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천민의 해방자 암베드카르는 누구인가?

2010. 2. 26. 21:21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제불조사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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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천민의 해방자 암베드카르는 누구인가?

암베드카르[Ambedkar, Bhimrao Ramji]

1893. 4. 14 인도 모우~1956. 12. 6 뉴델리.

인도의 정치가.

하리잔(불가촉천민 계급)의 지도자로 1947~51년 법무장관을 지냈다. 인도 서부의 불가촉천민 계급인 마하르가(家) 출신으로 소년시절 신분이 높은 학교 친구들에게 굴욕을 당했다. 아버지는 인도군의 장교였다. 바로다의 가에콰르(통치자)가 주는 장학금을 받아 미국·영국·독일의 여러 대학교에서 공부했다. 가에콰르의 요청으로 바로다 관청에 들어갔으나 역시 신분이 높은 동료들의 학대 때문에 자리에서 물러나 변호사업과 가르치는 일에 전념했다. 곧 하리잔 사이에서 지도적인 위치에 서게 되었으며, 하리잔을 위해 몇 개의 잡지를 창간했고, 하리잔이 정부의 입법위원회에 그들의 대표를 보낼 수 있도록 했다. 하리잔을 위한 연설로 마하트마 간디와 논쟁을 벌이면서 〈국민의회와 간디가 불가촉천민에게 무엇을 해주었는가 What Congress and Gandhi Have Done to the Untouchables〉(1945)를 썼다. 1947년 인도 정부의 법무장관이 되어 불가촉천민에 대한 차별을 불법화하는 인도 헌법 구성에 앞장섰으며, 이 문제를 의회에서 통과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자신이 정부 내에서 영향력이 없다는 사실에 낙담한 그는 1951년 사임했다. 1956년 10월 힌두교리가 불가촉천민을 영속화시킨 데 절망을 느껴 힌두교를 버리고 약 20만 명의 동료 불가촉천민과 함께 인도 나그푸르에서 의식을 치르고 불교도가 되었다.

 

 

불가촉천민[不可觸賤民, untouchable]


harijan이라고도 함.

전통적인 인도 사회에서 가장 낮은 카스트에 속하는 수많은 집단 또는 카스트 체계에도 속하지 않는 사람들.


불가촉천민이라는 말의 사용과 그와 관련된 사회적 차별행위는 1949년에 인도의 헌법제정회의에서 채택된 헌법에 의해 불법으로 규정되었으며 파키스탄에서는 1953년 불법임이 선포되었다. 위대한 사회지도자인 마하트마 간디는 불가촉천민을 하리잔(하리 비슈누 신의 자녀들, 또는 간단하게 신의 자녀들이라는 뜻)이라고 불렀으며, 여러 해 동안 이들의 해방을 위해 활동했다. 전통적으로 직업 또는 생활습관이 더러운 일과 관련되어 있으면 불가촉천민으로 규정되었다. 예를 들면 ① 어부 같은 사람들, ② 소를 죽이거나 죽인 소를 치우는 일 또는 가죽무두질을 하면서 생계를 잇는 사람들, ③ 똥·오줌·땀·침 등 인체의 배설물과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들, 청소부나 세탁부, ④ 쇠고기를 먹거나 집돼지·닭 등의 고기를 먹는 사람들인데, 인도의 원시종족들 대부분이 이 범주에 속한다.


정통 (→ 힌두교는 인도의 산악부족들을 불가촉천민으로 간주하는데, 이들이 미개하거나 우상을 숭배해서가 아니라 쇠고기를 먹거나 집돼지·닭 등을 도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도 사회에 동화되지 않은 산악부족들이 불가촉천민이라는 지위를 받아들이지 않고 단지 행동양식에 의해서 결정된 사회적 지위를 인정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큰 혼란이 일어났다. 식민지에서 벗어나 독립한 인도와 파키스탄에서 새로운 헌법이 제정될 때까지 불가촉천민들은 여러 가지 사회적 제약을 받아야 했으며 북부보다 남부에서 차별이 더욱 심했다. 대부분 이들은 도시나 마을의 경계 밖에 따로 작은 마을을 이루어 살았다. 또한 수많은 사원과 대부분의 학교에 들어가는 것이 금지되었으며 상위계급이 물을 긷는 우물의 사용이 금지되었다. 이들과 접촉하는 일은 상위계급의 사람들을 심하게 오염시킨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에 다시 정화시켜주는 의식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인도 남부에서는 일부 불가촉천민들을 보기만 해도 일단 오염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들은 밤에만 활동했다. 이러한 사회적 차별 때문에 많은 불가촉천민들이 그리스도교·이슬람교·불교 등으로 개종함으로써 사회적 억압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했다.


오늘날의 인도 헌법은 법적으로 불가촉천민들을 지정 카스트(1970년대에 약 8,000만 명의 주민이 속하는 것으로 추산)와 지정부족(약 3,800만 명) 등으로 규정함으로써 이들의 곤란한 처지를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불가촉천민 신분의 불법규정과 함께, 헌법의 규정에 따라 이들에게 특별 교육혜택과 직업상의 혜택이 주어졌으며, 의회에서도 특별한 대표권이 부여되었다. 이러한 조치들을 뒷받침하기 위해 1955년 불가촉천민법(Untouchability Offenses Act)이 제정되었다. 어떤 사람이 하리잔이라는 이유로 다양한 종교적·직업적·사회적 권리들을 누리는 것을 막는 사람은 처벌받게 되었다. 오늘날에는 그동안 통용되어오던 불가촉천민이라는 말 대신 하리잔이라는 말이 널리 쓰이고 있다. 이러한 조치들이 시행되어도 순수한 계급과 오염된 계급이라는 전통적인 차별이 아직도 인도 사회의 각 영역에 걸쳐 남아 있기 때문에 불가촉천민들의 완전한 해방이 늦어지고 있다.  <출처 : 다음 백과사전.>

 

인도 천민의 해방자 암베드카르는 누구인가?

 

암베드카르는 힌두교 하에서 계급 해방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해 불교로 개종한다. 사진은 1956년 나그푸르에서 열린 개종식 모습.

인도 현대사의 지도자 중 인도 국민의 깊은 사랑과 존경을 받는 인물은 누구일까?

아마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대부분 ‘간디’를 첫 손가락에 꼽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 인도 국민들은 ‘제이 브힘(Jay Bhim, 암베드카르 만세!)’을 외친다. 우리에게는 아직 낯선 인물이지만, 암베드카르(1891∼1956)는 인도 불가촉천민의 해방자이자 현대 인도불교의 중흥자로 칭송받는 ‘영웅’이자 ‘신화’다.

