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심법요傳心法要 / 황벽희운>

2008. 7. 11. 19:05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제불조사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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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심법요傳心法要 / 황벽희운>


목숨을 걸고 할 일

젊었을 때 공부하라
대중들아,너희들이 만약 무명(無明)을 깨부수지 못한다면
죽을 때에는 반드시 괴로워하고 발버둥칠 것이 분명하리라.

 

어떤 외도들은 남이 공부하는 것을 보면
`아직도 저러고 있나`하며 냉소를 보내지만,
내 그대들에게 묻노니,
죽음이 눈앞에 닥치면 무엇으로 생사를 대적하겠느냐?

 

모름지기 평상시에 힘을 길러 놓아야 급한 일이 닥칠때에는
다소 힘을 쓸 수 있는 것이니,
목이 타들어 올 때 비로소 샘을 파는 따위의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말라.

죽음이 임박하면 이미 팔,다리를 쓸 수 없으니
앞길이 망망하여 갈팡질팡할
뿐 참으로 괴롭고 괴로우니라.

 

평소에 입으로만 선(禪)을 말하고 도(道)를 말하며,
부처를 꾸짖고 조사(祖를師)를 욕하는 등
제법 공부를 한 듯이 큰소리를 치지만 죽음에
이르러서는 아무 소용이 없느리라.
평소에는 큰 소리로 남을 속여 왔으나
죽음을 맞이한 자신마저 어찌 속일 수 있으랴.

 

형제들아, 부디 권하오니 몸이 건강한 동안에
이 일을 분명히 판단해 두어라.

대개 화두(話頭)는 풀기가 그리 어려운 것도 아닌데
목숨을 떼어 놓고 공부하려고는 아니하고
단지`어렵고 어렵다`고만 하니,
참으로 대장부라면 어찌 이런 말을 할 수 있겠느냐?


 

자신에게 맞는 화두를 참구하되,밤이나 낮이나,
가나 오나,앉으나 서나,
생각 생각이 끊이지 않고 정신을 바짝 차려 공부해야 하느리라.
달마(達摩)가 서쪽에서 왔다는 것도 알고 보면
바람도 없는데 파도를 일으킨 것이요,
세존이 꽃을 들어 보이신 것도 크나큰 허물이라 할 것이니라.

 

대중들아, 도가 특별이 있다고 생각이 드느냐?
그런 생각 하지 마라.
세상사란 어려운 것이 하나도 없다.
오직 마음만 있으면 모두 해결되느리라.


 

오직 한 마음


 

모든 부처님과 모든 중생의 본체는 오직 한 마음일 뿐
다른 것이 없다.
이 마음은 시작 없는 옛적부터 생겨난 것도 아니고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푸르거나 노란 것도 아니며 어떤 형상이 있는 것도 아니다.
길고 짧은 것도 없으며 크다 작다 할 수도 없다.

 

모든 이름과 말과 자취와
상대적인 것을 초월 한 것이 곧 마음이다.
마음을 움직이면 벌써 어긋나는 것이니
마치 허공과 같아 끝이 없으므로 헤아릴 수가 없다.

 

이 한 마음이 부처이다.

부처와 중생이 다를 것이 없지만
만약 중생들이 모양(相)에 집착하여 밖을 향해
부처를 찾는다면 찾을수록 잃게 될 것이다.

 

스스로 부처면서 부처를 찾고 마음을 가지고
다시 마음을 잡으려 한다면 아무리
오랜 세월을 두고 애써도 이루지 못할 것이다.
이는 생각만 쉬면 부처가 스스로 나타나는 것인을
알지 모르기 때문이다.

 

마음이 곧 부처요,부처가 곧 중생이다.
그러나 이 마음은 중생일 때에도 줄지
않았고 부처가 되었을 때에도 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이 마음은 본래부터 한없는 수행과 공덕이
갖추어져 있으므로 다시 더 닦거나 보탤 여지가 없다.

