리 관복을 벗고 승려의 본분을 다하라ꡑ고 권고하였다.  

* 근대의 불교


여기서 말하는 근대는 국호를 대한(大韓)으로 바꾼 1897년에서 8.15해방까지로 한다.
조선조 500년간 억압을 받았던 불교계는 근대로 접어들면서 일본의 침략으로 인해 또 위축되었다. 개항이 이루어진 다음 해인 1877년부터 일본의 침략과 더불어 일본 각 종파의 승려들은 국내 곳곳에 포교당과 사찰을 건립하고 국내의 승려들을 포섭 또는 개종시키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그들은 먼저 호의를 베풀어 환심을 사기 위해 파격적인 방법으로 조선시대 불교탄압의 상징이었던 승려들의 도성출입금지를 해제하였다. 1895년 4월에 일본당국과 승려들에 의해 이루어진 이 조치는 국내의 승려들뿐만 아니라 일부 지식인들에게 큰 호감을 가지게 했다. 그러자 정부에서는 지금까지의 불교배척을 완화하기에 이르렀고, 불교계에서도 전국 사찰을 통합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이러한 취지를 관철하기 위해서 정부는 1899년 동대문 밖에 원흥사를 세워 조선불교의 총종무소로 하고 전국 13도에 각각 하나의 중심 사찰을 두어 업무를 총괄하였다.
1902년에는 정부가 사찰을 관리하기 위해 궁내부 소속으로 관리서를 설치하였다. 관리서에는 사사관리세칙을 제정하고, 대법산, 중법산 제도를 실시하여 전국 사찰을 총괄하였다. 대법산은 국내 중심 사찰을 원흥사로 정하고, 중법산은 도내 중심 사찰로서 16개의 사찰을 지정하였다. 이를 계기로 전국의 사찰 및 승려는 국가 행정의 범위 안에 있게 되었다. 관리서는 궁내부 소속의 관서였기 때문에 공무원이 사무직에 임명되어 여러 업무를 담당하였다. 그러나 당시 정치적 혼란과 공무원의 부패로 인하여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1904년에 관리서와 대법산 제도는 폐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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