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자가 놓치기 쉬운 점/법상스님

2015. 6. 14. 18:31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발심수행장·수행법

728x90

 

 

수행자가 놓치기 쉬운 점/법상스님

 

 

수행하는 사람
정진하는 사람이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이고,
또 가장 잘 빠지기 쉬운 마(魔)이기도 하고,
또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알고 그리 살고 있는
꼭 짚어두고 싶은 주의점이 하나 있습니다.

아마도 초심자들이,
처음 막 신심내어 마음공부 하려는 사람들이
잘 하고 있는 점이면서,

조금 공부한 사람들
공부했다는 상이 많은 사람들,
또 수행이라는 겉치레에 잔뜩 빠져 든 사람들이
항상 여기에 걸리고 빠지게 되는 점이기도 합니다.

모르긴 해도
처음에 초심자 때는 잘 실천하다가
조금 공부했다 싶으면서 다시금 놓치게 되고,
또다시 공부가 참으로 여물게 되면서
조금씩 다시금 되짚게 되는 점이기도 하겠네요.

무슨 얘기를 이렇게 궁금하게 하느냐고요?
예...
‘나’는 아니겠지 하고 덮어두지 마시고
나의 행이 그렇지 않는가 한번쯤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처음 공부하는 사람들은
참 순수하고 맑은 신심이 있습니다.

작은 가르침에도 깊이 감동하고,
부처님과 가르침에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깊은 감사를 느끼고,
부처님 전에 공양 하나 올리기 위해 온갖 정성을 다하고,
절에 가서 법문 듣기 위해, 또 수행에 동참하기 위해
온갖 정성스런 마음을 다하곤 합니다.

집에서도 몇 일씩 날짜를 정해두고 정진도 하고,
새벽예불이며 기도를 하고,
일상 생활 속에서도 염불이며 독경을 꾸준히 하고,
책도 사서 보고, 법문도 찾아다니며 듣고,
그야말로 공부에 대한 마음이
진지하고 정성스러우며 순수한 열정을 가지게 됩니다.

그런데 공부를 조금씩 하다 보면
나태한 마음도 생기게 되고,
뭐 이런 것 까지 해야 하나 싶기도 하고,
염불하고 절 해서 뭐하나 하는 마음도 들고,
법문을 들어도 그 법문을 내 잣대로 분별하고,
부처님과 가르침에 대한 감사하는 마음이며
정성스레 공양하고픈 마음도 사그라 들고,

내 안에 부처님 있는데
꼭 절에 찾아가서 부처님께 공양 올릴 필요 있나 싶기도 하고,
기도하는 마음도
정성스러움이 사라져 타성에 젖은 습관이 되기도 하고,
염불, 절, 독경 같은 것은 다 방편이고 필요 없는 거라고 하면서
염불하고 절하는 신도들에게는
‘나도 옛날에는 저랬지’ 하면서
한 수준 아래라고 깔보는 마음도 생기고,

혹은 참선 조금 배워 가지고
오래 앉아 있음을 자랑삼아 이야기 하면서
염불하고 절하는 사람들을 무시하기도 하고,

다른 수행 안 하는 사람들 앞에서
‘나는 수행하는 사람이니 너희들과는 다르다’ 하며
상대를 얕보고 깔보면서 ‘나 잘난’ 마음을 키워가고,

근본법에 대해 자꾸 많이 듣다 보니
방편법을 무시하게 되면서,
일배가 삼천배인데 뭐하러 절하냐고 하지를 않나,
가족에게 공양하면 되지 절에 부처님께 뭐하러 공양하냐고도 하고,
3000배 절하는 것 보다 한 시간 앉아 있는게 낫다고도 하고,
늘 관하고 살면 되지 무슨 기도가 필요하냐고 하질 않나,

선악이 따로 없다면서 악행과 막행을 서슴지 않고,
걸림없이 살아야 한다면서 제 멋대로 남들 피해를 주고,
절에 가서 스님들 누가 더 잘났는지
누가 더 수행을 많이 했는지 요목조목 따져가며 분별하고,
오히려 스님들 앞에서는 자기 수행 잘하는 것 자랑하려 하고,

참...
말 하려면 그 폐해가 한도 끝도 없지요.

그렇듯 수행한다는 아상만 자꾸 커지고,
정성스런 마음, 진지한 마음, 맑은 신심이 자꾸 나약해지고,
방편은 저버리고 알음알이로 배운 근본법만 나열하면서
공부 많이 한 사람 행세를 하고,
또 대접 받으려고 한단 말입니다.

이렇게 까지 극단적이지는 않더라도
누구나 이런 마음들이 자리하고 있을 것입니다.