  

인연을 만나면 따르고 인연이 없어지면 고요하다.
이 부처를 믿지 않고 상(相)에 집착하여 수행하는 것으로
공덕을 구한다면 이런 것은 모두 허망한
일이며 도(道)와는 크게 어긋난다.

 

마음이 곧 부처요,따로 부처가 없다.
이 마음은 허공처럼 맑고 깨끗하여 한 점의
모양도 없다.만약 한 사람이라도 움직인다면
곧 법체(法體)와는 어긋나며 상에
집착하는 것이니,예로부터 상에 집착한 부처는 없다.

 

또한, 육도만행을 닦아 성불하고자 한다면
이는 곧 차례가 있는 것이니
예로부터 차례를 닦아서 부처 된 이는 없다.
단지 한 마음만 깨달으면 다시 더 얻을 법이 없으니
이것이 참다운 부처이다.
부처와 중생은 한마음이고 조금도 다르지 않다.
마치 허공과 같아서 때 묻힐 수도
없고 무너뜨릴 수도 없다.

 

태양이 온 세상을 비추어 밝은 일이 없고,
태양이 사라져 어둠이 천하를 덮더라도 허공은
일찍이 어두운 일이 없다.
밝고 어두움이 서로 바뀌더라도

허공의 성질은 조금도 변함이 없듯이
부처와 중생의 마음도 또한 이와 같다.

 

만약 부처를 생각할 때 청정하고 밝게 해탈한 모양을 떠올리고,
중생을 생각 할 때에는 더럽고 생사에 시달리는
혼탁한 모습을 떠 올린다면
무량겁을 수행해도 끝내 도는 이루지 못할 것이다.
그 이유는 상에 집착해 있기 때문이다.

 

마음에는 털끝만큼이라도 얻어야 할 법이없으며,
이 마음이 바로 부처다.
요즘 도를 배우는 사람은 이 마음의 본체를
생각하지 못하고 마음에서 마음을 일으켜 밖을 향해
부처를 찾고 상(相)에 집착하여 수행하고 있다.
이런 것은 모두가 그릇된 방법이요,지혜로는 길이 아니다.


무심(無心)

 

 

시방세계의 모든 부처님께서 공양(供養)하는 것보다는
한 사람의 무심도인(無心道人)에게 공양하는 것이 더 낫다.
왜냐하면 무심이란 일체에 대해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있는 그대로의 본체가 안으로는 목석과 같고
동요함이 없고,밖으로는 허공과 같아 막힘이 없거나
장애 받는 것이 없다.

 

수행하는 사람이 감히 이 법에 들어오지 못하는 것은
공(空)에 떨어져 머물것이 없음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멀리서 강 건너 기슭만 바라보며 알기를 구하고 있다.
알기를 구하는 사람은 쇠털과 같이 많으나
도를 깨닫는 이는 쇠뿔과 같구나.

 

오늘날 수행인들은 자기 마음 가운데에서 깨닫고자 하지 않고
마음 밖의 상에 집착하여 대상을 취하니
모두 도와 등지게 된다.
이 마음은 곧 무심한 마음이므로 일체의 상을 떠난 것이다.
중생과 부처는 아무런 차별이 없으니 오직 무심하기만 하면
이것이 구경(究境)이다. 

 

도를 배우는 사람이 무심하지 못하면 무한한 시간을 두고
공부한다고 해도 끝내 도를 이룰 수 없다.
이 마음을 깨닫는 데에는 빠름과 더딤이 있다.
법문을 듣고 한 생각에 무심한 이도 있고,
여러 단계를 거쳐서 무심한 이도 있으니
어느 것이든 무심해야만 도를 얻는 법이다.

  

한 생각 사이에 무심을 얻는 것이나 여러 단계를 거쳐
무심하게 된 것이나 그 공덕은 깊고 얕은 차이가 없이 똑같다.
무심이 아닌 선행이나 악행은 모두 상에 집착한 것이다.
그러므로 상에 집착하여 악을 행하면 괴로운 윤회를 받고,
상에 집착하여 선을 행하여부질없이 수고만 받게 되나니,
모두가 무심한 마음을 보는 것만 같지 못하다.


