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상파괴자 붓다|…… 혜천스님설교

2017. 9. 24. 18:47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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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梵舟스님 달마도



우상파괴자 붓다

  

혜천(嵇瀳)스님의 일요강론

 


 

(불기2553년 12월 27일)

 

 

오늘의 주제는 우상파괴자 붓다입니다.

 

1977년에 나온 이영희 한양대 교수의 <우상과 이성>은 당시의 젊은이들에게 깊은 영향을 끼쳤다. 나 또한 82년인가 그 책을 읽게 되었는데, 단숨에 읽었던 기억이 있다. 그 시대는 웬만한 사람들은 거의 그 책을 읽었을 것이다. 그 책의 내용은 박정희 시대의 허구인 베트남 문제, 미국 문제, 중국 문제를 폭로하는 것이었다. 

 

책의 저자인 이영희 교수는 이 책으로 학생들을 의식화하는 원흉이라 지목되어 빨갱이로 몰려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그런데 그는 원래 육군 소령으로 미군통역장교 출신이었다. 그는 미군 태평양 함대 사령관의 방문 시 통역을 맡을 정도로 불어와 영어에 능통했다. 알다시피 맥아더 장군이 이 함대의 사령관 출신이기도 하다. 태평양함대 사령관이라는 직위는 당시 한국의 대통령도 감히 쳐다볼  수 없는 존재로, 우리에게는 절대적인 존재였다. 그러므로 이 영희의 이런 경력이 그의 세계정세에 대한 안목을 키워줬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나는 당시 그 책을 읽고 머리가 하얘졌다. 내가 알고 있었던 것이 무엇이던가? 

 

내가 우상파괴자 붓다를 말하면서 왜 이영희의 <우상과 이성>을 말하는가? 그가 한국사회에 던진 것은 그 당시에 호수에 작은 돌을 하나 던진 것과 같은 파문이었다. 그러나 부처님의 겨우 그 시대, 그 삶들의 입장에서 보면 파천황(破天荒)이다. 긍정적인 측면과 충격적인 측면 모두에서 그러하다. 

파천황이란 천지가 열리기 전의 혼돈을 깨트리고 처음를 여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일찍이 없었던 충격적인 일'을 의미하는 용례로도 사용된다. 당시의 부처님 말씀은 파천황이다. 즉 메가톤 급 핵폭탄의 위력을 지닌 것이었다.

 

우리는 우상이라고 하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기독교적 입장에서는 불상을 떠올릴 것이고, 개신교의 입장에서는 마리아상이나 예수의 십자가를 떠올릴 것이다. 칼뱅이나 루터의 종교 개혁가들은 마리아상이나 예수의 십자가가 성경에 위배된 우상이라고 주장하였다. 그 근거는 성경에 의하면 어떠한 상도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상을 공격하게 되는데, 프랑스 황제의 명으로 마리아상과 십자가에 대한 우상파괴가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천주교 신자들의 반발을 사 곧 중단되었다. 천주교 신자들은 마리아상과 예수가 새겨진 십자가 없이는 예배를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직도 그것들과 더불어 성화가 존재한다.

 

이슬람의 입장에서는 십자가 자체가 우상이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카바 신전에는 이슬람을 상징하는 검은 사각의 돌이 있다. 불교의 입장에서는 모든 종교의 상징물들은 우상이다. 불교는 원래 어떤 상을 만들지 않는다. 부처님의 입멸 시 그 유체를 화장하고 탑을 만들게 되었는데, 부처님은 비구들이 이 일에 전혀 관여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래서 한동안 탑에 대한 신앙이 금지되었다. 탑은 재가신자들이 세운 것이지, 불교 교단에서 세운 것이 아니다. 그래서 불교의 모든 상징물 또한 우상이다.

 

이 주제로 강론하는 것은 그 우상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우상하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하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다. 여러분은 무엇이 떠오르는가? 지금까지 말한 그런 것이 떠오르면 그것은 우리가 세계화되어 있다는 증거이다. 즉 우리는 입만 열면 글로벌이니, 세계화를 말한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우리의 세계화는 미국화의 다름 아니다. 미국화된다는 것은 기독교화된다는 것을 뜻한다. 미국사회는 기독교이념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이념 중에서도 강경보수파의 이념이 자리 잡고 있다. 이것은 보편적 그리스도의 이념도 아니다. 이것이 세계지배자로서의 기독교의 본 모습이다.