근본법 운운하려면
어디까지나 근본자리에 계합이 되어
제 성품자리 확연히 깨친 뒤에나 가능한 얘기입니다.
그냥 그렇다고 알음알이로 배우고 나서
제가 깨친 줄 알고,
또 그렇게 해야 더 도가 높은 줄 알고
이리 뛰고 저리 뛰고 그래서는 안 될 일입니다.

말로써 큰 도인이고, 대단한 수행자고
말로써 그러는 사람은
그냥 말 잘하는 사람이고 똑똑한 사람은 될 지언정
수행하는 사람하고는 거리가 멀지 않겠어요?

우리가 수행하면서,
마음 공부 열심히 하면서,
어디까지나 초발심 때의 그 겸손과 하심
그리고 순수한 믿음과 정성스런 공양 기도의 마음을
놓치만 안 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초발심시변정각이란 마음이 나온거 아니겠어요?

작은 예로 조금 공부 한 사람들은
절에 올 때도 부처님께 공양도 않하고, 공경하는 마음도 없어집니다.
그래 놓고, 이웃에게 살아있는 부처들에게 공양하는게 더 낫지
가만 앉아있는 부처님께 공양할 필요 있겠냐고
알음알이로 배운 지식 가지고 꾀나 그럴싸 하게 말합니다.
물론 맞는 말이고 좋은 말이지만
정말이지 그런 말을 할 만큼의 실천력과 수행력
또 깨달음을 가지고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는 말입니다.

옛날에는 꽃이며, 떡, 쌀,
그도 아니면 무엇이 되었든 양이나 질이 중요한 게 아니라
자신의 마음을 담아 얼마나 정성스레 공양올렸어요?
중요한 것은 무엇을 올리고 말고가 아니고
그런 정성스런 마음이 법계를 감동시키고,
그런 정성스런 공양이 복의 근원이 되었으며,
수행 할 수 있는 힘으로 다가왔다는 말입니다.

요즘도 어리석은 사람들이나 그러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큰스님들께서는
부처님과 가르침을 얼마나 정성스레 모시고 공양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는지 모릅니다.

요즘 보면 ‘감사’하는 마음이 많이 없어졌어요.
기도의 본질이 ‘감사’입니다.
이 우주 법계에 감사하고, 부처님께 감사하고,
하늘과 땅과 풀이며 대지에 감사하고,
우리 모든 이웃들에게 감사하고,
부처님 가르침에 감사하는 마음
그 마음이 기도의 본질이고
바로 그러한 감사의 마음, 정성스런 마음이
모든 수행의 깊은 뿌리가 되고
불성을 일깨우는 순수한 깨우침이 되는 것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에서
공양 올리려는 마음도 나오고,
온갖 정성을 쏟으려는 마음도 나오고,
이 감사한 은혜를 갚겠다는 회향과 보시의 마음도 나오며,
이 세상을 밝고 긍정적으로 보고 부처님으로 보는 따뜻한 마음도 나오고,
나아가 수행에 대한, 깨달음에 대한 큰 정진심이 일어나는 법입니다.

지난 번 상원사에 갔을 때 들은 얘기가
상원사 선원의 큰스님께서는 늘상 앉아 참선하시면서도
하루도 빼놓지 않고 아침에 차를 다려
그 노구를 이끄시고서 적멸보궁까지 직접 오르셔서는
부처님 전에 차공양을 올리고 절을 하시고는 내려와서
참선에 든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또 저의 은사스님께서도
참선 그렇게 열심히 하시면서도
외출하실 때나 들어오실 때면 항상 108배를 하셨고,
때때로 손수 겨울에 새벽 도량석도 도시고,
그렇게 부처님을 향한 마음이 정성스러우셨습니다.
화계사 숭산스님께서도
매일 새벽이면 절 수행을 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종교의 본질은,
아니 모든 존재의 근원적인 본질은,
온 우주 법계에 대한, 불성에 대한
‘감사’와 ‘정성’ 또 순수한 믿음에서 옵니다.

얼마 전 찾아온 보살님께서 반가운 말씀을 하시데요.
수행 수행 너무 강조하다 보니까
어느 순간 당신께서 너무 수행한다는 상에 빠져 있다고 하시면서,
정말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었다고 말입니다.

부처님에 대한, 또 가르침에 대한 공양과 공경의 마음,
정성스런 기도의 마음, 순수한 믿음이
오히려 불교공부를 해 나가면서 자꾸 퇴색되어가고,
수행한다는 상만 자꾸 늘어난다고 하시면서
참회를 하시고자 하셨습니다.

