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심청심] 시대를 이끄는 불교|마음공부 생활수행

2017. 11. 25. 21:23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발심수행장·수행법

728x90

[洗心淸心] 시대를 이끄는 불교

 
기사등록일 [2010년 05월 06일 11:46 목요일]
 

지난 주에는 서울에서 목사님, 신부님, 스님들이 함께 모여 교육을 받을 일이 있었다. 많은 교육들 가운데 한 강의가 아주 의미있게 느껴졌다. 현재 우리나라 심리학, 상담학계에서 아주 저명하신 교수님의 강의였는데, 현대 심리 상담학계의 이슈가 되고 있으며, 기존의 심리치료의 흐름 자체를 바꾸어 놓았을 정도로 획기적인 심리 치유 기법이라는 설명과 함께 4시간 동안 강의가 이어졌다.

바로 마인드풀니스(Mindfulness)라는 마음챙김, 혹은 관 수행에 대한 강의다. 물론 그동안의 언론 등을 통해 심리치료학계의 주류로써 불교 수행법이 각광을 받고 있다는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직접 강의를 듣고 보니 감회가 남다르다. 더구나 그 내용과 그 교수님을 선정해 초빙한 분이 바로 목사님이다. 참석한 한 목사님은 마인드풀니스 코스를 6개월간 받으시면서 큰 효과를 경험했다는 말도 했다. 강의 내내 ‘분별하지 말고 알아차려라’, ‘판단하지 말고 지켜보라’는 말이 이어졌다. 이러한 내용의 강의를 스님들께가 아니라 심리학 교수님께 듣고 있으며, 그것도 목사, 신부님들과 함께 듣고 있고, 모두가 매우 흥미롭게 강의에 빠져들고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새롭다.

내용은 말 그대로 불교의 위빠사나, 사띠, 관 수행을 거의 변형시키지 않고 고스란히 가져다 놓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다. 무언가 다른 새로운 것이 접목되어 변형 발전되었다기 보다는 그저 불교의 수행법을 고스란히 ‘설법’하고 계시는 것이었다.

사실 이것은 비단 심리학계에서만의 현상이 아니다. 이제 수많은 연구 분야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이 새로운 현대과학의 이름으로 사람들에게 ‘설법’되어지고 있다.

생태 환경 분야만 해도 어떤가. 데카르트와 베이컨, 뉴턴 등에 의해 체계화된 기계론적 자연관은 이후 린 화이트에 의해 반박되기 시작된 뒤부터, 점차 동물해방론으로, 생명중심주의로 이어졌고, 이어서 생태중심주의, 가이아 이론, 심층생태론, 생명평등주의 등으로 발전해 오고 있다. 이러한 생태 환경윤리의 발전과정은 흡사 점차적으로 불교의 연기적 세계관에 이르기 위한 하나의 단계적 과정이었던 것처럼 느껴진다.

물리학은 또 어떤가. 기존의 뉴턴 물리학, 고전 물리학에서 우주는 물질로 이루어졌으며, 거대한 기계와 같은 것이었던데 반해 오늘날 상대론과 양자론을 주축으로 하는 현대 물리학, 양자 물리학은 그러한 근원을 완전히 뒤흔들면서, 점점 더 불교의 가르침을 더욱 분명히 뒷받침 해 주는 역할에 충실하고 있다.

어디 그 뿐인가. 요즘 유행하는 시크릿 같은 책들도 그렇고, 수많은 자기계발서나, 영성, 명상의 분야에서도 부처님의 가르침은 조금씩 다른 옷을 입고 강력하게 확산되고 있다. 한동안은 절 수행이 각종 언론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요즘 다양한 분야의 시대를 선도하는 수많은 책들을 읽다보면 그 안에서 불법을 분명하게 보게 된다. 그야말로 동서양의 어떤 분야나 학문을 막론하고 불교적인 가르침이 모든 분야의 선구적 역할을 하고 있다.

