堂堂大道 당당대도
堂堂大道당당대도 赫赫分明 혁혁분명
人人本具인인본구 箇箇圓成 개개원성
당당한 대도(大道)여,
눈부시게 빛나고 분명하구나.
사람 사람들이 본래로 갖추었고
개개인에게 원만하게 이루어져 있도다.
[야보(冶父) 道川스님]
이 멋진 글은 야보도천(冶父道川)스님이
금강경의 대승정종분(大乘正宗分)의 내용을
한마디로 함축하여 찬탄한 것이다.
대승정종이란 가장 위대한 가르침,
즉 대승의 가르침 중에서 바르고 으뜸이 된다는 뜻이다.
대승의 가르침 중에서 바르고 으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
알기 쉽게 번역하면,
금강경에서 수보리라는 제자가 세존에게
“세존이시여,
세존처럼 깨달음의 삶을 살고자 하는 마음[菩提心]을
낸 사람들은 그들이 자신들의 마음을
어떻게 다스려야 합니까?”라고 질문하였다.
세존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각양각색의 사람들, 즉
민족이 다르고, 종족이 다르고, 생김새가 다르고,
사는 국가가 다르고, 언어가 다르고, 풍습이 다르고,
피부 색깔이 다르고, 남녀성별이 다르고,
늙고 젊음이 다르고, 유식과 무식이 다르고,
빈부귀천이 다르고 하는 등등의 각각 다른 무수한
사람들을 내가 다 제도한다. 그래서 그들을
내가 제도하였으나 실은 사람들을 제도한 것이 없다.
왜냐하면 깨달음의 삶을 사는 사람은
‘나’라는 자아의식이나
‘남’이라는 차별의식이나
‘중생’이라는 열등의식이나
‘수명의 제약’이라는 한계의식이 있으면
그는 곧 깨달음의 삶을 사는 사람이 아니다.
그 이유는 이렇다. 설사
내가 그 많은 사람들을 다 제도 하였다 하더라도
나는 아무 것도 한 일이 없다.
왜냐하면 그 사람들이 얻었다는
열반의 경지, 깨달음의 경지,
제도를 얻은 경지, 성불의 경지란
사람 사람들이 본래로 가지고 있는 것이며
개개인에게 원만하게 이루어져 있는 것이라서
나는 실은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다. 이 사실을 아는
나로서는 어떤 상(相)도 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치가 이러함으로 만약 어떤 상이라도
내는 사람은 깨달음의 삶을
사는 사람[菩薩]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사실에 대해서
천하의 명안종사(明眼宗師)인 야보스님은
특유의 선어(禪語)로써
“당당한 대도(大道)여,
눈부시게 빛나고 분명하구나.
사람 사람들이 본래로 갖추었고
개개인에게 원만하게 이루어져 있도다.”라고
간단명료하게 표현하였다.
함허(涵虛,1376-1433)스님은 한수 더 떠서
“별의 별 사람들이 이 세상에 함께 살고 있음이여,
마치 아름다운 비단 위에 진주를 흩어 놓은 듯
영롱하게 빛나고 있구나
[九類同居一法界 紫羅帳裡撒眞珠].라고 하였다.
인간 개개인의 고유한 무한 가치와
영원한 생명에 대한 함축성이
빼어난 이 선시는 만고의 명언이다.
불교의 무수한 가르침은 실은 거의가 방편이고
이러한 사실을 깨우치는 가르침이 진실이다. 그러므로
금강경을 반드시 공부하여야 하는 교과서로
종헌종법에서 지정한 이유가 이것이다.
대승의 가르침에서 바르고 으뜸이 되는 부분이라고
명명한 눈 밝은 사람들의 해석이 더욱 돋보인다.
우리 불자들은 궁극적으로
사람이 부처님이라는 인불사상(人佛思想) 위에서
모든 문제를 이해해야 하며
인생문제를 풀어가야 한다..
아직은 이루지 못한 미래의 작은 꿈에 허덕이며
언제나 갈증을 느끼고 항상
굶주림에 시달리며 살 것이 아니라,
이미 갖추고 있는 무한 풍요를 누리며
영원한 생명과 지극한 행복을 느끼며 살 일이다.
