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마음은 스스로를 속이고 남도 속인다.

2008. 7. 8. 14:27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제불조사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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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마음은 스스로를 속이고 남도 속인다.

이 공부에 뜻을 두지 않했으면 모르거니와 
한번 뜻을 두었으면 자기 자신을 속이지 말아야 한다.
불교를  바로 믿기 위해서 경전이나 조사 어록을 본다. 
그리고 이해한다. 지극히 당연 한것 같다.
그러나 여기에는 무서운 함정이 있는 것이다.
이 아는 마음은 바른 믿음으로 전향 되지 못하면 반드시
스스로를 억메이게 한다. 
그리고 그 말을 의지해 살려고 한다.
이 의지한다는 말에는 두가지가 있다.
그뜻을 취하고 그 아는 것은 사라져 버리는 것이 그 하나요.
그 두번째 아는 것은  우리가 그 아는 것을 의지해 행하려는 것이다.
이 두가지 사이에는 구별하기가 여간 난감하다.
철저한 불교적인 사람은 될지 모르지만 전혀 
그 글이 가지고 있는 뜻을 멀리 한 자다.
그러나 알고 그 뜻을 취하면 아는 것에 대한
기억할 일이 없어지고 오로지 궁구 할 뿐이다.
기억은 더듬더듬하게 되며 서툴러진다.
이는 그뜻에 마음이 가까이 해져 있는 징조이다.
그러나 기억해서 그때 그때 적재적소에 이치를 들어가며 인용하는  
이는 그 뜻은 가까이 접근하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
이럴 때 그 사람은 스스로  아는 것에 속고 
있으면서 속고 있음을 모르고 있다.
이런 이들에게는 궁구하여 오는 깨닮음이란 오지 않는 것이다. 
그 아는 것이 자기것인양 되어져 있기 때문이다.
머리에서는 이해를 하여 돌아가고 있으나 
이런 분들은 그 뜻에 아는 것을 놓고 
개합하기란 하늘과 땅차이 만큼이나 멀다. 
왜냐 하면 그 아는 마음으로
보배를 삼고 있기 때문이다.
마땅히 부처의 가르침이라도  잊어버려야 한다. 
그래야사 참 부처의 싹이 나오기 때문이다.
부처를 알아서 구해 지키고 있는 자는
부처의 도둑이며 썩은 글귀에 뭍혀 있는 자이다'
부처는 기억하는것이 아니다. 
그리고 부처는 옛부처와 지금 부처가 둘이 안다.
마땅히 아는 부처는 버릴 수록  좋다. 
부처는 옛과 지금의 시간 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 부처의 성품속에  알고 모르고를 유지하고 있으니 
두 부처를  갖이지 말아야 한다.
이 부처는 젊잖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방탕한 것도 아니다. 
말 잘 한것도 아니고 어디에다 짓눌려 놓는 것도 아니다. 
우리들의 생각 생각이 일어 날 때 같이 있으며
어떤 형식이나 틀에 억메어져 잇는 것이 아니다.
어떤 특유의 사람에게 만 붙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어떤 게송을 지어서 그 게송 속에 잠자고 잇는 것도 아니다.
지금 살아있는 그 사람과 같이 항상 있는것이다. 
다만 부처로 다른 부처를 그리지 말아야 한다. 
아는 자와 모르는 자가 있어서 가르침속에 있는 것도 아니다. 
둘 다 다 떨어져 나가 버렸다.
그러면서 여기도 잇고 저기에도 있다. 
스스로 자기를 속이지 말아야 한다. 
어떤 전통적인 것으로 메 달아 놓고 부처를 따로 설하려고 해서는 안된다. 
그 눈에는 어떠한 것도 섞혀져 있지 않해서 홀로 영롱하다.
부처를 기억한자는 부처를 등진자이다. 
 *** 왜냐하면 
 옛사람들의 언구를 이해해서 기억하고 있으면
남을 가르칠때 그 기억된 것을 말해 주게 된다. 
듣는 사람은 잘 들을 수 있고 좋은 법문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법문을 한 사람은 언구를 따라 들어가 
이해한 것으로 법문을 하고 있기 때문에 
자기 것인것 같지만 자기것이 될 수가 없는 것이다.
마땅히 그 언구를 놓아 버려야 바로 궁구하게 되며 
궁구한 즉 마침내는 바닥이 드러나 성품을 보게되며 
그 성품을 본 자는 옛 사람의 것을 기억해서 쓰지않고 
성품을 본대로 말하기 때문에 옛 사람들이 언구와 같은 것이 나온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옛사람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겠는가.
기억해서 쓰고 있는 자는 옛사람의 뜻을 얻는 것이 아니고 
언구를 따라 들어가 그 언구를 붙들고 말을 하고 잇는 것이다. 
그러므로 
말은 옛 것과 같지만은, 근본 뜻을 등지는 것은 
멀고 먼 나라에서 온 것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공부인은 이런 것에 진실하지 않으면 
스스로 자기를 속이고 있고,남도 속이는 것이 된다. 
이런 것을 옛 사람들은  '바람도 없는데 파도를 일으킨다'
고 말하는 것이다. 
사람이 본래 바람이 없는데 어디서 파도가 일어 나겠는가 !
근본 바닥을 터치 못햇기 때문에 시끄럽고, 요란하고 
점잖은 갑옷속에 숨겨 놓은 것과 같은 것이다. 
본성이 터치되면은 활달 자재하며 옛 것을 들고 다니지 않해도 
지금 이곳에서 옛 것을 쓸 수 있는 것이다. 
마음 공부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람에게는 
이 소리가 어려운 듯 하나, 중생심을 걷어 내 버리고 
꿰뚫어 보는 눈을 가진 사람에게는 피할 수 없는 것이어서 
진과 가는 저절로 구별되어 진다. 
스스로 진실해 지기 위해서는 옛 언구를 의지해서 믿고
다시 옛 언구를 놓아 버리고 참구 할 뿐 
다시 다른 곳에 눈을 돌리 필요가 없는 것이다. 
마침내는, 옛 사람들의 눈과 둘이 아니게 되어 
이 자리에서 옛을 보고 옛 사람들의 뜻속에 
우리들의 뜻이 그대로 있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래야 현실속에서 불교가 살아나며, 불교로 사람을 
얽매여 놓는 짓은 않하게 된다.  

용기 있는 자는 지금 곧 할 수 있다고 본다. 
서울 돈암동 六祖寺현웅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