그야말로 불교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더라도 세계 곳곳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이 활짝 꽃피어나고 있음을 목도하게 된다. 그만큼 사회가 깨어나고 있으며, 불법이 전해질 토대가 충실해지고 있다고 볼 수도 있겠다. 이런 깨어남의 시대, 영적 각성의 시대에 우리 불교가, 또 나 자신이 해야 할 몫이 무엇일까. 이 귀한 불법의 주체자로써, 이 정신적 진보의 시대 중심에 서서 시대를 이끌고 갈 것인가, 아니면 주변인으로 전락해 뒤따르며 서성이기만 할 것인가.

운학사 주지 법상 스님



  염일방일 (拈一放一)  





염일방일(拈一放一)이라는 고사(故事)가 있습니다.
『하나를 얻으려면 하나를 놓아야 한다』는 뜻이지요.
염일방일 즉, 하나를 쥐고있는 상태에서
또 하나를 쥐려고 이미 손에 쥐고 있는 것까지
모두 잃게된다는 말입니다
고사는 약 1천년전 중국 송나라(북송) 때
정치가, 철학자이며 사학자로 자치통감(自治通鑑)을 지은 
사마광의 어린 시절에 있었던 일 때문에 전해진것입니다
파옹구우(破甕救友) 라는 고사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어느날 숨바꼭질 놀이를 하다가 한 아이가
큰 물독에 빠져서 허우적거리고있었는데,
주변의 어른들은이 아이를 구출하기 위해서 
사다리와 밧줄을 가져와 요란법석을 떨었지만.
여의치 않아 물독에 빠진 아이는 숨이 넘어갈 지경이었습니다
지켜보고 있던 사마광이 주변에 있는 돌맹이를
주워들어 그 커다란 물독을 깨트려서 물독에 빠진 아이의
목숨을 구했습니다.
어린 아이 사마광(司馬光)은 고귀한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는 장독쯤은 깨트려버려도 되는
작은 것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한 것이지요.

어린 아이도 아는 이 단순한 지혜를 왜 
어른들은 깨우치지 못하고 우왕좌왕 했을까요?
그것은 살아가면서 어릴 때 순수한 마음을
점점 잃어버리고 작은 욕심이 앞섰기 때문입니다.
어른들의 잔머리로 항아리 값, 물 값, 책임소재
등을 따지며 시간을 낭비하다가
정작 귀중한 사람의 생명을 잃게 할 뻔 했습니다.
      더 귀한 것을 얻으려면 덜 귀한 것은 버려야 하나봅니다. 내게 있어 돌로 깨 부셔야 할 것은 무엇인가?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원숭이를 잡는 방법은   매우 간단합니다.   원숭이 팔이 겨우 들어갈만한 간격으로   창살을 설치하고 그 안에 원숭이가 좋아하는   맛있는 과일 특히 견과류를 넣어 둔답니다.   또는 항아리 안에 넣어두는 방법도 있습니다.   입구가 손이 겨우 들어갈만한 항아리지요.   원숭이는 창살(또는 항아리) 안으로 손을 넣어 과일을   움켜쥐고 꺼내려고 애를 쓰지만 거머쥔 손을   절대로 꺼낼 수가 없습니다.   사냥꾼은 멀찌감치 떨어져서 지켜보다가 다가가서   서두르지 않고도 손쉽게 원숭이를 사로잡는답니다   원숭이는 한번 손에 들어온 먹을 것은   절대 놓지 않는 습성이 있답니다.   그래서 어리석은 원숭이는 사냥꾼이 다가가는데도   도망가지 못하고 꼼짝없이 잡히고 마는 것이지요.   만약에 먹을 것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손에 쥔 것을 놓아버리기만 했다면   원숭이는 손을 빼서 잡히지 않고   달아날 수 있었겠지요
      더 귀(貴)한 것, 더 큰 것을 얻으려면 덜 귀(貴)한 것, 작은 것을 버리는 지혜가 필요하다는 교훈입니다.
ㅡ모셔온 글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