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자라는 마음도 놓아라|마음공부 생활수행

2017. 3. 11. 19:58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발심수행장·수행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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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자라는 마음도 놓아라




불교를 공부하는, 수행하는 많은 이들은
하루 하루 조금씩 더 행복해 지고 있다.
나날이 향상되고 있으며
마음의 평화를 이루고 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여기에서부터 다시 시작할 것이 아니라
맨 처음으로 되돌아 가야 한다.

지금까지 쌓아 올렸던 모든 배움과 수행 그리고 공부
그 모든 것들을 다 무너뜨려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더 나아갈 수 없다.
스스로 나아가고 있다고 생각할 지 모르겠지만
그것은 퇴보다.

지식을 쌓아두었다고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이 세상은 온갖 지식인들 때문에
잔뜩 망가져 가고 있다.
지식이 없었다면 오늘날과 같은
이와같은 큰 파괴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지식이 있으니
파괴의 규모도 엄청나게 거대하게 진행된다.
저 이라크에서 전쟁이 일어나는 것도
일반인들이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똑똑한
몇몇 지식인들에게서 나왔다.

이 세상이 개발과 발전이라는 이름으로
점차 파괴되어 가고
자연이 붕괴되어 가는 것도 그렇고,
의학이라는 이름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오히려 병들어 가는 것도 그렇고,
경제라는 이름으로, 부유함이란 이름으로
수많은 산과 들이, 수많은 생명들이 죽어가는 것도 그렇다.
모두가 어리석은 지식에서 나온 것이다.

지식이란 어리석음이다.
지식을 채움으로써 완전해 질 수는 없다.
참된 지혜란 지식을 놓았을 때 온다.

그러니 공부하는 자는
지식만을 늘릴 생각일랑 쓰레기 통에 집어 넣는 것이 낫다.

잘못된 공부를 하고
잘못된 수행을 하는 자들은
오히려 참된 지혜를 욕되게 하고 있다.

불교공부를 하거나,
수행을 하거나,
마음을 닦아가는 사람들일수록
정말이지 큰 아상에 빠져들곤 한다.

수행을 많이 하면 할수록
‘수행을 잘 하고 있다’ ‘나는 수행 잘 하는 사람이다.’
라는 등의 ‘나 잘난’ 상이 생겨나게 마련이다.

수행하는 사람들은
수행의 과정에서 잘 지켜볼 수 있어야 한다.
마음공부를 해 나갈수록,
불교 공부를 해 나가고 실천해 나갈수록,
얼마나 내 안에서
‘나는 공부 많이 한 사람이다.’라는 상이 생겨나고 있는가를...

이건 수행자들에게 있어 상당히 중요한 문제다.
수행이란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이 점을 잘 지켜보는 것이다.
잘 지켜보아 거기에 빠지고 집착하지 않는 것이 수행이다.

왜냐하면 무언가를 하면 할수록 ‘한다’는 상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그 ‘하는’ ‘과정’과 ‘생겨나는’ ‘상’을 잘 살피라.
그것이 아상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어떻게 소멸되는가에 대한,
즉 ‘나’라는 것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소멸되는가에 대한
귀한 수행의 재료를 전해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행을 잘못하는 사람은
수행을 많이 하면 할수록 스스로 수행했다는 상이 커진다.
겸손하고 하심하지 못하고
스스로 거만해지며, 남들을 얕보는 마음이 생겨난다.

물론 그러지 않을 수가 없다.
이 공부가 너무나 엄청난 공부이고
참된 진실의 지혜를 알게 해 주는 공부다 보니
이 공부를 하다 보면
저 스스로 교만해 지지 않을 수가 없다.

‘나는 수행을 하는 사람인데’
‘나는 마음을 닦는 사람인데’
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상대를 얕잡아 보게 된다.

수행을 더 열심히 하는 사람일수록,
공부를 더 많이 한 사람일수록
그렇게 되기 쉽다.

어떻게 그렇게 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 엄청난 공부를 하면서
어찌 그런 마음을 갖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건 어쩌면 당연하다.
그만큼 이 공부는 큰 지혜의 공부이기 때문이다.

그런 마음을 갖지 않아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면 잘못이고 틀렸다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어쩔 수 없이 그런 마음이 일어난다.
그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며 당연한 일이다.
그러니 그런 마음 일어남에 스스로를 자책할 필요는 없다.