최근 <암베드카르 평전>(필맥)이 출간된데 이어 그의 일대기와 업적, 어록, 연보 등을 담은 또 다른 평전 <암베드카르>가 선보이는 등 암베드카르에 대한 국내의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그의 일생을 출생, 브라만주의와의 투쟁, 원탁회의, 종교의 탐색과 민중을 위한 불법이라는 큰 획으로 나눈 이 책에서는 그의 사상과 업적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놓았다. 먼저 그의 일대기를 간략히 살펴보자.

암베드카르는 인도 카스트제도의 최하층 계급인 불가촉천민으로 태어났다. 친구들은 그에게 돌을 던졌고, 교사들은 부정 타는 것

인도 불가촉천민의 해방자이자 인도 현대불교의 중흥자인 암베드카르의 평전.

이 두려워 그에게 질문을 하지도, 산스크리트어를 가르치지도 않았다. 이러한 사회적 멸시에 시달리던 암베드카르는 노예제도인 카스트를 타파하겠다는 결심을 하고 매일 새벽 두시에 일어나 공부에 매진했다. 1907년 대학에 입학한 그는 이후 주위의 도움으로 미국과 영국에서 유학생활을 했고 고국에 돌아와 교수와 변호사로 일했다. 그러나 동료 교수들은 그가 교수 휴게실에 놓인 주전자의 물조차 마시지 못하게 하는 등 신분 차별은 계속됐다.

교수직을 사임하고 다시 영국으로 건너간 그는 법학과 경제학을 공부했고 1927년 ‘초다르 저수지’ 사건으로 불가촉천민 해방운동의 신호탄을 쏘았다. 이는 마하드 시의 상위 카스트 주민들이 불가촉천민의 초다르 저수지 사용을 반대한 것에 저항한 사건으로, 암베드카르를 비롯한 만여 명의 군중은 저수지까지 행진하고 ‘금지된 저수지’의 물을 떠 마심으로써 자신들의 권리를 행사했다.

이후 그는 힌두교의 개혁을 위해 법무장관과 노동장관을 역임하며 불가촉천민을 위한 정당을 창당했고, 그들의 의회진출을 법제화 하는 등 신분제 철폐를 위해 앞장섰다. 그러나 그는 힌두교 아래에서 신분제를 타파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1935년 “힌두교인으로 태어났지만, 힌두교인으로 죽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라 선언한다. 그리고 그가 대안으로 찾은 가르침은 바로 불교였다.
“프라즈나(지혜)와 카루나(사랑) 그리고 사마타(평등)가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기에 저는 불교를 사랑합니다. 이 원리들은 선하고 행복한 삶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조건들입니다.”

암베드카르는 불가촉천민들과 함께 계급해방에 앞장섰다.

그는 불교 교리에 대한 연구와 저술을 이어갔으며 1956년 10월 14일, 나그푸르에서 50여 만 명의 추종자들과 함께 불교로 개종함으로써, 사그라져가던 인도 불교에 불을 지폈다.

책에서는 암베드카르의 일대기를 짚어가는 한편 인도의 성자로 여겨지는 간디와의 사상 대립을 조명하는데 많은 장을 할애하고 있다. 신분제의 완전철폐를 주장했던 암베드카르와 달리 간디는 카스트 제도가 인도 사회를 지탱하는 힘이라 여겼다. 이러한 인식차이는 불가촉천민의 의회진출과 차별근절 등의 문제에 있어 첨예한 대립을 보였다. 오늘날 인도인들이 “암베드카르가 없었다면 인도 불가촉천민의 역사는 전혀 다르게 쓰여졌을 것”이라고 평가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진정 국민의 목소리를 귀 기울여 들을 줄 알고, 이를 실천하기 위해 일생을 바쳤던 암베드카르의 일생을 통해 오늘날 지도자의 모습을 반추해보게 된다.  <여수령 기자>


 

인도의 암베드카르를 아는가?   .....   한겨레 임종업 기자

 

모른대도 부끄러워 마시라. 그 나라는 우리와 멀리 떨어진 까닭이다.

<암베드카르 평전>(게일 옴베트 지음, 필맥 펴냄)과 <암베드카르>(디완 챤드 아히르 지음, 에피스테메 펴냄)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나왔다. 이들의 공통점은 암베드카르를 마하트마 간디와 비교하여 서술한다는 점이다. 동서를 막론하고 간디는 알아도 암베드카르는 낯선 탓이다. 잘 알려진 간디를 고리로 이야기를 풀면 알아듣기 쉽지 않겠는가. 기실 암베드카르는 간디와 22살 차이로 동시대를 살아 사사건건 부닥쳤다. 부닥침이 거의 정면대결 수준이라면 간디와 더불어 서술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인도의 독립을 위해 투쟁한 간디와의 정면대결이라니? 독립인도 초대 법무장관을 지냈으니 적어도 그 인물이 영국의 끄나풀이 아닌 것쯤은 추측이 가능할 터이다.


추종자와 함께 불교로 개종


한두 마디로 줄여보자. 천출. 이례적으로 고등교육을 받은 그는 불가촉천민의 지위 향상을 위해 수차례 군중집회를 주도한다. 독립인도의 기틀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불가촉천민을 둘러싸고 간디와 대립한다. 고단한 투쟁 끝에 독립인도의 헌법에 여성과 불가촉천민의 자유와 권익 보호를 위한 조문을 명문화하는데 성공한다. 나아가 힌두교로는 카스트제도를 깨뜨릴 수 없음을 절감하고 추종자 50만명과 함께 불교로 개종해 결과적으로 인도불교의 중흥자로도 꼽힌다.


자! 이제, 간디와 대비하면서 암베드카르에 빠져보자.


두 사람이 처음으로 맞닥뜨린 것은 독립인도의 헌법을 마련하기 위한 2차 원탁회의가 열리기 직전인 1931년 8월.


이때 암베드카르가 “개나 돼지보다도 못한 취급을 당하면서 마실 물도 얻어먹을 수 없는 이 땅을 어떻게 조국이라고 부르겠는가”라고 따지자 간디는 “불가촉천민들이 힌두교에서 정치적으로 분리되어 나가는 일이 었어서는 결코 안된다. 이는 자살행위나 다름없다”고 말했다. 메울 수 없는 간극. 태생도 밟아온 길도 다르니 당연할 수밖에.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난 간디는 대학에 들어갔으나 공부가 힘에 부쳐 자퇴하고 영국에 건너가 변호사자격증을 땄다. 귀국해서 봄베이에서 별볼일 없는 변호사 생활을 하다가 1893년 남아프리카 인도인 사업가의 사건청탁을 맡으면서 남아프리카에서 20년여년을 산다. 1915년 그가 귀국할 무렵 암베드카르는 뉴욕 콜럼비아대학교에서 공부 중이었다. 암베드카르는 23년 귀국해 사회운동 일선에 뛰어든다.


