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근보살과 숭의비구

2014. 5. 14. 08:10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제불조사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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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 그대로 청정하다”
두 보살 이야기(1)
이미령 | 동국역경원 역경위원ㆍ책 칼럼니스트  

   
 
아주 오랜 옛날, ‘사자의 음성’이라는 명호를 지닌 부처님이 세상의 교화를 마치고 반열반에 드신 뒤의 일입니다(대지도론 제6권).

희근(喜根)과 승의(勝意)라는 두 보살비구가 살았습니다. 희근보살은 세속에 머물면서도 그 행동거지가 단정하였고, 옳다 그르다 맞다 틀리다고 분별하여 ‘내가 옳고 네가 틀렸다’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희근보살은 제자들에게도 욕심을 적게 할 것과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을 찬탄하지도 않았고, 계를 지켜야만 한다거나 철두철미한 수행에 임해야 한다고 강조하지도 않았고, 그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면 청정하다”라는 것만 가르쳤습니다.

심지어 “탐욕이나 성냄, 어리석음의 모습이 나타난 것이 모든 존재(법)요, 이런 모든 법의 모습이 바로 모든 법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며, 이것은 걸림이 없다”라고 가르쳤습니다.

이 같은 가르침을 받은 제자는 모두 총명하고 깊은 지혜를 닦기를 좋아했으며 일상지(一相智 : 모든 것의 본질을 깨닫는 지혜)에 들었습니다. 그의 제자들은 세속에 머물러 사는 재가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세속에서 여느 사람들과 다름없이 지내더라도 사람들과의 사이에서 분노하거나 후회하는 일이 없었습니다. 진실한 이치를 얻은 까닭에 마음이 태산처럼 굳건했습니다.

 

분별심이 없었던 희근보살

분노 후회 없이 마음 굳건

 

반면 승의법사는 그와 정반대였습니다. 그는 청정하게 계를 지켰고, 열두 가지 두타행을 실천했으며, 참선의 깊은 경지에 도달했습니다.

승의의 제자들 역시 이런 스승에게서 가르침을 받았지만 어쩐지 마음이 굼떴고, 뭔가 생각하거나 행동할 때에 ‘이건 계에 어긋나는 일이다’, ‘이건 계를 지키는 일이다’, ‘이건 옳은 일이다’, ‘이건 그른 일이다’, ‘이건 해야 한다’, ‘이건 하면 안 된다’라고 따지느라 늘 마음이 어지러웠습니다.

어느 때인가 승의가 마을에 들어갔다가 희근의 제자가 사는 집에 갔습니다. 승의법사비구는 희근의 제자가 준비한 자리에 앉아서 이렇게 훈계했습니다. “모름지기 계를 지켜야 합니다. 욕심을 적게 하고, 만족할 줄 알아야 합니다. 철저하게 수행해야 하고, 조용한 곳에 머물러야 하며, 참선의 고요한 경지가 최고인 줄 알아야 합니다.”

그는 나아가 그의 스승인 희근을 비방했습니다. “그런데 그대의 스승 희근법사를 보자 하니, 하는 말이 죄다 법답지 않더군요.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걸림 없다니 이런 삿된 생각이 또 어디 있겠소! 마음에서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끊어 청정한 경지에 머물도록 사람들을 인도해야하거늘 오히려 엉뚱한 말을 늘어놓고 있으니 희근은 순수하지 않고 청정하지 않은 사람이오.”

그러자 그 제자가 승의에게 물었습니다. “탐욕이란 것이 어떤 모습입니까?” 승의가 대답했습니다. “탐욕은 번뇌의 모습이오.” “그렇다면 탐욕이라는 번뇌는 안에 있습니까, 밖에 있습니까?”

“안에 있지도, 밖에 있지도 않소. 만약 안에 있다면 바깥의 인연을 기다릴 필요도 없고, 밖에 있다면 나와는 관계가 없으니 내가 탐욕 때문에 괴로울 일도 없기 때문이오.”

그러자 희근의 제자인 거사가 말했습니다. “스님의 말씀처럼, 탐욕이 안에도 있지 않고 밖에도 있지 않고, 사방 그 어디에서부터 오는 것도 아니라면, 탐욕이라는 법의 실제모습은 아무리 찾고 구해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생겨난 적도 없고 멸한 적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텅 빈 것이라는 말인데, 어찌 번뇌라고 하겠습니까?”