다만 잘 지켜볼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을 놓쳐버리면
정말이지 그 달콤함에서 영영 헤어나오기 어려울 지 모른다.

사람들의 속성은
대접해 주면 줄수록 스스로가 정말 대단한 줄 착각한다.
지혜롭다고 수행 잘 한다고 말해줄수록
제 스스로 지혜로운 수행자로 착각하길 좋아한다.
스님들도 스님 스님 하며 떠받들어 주면
스스로 잘난 줄 알고 신도님들께 하대하려고 한다.

가만히 생각해 보라.
얼핏 잠깐 생각해 보라는 말이 아니다.
내 안 깊숙이까지 들어가 깊이 깊이 반추해 보라.

나는 얼마나 나 잘난 맛에 살고 있는가.
내가 불교 공부를 좀 했다는 생각,
나는 수행 잘 하고 있다는 생각,
나는 지혜로운 수행자라는 생각,
나는 우월하다는 생각,
상대적으로 너는 잘못됐다는 생각,
내가 옳다는 생각들...
내 안에는 너무도 많은 양의 그런 상들이 가득하다.

그런데 수행을 잘 하면 할수록 이런 마음이 드는 건 왜 그럴까.
수행을 많이 하면 할수록
스스로 수행 많이 했다는 우월감이 오는 것은 왜 그럴까.

그게 바로 수행의 과정에서 오는
가장 중요한 수행의 재료이기 때문이다.
그런 마음들이야말로
가장 고마운 수행의 재료들이다.
그것이야말로 우리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수행이다.

‘난 수행자다’하는 그 아상,
그 ‘나 잘난 마음’
그 마음을 잘 닦아낼 수 있어야
비로소 수행자의 대열에 들 수 있다.

이건 아주 중요한 문제다.
많은 수행자들이 한번쯤은 생각해 봄직도 하지만
깊이있게 비추어 보고 관해보지는 않는 부분이기도 하다.

물론 이건 수행자만에 해당되는 문제는 아니다.
모든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어떤 것과 동일시 해 놓고 그것이 자신인 줄 착각한다.
그래서 그렇게 동일시 된 자기 자신보다 못한 사람들에게는
하대하며 우월감에 젖어있고,
그 보다 잘난 사람들에게는
열등을 느끼며 온갖 부러움을 보낸다.

이 세상에 그 어떤 것도
나 자신과 동일시 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어떤 것이 ‘나’일 수 있겠는가.
딱 잘라 ‘이것이 나다’라고 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런데 무엇을 가지고
스스로 열등과 우월의식을 가질 것인가.
그것이야말로 우리들이 가장 깊게 사유해 보고
초월해야 할 어리석은 분별심이다.

돈 좀 있고,
계급 좀 높고,
명예도 좀 높고,
학벌이나 회사나 이름 좀 드날린다고 치자.

그것이 나인가?
절대 그것이 나는 아니다.
그냥 그것은 일종의 잠시 걸치는 겉옷일 뿐이다.
사람들은 거기에 속을 것이다.
아니 나를 포함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그런 겉모습에 속고 사는 것이 우리 사는 삶의 모습이다.
알면서도 속고 모르면서도 속는다.

그러나... 속지 말라.
왜 속고 살아야 하는가.
지혜로운 이라면 그것을 타파할 수 있어야 한다.
세상에서 씌워놓은 온갖 상들에서
홀가분하게 벗어날 수 있어야 한다.

하물며 나 자신 스스로 얽매일것인가.

‘나는 수행자다’
‘나는 회사 사장이다.’
‘나는 스님이다.’
‘나는 학교 선생님이다.’
‘나는 돈 많이 버는 사람이다.’
‘나는 능력있고 외모도 출중한 사람이다.’
‘나는 의사고 변호사고 회장이다.’

그것은 내가 아니다.
속지 말라.
‘그것’을 자기 자신과 동일시 하지 말라.

세상에서는 그것을 중요시 여길 것이다.
그렇다고 따라가지 말라.
그것은 달콤하다.

좋은 차를 타고,
좋은 집에 살면서,
돈을 펑펑 쓰고 살면
남들이 모두 나를 대접해 준다.
남들이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다르다.
나를 공경하고 아부하며 믿고 따른다.