권리를 구걸하지 말고 투쟁하라


그동안 독립운동에 열심이었던 간디가 불가촉천민을 위해 한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1932년 불가피한 상황에 밀리기 전까지는. 남아프리카에서 돌아온 간디가 세운 아쉬람에 한 불가촉천민 가족이 들어와 살기를 원하면서 빚어진 사건이 간디의 전기 가운데 1922년까지 불가촉천민이 등장하는 유일한 사건이다. 이때 그의 부인은 “부엌에서 불가촉 여편네의 꼬라지를 나더러 어떻게 보라고 하느냐”고 앙탈을 부렸다나. 또 간디가 1915~32 여섯 차례 단식을 하면서 ‘불가촉’이란 주박을 풀기 위해 한 것은 한차례도 없었다. 그는 다만 정통파 힌두교인들에게 불가촉천민을 사랑과 긍휼로 대하라고 권면했을 뿐.


개·돼지보다 못한 취급받고 물 마실 권리조차 없는 불가촉천민 출신 암베드카르는 독립 인도의 건설 과정에서 간디와 정면충돌 한다.고단한 투쟁 끝에 그는 여성 천민의 자유와 권익을 헌법에 명문화하는 데 성공한다.


이에 반해 암베드카르는 “억압받는 민중의 권리를 회복하려면 억압하는 자들에게 구걸하거나 그들의 양심에 호소해서는 안되고 오로지 줄기찬 투쟁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1927년 3월 물도 마음대로 떠먹을 수 없는 불가촉천민 1만여명을 이끌고 마하드에서 상수원인 초다르 저수지까지 행진했다. 그 저수지에서 떼거리로 물을 떠마심으로써 물 마실 권리를 온천 하에 알렸다. 그해 말에는 수천명이 다시 모인 자리에서 카스트계급들간의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힌두법전인 마누법전을 불태우는 과단성을 보였다. 1930년에는 나시크에서 칼라람사원 출입할 권리를 따내려 떼거리로 모여 투쟁했다. 결국 폭력사태까지 발생하고 마는데 온갖 어려움 속에서 간헐적으로 5년 동안 지속했다.


힌두법전을 불태우다


간디와 암베드카르가 정면충돌한 것은 1932년 2차 원탁회의. 의회대표로 참석한 간디는 첫 연설에서 불가촉천민들에게 독자적인 정치적 권리를 주어야 한다는 암베드카르의 요구를 맹비난했다. 두 지도자는 두달 이상 싸웠으나 간극을 메울 수 없어 영국수상의 중재령이 내려졌다. 그 과정에서 간디는 영국의 인도담당 장관에게 수차 편지를 보내 그들에게 대표권을 따로 주었을 때의 폐해를 경고했다. 자신의 희망사항이 물거품이 되자 간디는 너죽고 나죽자식으로 단식에 들어갔고 엿새만에 힌두교쪽에 주어진 의석 가운데 일정의석만 그들에게 배정하는 협정(푸나협정)이 맺어졌다. 간디가 비로소 불가촉천민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반성하게 된 계기다.


그 후 암베드카르는 불가촉천민들이 입법부만이 아니라 행정부에 진출할 권리가 주어져야 한다고 주장하여 1937년 크하레 내각은 불가촉 천민 1명을 국무위원으로 임명했다. 간디? 물론 반대했다. 구조적인 가난 때문에 교육받을 기회를 잃었으므로 그들에게 일정수의 공직을 떼어주어야 한다는 주장에 이르면 간디의 표정은 어떠했을까.


인도인들은 “암베드카르가 불가촉천민의 어머니라면 간디는 보모에 불과하다”며 “그가 없었다면 인도 불가촉천민의 역사는 전혀 다르게 쓰여졌을 것”이라고 평가한다. 이제 알겠는가. 암베드카르를 간디와 비교해서 설명할 수밖에 없는 기분 나쁜 아이러니를...  한겨레 임종업 기자


 

불가촉천민의 개종

 

“천한 숙명에서 벗어나 용기내어 대항하라”
기사등록일 [2006년 10월 30일 월요일]
 
<사진설명>지난 2002년 석가족의 집단 개종 당시의 모습. 석가족을 포함한 많은 불가촉천민들은 이제 불교를 통한 자유를 갈망하고 있다.

그들은 인도 사회에서 가장 억압받고 학대 받는 자들이다. 그들의 공식적인 이름은 ‘달리트’. 인도의 힌두교 사회 계층에서 가장 낮은 계급으로 간주되는 자들이다. 그들의 몸이 더러움 그 자체라고 여기는 다른 계층의 사람들은 그들과의 신체적 접촉을 오염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그들은 ‘언터쳐블’, 즉 ‘불가촉천민’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린다. 오늘 날, 인도 전역에 사는 수 천명의 불가촉천민들은 자신들에 대한 이러한 불공평한 대우를 더 이상 참지 않기로 결심하고 비인간적 카스트 제도에 반기를 들기 시작했다. 사실 이러한 카스트 제도가 인도에 도입된 것은 약 7000년 전 지금의 러시아 남부 지역에서 살고 있던 아리아 족들에 의해서였다.

 

7천년 억압의 역사

아리아 인들이 그들의 소를 방목하기에 더 나은 목초지를 찾고자 인도에 침입했을 때, 그들이 제일 먼저 정착하기 시작한 곳은 카슈미르와 펀자브 지역으로 그 곳에 당시 그들의 종교였던 베다 종교를 널리 전파하며 카스트제도를 도입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카슈미르와 펀자브 지대에 ‘풍요로운 땅’이라는 의미를 지닌 ‘바랏’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 당시 인도에서 토착 인으로서 살고 있던 정직하고 순박한 드라비다 사람들은 탄트릭 종파를 따르고 있었다. 인도에 새로 정착한 아리아 인들은 토착 인들의 종교였던 탄트릭 종파는 물론이고 인도인들 마저 그들을 아수라 혹은 악마라고 부르며 탄압하기 시작했다. 아리아 인들은 그 당시 이미 두 개의 사회 계층을 가지고 있었다. 성직자 계급의 ‘브라민’과 전사 계급의 ‘크샤트리아’가 그것이었다. 그들은 인도에 살던 토착 인들을 위해 두 개의 더 낮은 계급을 새로 추가했다.