그러려면 눈을 감은 채 눈을 뜨고,
귀를 막은 채 귀를 열고 있어야 한다.
눈을 뜨고 온갖 사물들에 시선을 빼앗기고 있거나
귀를 열고 별의별 소음에 끌려 다니면
무한 풍요와 영원한 생명과
지극한 행복의 맛은 느끼지 못한다.
이러한 사실을 일깨워 주는 가르침이야 말로
대승의 가르침 중에서 바르고 으뜸이 되며,
당당한 대도(大道)가
눈부시게 빛나고 분명한 사실인 것이다.
글 쓰는 일
세상살림살이
인생살림살이
한치 앞도 구분 못하는 안개낀 도로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안개가 깨끗이 사라질때까지
타인 접근금지의 주의의무를 준수하면서
세상이 확연히 나타날때까지
단순한 기다림이 아니라
사방팔방을 잘 살피면서 안전한 대피상태에서 머물러 있어야 한다.
장애때문에 일시으로 멈춤하는 것이다.
내 이야기를 들어 주려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때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곧 글 쓰는 일이다.
어두울 때 글이 쓰고 싶고,
배가 고플때 글은 더 잘 쓰여진다.
알지 못하는 그 누군가를
막연히 기다림하고 있을때도 글은 빛을 발한다.
이 생각 저 생각으로
이 궁리 저 궁리할 그 시간에 글을 쓴다.
글짜들이 모여 한줄을 이루고 줄들이 이어져 내려갈때
정수기의 물이 아래로 흘러면서 맑듯이 나도 맑아진다.
'나는 누군가' 라는 식의 나 스스로를 바보 만드는
질문은 더 이상 내가 나에게 하지 않는다.
글을 쓰면
내면 밑바닥에 보이지 않던 살림살이들이 나타난다.
글 쓰는 사람은 안다.
비밀은 자신만이 알고 있는 사실들로 무덤 속까지 가져간다는 것을 ..
여기서 말하는 것은
비밀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나 자신도 나를 잘 모르는 것들을
글 쓰면서 알아내어 나를 재생하려는 것이다.
현재가 미워서 재생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내 두눈에 세상이 보이지 않은 적이 한번도 없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뜨겁게 달군 햇살이 내눈을 부시게 한다.
깊은 산 속의 새벽은 물소리 새소리와 아침이슬로 시작한다.
도심에서는 차량소음으로 가득하다.
삶의 모습들이 천차만별로 다양하게 연출된다.
내려가는 사람
올라오는 사람
무지 분주하기만 하다.
일상의 모습들이 저토록 몸들을 바삐 움직이게
하는 것들이 무엇일까.
시간일까..
그 곳을 알고 가고 있는 것일까.. (장소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권리행사의 적극적인 일
의무적이고 소극적인 일
아침은 아침 그대로
한낮은 한낮 그대로
저녁은 저녁 그대로
모두 다 다르게 온다.
이렇듯이 밖의 세상 돌아가는 사정을 알아보려고
몸을 아끼지 않고 뛰어다니는 것이 옳은 일들일까 ..
내 속 살림살리들을 모르고서야 어찌 밖을 말 할 수 있으랴.
말은 쉽다.
흔적없이 사라지는 게 말이고, 행 없이 살아가는 일이 말이다.
글은 말과 다르다.
표현하는 것도 전후관계가 맞아야 한다.
글을 쓰는 것은
누군가에게 보이려는 목적이 전부는 아니다.
가슴에 담고 있으면
답답함이 먼저 온다.
누군가에게 말하면 속이 시원할 수도 있을테지만 ..
그 누군가는 없다.
만약, 그 누군가와 동행할 수 있을때에도
글처럼 자신을 진솔하게 다 내 놓을 수 있을까 ..
글은 남겨두는 것이다.
그때 그일에 대해서 기억하는 것이 되고,
그 순간 그 진실을 확인하고 추억하는 것이다.
세월이 흘러서
내가 변해질때
지난 날들의 하루살이들이
작은 감동이 되어 주기를 기대하면서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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