중요한 것을 놓치면 안됩니다.
수행도 좋고 참선도 좋고 정진도 좋고
열심히 마음공부하는 것 다 좋지만
본질을 놓쳐서는 안됩니다.

자꾸 알음알이 가지고
근본법을 운운하면서
지극히 순수한 기도의 마음, 공양의 마음,
감사의 마음, 정성스런 마음, 공경의 마음을 놓쳐서는 안되겠습니다.

오늘 하는 기도와 내일 하는 기도가,
작년 했던 기도와 지금 하는 기도가,
아무리 시간이 흐른다 하더라도
처음처럼 똑같이 진실되고 형식적이지 않으며
정성스럽고 진지한 믿음으로 행해져야 할 것입니다.

『대품반야경』에 보면,

부처님은 이 법에 의지하여 행하고,
이 법을 공양, 공경, 존중, 찬탄하신다.
무엇을 이 법이라고 하는가?
소위, 반야바라밀이다.

모든 부처님은
반야바라밀에 의지하여 머물고,
이 반야바라밀을 공양, 공경, 존중, 찬탄하신다.

라는 말이 나옵니다.
부처님께서도 반야바라밀이라는
법에 의지하여 머물고,
그 법을 공양 공경 존중 찬탄하신다고 합니다.

부처님은
더이상 공양 공경 존중 찬탄이
필요 없는 분이 아니겠어요.
그저 진리의 당체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도 불구하고
진리의 근원이신 부처님께서도
법에 의지하여
그 법을 공양하고 공경하며
존중하고 찬탄하신다고 하십니다.

하물며
우리 같은 미진한 중생들이
부처님과 가르침을
찬탄하고 공양하며 공경하고 존중하는 일을
소홀히 해서야 되겠습니까.

수행 많이 했다고 거만해지고
형식적인 기도가 되고,
말만 앞세우고,
아상만 잔뜩 치켜 세우고,
근본법으로 자기 합리화를 꾀하는
그런 ‘수행자라는 상’을 빨리 깨버려야 할 것 같습니다.

이런 틀을 자기 스스로 돌이켜 비춰 볼 줄 알고,
스스로 깨고 나올 줄 알고,
다시금 새롭게 원을 세우고,
매 순간 순간 새롭게 떨치고 일어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매 순간 새롭게 떨치고 일어나는 일이
바로 출가의 진정한 의미일 것입니다.

비본질적인 것으로부터 뛰어 나오는 것,
형식적인 틀 속에서 뛰쳐나오는 것,
‘나’라는 틀을 깨고 나오는 것,
욕심과 집착에서부터 벗어나는 것,
참으로 ‘나 자신’이 되는 것,
이것이 참된 출가이지
승복을 입는다고, 머리를 깎는다고,
절에를 다닌다고, 경전을 본다고 수행자라 할 수만은 없는 노릇입니다.

저 또한 법우님들 앞에
참회하는 마음으로 이 글을 씁니다.

늘 자신의 지금 위치를 비추어 보고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내 삶의 무게가 얼마만큼인지,
자신의 삶의 빛이 얼마나 환히 빛나고 있는지,
스스로 환히 비춰 보며 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영원히 사랑한다는 것은 영원히 사랑한다는 것은 조용히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영원히 사랑한다는 것은 자연의 하나처럼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서둘러 고독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고 기다림으로 채워간다는 것입니다 비어 있어야 비로소 가득해지는 사랑 영원히 사랑한다는 것은 평온한 마음으로 아침을 맞는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것은 몸 한쪽이 허물어지는 것과 같아 골짝을 빠지는 산울음소리로 평생을 떠돌고도 싶습니다 그러나 사랑을 흙에 묻고 돌아보는 이 땅 위에 그림자 하나 남지 않고 말았을 때 바람 한 줄기로 깨닫는 것이 있습니다 이 세상 사는 동안 모두 크고 작은 사랑의 아픔으로 절망하고 뉘우치고 원망하고 돌아서지만 사랑은 다시 믿음 다시 참음 다시 기다림 다시 비워두는 마음으로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찢긴 가슴은 사랑이 아니고는 아물지 않지만 사랑으로 잃은 것들은 사랑이 아니고는 찾아지지 않지만 사랑으로 떠나간 것들은 사랑이 아니고는 다시 돌아오지 않지만 비우지 않고 어떻게 우리가 큰 사랑의 그 속에 들 수 있습니까 한 개의 희고 깨끗한 그릇으로 비어 있지 않고야 어떻게 거듭거듭 가득 채울 수 있습니까 영원히 사랑한다는 것은 평온한 마음으로 다시 기다린다는 것입니다 도종환 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