 

권력도 막지 못한 그들의 분노

고타마 붓다는 자신이 힌두교의 높은 계층에 속하는 계급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힌두교의 카스트 제도를 강하게 비난했던 최초의 인물이었다. 부처님께서는 제멋대로 행동하는 퇴폐적 브라민 계층들이 인도인들을 착취하는 것을 더 이상 참을 수 없다고 생각하셨다.

오늘날 불교는 불교가 시작된 바로 그 나라로 다시 돌아가 수천 년 동안 불가촉천민이라는 낙인을 지닌 채 살아온 3억 인구의 달리트 계층에게 평등과 정의를 가져다 주고 있다. 1956년 최초로 오백 만 명의 불가촉천민들이 힌두교를 버리고 불교로 개종을 한 지 오십 년이 지난 작년 육십 만 명이 훨씬 넘는 불가촉천민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들며 살고자 델리로 모여들었다. 작년 11월 4일 약 백 만 명의 천민들을 불교로 개종시키기기 위한 또 다른 모임이 계획되었는데 이 모임은 정부 관계 당국에 의해 저지되고 말았다. 모임이 저지된 이유는 보수적이고 극단적인 힌두교 세력이 이 모임을”기독교의 음모”라고 부르며 억압했기 때문이었다. ‘소수 세력을 위한 국가 위원회’에 따르면 이 모임이 인도의 법과 질서에 문제를 초래할 수 있어 금지되었다고 한다.

<사진설명>불자가 된 천민 출신의 여인이 부처님께 서약을 하고 있다.

우리가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종교를 개종하는 것이 인도에서는 다른 그 어떤 나라보다 더 민감한 문제라는 사실이다. 기독교인들은 종종 수상한 방법을 이용하여 천민들을 개종한다는 이유로 인도에서 많은 비난을 받고 있기도 하다.

이러한 억압과 금지에 반기를 들고자 경찰이 미리 막아둔 바리케이드를 밀어내며 수 천명의 불가촉천민들이 인도 구석 구석에서부터 암베드카르 바반으로 모여들었다. 암베드카르 바반은 불가촉천민 계층 출신의 지도자였던 비. 알. 암베드카르(B. R. Ambedkar)를 기념하여 지어진 곳이었다. 한자리로 모여든 이들은 깃발을 들고 힌두교 상위 계층에 항의하는 구호를 외치며 불교를 따르겠다고 한 소리로 외쳤다.

이 모임을 주관한 자는 이 모임에 참가한 수많은 사람들을 감금하고 이 곳으로 오려던 사람들에게 모임이 취소되었다는 거짓말을 유포했던 경찰을 강력하게 비난했다. 하지만 이러한 경찰의 억압도 결국 그들을 막지 못했고 인도의 천민들은 디크샤(‘가르침’ 혹은 ‘종교의 개종’을 의미함)를 받고자 한 자리에 모여 밝은 주홍빛 승복을 차려 입으신 스님들과 함께 예불을 올렸다. 청동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불상이 세워졌고 스님들은 다른 사람들이 다 볼 수 있는 야외에서 공식적으로 개종 의식을 수행하기 시작했다. 개종 의식을 마친 새로운 불자는 종교적 맹세를 선언했다. 새롭게 불자가 된 천민들은 더 이상 힌두교의 신과 여신들을 절대로 섬기지 않겠다는 맹세도 덧붙였다. 새로이 불자가 된 자들 중 한 명이 기자에게 말했다.

“지금부터 나는 더 이상 불가촉천민이 아닙니다. 힌두 신들은 단지 우리에게 노예라는 신분과 굶주림만을 주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지배를 더 이상 받지 않을 겁니다. 우리는 억압받았던 과거의 사슬에서 해방되어 교육을 통해 새로운 시대를 만들어 가고 인간의 기본 권리를 인식하며 살아갈 것 입니다. 불교는 단연코 이러한 해방으로 이르는 길입니다.”

‘인도의 억압받는 카스트와 부족들의 연맹(All Indian Confederation of Secluded Castes and Tribes)’의 회장직을 맡고 있는 우딧 라즈(Udit Raj)씨는 이러한 천민들의 개종 모임을 개최하고자 4년간 노력을 기울여왔다고 한다. 그는 ‘개종’이라는 단어를 거부했다. 그리고 불교를 받아들이는 것은 인도 고유의 문화를 찾아 돌아가는 것이자 인도인들의 형제애와 만물에 대한 사랑을 배울 수 있는 방법이라고 했다. 그는 또한 불교가 불교의 탄생지였던 인도에서 쇠퇴했던 이유는 불교가 그들에게 가해진 공격에 용기를 내어 대항하지 못했던 탓이었다고 설명했다.

 

“동등한 권리와 평등 원할뿐”

<사진설명>천민 출신의 인도인들이 한 자리에 모여 인간의 기본 권리와 평등에 대하여 외치고 있다.

그는 과거에 ‘아힘사’ 즉 불살생이라는 덕목을 신봉했지만 이제는 본인을 공격하거나 본인에게 해를 가하는 자가 있다면 자기 방어를 위해서라면 본인의 권리를 행사할 것이라고 말했다. “불교는 운명론 혹은 숙명론을 강조하면서 인간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지요”. 그는 말했다.

얼마 전, 달라이 라마께서 인도인들이 그들의 사회에서 동등한 지위를 얻고자 불교로 개종하는 것에 관하여 말씀을 하셨다.

“나는 항상 새롭게 불자가 된 사람들, 특히 소위 천민이라고 불리는 계층 출신의 불자들에게 말합니다. 불교를 선택한 것이 단지 다른 종교에 대해 분노를 느껴서여서는 안 된다고… 좀 더 동등한 권리를 누리기 위해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들어야 합니다. 불교는 인도에서 가장 오래된 종교 중 하나지요. 만약 불교가 탄생한 나라인 이 나라 인도의 사람들이 부처님을 따른다면 이는 매우 좋은 일입니다. 결국 불교와 힌두교는 형제 자매와 같은 사이니까요.”

인도에서는 좀 더 큰 규모의 개종 행사가 조만간 다시 열릴 것이라고 한다. 이번에는 인도 정부 혹은 관계자들이 공명정대함과 책임감에 대해 다시 한번 깊게 생각해보고 행동에 옮기길 소망한다.

