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넋풀이 [15:19]
박병천 구음다스름
의식에 기반을 두고 있는 박병천의 음악은 한치의 오차도 허락하지 않는 정확하고 질서정연한 구성을 보여준다. 징을 두드리면서 혼을 부르고, 달래주고 이야기를 주고받고, 떠나 보내고, 살풀이로 풀러주는 하나 하나에 혼이 배어 나온다. 담백함과 그 구성진 모든 것들 그에게 장단과 소리 한자락을 해도 진도만의 특이한 창법이 있어 진도 사람임을 단박에 알게 한다. 망자를 천상세계로 인도하는 진도씻김굿(중요무형 문화재 72호) 기능 보유자인 박병천은 굿 속의 장단을 창조적으로 계승하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정확히 배우고 익히는 것이라고 말한다. 육순을 넘긴 나이에도 왕성한 무대활동을 펼치고 있는 그는 '어떤 상황에서건 예술혼을 서로 통한다'는 사실을 믿고 한국의 무속이 갖는 예술적 독창성을 고증을 통해 원형 그대로 보존하려는 노력을 잊지 않는다.
진도의 별, 하늘을 비추다
“늙은 사람 죽지 말고 젊은 사람 늙지 말고. 가난한 사람은 가난하지 말고 병든 사람 나으시고…” 비는 소리가 낭랑합니다. “인생 살며 육신이 늙어도 악·가·무가 겸해지면 집이 생깁니다. 그게 소위 집 가(家)예요. 집이 생기면 남을 빌어주는 의식이 생기고요. 기(氣)와 예(藝)로만 가면 미적(美的) 구성밖에 안됩니다. 춤춘다고 오른손 먼저, 왼손 먼저를 지키며 하는 게 아니라 악·가·무를 마음대로 통달했을 때 무가가 됩니다. 나는 아직 못했어요. 이 세상에서 못하고 눈감을 겁니다.” 하나를 통틀어 보는 눈이 있고 무언가 이루려면 악·가·무를 알아야 한다고 강조한 이 시대의 예인 박병천 선생 타계추모특집 <진도의 별, 하늘을 비추다>
故 박병천 선생 약력
1932년 진도 지산면에서 2남3녀중 넷째로 출생 1952년 목포상선전문학교 졸업 1960년 무무악 시작 1971~76년 전국민속경연대회 남도들노래(국무총리상) 강강수월래(대통령상)
진도만가(문공부장관상) 1977년 ‘진도 다시래기’ 발표 1978년 ‘씻김굿’ 서울에서 공연 1980년 중요무형문화재 제72호 ‘진도 씻김굿’ 기·예능 보유자 지정 1981년 박병천문화재 전수관 개설 1982~95년 한국문화재보호재단 악장 및 예술감독 1999년 대한민국 문화훈장(보관) 사단법인 민속놀이진흥회 이사장(87년~), 대불대 석좌교수 2007년 11월 20일 타계
〈음반〉 ‘박병천의 구음다스름’ ‘한국의 슬픈 소리’ ‘진도씻김’ ‘강강술래’ 〈해외공연〉 81년 국제민속예술제 초청 유럽 6개국 순회공연 84년 LA올림픽 개막축제 공연, 니카라과 민속음악제 금상 85년 베를린 국제민속음악제 국가대표 유럽 7개국 순회공연 88년 서울올림픽 개막식 ‘화합’ 협동안무 90년 LA 아·태지역 토속신앙 페스티벌 공연 94년 아시아 소사이어티 초청공연 ‘진도씻김굿’ 미국 순회공연 99년 독일·오스트리아·이탈리아 유형문화 전시·무형문화재 공연 2005년 러시아 나라음악 큰잔치 2006년 몽골제국 건국 800주년 기념 공연 2007 한·베트남 수교 15주년 기념공연
2. 시나위살풀이 [10:40]
진도의 별, 하늘을 비추다
진도 씻김굿으로 씻겨지고, 진도 만가 자락에 실려서 저승으로 가는 죽음은 쓰라린 단절만은 아닌 듯싶다. 그 죽음은 단절이라기보다는 산 자와 죽은 자 사이의 온당한 자리매김인 것으로 보인다. 삶과 죽음의 본래 모습은 한없이 깨끗하고 순결한 것이라야 옳다는 믿음이 아마도 씻김굿의 소망일 것이다. 산 자가 죽은 자의 원한과 슬픔과 죄업을 씻어줌으로써 죽은 자를 죽음의 자리로 돌아가게 하고, 죽은 자에게 죽은 자로서의 위엄과 신성과 평정을 회복하게 한다.