이 법은 곧 마음이므로 마음 밖에 법이 없고,
이 마음이 곧 법이므로 법 밖에 마음이 없다.
마음이 스스로 무심해지면 무심하다는 것도 없어진다.
그러므로 마음으로써 마음을 없애려 한다면 도리어
마음이 생기게 된다.

 심법(心法)은 모든 생각이 미칠 수 없는 자리 이므로
언어로 표현할 수 없으며 도 마음으로 생각할 수도 없다.
이 마음이 사람마다 다 가지고 있는 본래의 청정한 부처다.
비록 수십 겁을 수행하며 모든 단계를 거쳤다 하더라도
깨닫는 순간에는 원래 스스로가 부처임을 증득할 뿐이다.
그 위에 어떠한 것도 얻을 것이 없다.

  

자신이 수행해 온 시간과 노력을 되돌아 보면
오히려 꿈속처럼 허망할 것이다.
부처님도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최상의 깨달음을 성취하였으나 얻은 것이 없다.
만약 얻은 것이 있다면 연등불(燃燈佛)께서
나에게 부처가 되리라는 예언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또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 법은 평등하여 높고 낮음이 없다.
이것을 보리(菩提)라고 한다."
본래의 청정한 마음은 중생 세계니 부처 세계니,
유상(有相)이니 무상(無相)이니 하는 상대적 개념을 벗어나
모든 세계가 평등하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본래 청정한 마음은 보름달 같이 밝고 두루 비추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깨닫지 못한 채,
단지 보고 듣고 아는 것, 이것을 자기의 마음인 줄 안다.
보고 듣고 아는 것, 이것에 가리어 본래의 밝고
깨끗한 마음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보고 듣고 아는 것에서 무심하기만 하면
본래의 마음이 드러나 태양이 허공에 솟아 온 천하를
두루 비추는 것과 같아질 것이다.

 

그러므로 도를 배우는 사람들이 보고 듣고 아는 것,
이 세가지의 작위(作爲)를 없애 버린다면
마음도 생각하는 작용이 끊어지고 생각할
대상도 없어지게 된다.

 

우리는 보고 듣고 아는 것이 본래의 마음인 줄로
잘못 알고 있기는 하지만
본래의 마음은 이처럼 보고 듣고 아는 것에 속한 것도 아니며

또 그것을 떠난 것도 아님을 알아야 한다.
단지 보고 듣고 아는 것에 의지하여 견해(見解)를
일으키지도 말고 또한 마음을 움직여서도 안된다.

  

뿐만아니라 보고 듣고 아는 것을 떠나서 마음을 찾지 말고
진리를 알려고 하지 말라.그것은 함께 있는 것도 아니며,
한 곳에 머무르는 것도
아니며 어디에 매인 것도 아니다.
종횡으로 자유로워서 도량(道場)아닌 곳이 없다.

 

세상 사람들은 <부처님께서 심법(心法)을 깨닫고 전했으니,
마음을 깨달아야 한다>하면서 마음으로 법을 찾아 다니면서도

마음이 곧 법인 줄을 알지 못한다.
법은 곧 마음이므로 마음으로 마음을 찾는 것은 옳지 않으니
천만 겁을 찾는다 해도 결국 찾을 수 없다.

그러므로 일마다 무심해야 하며 이것이 본래의 법이다.

 

마치 어떤 사람이 집안에 구슬이 있는데도 밖에서 찾아 헤메다가

지혜있는 사람이 가르쳐 주어야 발견하게 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도를 배우는 사람이 자기 마음이 부처 인줄 모르고
밖에서 찾는다면 오랜 시간만 허비할 뿐 도를 이룰 수 없다.
그러므로 즉시 즉시에 무심하는 것이 오히려 낫다.