이 땅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행복할 수 있기를…. 국제칼럼니스트   법보신문  874호 [2006-11-01]

 

인도불교의 중흥 암베드카르의 불교입문맹세 22개항


1956년 10월 14일과 15일, 인도 나그푸르의 딕샤 부미에서 50만명의 사람이 일시에 불교로 개종하는 역사적인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은 일찍이 세계에 유래가 없었던 가장 큰 교모의 개종으로 기억되고 있다.


이러한 불교 집단 개종식을 주도한 인물은 암베드카르 박사이다.


빔라오 람지 암베드카르(Bhimrao Ramji Ambedkar)는 인도어로 달리트(Dalit)로 불리고 공식적으로는 ‘지정 카스트’(Scheduled Castes)로 불리는 불가촉민, 즉 최하층 계급 출신이면서도 불굴의 의지와 노력으로 변호사, 교수, 노동부 장관, 초대 법무부 장관 등을 거쳐 사회 운동가요 종교 지도자로 승화한 인물이다.


그는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인도 정부의 초대 법무부 장관으로 재직하면서 인도의 민주 헌법과 법전 의안의 초안을 작성하여 더욱 유명해졌다. 그러나 그는 이후 정계에서 은퇴하여 천민을 해방하기 위한 운동에 앞장섬으로써 천민의 아버지로 존경받았다. 그의 최종적인 결론은 불교의 평등 정신에 귀의함으로써 정신과 물질의 양면에서 압박받는 사람들의 생활을 향상시킬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에 그는 스스로 불교도가 됨으로써 그들을 불교도로 개종시킬 것을 결심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그림) 암베드카르 박사와 부인이 50만명과 함께 수계식을 하고 있다. 인도 Nagpur, 1956.


그의 개종식은 불기(佛紀) 2500년을 기념한 1956년 10월 14일 나그푸르에서 거행되었다. 이때 운집한 50만 명의 천민이 그와 함께 불교도가 되었다.


이 역사적인 행사가 진행되는 동안, 암베드카르 박사는 지지자들 앞에서 22가지 맹세를 제정했다. 이러한 암베드카르의 맹세들은 혼돈과 반목으로부터 불교를 보호하는 보루의 역할을 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대중을 빈곤 상태로 이끌고 힌두교의 상위 계급들을 살찌우는 미신과 소모적이고 무의미한 의식들로부터 개종자들을 자유롭게 할 수 있었다. 이 점에서 암베드카르가 인류의 희망으로 중시한 것은 불교의 평등 사상이었다.


암베드카르의 불교입문맹세 22개항


01. 나는 브라흐마 비슈누 마헤슈와라를 신으로 인정하지 않고 또한 숭배하지도 않는다.


02. 나는 라마와 크리슈나를 신으로 인정하지 않고 또한 숭배하지도 않는다.


03. 나는 가우리(시바신의 처, 월경전의 소녀)나 가나빠띠(집단의 수령)와 같은 힌두 신전의 남신, 여신 중 어느 쪽도 신으로 인정하지 않고 또한 숭배하지도 않는다.


04. 나는 화신(化身, 신들이 변해서 다른 것으로 나타난다는 사상)을 믿지 않는다.


05. 나는 붓다가 화신인 것, 즉 그가 비슈누의 화신인 것을 믿지 않는다. 도리어 나는 그것이 거짓 선전이라고 생각한다.


06. 나는 조령제(祖靈祭)를 지내지 않고 제사떡을 드리지 않는다.


07. 나는 붓다의 법에 거슬리는 어떠한 관행에도 따르지 않는다.


08. 나는 어떠한 의식이나 제식도 브라흐만의 손에 의해서 집행되는 일을 하지 않는다.


09. 나는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고 믿는다.


10. 나는 평등권을 확립하기 위해 노력한다.


11. 나는 붓다에 의해 가르쳐진 8정도를 따른다.


12. 나는 붓다가 가르친 불교교단의 10계를 지킨다.


13. 나는 모든 생물을 자비롭게 보호한다.


14. 나는 도둑질을 하지 않는다.


15. 나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16. 나는 사음을 하지 않는다.


17. 나는 술을 마시지 않는다.


18. 나는 팔정도를 따르고, 선행, 자비를 행함을 인생지침으로 삼는다.


19. 나는 사람됨에 해롭고 진보를 방해하는 불평등주의적인 힌두법을 고발하고 또한 거부한다.

그리고 나는 붓다의 법을 택한다.


20. 나는 불교야말로 유일한 참된 종교라고 확신한다.


21. 나는 새로운 생활에 들어간 것을 확신한다.


22. 나는 붓다가 가르친 그밖의 다른 계율과 교리에 따라 살아갈 것을 맹세한다.



`교육으로 지옥 같은 천민 굴레 벗어났다`  중앙일보

인도 최하층 `달리트`서 대학총장 자리 오른 자다브   

 

인도 최하위계층인 달리트. 손도 닿으면 안된다는 '불가촉(不可觸)천민'이다. 더러운 발자국을 지우기 위해 허리춤에 빗자루를 매달고 다녀야 하고 우물에서 물을 길어 마실 수도 없다. 이들 대부분은 전생의 악업 때문에 미천한 신분으로 태어났다고 믿으며, 더 나은 삶은 내세의 몫으로 미뤄둔다.


달리트 출신으로 대학 총장의 자리에까지 오른 나렌드라 자다브(54.사진) 인도 푸네대학 총장은 신분의 굴레를 벗은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미국 인디애나 대학에서 경제학 박사를 받았으며, 인도중앙은행 수석 경제보좌관, 아프가니스탄의 중앙은행 자문관 등을 지냈다. 외교통상부 초청으로 방한한 그를 13일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만났다. 마침 그와 그 가족의 성공 스토리를 담은 '신도 버린 사람들'(김영사) 한국어판이 최근 출간됐다.


-인도의 신분제도인 '카스트 제도'가 아직 있나.


"1947년 인도가 독립하면서 카스트 제도는 법적으로 폐지됐다. 하지만 아직도 카스트는 경멸과 모욕의 빌미를 제공한다. 나 역시 그런 편견을 자주 접한다. 한번은 한 이웃이 나를 부르더니 나에 대한 칭찬을 많이 들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달라트인인데도 그렇게 교양이 있다면서요'라고 하더라."


-신분의 벽을 뛰어넘은 원동력은 뭔가.


"교육이다. 내 아버지 다무는 '불가촉천민의 아버지'로 불리는 암베드카르의 영향을 받아 '부모는 자녀를 교육함으로써 그들의 운명을 바꿀 수 있다'는 소신으로 사셨다. 아버지는 아들을 학교에 보내기 위해 무작정 학교를 찾아가 교장실 바닥에 드러눕기까지 했다. 교육은 신분에 의해서가 아닌 능력에 의해 돈과 명예를 얻을 수 있도록 해준다."