- 김훈 ‘원형의 섬 진도’ 중에서
인간문화재 고(故) 박병천(중요무형문화재 제72호 ‘진도 씻김굿’ 예능보유자). 향년 75세. 그는 죽음을 앞두고 한 지인에게 보낸 글에서 ‘오호라, 천명이 여기까지던가’라고 되뇌었다고 한다. 그의 천명은 무(巫)였고, 그것은 내림이었다. 그는 진도 신청의 당장 박범준(24세 때 작고)과 진도 최고 무당 김소심의 차남으로 지산면에서 태어났다. 그의 작은할아버지 박종기(1879~1941)는 대금산조를 창시한 신화적인 대금 연주가였고, 지금은 그의 장남 환영(50·부산대 교수)과 손자 명규(국악고 1년)에게 그 맥이 이어지고 있다. 그의 조카가 중앙대 김성녀 교수고, 그 모친이 그의 사촌 박옥진이고, 또 그 이모가 박보화다. 그의 가계는 ‘쟁혈(징의 혈)’을 타고 났으니 무업(巫業)은 돌고 돌아 무려 24대에 이른다.
그의 마지막 씻김굿판은 지난 11월 24일 진도군청 앞 철마광장에서 그의 딸이자 단골(무당)인 미옥(45)이 주재했고, 그는 소리로서라도 씻기는 자가 아니라 그냥 망자였다. 그의 오랜 친구 강준섭의 ‘다시래기(중요무형문화재 제81호)’가 길을 열었고, 진도의 큰무당 채정례가 그 길에 넋두리를 늘어놓았다. 단골 미옥이 본격적으로 씻김을 행하기 전에 그의 막내딸 윤정(28)이 살풀이춤을 추었다. 나이보다 훨씬 앳되어 보이는 막내는 마치 바리데기와도 같았다. 그녀는 아무 말도, 심지어 소리조차 없이 흐느꼈다. 그래도 고인의 단골딸은 의젓했다. 그녀는 남은 가족들에게서 고인의 넋을 끌어올리며 울고 웃었다. 그녀는 기구한 가족사를 풀어내고 씻김으로써 망자의 넋을 달랬다. 영돗말이가 섞이고 길닦음으로 이어지는 동안 능수능란하기만 한 그녀였지만, 그 많은 씻김판에서 그 많은 눈물을 흘리고도 아직 남은 눈물이 있었는지 연신 눈물을 쏟고 쏟았다. 그 눈물이 보는 이의 마음을 외려 따뜻하게 했다.
3. 용신풀이 [25:07]
박미옥은 한때 그 지긋지긋한 세습 무계(巫系)의 업에서 벗어나고자 어지간히 몸부림쳤다. 다니던 국악고를 1년 만에 때려치우고, 광주로 내려가 양품점 종업원을 하기도 했고 옷 장사에 나서기도 했다. 세속 남자를 만나 결혼한 후에는 진도로 내려와 소주방을 차렸다. 남편과 함께 술판을 바라지하면서 굿판을 지워내고자 무던히도 애를 썼다. 그 안에는 무업에 대한 세상의 천대와, 버림받은 어머니에 대한 연민과, 아버지에 대한 깊고 깊은 애증이 깔려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끝내 다시 무업으로 돌아갔다. 그런 것이 업이었다. 그녀는 동생들과 함께 굿판에 나가기를 거듭하면서 차츰 단골로서 단련되어 갔다. 처음에는 어머니 정숙자(그녀는 4년 전 세상을 떴다)의 도움 없이는 굿판을 끝까지 이끌어나갈 역량이 되지 못했으나, 이제는 망자뿐 아니라 살아남은 자들까지도 곧잘 위무하는 정도는 되었다. 이 날 그녀는 종천에 이르기 전 잠시 짬을 내어 아까부터 술김에 공연이 딴지를 붙던 문상객 하나와 맞붙었다. 그러다가 아는 얼굴이 비치니 반갑게 얼싸안기도 했다. 그토록 끈질긴 삶과 그토록 끈질긴 죽음 중 그 어느 것이 그녀를 그토록 억세고도 다감하게 만들었을까.