 

우상이라는 단어에서 실제 어떤 것이 떠올랐다면 여러분은 세계화 되었다는 증거이다.(?) 아시아에는 우상이라는 개념이 없다. 그것은 기독교적 개념이다. 불교, 도교, 힌두교 모두 우상이라는 개념이 없다. 그런 면에서 우상이라는 단어를 보고 무엇을 떠올렸다면 자신이 세계화되었다고 자긍심(?)을 지녀도 된다. 우린 이정도로 글로벌화된 나라에 살고 있다.

 

부처님이 말하는 우상은 우리의 마음 속에 각인되어 있는 어떤 것

 

그러나 부처님이 말하는 우상은 그런 과는 다르다. 부처님이 말하는 우상은 우리의 마음 속에 각인되어 있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무엇을 들으면 무엇이 연상된다. 그것은 마음의 각인 때문이다.

 

인간은 신의 분노를 진정시키고, 신의 만족시키기 위해, 인간 역사가 시작되기 이전이나 이후, 심지어 현대까지 그 하나를 한다. 과거, 현재, 미래를 통해 신의 분노에 대한 진정과 신의 만족을 위해 일생을 산다. 이 말이 무슨 남의 다리 긁는 소리냐 또는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냐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우리가 횡설수설하면 그렇게 표현하는 걸 보면. 기독교 구약의 역사가 그러하고, 힌두교 베다의 역사가 그러하다. 이들 역사들은 신의 분노를 진정진정시키고 신을 만족을 위한 인간 희생의 역사이다. 신의 분노를 진정시키기 위해서는 무엇인가를 바쳐야 한다. 때로는 사람을 바치기도 한다. 그러나 요즘에는 보편적으로 돈을 바친다. 십일조도 이를테면 그런 것이다.

 

베다시대 최고의 인드라는 폭풍의 신이다. 이 폭풍의 신은 번개와 벼락을 동반하다. 또한 바람과 비를 동반하기도 한다. 고대사회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맹수가 아니다. 그것은 한 두 명의 희생으로 끝난다. 그러나 폭풍우는 한 지역이 결단난다. 그래서 그것이 가장 두렵다. 특히 인도에서는 두말할 나위 없다. 인도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폭풍우이다.

 

절에 가면 신중단 [神衆壇]이라는 것이 있는데, 그 중 모자 쓰고 칼을 쥐고 서있는 것이 바로 이 인드라신이다. 우리 말에도 "불난 뒤에는 남는 게 있어도, 물난리 끝에는 남는 게 없다"는 말이 있다. 미국 뉴 올리언즈주 카트리나나 동남아에 불어닥쳤던 쓰나미도 그런 것이다. 나는 이걸 보고 혹시 그해 그곳에 삼재가 들지 않았나 생각했다. 실제 어떤 목사가 말하기를 " 올리언즈에 폭풍과 해일이 강타한 것은 그 곳 출신 흑임 코미디언이 동성애자였기 때문에, 그에 대한 벌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아니러니하게도 가 말한 그 흑인은 죽지 않았다.

 

부처님은 바로 그 우상을 깨뜨렸다. 부처님은 신의 절대성을 부정한다. 고행이란 무엇인가? 부처님 또한 깨달음을 얻기 위해 6년간을 고행했다. 그러나 이것은 후대의 시각이라고 볼 수 있다. 적어도 그 시대 고행을 하는 이유는 신의 만족을 위해, 더 정확하게는 신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이다. 내가 저번 금강경 강의에서 강가강을 말한 적이 있다. 강가강이라는 것이 고행자가 고행을 열심히 한 데 대해서 신이 인간에게 선물한 것이라고 했다. 아마 그렇다고 한다면, 여기있는 어린 현수가 "그럼 희말라야의 눈 녹은 물은 어디로 가나요?"하고 물을지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그 시대 사람들은 신화에서 말하는대로 그렇게 믿고 여겼다. 인도의 3신중 하나인 시바신이 머리로, 등으로 그 물을 받아 강가강, 고다바라강 등 5개의 갈래로 흐르게 하였다는 것이다.