그것은 너무나도 달콤하다.
그것을 버리기 싫다.
놓치기 싫다.

그런 달콤한 유혹을 버릴 수 없다.
더 많이 벌고 싶고,
더 많이 주목받고 싶고,
더 높은 자리에 오르고 싶으며,
내 이름을 더 많이 빛내고 싶다.

그러나
그것을 버릴 수 있어야 한다.
설사 그것을 다 누리고 살더라도
거기에 집착하지 않을 수 있어야 한다.
그게 우리들의 수행이다.

그것이 ‘아상’을 녹이는 무아의 수행이고,
집착을 버리는 방하착의 수행이며,
어디에도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삼법인의 수행이며,
항상하는 것이 없다는 무상의 수행,
텅 비어 있다는 공의 수행,
다만 조건따라 변화해 갈 뿐이라는 인연법의 수행이다.

‘나’라고 생각되는 일체 모든 것을 버려야 한다.
‘나’는 없기 때문이다.
‘내 소유’에 얽매이고 집착하지 말라.
‘내 것’은 어디에도 없다.

하물며
수행하는 사람이
‘나는 수행자다’라는 상을 내면서
스스로 남들보다 우월하다는 생각을 할 수 있겠는가.

나는 수행하는 사람이니 우월하고
남들은 수행이 뭔지도 모르는 사람이니 열등한 것인가.
그렇지 않다.

그런 생각이 있다면 그렇지 않다.
설사 그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런 생각이 있다면 그것은 거짓이다.
그것은 내가 나를 속이고 있는 것이다.

물론 나 또한 나를 속이고 있다.
내 스스로도 거기에서 벗어나고 싶다.
그래서 더욱 더 그러한 내 마음을
내 속을 더 깊이있게 지켜보고자 한다.

내 스스로 나를 속이고 있는 것을
깊게 지켜보고 바라보며 알아채고자 노력할 뿐이다.
다만 그렇게 지켜볼 뿐.

깊이 지켜보아야 보인다.
그래야 내가 얽매이고 있는 것의 실체에 눈뜰 수 있다.
어설프게 관하면서
관수행이 어쩌고, 위빠싸나가 어쩌고 하지 말라.

단분간은 그저 다만 바라보기만 하라.
스스로 그 틀을 얼마만큼 훤히 바라보고 있는지
깊이 바라보라.

왜냐하면
그렇게 스스로 남들에게 알려주려고 하면
‘알려준다’는 그 틀 속에 빠져
스스로 커다란 상을 하나 만들게 된다.

자신은 이제 ‘알려주는 사람’이 된다.
그것이 ‘법사’여도 좋고, ‘스님’이여도 좋고,
‘포교사’나 혹은 ‘선생님’이여도 좋다.
누군가 보다 더 우월하다는 그 모든 표현들,
그래서 알려줘야 한다는 그 모든 표현들,
그것이 또다른 상을 만들어 내어 나 자신을 더욱 얽어맨다.

어쩌면 스님들은
‘스님’이라는 틀을 깨는 사람들이다.
부단히 스님을 깨고 나오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비로소 스님이라는 상에서 깨어났을 때
비로소 스님이 될 수 있는 사람들.
스님이 아닐 수 있을 때
비로소 진정한 스님이 될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이다.

수행자는
수행자라는 틀을 깨려는 사람들이며,
선생님은
선생님이라는 틀을 깨려는 사람들이고,
교수님, 사장님, 회장님
그들은 교수, 사장, 회장이 아니어야 한다.

그것이 아니었을 때 비로소 그것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금강경에 ‘불법은 불법이 아니다 그러므로 불법이다’란 구절이 있다.
그것은 우리 모두에게 적용되는 표현이다.

스님은 스님이 아니다 그러므로 스님이다.
스님이 스님이라고 하면 그는 스님이 아니다.
수행자가 스스로 수행자라는 상에 빠져 있게 되면
그는 더 이상 수행자일 수 없다.

그것이 아닐 때
비로소 그것이 될 수 있다.
아무것도 아닐 때
비로소 그 무엇도 될 수 있다.

‘무엇’이 되고자 하지 말라.
그 무엇도 되지 않을 수 있었을 때
비로소 참된 자신을 만날 수 있다.

‘이것이 나다’라고 할 만한
그 어떤 것도 없을 때
비로소 내가 누구인지 조금씩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