-국비장학생으로 선발돼 미국유학을 다녀왔을 정도로 공부를 잘했다는데. 비결은 뭔가.


"일곱가지 공부원칙을 세웠다. 첫째는 목표를 높게 가지라는 것. 달성하기 쉬운 낮은 목표를 세우는 건 범죄행위다. 또 ▶목표에 대한 욕심을 가져라 ▶끊임없이 노력하라 ▶시간을 효율적으로 쓰라 ▶대충대충 하지 말고 정도를 걸어라 ▶항상 가족을 생각하라 ▶자기가 속한 사회에 기여하라 등이 원칙이다."


-책 '신도 버린 사람들'은 93년 인도에서 첫 발간된 뒤 큰 화제가 됐다고 들었다.


"특히 젊은 달리트들의 반향이 컸다. 독자에게 받은 편지만 1만여 통이 넘는다. 이 책의 메시지는 한마디로 '희망'이다. 또 독자들에게 '자기가 가진 어려움을 과장하지 말라'는 뜻을 전하고 싶다. 의지와 노력이 있으면 언젠가는 꿈을 이룰 수 있다."      중앙일보 이지영 기자


 

운명 박찬 불가촉천민 가족사 감동   베스트셀러 읽기 / <신도 버린 사람들>

 

» <신도 버린 사람들>

“베다를 들으면 귀에 납물을 부을 것이요,

베다를 암송하면 그 혀를 자를 것이며,

베다를 기억하면 몸뚱이를 둘로 가를 것이다.”


‘베다’라면 고대 브라만교의 경전인데, 그 성스러운 말씀을 듣고 읽고 기억했다는 이유로 이런 끔찍한 형벌을 받아야 하는 사람은 누구일까? 인도 카스트제도의 최하층 바깥에 있는 ‘불가촉천민’이다. 힌두 경전 〈마누 법전〉은 불가촉천민에게 신의 가르침을 접할 기회조차 박탈했다. 인도는 1947년 독립과 함께 공식적으로는 카스트제도를 부정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여전히 카스트제도가 작동하고 불가촉천민도 사회의 밑바닥에 그대로 남아 있다. 그 불가촉천민이 인도 인구의 16%인 1억6500만 명에 이른다. 이들이 실질적으로 해방되지 않는다면, 인도는 평등과 자유의 국가가 되지 못할 것이다.


〈신도 버린 사람들〉은 바로 이 불가촉천민 집안에서 태어나 수많은 카스트 장애를 뚫고 가장 촉망받는 경제학자로 성장한 나렌드라 자다브의 가족 이야기다. 지난 6월 출간된 이 책은 한 달 만에 2만부 가량이 팔렸다. 지은이가 출간 직후 한국을 다녀간 것이 홍보에 도움이 되기도 했겠지만, 심리적 거리감이 적지 않은 인도라는 땅을 배경으로 한, 불가촉천민의 이야기가 독자의 큰 호응을 얻은 것은 의외라고 할 만한 일이다. 책을 만든 김영사의 편집자 황은희씨는 “탄탄한 원고의 힘”을 가장 큰 이유로 꼽았다. 지은이는 불가촉천민이었던 아버지와 어머니의 이야기를 거짓 없이 솔직하게 풀어놓는다. 그 속에 인도 카스트제도의 야만성과 억압성을 고발하고, 불가촉천민의 해방자였던 빔라오 람지 암베드카르의 위대한 투쟁을 새겨넣었다. 황은희씨의 말을 빌리면, 이 책은 “정직하고도 굳건한 책”이며 “정말 감동적이고 가슴 뜨거운 이야기”이다.


이 책은 깊은 감동을 전하는 휴먼 스토리이자, 일종의 성공담이기도 하다. 삶의 밑바닥에서 일어나 인도 최고의 두뇌 가운데 한 사람으로 정점에 선 자기실현형 인간의 이야기인 셈이다. 이 점이 독자들에게 호소력을 발휘했다고 황은희씨는 말한다. “이 책은 독자들에게 ‘이런 사람도 있는데 하물며 나는 어떻게 살았나’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신조차 내 꿈을 빼앗지 못했다’라는 카피처럼 사람들은 자신보다 훨씬 끔찍한 상황에서 그 악조건을 극복한 실존 인물을 통해서 희망을 얻는다.”


책 안에서 지은이는 담담하게, 그리고 당당하게 자신의 역사를 말한다. “그렇다. 나는 마하르 카스트 출신이다. 내 아버지는 간신히 문맹을 면했고, 변변찮은 막일로 가족을 먹여 살린 보잘것없는 노동자였다. 내 조상들은 불가촉천민이다. 그들은 침이 땅을 더럽히지 않도록 오지항아리를 목에 걸고 다녔고 발자국을 즉시 지울 수 있게 엉덩이에 비를 매달고 다녔다. 그리고 그들은 마을의 하인이 되어 이글거리는 태양 밑을 입에 거품을 물고 숨이 끊어지도록 달려서 관리들의 행차를 알려야 했다. 그래서 뭐 어떻다는 말인가? 나는 내 힘으로 존엄성을 입증하지 않았던가?” 지금 처지가 어렵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 책을 읽으면 용기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한겨레 고명섭 기자 michael@hani.co.kr


 

 

저들, 웃기까지…얼마나 피눈물 흘렸을까    경향신문 입력: 2007년 06월 15일 14:0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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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도 버린 사람들…나렌드라 자다브|김영사


‘인도’를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세계 4대 문명인 인더스 문명과 불교의 발상지. 명상과 영혼의 나라. 그러나 인도는 21세기 들어 더욱 주목받고 있는 나라다. 중국과 함께 ‘친디아’(Chindia)로 불리며 세계 경제를 주도할 핵으로 꼽힌다. 연간 경제성장률이 2004년 7.4%, 2005년 8.6%, 2006년 9.0%로 고속성장을 구가하고 있다.


인도는 세계 2위의 ‘거대 시장’이다. 인구는 약 11억명. 전 세계의 16%를 차지한다. 지구상에 살고 있는 여섯 명 가운데 한 명이 인도인인 셈이다. 그런데 인도인의 16%, 즉 여섯 명 가운데 한 명인 1억7000만명 정도가 ‘불가촉천민(不可觸賤民)’이라고 불렸던 ‘달리트’다. 인도 하면 곧잘 떠올리는 카스트제도 ‘밖’의 사람들, 그래서 ‘아웃카스트’라고도 한다. 브라만(사제), 크샤트리아(왕, 귀족), 바이샤(상인), 수드라(노예, 천민)로 구성되는 카스트에 들지 못하는, 천민인 수드라보다 더 낮은 사회의 최하층이다.