 

부처님은 어느 날 고행을 그만둔다. 그 시대의 입장에서 보면 이것은 굉장한 결단이다. '고타마 싯타르타가 타락했다'는 주위의 비난이 빗발쳤다. 그가 고행을 그만둔다는 것은 더 이상 신을 섬기지 않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고행을 그만둔다는 것은 신을 섬기지 않겠다는 것이다.

 

우리가 문자만 보고, 읽으면서 감동해서는 안된다. 오늘날도 신의 분노를 진정하고, 만족하게 하기 위해 우리 주변에서 흔히 일어난다. 그러면 떡고물이라도 하난 생기지 않을까 해서 말이다. 그러나 부처님은 이를 과감히 부정한다. 그래서 파천황이라고 일컫는 것이다. 부처님은 신화와 신비를 부정한다. 

 

우리는 흔히 성과 속을 구분한다. 성은 신에 속하는 것, 속은 인간에 속하는 것으로 말이다. 이것은 서양 기독교의 개념이다. 힌두교에 적용하면, 신의 형상을 한 땅 위의 신이므로 바라문은 신성하다. 창조주 브라흐만이 천지를 창조하고, 인간을 창조하는데, 창조주 브라흐만의 입으로 브라만을 만들고, 양 팔로는 크샤트리아를 만들고,(여기에서 차용된 것이 부처님 탄생에 대한 옆구리설), 양쪽 넙적다리로는 바이샤를 만들고, 발가락으로 수드라와 불가촉 천민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중동의 창세기 신화도 인간을 흙으로 빚었다고 한다. 코란에 의하면 백토로 백인을 빚고. 흑토로 흑인을 빚었는데, 그저 남는 것으로 황인종을 만들었다고 한다.

 

여기서 브라만이 창조주 브라흐만의 입에서 나왔다는 것이 중요하다. 즉 인간은 호흡하지 않으면 안된다. 생명의 근원은 입이다. 바라문족은 신성하고 신성불가침이다. 창조주 브라흐만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그래서 천신 뿐 아니라 땅에 잇는 바라문도 섬겨야 한다는 것이다. 부처는 이것에 대해 '그러면 너희는 왜 입으로 아이를 낳지 않는가?"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부처님은 신성을 부정하고, 신비한 힘을 부정한다. 바라문들의 주문에는 신비한 힘이 있다고 믿으며, 그것을 외우면 신이 선물을 준다고 한다. 부처님은 주문, 즉 주력이나 신비를 부정한다. "그렇다면 너희가 주력의 힘을 보이라. 강물의 바위를 주력으로 끌어올려 보라"고 말한다. 불교에서도 광명진언을 외우면 겁나게 좋아부런다고 한다. 큰스님들도 빛이 나고 오로라가 비친다고 말한다. 내가 그래서 <친절한 금자씨>의 이영애씨를 특별히 모시고 왔다. '그건 니 생각이고, 너나 잘 하세요'.

 

부처님에 의하면, 스님이 주문을 외우는 것이 금지되어 있다. 천수경을 외우고, 수리수리 마수리 이런 것 안된다. 그래서 우리는 단지 부처님의 <경문>을 읽을 뿐이다. 부처님이 지금 이 땅에 오신다면, "아난아! 저 나를 숭배하는 저 이교도들은 누구인가?"라고 물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아난이 "전들 알겠습니까"하고 하지 않을까?

 

부처님은 주력의 힘을 부정한다. 주력하는 것은 신을 만족시키고, 기쁘게 하기 위한 것이다. 인간은 신의 분노를 진정시키고, 만족을 위해 노력한다. 인도가 그러했다. 그런데 부처님이 이를 부정했다. 당연히 부처님은 굉장한 비난과 반발을 사게 된다.

 

한때 공기업에 취직하면 신이내린 직장이니, 공무원에 대해서는 철밥통이라고 했지만, 지금은 각각 공기업은 아수라판, 공무원을 깨져버려 개밥그릇취급을 받는다. 법이 있어도 법이 지켜지지 않는다. 법치를 말하는 자가 법을 지키지 않는다. 그런데 인도의 경우, 적어도 인도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지배계급은 현재까지 변하지 않는다. 현대 인도의 지배계급은 여전히 바라문이고, 그들이 정치권력과 경제를 장악하고 있다. 우리의 공기업직원, 공무원은 여기에 비하면 조족지혈이다. 이들은 수천년 자자손손, 앞으로 몇 천년 더 해먹을지도 모른다.

