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불교 허울쓴 물신교 신도/혜담스님

2010. 3. 8. 23:36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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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담스님, <방거사어록 강설> 통해 종단현실 비판

▲ 혜담스님. "무슨 원장 무슨 의원으로 피선되기 위하여

손상좌 같은 스님들에게 돈 봉투를 내밀겠는가?

모두가 명예욕에 눈이 멀었기 때문이다."

조계종 호법부장을 역임하고, 지금은 경기도 검단산 각화사에서 정진하며

재심호계원 소임을 맡고 있는 혜담스님이 작심한 듯 종단의 현실을 강하게 비판하고 나섰다.

혜담스님의 비판은 최근 펴낸 <방거사 어록 강설>(불광출판부)을 통해서다.

비판은 우회하지 않는다. 아주 직설적이다.

치둔(癡鈍; 어리석고 우둔함)함의 미덕이 없는 ‘무늬만의 수행 풍토’,

지위만 탐내는 명예욕이 종단을 어지럽히고 있으며,

불교의 허울을 쓰고 물신교를 맹신하고 있다는 것이 혜담스님의 진단이다.

수행풍토에 대한 혜담스님의 지적은 한탄에 가깝다.

“도(道)와 돈을 혼동하고 있지 않은지 의심스럽다.

출가수행자든 재가수행자든 재물에 대한 집착을 끊지 않고,

아니 끊으려는 생각도 하지 않고 선방에 앉아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다.”

재물 얻는 수단이 되는 선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선이 재물을 위한 간판이 되기도 하는 현실을 빗겨가지 않는다.

“일부이긴 하지만 재물을 위해서 선원(禪院)이라는 간판을 걸기도 한다.

지장선원이나 관음선원 같은 이름들이 그것을 말해준다.

이름 있는 선사(禪師)가 천도재에 열을 올리고,

해제 여비를 많이 주는 선원에는 방부 들이기가 하늘의 별따기만큼이나 어려운 실정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우리들은 부처님의 말씀을 믿지 않고,

오히려 불교의 허울을 쓴 물신교의 신도가 되고 말았다고 죽비를 내리친다.

“수행자는 행복을 물질적?향락적인 것에서 찾고 있는 세태를 향해서

‘그것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냥 질주하는 물신교라는 자동차에 브레이크 역할을 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런데도 모두가 가속 페달을 밟고 있다.”

무늬만의 수행자가 범람하기 때문이다.

혜담스님은 “요즈음 내 앞에 나타나 있는 사람은 모두가 잡된 일을 좋아하는 이들[修行者] 뿐이다.

치둔한 사람을 찾으려 해도 한 사람도 볼 수가 없다”는 약산 선사의 말을 인용한 후

무늬만 수행자가 참된 수행자인 척 인심을 호도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짐짓 자신은 하루에 한 시간도 참선을 하지 않으면서 신도들을 향해서는 참선법을 설하는가 하면,

선객이라고 자처하면서 종단의 정치나 사회문제에 골몰하고 있다.”


이어 혜담스님은 “부처님은 수행자로 살기 위하여 나라 전체를 버리셨다.

부처님 당시라고 해서 카필라국에 사회적인 문제가 어찌 없었겠는가?”라고 물음으로써

불도만을 위해 전력투구해야 한다고 권고한다.

혜담스님은 조사어록을 멀리 하며 좌선만 하는 풍토를 ‘과대망상’이라고 호되게 질책한다.

“불행스럽게도 우리 주변에는 <금강경>은 고사하고

조사어록을 보는 것조차 백안시하는 선객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마치 좌선만 하고 있으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는 터무니없는 과대망상에 빠져 있는 것이다.

조사스님들이 그렇게 열심히 조사어록을 편집했던 이유를

이 시대의 수행자들은 반드시 알아야 하지 않을까.”

간화선(看話禪)의 문제에 대해서도 지적한다.

“화두란 의심이다. 온 몸이 전체로 그 문제와 하나가 되어

나아갈 수도 물러설 수도 없는 상태가 된 의심이다.

지금 우리 불교계의 화두로 떠오르고 있는 간화선의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

억지로 의심을 불러일으키려고 하는 점이다. 즉, 의심을 위한 의심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무슨 까닭으로 돈다발 들고 다니나?

수행이 이럴진대 사찰과 종단에는 명예욕이 만연하고 있다.

혜담스님은 승려들 간의 분규의 본질은 잿밥싸움보다는 명예욕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재물욕과 권력욕을 넘어선 단계에 이르렀음을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처자권속이 없는 나이 연만한, 스스로 수행자를 자처하는

스님들이 무슨 재산을 탐내어 백주 대낮에 난투극을 벌이겠는가.

이유가 있다면 일부 권승(權僧)들의 어떤 지위에 오르고 싶다는 명예욕이고,

그것 또한 자신이 그 지위에 오르면 사찰이나 종단을 가장 모범적으로 운영할 수 있다는

자기기만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무슨 까닭에 수행자를 자처하는 스님들이 본사주지나 종회의원이 되기 위하여

유권자를 돈으로 매수하고, 무슨 이유로 교수가 되기 위하여 돈다발을 들고 다니며,

무슨 원장 무슨 의원으로 피선되기 위하여 손상좌 같은 스님들에게 돈 봉투를 내밀겠는가?