접촉하는 것만으로도 오염이 된다고 해서 ‘불가촉천민’이었다. 침이 땅을 더럽히지 않도록 침을 닦는 그릇을 목에 걸고, 더러운 발자국을 지우기 위해 빗자루를 허리춤에 매달았다. 사원에 들어가 기도도 드릴 수 없었고, 심지어 그곳에 그림자도 드리울 수 없었다. 인분을 나르거나 가축의 시체를 치우는 등 비천한 일들이 그들의 몫이었다.


‘신도 버린 사람들’은 이들 불가촉천민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영어판 제목 ‘Untouchables’는 바로 ‘불가촉천민’을 뜻한다. 저자는 나렌드라 자다브 인도 푸넨대학 총장. 불가촉천민 출신이라는 굴레를 벗어던지고 국제적 명성을 지닌 경제학자로 우뚝선 인물이다. 저자는 책 속에 그의 아버지 ‘다무’와 어머니 ‘소누’가 걸어온 세월을 담고, 자신과 딸의 이야기를 더해 불가촉천민들이 감수해야 했던 핍박과 굴욕과 배고픔을 생생하게 드러냈다. 나아가 정해진 ‘카르마’(운명, 업)를 거부하고 스스로 운명을 개척해나간 가족의 투쟁을 감동적으로 그려냈다.


책은 한 편의 드라마를 보는 것처럼 술술 잘 읽힌다. 다무와 소누의 회상과 대화가 많은 부분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어렸을 때부터 불가촉천민으로서의 차별을 견뎌야 했다. 물을 더럽힌다는 이유로 개도 마시는 물을 떠서 마실 수 없었고, 과자를 나눠주려고 쟁반을 만졌다는 이유로 혼쭐이 나야 했다. 불가촉천민의 의무인 ‘예스카르’를 실행하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온 다무는 ‘마을의 하인’으로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는 현실에 항거하다 몰매를 맞는다. 이 사건은 다무, 나아가 저자의 인생을 바꾸게 된다. 다무와 소누는 자식들에게 자신들보다 나은 삶을 물려주고, 인간의 존엄성을 가지고 살 수 있도록 싸울 것을 다짐한다.


저자는 어머니, 아버지의 지난 삶을 세세하게 묘사해 불가촉천민의 고단한 삶을 보여주는 동시에 당시 인도의 사회상과 생활상도 드러낸다. 특히 불가촉천민들의 운동을 이끈 위대한 지도자 암베드카르(1893~1956)의 이야기를 중간중간 삽입한다. 불가촉천민 출신으로 인도 공화국 초대 법무장관을 역임했던 암베드카르는 불가촉천민 1만명을 이끌고 저수지로 몰려가 ‘천민의 물 마실 권리’를 선포했고, 힌두사원 출입제한 금지운동을 이끌기도 했다. 말년에는 50만명의 불가촉천민들과 함께 신분제의 근원인 힌두교를 버리고 불교로 개종했다. 다무와 소무는 이 암베드카르를 만나면서 교육만이 운명을 바꿀 수 있음을 깨닫게 된다.


1950년 인도 헌법이 불가촉천민의 폐지를 선언하고 카스트에 따른 차별을 금지하는 법도 만들어졌지만 차별이 사라진 건 아니었다. 저자는 책 후반부에 “사회적으로 성공한 불가촉천민”인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여전히 존재하는 차별의 벽을 지적한다. 상층 카스트만이 독점했던 산스크리트어 시험에서 그가 우수한 성적을 내자 교사는 “불가촉천민이 공부를 잘 하는 이 나라 교육 제도가 의심스럽다”며 한탄했다.


그는 여전히 “달리트인데도 교양이 있다”거나 “자네처럼 낮은 카스트와도 심중을 터놓고 철학적인 얘기를 나눈다”는 말을 듣는다. 방식이 달라졌을 뿐 카스트는 죽을 때까지 사라지지 않고 경멸과 모욕의 빌미를 제공하는 것이다. 저자가 꿈꾸는 세상은 ‘천민임에도 성공했다’ ‘천민임에도 교양 있다’가 아니라 “나를 나 개인으로 봐주는 세상”이다.


저자는 ‘미운 오리새끼’ 동화를 거론하면서 “불평등한 카스트 제도에 갇혀 얼마나 많은 백조들이 스스로를 미운 오리새끼로 여기며 형벌 같은 삶을 살다 갔을까”라고 묻는다. 세상에 쓸모없는 사람이란 없으며 누구나 내면에 장점을 지니고 있고, 그것을 꽃피울 수 있어야 한다는 메시지다.


책이 딸 아푸르바의 짧은 글로 끝을 맺는 것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미국 존스홉킨스 대학에서 의학을 전공하는 아푸르바는 카스트의 굴레에서 벗어나 꿈을 마음껏 좇는 새로운 세대의 상징이다. 그녀는 말한다. “우리 조상들은 내가 이 세상 모든 소녀들과 똑같이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들기 위해 피땀을 흘렸다. 나는 그들이 나를 위해 밝힌 횃불을 받아 들었고, 이제 나를 막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강수정 옮김. 1만1000원        〈경향신문   김진우기자 jwkim@kyunghyang.com

 

 

'Untouchables'의 번역서 <신도 버린 사람들>을 읽고

 

이 책의 저자 나렌드라 자다브(Narendra Jadhav)는 불가촉천민 출신이다. 인도 뭄바이 대학에서 경제학 석사를 받았고, 미국의 인디에나 대학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인도의 중앙은행 수석보좌관을 역임했으며, 국제통화 금을 비롯한 국제기구에서 활동했고 푸네대학의 총장이 되었다. 

   
 

  

그의 책 <Untouchables>에 대해 알게 된 것은 불가촉천민의 이야기를 다루는 TV 프로그램을 통해서였다. 그해 겨울 인도에 가는 동료에게 책을 구해달라고 부탁했었다. 그러나 돌아온 동료의 말은 ‘Untouchables’이라는 말을 하는 것도 꺼려하는 서점들이 많았고, 델리의 몇 개 서점을 들렸으나 책을 구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결국 인도 현지에서 구할 수 없었던 책을 인터넷 서점을 통해 겨우 구입했다.