 

인도 땅이라면 태어날 때 잘 살펴보고 태어나야 한다. 부처님은 도솔천에서 다 내려다 보았다고 그러지 않던가! 여러분께서는 잘 살펴보고 지금의 부모를 선택해서 태어났다고 생각하는가? 모두가 이건희 자녀일수는 없다. 그러기에 권투도장을 다녔어야 했다. 이겨서 그 아래 태어나려면. 부처님은 바로 이런 걸 비판한다. 그래서 힌두교의 비난을 사게 되고, 그들이 고타마 싯타르타에게 저주를 퍼붓는 것이다. 부처님은 내 마음 속의 우상을 버리라는 것이다.

 

음력12월8일는 새벽 샛별(신성)을 보고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은 날이다. 불교는 그래서 별과 달을 중시한다. 즉 6년간의 고행을 통해서도 얻지 못한 것을 얻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무엇을 보고, 느껴야 하는가? 마음속의 우상을 파괴해야 한다. 왜 너는 너 자신으로 살아가지 못하는가? 부처님도 과거에는 신의 분노를 진정하고 만족시키기 위해 고행을 했다.

 

그러난 어느 날 그는 그것을 버렸다. 네란자라 강에서 목욕하고 수자타가 바친 우유죽을 공양받는다. 신에게 바치던 우유죽을 부처님께 드리다. "당신이 이걸 드시지요. 신에게 바치던 우유죽이 고타마에게 바쳐졌으므로, 신의 대열에 합류했다는 식으로 해석해서는 안된다.(나의 해석).  고행의 수행자는 우유죽을 먹으면 안된다. 고행의 수행자가 우유죽을 먹는다는 것은 소나 말이 되는 것과 다름없다.

 

하기야 채식주의자도 등급이 있다고 한다. 완전히 채식만 먹는 이, 우유까지 먹는 이, 계란까지 먹는 이, 생선까지 먹는 이로 말이다. '인간이 타락하더니 여러 가지 하는구나'라는 비난을 받는 것이다. 우리는 만약 그 처지가 된다면 그 장소에서 도망칠 것이다. 우리는 무서워서가 아니라면서 더러워서라도 똥은 피하려 한다. 부처님은 피하기는 커녕 아예 똥을 깔아 뭉갠다. 그 당시 고행이라는 것이 상상을 초월했으므로, 수행자가 그것을 그만 둔다는 것 역시 상상을 초월하는 충격이었다.

 

고행을 그만둔다는 것은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걸 버린다는 의미이다. 우리는 버리지 못한다. 마치 청춘남녀가 그들의 사랑을 위해 야반도주를 한다면, 부처님은 도망은 커녕 집 안마당에 살림을 차리는 격이다. 존경심이 역전되면 증오심이 더욱 커지게 마련이다. 사람이 화가 나면 치가 떨린다고 표현하는데, 정말 이가 떨리는 정도인지 나로서는 그런 경험이 없어 알 길이 없다.

 

부처님은 그 모든 것을 그만두고,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 피팔라수(보리수) 아래 앉은 지 일주일 만에 새벽별을 보고 깨달음을 얻는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라는 것이다.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라는 것은 내 마음 속에 각인되어 있는 우상을 파괴하라는 것이다.

 

안평대군을 비롯한 당대의 명필들은 모두 다른 삶의 서체를 연습해 경지에 오른 사람들이다. 그러나 추사 김정희는 박규수의 평대로 '괴(怪)'하다. 연암의 손자인 환제 박규수는 추사와는 정치적 대립관계에 있는 처지였다. 그는 추사의 서체 변천사에 대해 "완옹(阮翁)은  소시적에는 동기창을 본받았고, 청연시절에는 중국에서 옹방강을 만나 그의 서체를 본받고, 작년에 이르러서는 미불과 소동파와 당의 구양순을 본받았다.

 

그러나 제주도에 갔다 온 이후로는 그 어떠한 것도 본받지 않고, 장점만으로 글씨를 써서 자기의 글씨를 썼다" 제주도에 유배 갔을 때는 위리안치(탱자나무가시로 된 울타리 안에서 자신도 나가지 못하고, 다른 사람도 들어 갈 수 없는 유배형태) 때문에 그는 글 쓸 일이 없었다. 세한도에 있는 글씨는 구양순체이며, 가야산 해인사 중건상량문도 역시 구양순체로 문외한이 봐도 잘된 글씨이다.