 

모든 법은 본래부터 있는 것도 아니며 얻을 것도 없으며
의지할 것도 없으며 머물지도 않고 주관이나 객관이 없다.
단지 망령된 생각만 일으키지 않으면 곧 깨달음을 얻을 것이다.
깨달음을 얻는다는 것은 본래의 마음을 증득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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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공이 법신(法身)이다.


팔만사천 가지의 법문은

팔만 사천가지의 번뇌를 치료하는 것이다.

그러나 단지 중생을 교화하는 방편일 뿐

법이라는 것은 본래없다.


그러므로 버리는 것이 곧 법이요,
버릴 줄 아는 자가 곧 부처이다.
일체의 번뇌를 버리기만 한다면 얻을 것이 없다.

 

그러므로 도를 배우는 이가

깨닫는 비결을 터득하고자 한다면
마음에 아무것도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
`부처님의 참된 법신은 허공과 같다.`고
비유한 것이 바로 그러한 뜻이다.

 

법신이 곧 허공이며 허공이 곧 법신인데도
`법신이 허공에 두루 충만하다`고
말하면 사람들은 허공 가운데 법신이 머무르는 것인 줄로
생각할 뿐 법신 그대로가 허공이고 허공 그대로가
법신임을 모른다.
만약 허공이 따로 있다고 한다면 허공은 법신이 아니며,
그렇다고 법신이 따로 있다고 생각 한다면
법신은 허공이 될 수 없다.

 

허공과 법신에 대해 분별심을 내지 마라.
허공과 법신은 조금도 다른 모양도 없으며,
따라서 부처와 중생이 다른 모양이 없고,
생사와 열반이 다른 모양이 없으며,
번뇌와 보리도 다른 모양이 없는 것이니
일체의 모양을 떠남이 곧 부처이다.

 

중생은 객관 세계를 취하고 도를 닦는 사람은 마음을 취하나
마음과 경계를 함께 잊는 것이 참된 법이다.
그러나, 객관세계를 잊는 것은 쉽지만

마음을 잊기란 매우 어렵다.

  

사람들이 마음을 잊어 버리지 못하는 이유는
공(空)에 빠져 의지할 데가 없을까 두려워해서인데,
이는 공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공 그 자체가
참된 법계(法界)임을 모르기 때문이다. 
 

이 신령스런 깨달음의 성품은 예로부터

허공과 함께 해 왔기 때문에

한 번도 생기거나 없어진 적도 없고,

더럽거나 깨끗한 적도 없으며,
시끄럽거나 고요한 적도 없으며, 젊거나 늙지도 않고,
동서남북도 없고, 안팎의 구분도 없다.

 

또 헤아릴 수도 없고 형상이나 색상이나 소리도 없다.
그러므로 찾을래야 찾을 수 없고

지혜로써 알 수도 없으며,
말로 표현 할 수도 없으며
사물을 통해서 이해 할수도 없으며

힘써 공부한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이는 모든 부처로부터 벌레에 이르기 까지

똑같이 지닌 성품이다.

이 성품이 곧 마음이요,

마음이 부처고 부처가 곧 법이니,

한 생각 잘못 일으키면 모두가 망상이 된다.

 

그러므로 마음으로써 마음을 구하지 말고,

부처를 가지고 부처를 구하지 말 것이며,

법을 가지고 법을 구하지 말라.
밖의 경계를 쫓아다니며 따르는 것,

이것을 마음이라고 잘못 알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탐욕. 성냄. 어리석음이 있기 때문에

계(戒) 정(定) 혜(慧)를 말씀하신 것인데,

애초부터 번뇌가 없다면 깨달음인들 어디에 있겠는가?

 

그러므로 조사께서

"부처님께서 팔만사천 법을 말씀하신 것은
일체의 마음을 없애기 위해서다.
나에게 일체의 마음이 없으니 팔만사천의 법문이

무슨소용이 있겠는가?"하셨다.