책을 구입할 때 마음은 급했으나 일에 쫒기다보니 대강만 훑어보고 덮어두게 되었다. 그런데 지난 6월 이 책의 한국판 번역본이 나왔고, 이 책에 대한 서평과 독자들의 글이 인터넷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지금은 절판되어 구하기 어렵지만 <어느 천민의 하루>라는 책과 암베드카르에 관한 글들을 통해 불가촉천민 문제에 어느 정도 접해왔던 나로서는 나렌드라 자다브의 가족들이 겪은 불가촉천민의 고통스러운 삶이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인도의 절반 가까운 가난한 하층민들과 불가촉천민의 삶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생생한 이야기를 통해 다시 한 번 ‘끔찍한 인간 차별’을 경험하는 듯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나는 지금 여기서 이 책의 내용을 소개하거나 불가촉천민 출신의 나렌드라 자다브의 성공담을 주제로 삼으려는 것은 아니다. 이 글은 한국어 번역본 <신도 버린 사람들>을 읽으면서 눈에 들어온 한 줄과 그에 대한 생각을 담은 글이다.


나렌드라 자다브가 1986년에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아 돌아 왔을 때 아버지 다무는 아들이 연구한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물었다. 글만 겨우 읽는 수준의 아버지가 이해할 수 있도록 자다브는 자신이 한 연구에 대해 최선을 다해 설명했다. 이때 아버지는 ‘그걸로 보통 사람들을 어떻게 도울 수 있느냐’고 물으면서 ‘아무리 공부를 많이 하고 연구를 많이 해도 길거리의 사람들을 돕지 못한다면 전부 낭비일 뿐이다.’ 라고 말한 것이다. 책이 거의 끝날 무렵에 등장한 이 한 줄이 내 눈을 잡았다.


갑자기 내 귀에는 ‘불교 공부를 아무리 많이 해도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한다면 그 공부는 낭비일 뿐’이라는 말이 들리는 듯했다. 보는 시각에 따라 다르겠으나 불교 공부의 열풍이 불고 있고, 불교의 가르침을 세상에 제대로 전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 많은 단체가 생겨나고 있다. 그동안 불교계가 침체되어 있었고, 경전의 가르침과 수행을 외면한 채 기복적 불교가 되어가고 있다는 자성의 소리가 높았던 것을 상기해보면 참으로 바람직한 현상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고 수행을 열심히 하면서 고통 받는 주변을 돌아볼 생각을 하지 않는다면 그 가르침과 수행은 무용지물이 되지 않겠는가. 한 줄의 경전을 공부하고 그 한 줄의 가르침을 주변에게 전하는 법보시도 중요하다. 아울러 그 한 줄을 가슴에 담아 ‘고통 받는 세상의 사람들을 고통에서 구하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그 노력이라는 것이 거창한 것은 아니다. 곁에서 목말라 죽어가는 사람을 외면한 채로 경전을 독송하고 있는 모습이 아닌지 돌아보자는 것이다.  개인이나 단체나 거창한 구호를 외치고 목표를 세우기에 앞서 이것이 ‘보통 사람들에게 어떤 도움이 되는 것인가’를 먼저 생각해보았으면 좋겠다.


불가촉천민이라고 받아주지 않는 아들을 학교에 입학시키기 위해 교장실 바닥에 드러누워 ‘우리 아이를 받아 줄 때까지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겠다.’고 떼를 쓰던 자다브의 아버지 다무였다. 그렇게 입학시킨 아들이 인도에서 석사학위를,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아 아버지 앞에 나타났을 때 얼마다 대견스럽고 자랑스러웠겠는가. ‘잘난 우리 아들’ 이라는 말을 하기 전에 ‘네가 받은 학위가 보통사람들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는 것이냐’ 고 묻는 아버지 다무의 말 속에는 세상의 고통을 편안케 하리라는 부처님의 8만4천 법문이 그대로 다 녹아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암베드카르를 존경했고, 암베드카르와 함께 불교로 개종한 아버지 다무. 그리고 암베드카르에게서 배운 가르침을 그대로 아들에게 전하며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했던 아버지 다무가 있었기에, 세상의 주목을 받는 최고의 인물로 꼽히는 나렌드라 자다브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책을 구입하고 첫 페이지를 열은 후 마지막 페이지까지 읽는데 3일이 걸렸다. 마지막 하루는 몇 페이지 남겨 놓은 시점에서 내 눈을 사로잡은 그 한 줄에 머물러 있었다. 그리고 책을 덮은 후 나는 심한 우울증을 앓았다. 자다브의 부모님들처럼 나는 내 자식들에게 삶의 나침반이 되어주고 있는가라는 반성 때문이었다. 제대로 된 불자도 못되고 제대로 된 부모 역할도 못하고 있다는 자책으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래도 오늘은 ‘주변의 작은 아픔이라도 덜어주는 노력을 하자’는 다짐으로 쓴 이 글이 수면제가 되어 줄 것 같다.

박금표의 사라스와티의 속삭임 사라스와티 unjaena@freechal.com

 

                                                                 <자료정리 : 나누며 공유하며 불자모임광장 통달무아법자>

 

 

◐신비스런 건축물◑

 

 

건축 자재와 건축기술의 발전으로

새로운 형태의 건축물이 세계각국에서 그 자태를 뽑내고 있습니다.

 

대칭과 기능적인 것이 아름답다는 통념에서 비대칭과 상상력이 돋보이는 

기이한 세계각국의 건축물을 소개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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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Mind House (Barcelona, Spain)

 

 

2. The Crooked House (Sopot, Poland)

 

 


3. Stone House (Guimares, Portugal)

 

 

 

4. Lotus Temple (Delhi, India) 

 

 

5. Cathedral of Brasilia (Brazil)

 

 


6. La Pedrera (Barcelona, Spain)

 

 

 7. Museum of Contemporary Art (Rio de Janeiro, Brazil)

 

 

8. Kansas City Library (Missouri, USA)

 

 

9. Low impact woodland house (Wales, UK)

 

 

 10. Guggenheim Museum (Bilbao, Spain)

 

 


11. Rotating Tower, Dubai, UAE

 

 


12. Habitat 67 (Montreal, Canada)

 

 

13.Casa da musica(Porto, Portugal)

 

 

14. Nautilus House (Mexico City, Mexico)

 

 

15. The National Library (Minsk, Belarus)

 

 16.National Theatre (Beijing, China)

 



 

17. Conch Shell House, Isla Mujeres, Mexico

 


 

18. House Attack (Viena, Austria)

 

 

19. Kunsthaus (Graz, Austria)

 

 


           20. Wooden Gagster House (Archangelsk, Russ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