 

동주 이영희가 연세대 100주면 기념관에서 그림과 글씨에 대한 특강을 하였을 때, 어떻게 추사체가 탄생했느냐고 질문했다. 그에 대한 답의 대강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추사는 젊어서부터 명필이라고 소문이 자자하여, 글씨를 써달라는 부탁이 쇄도하였다, 그러나 귀양시절에는 글씨 쓸일 이 없어졌다. 귀양 이전에는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 글씨를 섰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구양순체로 된 세한도 발문에서 보여지듯이, 심심해서 울화통이 날지언정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 글씨를 쓰지 않아도 되었다. 즉 자기가 쓰고 싶은 글씨를 쓰는 것이다. 자기 글씨를 쓰는 것이다. 

 

유배지로 향하던 중 쓴  해남 대흥사 무량수각과 유배 이후 1846년 쓴 그의 고향 예산 화암사 무량수각 편액 모두 추사의 글씨지만, 서로 다르다. 이에 대해서 박규수는 " 귀양 가기 전의 추사 글씨는 지나치게 기름진 것이 흠이었지만, 귀향 후의 추사의 글씨는 기름기가 다 빠지고 골기만 남았다." 고 평했다. 골기란 금석기가 있다는 표현으로 왕희지 글씨체는 그저 이쁘지만, 예서체의 글씨는 이쁘지 않고 금석기의 체를 추구한다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주목해야 한다. 부처님이 보리수 아래 앉는 것은 신의 절대성을 버리고, 비로소 자기 자신이 앉는 것이다. 완당이 남에게 보여주는 글씨를 쓰다가 귀양 이후 자기 글씨를 쓰는 것에 비유할 수 있겠다. 추사의 글씨에서 어떤 획은 말 같고, 어떤 획은 싸릿가지처럼 가늘지만 그 조형미가 기막히다. 우리가 만약 이런 글씨를 쓰면, 욕이 나오거나, 혀를 차거나, 먹이 아깝다 할지 모른다.

 

우리는  우리 마음에 각인되어 있는 우상을 파괴해야 한다. 그 우상을 파괴해야  나 자신으로 살 수 있다. 우리는 누군가의 누구로 산다. 다른 사람들은 근기가 높아 자신으로 사는지 몰라도 나는 그렇다. 누군가의 구군가로 살기 때문에 누군가에 의해 규정받는다. 그래서 누군가의 덕을 보기도 하고, 욕을 먹기도 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누군가의 누구로 살지 말고, 자기 자신으로 살라는 것이다. 그것은 신을 기쁘게하고, 만족하게 하는 것을 버리는 것이다. 

 

새해에는 모쪼록 우상을 파괴하시기를 바랍니다. 부처님은 우상파괴자입니다. 

오늘 강론은 여기까지입니다. 

 

강론은 여기까지 하고, 신년부터는 여러분들이 기도를 이끌어 주시길 바랍니다.

오늘은 제가 하겠습니다.

 

자비하신 부처님

올해에는 기쁜 일보다 슬픈 일이 많았습니다. 

사랑보다는 미움이 많았습니다.

나눔보다는 제몫 찾기가 많았습니다.

 

새해에는 슬픈 일보다는 기쁜 일이

미움보다는 사랑이

제 몫을 찾기보다는  나누는 일이 넘처 나길 기원합니다.

 

이 자리에 있는 불자 여러분들과 그 가족

그리고 온누리의 생명에

부처님의 은혜 누리시길 바랍니다.

 

 

혜천스님 - 초기불교전공 흥천사주지 



   






 달마도 게송()

 

大道無門 (대도무문 )

千差有路 (천차유로 )

透得此門 (투득차문 )

獨步乾坤( 독보건곤 )


無門慧開, 1183~1260 南宋


 


* 大道는 문이 없어

모든 길은 다 長安으로 통하나니

이 關門을 뚫는 자는

걸림없는 自由人이 되리라








일색변 (一色邊 )

- 무산(霧山) 조오현 (1932~)


 사랑도 사랑 나름이지

 정녕 사랑한다면

 연연한 여울목에

 돌다리 하나는 놓아야

 그 물론 만나는 거리도

 이승 저승쯤은 되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