모두가 명예욕에 눈이 멀었기 때문이다.”

재가자라고 비판의 예외가 되지 않는다.

“기도하고 법문 들으면서 불법을 공부하기 위해서 절에 와서는

신도회장이나 무슨 장을 서로 하려고 파당을 만들어 분탕질을 일삼기도 한다.

역시 명예욕 때문이다. 그러면서 자신은 재가의 수행자라고 뽐낸다.

그러면 어찌 해야 하나? 이 물음에 대한 혜담스님의 오래 묵힌 대답이 <방거사 어록 강설>이다.

방거사, 성이 방(龐)이고, 이름은 온(蘊). 중국의 유마거사라고 칭송되는 인물이다.

과거 보러 가는 길에 한 행각승으로부터

“참으로 아깝습니다. 어찌하여 부처를 뽑는 곳엔 가지 않습니까?” 라는 물음에

마조 선사를 친견한 후 재가거사로서 수행자의 삶을 살았다.

8세기 중반에서 9세기 초 석두선사와 마조선사 문하에서 수행하여,

당대(唐代)의 불교를 선으로 특징짓는데 많은 영향력을 끼쳤다.

간화선의 주창자인 대혜스님이 <서장(書狀)>에서

“다만 온갖 있는 것들을 비우기를 원하고[旦願空諸所有],

결코 없는 것들을 채우지는 말라[愼勿實諸所無]”는 거사의 임종게(臨終偈)를 인용하여,

“다만 이 두 글귀만 알면 일생 참선하는 일을 마치게 될 것”이라고 극찬하기도 했다.

특히 마조선사를 친견한 후 발심하여

수만 수레에 상당하는 가재(家財)를 물 속에 가라앉혀 버리고,

성 밖에 작은 집을 장만하여 거기서 대바구니를 만들어 팔아 생계를 이었던 일화는

오늘의 우리를 부끄럽고 초라하게 만든다.

방거사가 재물을 물에 던지려 할 때 사람들이 말렸다.

“다른 사람들에게 주든지, 불사에 쓰라”는 것이었다. 그러자 방거사가 말했다.

“내가 이미 나쁜 것이라 생각하고 버리면서 어찌 다른 사람에게 주겠는가.

재물은 심신을 괴롭히는 근원이라.”

혜담스님이 <방거사 어록 강설>을 세상에 내놓은 이유는 세 가지다.

“20대 초반 범어사 강원에서 <서장>에 실린 방거사의 임종게를 대하고는

너무 황홀하여 잠을 이루지 못할 지경이었다.

그때의 감정이 40년이 가까워오는 지금까지 <방거사 어록>을 마음 한 구석에

줄곧 자리잡게 했는지도 모를 일”인 것도 분명 하나의 이유다.

은사인 광덕스님이 방거사의 ‘일체의 존재와 상관하지 않는 자’라는 법문에서

불법에 대한 눈이 열렸다는 것도 이 책을 펴내게 된 인연을 더욱 크게 만들었다.

둘째와 셋째는, “방거사를 우리 시대에 조명하여,

거사를 통하여 선종 본래의 모습인 당대의 선풍이 오늘날에 재생되는 데

보탬이 되기를 바라기 때문이며, 아울러 작금 교계에서 일고 있는 간화선을 둘러싼

소모적인 논쟁에 앞서 참선 본래의 참구법으로

회귀하는 계기를 마련해 보고자 하기 때문이다.”

정성운 기자 woon1654@korea.com


    가정에 관한 격언 부부가 진정으로 사랑할때는
    칼날처럼 좁은 침대에서도 함께 잘 수 있다. 그러나 사이가 좋지 않을 때는
    폭이16미터나 되는 넓은 침대일지라도 비좁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좋은 아내를 맞이한 남자이다. 아내를 이유 없이 괴롭히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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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통스러운 것은 없고 모든 악 중에서 악처만큼 나쁜 것은 없다. 세상에서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은 젊었을 때
    결혼해서 함께 살아온 늙은 아내이다. 자식은 어릴 때는 엄하게
    꾸짖고 자란 뒤에는 꾸짖지 말라. 어린아이는 엄하게 가르쳐야 하지만
    두려워하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 자식을 꾸짖을 때는 따끔하게 꾸짖되
    꾸짖음을 계속 반복해서는 안 된다. 아이들은 부모의 말씨를 흉내 낸다.
    아이의 말씨만으로 그 부모의 성품을 알 수 있다. 자식과 약속한 것은 반드시 지켜라.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아이에게 거짓말을 가르치는 것과 같다. 가정에서 부도독한 행동은
    과일에 벌레가 들어간 것처럼 모르는 사이에 퍼져 나간다. 아버지가 다른 사람과 논쟁할 때
    상대방 편을 들어 주어서는 안 된다. 자녀가 아버지를 공경하고 순종하는 것은
    아버지가 자녀들을 위해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장만해 주기 때문이다. -탈무드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