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언제나 행복이며, 부, 지혜, 심지어 깨달음 조차 매 순간 우리에게 보내주고 있다.
아니 삶은 항상 진리 그 자체이며, 행복, 지혜, 평화, 깨달음 그 자체로써 언제나 지금 이 자리에 존재하고 있다.
나를 벗어나 다른 곳으로 간 적은 한 번도 없다. 언제나 ‘지금 여기’라는 문 앞에 서서 우리가 마음의 문을 열고 초대해 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단지 마음을 열고 초대하는 것이다. 닫아걸고 틀어막지만 않으면 문 앞에서 내내 기다리고 있던 행복도, 평화도, 사랑도, 깨달음도 그 모든 진리의 요소들이 줄지어 들어오게 될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는 언제나 그것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고 있다는 사실이다. 마음에 방어벽을 치고 진리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틀어막고 있다. 물론 문을 열기도 한다. 그러나 마음속에 분별과 편견어린 잣대를 쳐 놓고 나에게 필요한 것만 쏙쏙 뽑아서 선택적으로만 받아들일 뿐이다. 우리 마음은 자동적으로 좋고 나쁜 것, 적과 아군을 구분해서 어느 한쪽만 받아들이고 다른 쪽은 거부하는데 익숙하다. 사람들을 만나도 나에게 이익 되는 사람, 도움 되는 사람들만 받아들이고, 싫어하는 사람이 오면 밀쳐내기 시작한다.
직장에서도 마찬가지다. 어떤 일이 오더라도 내 몫으로 받아들이기 보다는, 어떤 일은 내가 잘하니까 받아들이고, 또 어떤 일은 딱 거부하려고 애쓴다. 그런데 사실은 그 거부하려고 애썼던 그 일속에 나를 일깨워줄 수 있는 엄청난 비밀스러운 이치가 담겨 있다는 사실을 외면한다. 바로 그 생소한 일을 통해 법계는 나에게 아름다운 삶의 이치나 또 다른 새로운 진리에의 가능성을 보내주려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것을 번번이 거부한다.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더라도 마음에 불편함과 벽을 가진 채 받아들이는 것은 온전한 수용이 아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삶에는 새로운 변화나 어떤 각성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예를 들어 직장에서 자주 인사이동을 해야 하는 분들 같은 경우에 ‘이런 곳은 가고 싶고, 저런 곳은 안 갔으면 좋겠다’ 하고 방어벽을 쳐 놓는다.
모든 가능성을 향해 나를 활짝 열어놓지 못하는 것이다. 어디를 가도 좋고 무슨 일이 있어도 좋다, 시골을 가도 좋고 도시에 가도 좋다, 어디를 가든 바로 그곳이 이 우주법계가 지혜와 자비로움으로써 나를 돕기 위해 나를 보내주는 곳이구나 하고 받아들이지를 못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생각 자체가 좁아지고, 내 삶의 엄청난 가능성이 한껏 축소가 되고
만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삶을 대상으로 마음속에 방어벽을 치는데 익숙하다. 어느 한 쪽에 집착하니까 다른 쪽이 올 때 괴로운 것이다. 나를 완전히 열어 놓는다면 어디를 가도 좋고, 어떤 일이 일어나도 좋고, 어떤 인연을 만나도 좋으며 심지어 나를 괴롭히는 사람을 만난다고 할지라도 그 속에서 내가 경험하고 배울 것을 배울 수 있어서 좋은 것이다. 내가 삶 속에서 만나는 모든 경계는 나에게 깨우침을 주기 위해서, 업장소멸의 기회를 주기 위해서 우주법계가 자비로움으로써 계획해 낸 일이기 때문이다.
스스로 온갖 방어벽을 친 뒤 항상 선택하던 것만을 선택하고, 거부할 것은 거부하는 그런 비좁은 의식의 감옥에 갇히지 말라. 자신이 친 방어벽에 스스로 갇혀 꼼짝달싹 못함으로써, 진리의 가능성, 업장소멸의 가능성, 행복과 깨어남의 가능성을 걷어차지 말라. 다만 그 모든 것을 선택하지 말고 통째로 받아들이라. 문을 여는 순간 진리의 그 모든 것들이 활짝 웃으며 찾아 올 것이다.
운학사 주지 법상 스님 1052호 [2010년 06월 15일 14:3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