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근(喜根)과 승의(勝意)라는 두 보살비구가 살았습니다. 희근보살은 세속에 머물면서도 그 행동거지가 단정하였고, 옳다 그르다 맞다 틀리다고 분별하여 ‘내가 옳고 네가 틀렸다’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희근보살은 제자들에게도 욕심을 적게 할 것과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을 찬탄하지도 않았고, 계를 지켜야만 한다거나 철두철미한 수행에 임해야 한다고 강조하지도 않았고, 그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면 청정하다”라는 것만 가르쳤습니다.
심지어 “탐욕이나 성냄, 어리석음의 모습이 나타난 것이 모든 존재(법)요, 이런 모든 법의 모습이 바로 모든 법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며, 이것은 걸림이 없다”라고 가르쳤습니다.
이 같은 가르침을 받은 제자는 모두 총명하고 깊은 지혜를 닦기를 좋아했으며 일상지(一相智 : 모든 것의 본질을 깨닫는 지혜)에 들었습니다. 그의 제자들은 세속에 머물러 사는 재가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세속에서 여느 사람들과 다름없이 지내더라도 사람들과의 사이에서 분노하거나 후회하는 일이 없었습니다. 진실한 이치를 얻은 까닭에 마음이 태산처럼 굳건했습니다.
분별심이 없었던 희근보살
분노 후회 없이 마음 굳건
반면 승의법사는 그와 정반대였습니다. 그는 청정하게 계를 지켰고, 열두 가지 두타행을 실천했으며, 참선의 깊은 경지에 도달했습니다.
승의의 제자들 역시 이런 스승에게서 가르침을 받았지만 어쩐지 마음이 굼떴고, 뭔가 생각하거나 행동할 때에 ‘이건 계에 어긋나는 일이다’, ‘이건 계를 지키는 일이다’, ‘이건 옳은 일이다’, ‘이건 그른 일이다’, ‘이건 해야 한다’, ‘이건 하면 안 된다’라고 따지느라 늘 마음이 어지러웠습니다.
어느 때인가 승의가 마을에 들어갔다가 희근의 제자가 사는 집에 갔습니다. 승의법사비구는 희근의 제자가 준비한 자리에 앉아서 이렇게 훈계했습니다. “모름지기 계를 지켜야 합니다. 욕심을 적게 하고, 만족할 줄 알아야 합니다. 철저하게 수행해야 하고, 조용한 곳에 머물러야 하며, 참선의 고요한 경지가 최고인 줄 알아야 합니다.”
그는 나아가 그의 스승인 희근을 비방했습니다. “그런데 그대의 스승 희근법사를 보자 하니, 하는 말이 죄다 법답지 않더군요.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걸림 없다니 이런 삿된 생각이 또 어디 있겠소! 마음에서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끊어 청정한 경지에 머물도록 사람들을 인도해야하거늘 오히려 엉뚱한 말을 늘어놓고 있으니 희근은 순수하지 않고 청정하지 않은 사람이오.”
그러자 그 제자가 승의에게 물었습니다. “탐욕이란 것이 어떤 모습입니까?” 승의가 대답했습니다. “탐욕은 번뇌의 모습이오.” “그렇다면 탐욕이라는 번뇌는 안에 있습니까, 밖에 있습니까?”
“안에 있지도, 밖에 있지도 않소. 만약 안에 있다면 바깥의 인연을 기다릴 필요도 없고, 밖에 있다면 나와는 관계가 없으니 내가 탐욕 때문에 괴로울 일도 없기 때문이오.”
그러자 희근의 제자인 거사가 말했습니다. “스님의 말씀처럼, 탐욕이 안에도 있지 않고 밖에도 있지 않고, 사방 그 어디에서부터 오는 것도 아니라면, 탐욕이라는 법의 실제모습은 아무리 찾고 구해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생겨난 적도 없고 멸한 적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텅 빈 것이라는 말인데, 어찌 번뇌라고 하겠습니까?”
승의는 말문이 막혀버렸습니다. 말문이 막히자 승의는 부끄러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자신의 모습에 화가 나기도 하고, 자신을 보기 좋게 한방 먹인 희근의 제자에게 슬슬 화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모름지기 올바른 수행자라면 세속의 때 묻은 삶을 버리고 청정한 출가수행의 길에 들어서서 두타행에 매진해야 하거늘, 그걸 지적하려는 자신에게 오히려 무례하게 창피를 주었으니 승의가 불쾌해질 만도 합니다.
[불교신문 2866호/ 11월2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