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삶이로되 죽음의 삶인지라 / 백봉거사

2009. 1. 26. 22:03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오매일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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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삶이로되 죽음의 삶인지라 / 백봉거사

  
지극한 道는 方位가 없고 진리는 言說이 없다.
지극한 도는 방위가 없기 때문에 만법은 緣에 따라 일어나고,

진리는 언설이 없기 때문에 百家는 정에 맡겨 구른다.
이를 眞空妙有인 大用이라 이르니 인생은 누구나가 이 진공묘유인 大用중의 一分子이면서
되돌아 무한한 大界로 하여금 無盡(무진)한 대법륜을 스스름없이 굴리어가는 주인공이다.

이렇듯 만법의 主將이요 百家의 영장인 인생이 어찌된 일이냐?
무명 삼독에 떨어져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그물에 걸려들고 말았으니,
이름뿐인 인생으로 괴로운 바다에 떠도는 천애의 기형아가 되고 말았구나. 서글픈 일이다.

도대체 사람이란 무엇이냐?
주동적인가 피동적인가?
또는 어디서 쫓아왔으며 다시 어디로 향하여 흘러가는가?
흙덩이인가 불덩이인가?
천당인가 지옥인가?

오는 곳을 모르니 가는 곳을 어찌 알며, 가는 곳을 모르니 머무는 곳인들 어찌 알겠는가.
참으로 우리들 자신을 되돌아 살펴볼 때,
한낱 가죽주머니로서 이름뿐인 인생이라면 이것은 분명 실답지 않는 꼭두의 놀음에

지나지 않는 허망한 인생이니, 삶은 삶이로되 죽음의 삶인지라.
이 또한 허수아비의 삶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미한 중생들은 자기모순의 마음씀이의 잘못으로 비롯된 팔만사천의 괴로움속에서

生死想이 幻業만을 엮으며 가니, 어찌 이곳에 올바른 인생관인들 밝혀내며,

 진정한 사회관인들 세워지겠는가.

대개의 철학은 입뿌리 위를 벗어나지 못하므로 하여금 正論은 異說로 말미암아

그 뜻을 못 드러내고, 대개의 종교 역시 마음밖을 향해 달리므로 正道는 邪道로 말미암아

그 회포를 못 밝혀내니, 심히 불행한 일로서 미한 중생의 갈길은 그 어드메 쯤인가.

이럴진대 실답지 않은 허망한 인생이라 하여 허망한 꼭두놀음임을 자인하고,

사그라짐만을 기다릴까보냐.
아니다. 아니다.
허수아비로서인 나의 앞소식에는 시작도 끝도 없는 참나가 버젓이 있으니,
기틀에 응하여 三界를 지어내고 연에 따라 만법을 굴리는 데 어찌 인생무상만을 설하여

草露의 인생만을 논하리요.

생기고 사그라지면서 이루어지는 숱한 기관 그리고 또다시 기관끼리 모여서 이루어진 色相身은,
法性身의 그림자로서인 색상신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이러한 그림자요 메아리요 거품이나 마찬가지인 색상신을 여러분이 스스럼없이 굴리기도 하지마는
때에 따라서 이 색상신에게 굴리기도 하는 그 놈은 도대체가 무엇인가를 알아야 한다.

바로 나다.
나는 나일지라도 내가 없는 나다.
나는 빛깔도 소리도 냄새도 없으면서,
되돌아 빛깔을 나투어 빛깔에 응하고,
소리를 나투어 소리에 응하며,
냄새를 나투어 그 냄새에 응하며 사무치는 나다.

나는 있음도 아니요 없음도 아니기에, 있음으로 쫓아 없음으로 향하고,

없음을 쫓아 있음으로 향하며 생과 사를 굴린다.
큰 것도 아니요 작은 것도 아니기에 一塵(일진)에 처하여 시방에 두루하고, 시방에 펴서 일진에 잠긴다.
나는 밝음도 아니고 어두움도 아니기에 밝음으로 더불어 어두움을 삼고 어둠으로 더불어]

 밝음을 삼는다.
나는 착함도 아니고 악함도 아니기에 착함을 굴려 악함을 삼고 악함을 굴려 선함을 삼되,
악한 법으로 시방의 성현을 가르치고, 착한 법으로 일체 중생을 건진다.
나는 늙음도 아니요 젊음도 아니기에 늙음과 젊음을 나툰다.
나는 가는 것도 아니고 오는 것도 아니기에 가는 것 오는 것을 나툰다.

나는 모르기 때문에 아는 것이요 알기 때문에 모르는 것이니 이럴진대 나는 이 무엇인가.
실로 목숨을 걸고 삶을 엮어가는 데는 오직 한 도리가 있으니
이 한 도리는 하늘과 땅을 앞하여서 비롯이 없고 마침이 없는 영특스런 존재로

그 體性이 공적하면서 무한한 영지를 갖추고, 그 理量은 圓明하면서 무궁한 조화를 이룬다.

안으로는 훌륭한 기미를 머금었고 밖으로는 숱한 기관에 응했으니, 오직 이름하여 한 마음이다.
이 한 마음은 만법의 뿌리이며 온 무리의 오묘함의 바탕이다.
세상사람이 한 평생 갖은 고락을 다 겪건만 만리길 뻗친 풍광은 스스로가 거두우는 법이다.

그러나 이 한마음의 눈을 뜨지 못하는 자의 분수로는 문자나 언귀는 알아도 그 문자밖의 소식에

실감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 문제가 풀리기까지에는 진실에 의지하는 것이니,
이는 법에 의지하지 說에 의지하지 않는 것이며,
도에 의지하지 學에 의지하지 않는 것이며 心에 의지하고 身에 의지하지 않는 것이다.

알겠는가.
그대들은 무슨 방편으로서 온누리에 기미를 나투는 妙用의 도리를 제 스스로가 접하겠는가.
별도리가 없다.
오로지 심신을 여의고 분별을 놓아야 한다.심신은 번뇌의 씨요 분별은 망상의 뿌리다.
번뇌와 망상이 뒤범벅이된 곳에서 온누리의 기미인들 어떻게 빛을 놓겠는가.

이에 마음을 크게 뛰쳐서 푸른 하늘을 한장의 종이로 삼고
본래의 소식이라 써서 허공에 매어달 줄만 알면 아상과 식견은 한꺼번에 쓰러질 것이다.

靑山不論古今事
常在岩下問道士
綠水無心是非絶
萬里風光收不止

청산이라 고금사에 어이 그리 말이 없나
도를 묻는 선비만이 항상 여기 있는구나
녹수라서 무심인가 옳고 그름이 끊겼으니
만리풍광에 거두어서 그치지를 아니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