다음날 상여길은 생각보다 소슬했다. 간밤에 다들 취했는지 발인이 늦어졌다. 오전 9시가 넘어서야 영결식장을 출발한 상여는 아침햇살에 눈이 시린 듯 멈칫거리다가 이내 얼마 가지 않아 진도화물 소속 트럭에 올라탔고, 뒤를 따르는 이들은 카바레에서 내준 승합차거나 관광버스 등에 나누어 탔다. 거기까지 오는 동안에 진도경찰서 소속 한 경찰관은 장례행렬이 길을 막는다고 짜증을 부렸다. 상여는 ‘세계적인 별’이거나 ‘국보급 인간문화재’는커녕 보통 장례 대접조차 받지 못했다. 나 역시 어젯밤의 취기가 완전히 가시지 않았으므로 애써 따져 묻지는 않았다. 차가 고향마을에 이르는 동안 상여는 그나마 고향의 배웅을 받았다. 차창 밖으로 흘러가는 진도의 낮은 구릉들과 깊은 고랑들이, 속정 많은 진도사람들이 잠시 손을 흔들어 주었다. 고향마을에서 노제를 지낸 후, 이제부터는 영락없이 북망길이었다. 상두꾼들이 아무리 핑계를 대어도 이미 북망이 지척이었다. 잠시잠깐인 듯 상여는 장지에 이르렀고, 그곳은 산기슭이 아니라 남도의 들판을 가로지르는 신작로 가였다. 어디선가 아련히 들려오는 남도의 들노래가 귓가를 적셨다.
상사소리는 어디를 갔다가/때를 찾아서 다시 온데
우리 인생은 한번 가면/다시 오지를 못하나니
앞산은 점점 멀어지고/뒷산은 점점 가까워 온다
생전에 고인은 마음으로 가난하게 살고자 했다. 스스로 죄 없고 여유 있어야 남을 위해 빌어줄 수 있는 것 아니냐고도 했다. 하지만…. 그가 이제 죽은 자로서의 위엄과 신성과 평정을 되찾았는지는 알 수 없다. 아니, 아마도 그럴 것이다. 생전에 하 많고 많은 넋들을 씻겼고 이제 스스로도 씻김을 받았으니 그의 넋이야 깨끗하고도 순결할 터였다. 한 시대는 가고 한 시대는 오되 넋은 영원하니 죽음이 결코 끝은 아니었다.
늙어 늙어 만년 주야/다시 젊지 못하리라/하늘이 멀다 해도/초경에 이슬 오고/북경이 멀다 해도/세월 따라 백발이요/저승길이 멀다 해도/아차 한번 죽어지면/대문 밖이 저승일세/신이로~나아냐 장성고나라도고나/에~에~에이야 나니냐실어헤이야 - 진도 씻김굿 중 ‘초가망석’
글:유성문
4. 엇모리축원 [07:52]
아직 도 못다한 노래, 무가
“인생 살며 육신이 늙어도 악·가·무가 겸해지면 집이 생깁니다. 그게 소위 집 가(家)예요. 집이 생기면 남을 빌어주는 의식이 생기고요. 기(氣)와 예(藝)로만 가면 미적(美的) 구성밖에 안됩니다. 춤춘다고 오른손 먼저, 왼손 먼저를 지키며 하는 게 아니라 악·가·무를 마음대로 통달했을 때 무가가 됩니다. 나는 아직 못했어요. 이 세상에서 못하고 눈감을 겁니다.” 하나를 통틀어 보는 눈이 있고 무언가 이루려면 악·가·무를 알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악은 덮어놓고 노래가 아니라는 것. 악은 자동차가 지나가고 낙엽지는 소리라도 어우러지면 음악이라고 했다. 무(춤)도 마찬가지. 살풀이 수건 들고 분위기 잡는다고 능사가 아니다. 노인이 바람불면 쓰러질 것 같은 노송처럼 추어도 깨달음이 있었다면 그게 춤이다. 그런 이치를 모아 하나의 집이 생기면 그게 바로 ‘예술가’이다.
지금 죽어도 일을 이루었으니 됐다고 했다. 사실 한 사람이 문화재 한 종목도 지정받기 힘든데, 그는 국가지정 받은 종목이 4개이고 지방문화재가 3개다. 타고난 무업의 후손. 소리·춤·풍물·굿·비나리… 엇중모리의 비나리 한줄만 해도 박수다. 그저 소리한다고 박수하는 게 아니고 그에게 빨려 들어 박수한다. “늙은 사람 죽지 말고 젊은 사람 늙지 말고. 가난한 사람은 가난하지 말고 병든 사람 나으시고…” 비는 소리가 낭랑하다. “내가 건강하게 오래 살아야 남을 위해 빌어줄 텐데….” 해마다 만나는 친구들이 줄어든다. 저마다 출생하며 당기는 화살시위. 누구의 화살이 더 멀리 갔나 조금 갔나의 차이만 있을 뿐인데. 경주 병실에서 가을을 맞은 박병천은 저들의 복을 빌기 위해 자신의 화살이 멀리 날아가길 바랄 뿐이다. 다른 욕심이 없다.
5. 무장고풀이 [12:40]
길닦음 [2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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