 

본래 근원이 청정한 부처에게 어떠한 티끌도
덧붙이지 말아야 한다.
원래 삼라만상은 이 마음을 의지하여 건립되었으므로
경계를 만나면 마음이 일어나고 경계가 없으면 마음도 사라진다.

그러므로 깨끗한 성품위에 경계에 대한 분별심을 덧붙이지 말아야 한다.

 

`밝다``고요하다``보고 듣고 느끼고 안다`하는 것은
모두 경계에 따라
분별심을 내는 것이니,이는 모두 `있다.`는 집착에 빠진 것이다.
일체의 법에 대해서 있다거나 없다는 견해를 갖지 않으면
곧 바른법을 본다.


몸과 마음을 비워라



대체로 음성을 통해서 깨달으면 성문(聲聞)이요,
인연을 관찰하여 깨달으면 연각(緣覺)이다.
만약 자기의 마음을 스스로 깨닫지 못하면

비록 부처를 이룬다 하더라도 역시 성문이다.

  

도를 배우는 많은 사람들이 교법(敎法)에서 깨닫고
마음에서 깨닫지 못한다면,
비록 수십 겁을 수행하더라도 본래의 부처는 아니다.
만약 마음에서 깨닫지 못하고 교법에서 깨닫는다면
곧 마음을 가볍게 여기고 교법을 중하게 여기는 것이니,
이는 흙덩어리만 쫓아가고 본래의 마음은 잃어가는 꼴이다.
그러므로 본래의 마음에 계합하면 그뿐, 따로 법을 구하지 말라.

 

마음이 곧 법이다.

범부들은 객관 세계에 의해 마음이 가리워지고,

현상(現象)에 의해 진리가 가리워진 것으로 알고
항상 객관 세계를 도피하여 마음을 편안하게 하려하고,

현상을 차단하여 진리에 머물려고 한다.
이는 마음이 객관 세계에 장애가 되고,
진리가 현상에 장애가 되어 그런 줄 모르기 때문이다.

 

마음이 공하면 객관 세계도 공하고,
진리의 세계가 고요하면 현상도 따라서 고요해 지는 법이니,

마음을 거꾸로 쓰지말라.
범부들이 흔히 마음을 공하게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것은
공에 빠질까 염려 해서지만,

이는 자기의 마음이 본래 공한 것임을 알지 못해서이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현상을 버릴 줄 알지만
자기 마음은 버릴 줄 모르고,
지혜로운 사람은 자기 마음을 버리고
현상은 그대로 둔다.

그러나 보살은 마음이 허공과 같아서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지은 복덕마저 집착하지 않는다.  


버리는 것에는 세가지가 있다.

첫째, 몸과 마음을 허공처럼 비워 버리고

취하거나 집착하는 마음을 없애 버린 뒤에

방향에 따라 사물에 응하되

주객을 함께 잊어버리는 것이 큰 버림이다.

둘째, 도를 행하고 덕을 베풀되 다른 한편으로는
무엇이든 바라는 마음을 계속 버려 나가는 것이 중간 버림이다.


셋째, 여러가지 선업(善業)을 닦으며 희망하는 것이 있었으나
법문을 듣고 난 뒤 만법이 공한 줄 알고

집착하지 않는 것이 작은 버림이다.

큰 버림은 촛불이 앞에 나타나는 것 같아서
다시는 깨달음이 없고,
중간 버림은 촛불이 옆에 있는 것 같아서
때로는 밝기도 하고 때로는 어둡기도 하며,
작게 버림은 촛불이 뒤에 있는 것과 같아서 앞이 늘 어둡다.

 

보살은 마음이 허공과 같아서 일체를 다 버린다.
과거심(過去心)을 얻지 못한다는 것은 과거를 버린 것이요,
현재심을 얻지 못하는 것은 현재를 버린 것이며,
미래심을 얻지 못함은 미래를 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삼세를 함께 버린다.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