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불교 순교자 이 차돈

2009. 5. 23. 12:02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제불조사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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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불교 순교자 이 차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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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차돈 (異次頓)국립 박물관 소장


신라의 불교 순교자 이 차돈
506(지증왕 7)~527(법흥왕 14),


어려서부터 총명하였으며 학문과 무예를 열심히 닦아, 장차 나라를 이끌 큰 인물이 될 것이라며 주위의 칭찬이 자자하였다. 법흥왕의 근신(近臣)으로서 벼슬이 내사사인(內史舍人)에 올랐다.

신라의 불교는 아도라는 머리를 삭발한 승려 또는 묵호자라는 먹물 옷을 입은 승려가 고구려에서 와서 전하였으나 불법은 널리 홍포되지 않았다. 법흥왕(法興王)은 불교를 새 지배 체제의 구축을 위한 정신적 지주로 삼아서 왕법과 불법을 동일시하는 강력한 왕권을 확립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불교의 신봉을 공식화하려 했지만 귀족들의 거센 반발에 부딪쳐 성사시키지 못했다. 법흥왕 14년(527)에 왕의 종질이며 신하였던 이차돈이 왕의 뜻을 간파하고 자신이 참형을 당해서 반대자를 굴복케 할 테니 불교를 공인해 달라고 청원하였다.

신라의 대신들은 중들이 아이들처럼 머리를 깎고 다른 나라 옷을 입고 기묘한 말을 하여 공인할 수 없다고 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이차돈은 불교의 가르침을 전하며 공인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상반된 갈등 속에서 이차돈은 왕에게 불교 정책을 펴게 하기 위해 스스로 몸을 바쳤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이차돈의 목이 베어지는 순간 뿜어져 나오는 피가 마치 젖처럼 하얀 색이었다고 한다. 더구나 그의 목은 하늘을 날아 금강산(경주)의 정상에 가서 떨어졌으며 하늘이 가려지고 땅이 진동했다고 한다.

이차돈의 순교로 법흥왕은 배불파를 제압하고 527년에 불교 공인을 선포하였으며
529년에는 살생을 금하였다. 이차돈이 순교한 지 7년 뒤에는 신라 최초의 절인 흥륜사(興輪寺)가 창건되었고 법흥왕은 진흥왕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왕비와 함께 승려가 되었다.

“이차돈, 너는 그간 내가 지극히 아껴온 신하이다. 그리고 나를 즐겁게 해주려고 이러한 소동을 일으켰으니, 나로서는 가상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너는 지극히 높이 이겨야 할 왕명을 거짓으로 꾸며댔으니, 이 어찌 오만방자한 일이 아니랴! 왕을 능멸한 죄로 다스려야 마땅하다. 여봐라! 지금 당장 이차돈의 목을 베도록 하라!”

법흥왕이 이차돈을 감싸고 돌 것이라고 생각했던 대신들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자신들이 주장해야 할 이차돈의 처벌을 오히려 왕이 먼저 들고 나오고, 그것도 왕을 깔보았다는 죄를 씌어 곧바로 참형을 명령하다니, 어찌 이런 일이. 이차돈을 목 벤 후 법흥왕은 살기어린 눈으로 괴의 엄청난 행동에 파랗게 질린 대신들에게 돌아섰다.

“너희들도 이번 소동에 대해 응분의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사정을 정확히 확인해 보지도 않고 내게 달려와 거칠게 대들었으니, 이 또한 왕을 능멸한 죄가 크다. 국법에 따라 너희 모두도 참형에 처할 수밖에 없다. 여봐라! 시종무사들은 뭣들 하느냐! 당장 이 자들의 목 벨지어다.”


갑자기 하늘이 흙빛이 되고 땅이 크게 요동쳤다. 눈앞이 캄캄해지고 다리가 후들거리는 대신들에게는 하늘과 땅이 그렇게 느껴졌다. 화가 치민 탓에 아무 대책도 없이 호랑이굴에 몰려든 자신들의 어리석음을 한탄해야 했다. 자기 측근마저 무참히 죽였는데, 눈에 가시처럼 여기던 우리들이 이제 독안에 든 쥐꼴이 되었으니 가만두지 않으려 할 것이다. 대신들은 모두 무릎을 꿇었다.

“폐하! 저희가 잘못하였습니다. 살려만 주옵소서. 앞으로는 폐하의 명에 절대 복종하겠나이다.” 법흥왕은 애써 분을 삭이는 체하며, 입을 열었다.

“좋다. 너희가 그런 맹세를 한다면, 내 특별히 그 동안의 공을 생각하여 이번만은 용서해 주겠다. 다만 이차돈이 나를 위해 절을 짓고자 하다가 죽임을 당했으니, 내 그 절을 완성하여 이차돈의 혼을 위로하고자 하노라.”

이렇게 해서 불교는 온갖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신라 땅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법흥왕은 이차돈을 희생시킨 대가로 귀족들과의 파워게임에서 승리하고, 왕권 강화를 위해 그토록 바라던 불교 공인을 이루어냈다.

이차돈의 순교로 법흥왕은 배불파를 제압하고 527년에 불교 공인을 선포하였으며 529년에는 살생을 금하였다.

이차돈이 순교한 지 7년 뒤에는 신라 최초의 절인 흥륜사(興輪寺)가 창건되었고 법흥왕은 진흥왕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왕비와 함께 승려가 되었다. 진흥왕은 즉위(540)하여 37년간 나라를 다스리는 동안 일심으로 불법을 신봉하여 많은 업적을 남겼다.

진흥왕 11년에는 불교의 제반 업무를 관장하는 행정기구인 대서성(大書省)과 소년서성을 설치하고 이듬해 신라로 귀화한 고구려 승려 혜량(慧亮)을 승통(僧統)으로 삼고 그 밑에 비구승을 관장하는 대도유나(大都唯那)와 비구니 승을 관장하는 도유나랑을 두어 교단의 통솔 체제를 확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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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차돈순교비-디지털한국학


 

진흥왕 15년(554)에는 흥륜사의 낙성과 더불어 국민들이 승려가 되는 것을 허락하였다.
진흥왕 26년(565)에는 진흥왕 10년에 양나라의 유학승 각덕(覺德)이 불사리를 가져온 이래,
다시 진의 사신 유사(劉思)와 고승 명관(明觀)이 불교경전 1,700여 권을 가져왔다.
27년(566)에 신라시대의 최고 가람 황룡사(皇龍寺)를 완성하고, 35년(574)에는 황룡사에 금동여래장육존상을 조성하였다.

한국역사연구회, ?삼국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청년사, 1998, 354~356쪽.
이차돈은 순교자라기보다는 왕을 위해 목숨을 바친 충성스런 신하였다. 만약 신라에서 법흥왕 이전에 이미 국왕의 권위가 높아져 있었더라면, 그래서 법흥왕이 자신의 의도대로 불교 공인을 차질 없이

추진해 갈 수 있었더라면, 그의 희생은 필요 없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나라를 위해 기꺼이 한 목숨 내놓을 수 있을까?

수원 화성의 아름다운 야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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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화성(야경)

수원 화성은 정조대왕 때에 정약용의 설계와 감리로 만들어 졌다

세계 문화 유산으로 등록된 문화 유산이다

수원 화성의 아름다움은 익히 알려졌지만 특히 10.000여개의

서치 라이트로 빛쳐진 수원 화성의 야경을 보면서 어떠한

표현을 써도 그 아름다운 위용을 말할 수 가 없다

이를 보기위해 국내외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를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