승의는 말문이 막혀버렸습니다. 말문이 막히자 승의는 부끄러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자신의 모습에 화가 나기도 하고, 자신을 보기 좋게 한방 먹인 희근의 제자에게 슬슬 화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모름지기 올바른 수행자라면 세속의 때 묻은 삶을 버리고 청정한 출가수행의 길에 들어서서 두타행에 매진해야 하거늘, 그걸 지적하려는 자신에게 오히려 무례하게 창피를 주었으니 승의가 불쾌해질 만도 합니다.

[불교신문 2866호/ 11월2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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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성다라니 얻은 ‘희근보살’

두 보살 이야기(2)
이미령 | 동국역경원 역경위원ㆍ책 칼럼니스트  

   
 
그토록 수준이 낮다고 여긴 희근의 재가제자에게 한 마디 대꾸도 하지 못해 말문이 막혀 버린 승의법사가 불쾌해진 건 당연합니다. 그는 음성다라니(音聲陀羅尼, ghos.apraves´adh쮄ran.?)를 얻지 못한 사람입니다.

음성다라니를 얻었다는 것은 그 어떤 음성이나 말을 들어도 의미를 꿰뚫을 뿐, 그 음성이나 말이 찰나마다 나고 없어지는 것임을 깨달아서 마음에 담아두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지혜를 얻지 못하면 그 말에 집착해서 분노하거나 들뜨게 되며, 이런 지혜를 얻으면 헤아릴 수 없이 오랜 세월을 누군가 내게 비방을 퍼부어도 성내지 않고, 찬탄을 퍼부어도 들뜨지 않게 됩니다.

말이란 메아리와 같아서 빈 것임을 깨닫는다는 것이 ‘음성다라니에 들어간다’는 것이며, 이 내용은 대지도론 제28권에 등장합니다.

승의법사는 바로 이런 음성다라니를 얻지 못한 까닭에 부처님 말씀을 들으면 기쁨에 들뜨고, 외도의 말을 들으면 마음에 분노를 품고, 착한 법을 들으면 기뻐하고, 착하지 못한 법을 들으면 싫어하며 그 분별에 마음이 휩싸였던 것입니다.

 

찰나마다 나고 없는 언어

마음에 담지 않는 게 지혜

 

그는 자기 거처로 돌아와 비구들을 불러 놓고 이렇게 성토를 했습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저 희근 보살은 많은 사람을 속여 그릇되고 사악한 생각에 물들게 하였습니다.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끊어버리도록 사람들을 인도하지 않고, 그런 번뇌나 그 밖의 모든 법이 다 걸림 없는 모습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오. 이런 말을 들으니 내 어찌 화가 나지 않을 수 있겠소!”

하지만 승의법사가 자신을 성토할 때 희근법사는 생각했습니다.

‘지금 저 사람은 분노의 불길에 휩싸였구나. 분노에 눈과 마음이 가려 나쁜 업을 짓게 되면 그 괴로운 과보를 어찌 감당할 수 있으랴. 그러니 그에게 한 걸음 더 나아간 이치를 들려줘야겠다. 설령 지금 당장은 귀담아 듣지 않더라도 뒷날 부처님과 만날 인연을 맺게 되겠지.’

그래서 희근은 수행자들을 모아 놓고 진심으로 이렇게 게송을 노래했습니다.

 

탐욕은 곧 수행의 길이요

성냄과 어리석음도 그러하니

이 세 가지에 한량없는 부처님의 길이 있다.

어떤 사람이 탐진치와 수행의 길을 나누어 생각한다면,

이 사람은 하늘과 땅만큼이나 부처님과 멀어지리라.

수행의 길과 탐진치는 한 가지 법이어서 평등하거늘

이 말을 듣고 겁내지도 물러서지도 말아라.

탐욕의 법은 생겨난 적도 사라진 적도 없어서

마음을 괴롭히지도 못하거늘

‘내’가 탐욕에 끌렸다, 끊겠다고 헤아려 집착하면

그 사람은 탐욕에 이끌려 지옥에 들리라.

있다, 없다, 두 법이 다르다 주장함은

있다, 없다를 여의지 못한 것이니

있음과 없음이 평등한 줄 알면

그는 훌륭하게 세속을 벗어나 불도를 이루리라.

 

희근법사가 이 시를 노래할 때 수많은 사람들의 눈이 뜨였습니다. 다만, 그를 비방한 승의보살은 그 후로도 편견에 빠져 어리석은 행동을 거듭하여 오히려 남의 비방을 사게 되었다고 합니다. <대지도론 제6권>

“그러면 잘못된 것을 보고 화도 내지 말란 말이요?”라고 되물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불의를 보고 불같이 화를 내는 것보다 그것이 왜 잘못되었는지를 제대로 정확히 아는 일이겠지요.

[불교신문 2868호/ 11월2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