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감행복(五感幸福) |…… 혜천스님설교

2018. 7. 15. 12:23카테고리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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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감행복(五感幸福) 

 

혜천(嵇瀳)스님의 일요 강론 : 불기2554년 12월 5일


 

 

 

  

이번 주 강론의 주제는 오감 행복입니다.

행복하지 않으면 해탈할 수 없습니다. 행복은 어떻게 찾아오는가? 행복은 오감이 안정되어 있는 것을 말합니다. 오감이 안정되어 있어야 행복할 수 있습니다. 즉 그것이 오감행복입니다.

 

이 세상에는 여러 번 말해왔듯이 두 가지만 존재합니다. 나와 대상이 그것입니다. 우리는 오감을 통해 대상을 만납니다. 우리는 어머니 뱃속인 태아에서 부터 오감을 통해 대상을 만납니다. 우리의 뇌는 태아에서는 미성숙인 상태로 나와서 3세때까지 성장합니다. 성장은 오감의 자극을 통해 일어납니다. 자극을 받는다는 것은 대상과 함께 스며드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자극된 오감의 정보를 내면화합니다. 그 내면화 된 것이 우리가 말하는 생각입니다. 우리는 오감을 통해 대상의 정보를 받아들이고, 내면화하는데, 그것이 생각입니다. 즉 내면화되어 자기화된 것이 생각입니다. 그것이 축적되면 마음이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무엇이 중요하냐구요? 우리가 오감의 대상과 만나려면 마음이 열려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폐쇄되어 있으면 정보를 내면화시킬 수 없습니다. 여기서 다시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내면화시킨 정보를 고정된 이미지로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안이 좋고 나쁜 것은 고정된 이미지를 가지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그것에 나쁜 기억을 가지고 있으면, 그것에 거부 반응을 나타냅니다.

 

어려서 물에 혼쭐이 난 사람은 물을 두려워 하는 것입니다. 나는 아직도 깊은 물을 보면 두려워 합니다. 어렸을 때 저수지를 헤엄쳐 건너가다 못 나올 뻔 한 기억이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리 크거나 깊은 저수지도 아닙니다. 호기심에 저수지를 건너다가 힘이 빠져 못건너고 물을 꼴깍하고 먹어 버렸습니다. 그런 걸 지난가던 아버지가 건져 주었습니다. 사실 아버지가 구해주었다는 것도 나중에서야 안 일이지요. 나는 그 당시 혼절했으니 그 이후의 상황을 알 수 없습니다. 나중에 들은 얘기로는 아버지가 지나가다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나를 보고, 처음에는 장난인 줄 여기다가, 그렇지 않은 걸 알고서는 저수지에 뛰어들어 나를 건져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깊은 물을 보면 들어가고 싶은 생각이 별로 없습니다. 지금도 깊은 물을 보면 그것에 대한 잠재적인 두려움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의 경험을 잘 벗어나지 못합니다. 유년기에 아픈 상처를 겪게 되면, 그 의식이 내 잠재의식을 지배하게 됩니다. 나의 경우도 물을 보면 그 때 죽을 뻔 했던 잠재의식이 드러나는 것이죠. 마음이 오픈되어 있어야 하는데 그 부분이 닫혀 있는 거죠.

 

수행이란 것이 뭐냐면, 쉽게 설명하면 자기의 마음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마음이란 내가 태어나서 대상과 나 사이에 교환된 정보를 축적해 놓은 것입니다. 사람은 절대 벗어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생각, 즉 사유의 체계입니다. 어느 누구도 이것을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왜 내가 이렇데 단정적으로 말하느냐면, 그 의식을 벗어날 수 있다면 그는 붓다이기 때문입니다.

 

노엄 촘스키는 두 가지 주장을 합니다. 하나는 뇌를 세척하라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세뇌의 체제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뇌를 세척하는 것은 뇌가 내 식으로 이해하고, 즉 주관적으로 이해하는 내 생각인데, 이것을 씻어내라는 것입니다.  세뇌는 내가 나를 세뇌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이 나를 세뇌하는 것입니다. 마치 그것이 내 본래의 사유 의식인 양 내 의식에 주문을 걸죠. 예를 들면 마치 이것과 같죠. 인간의 몸에서 니코틴이 분비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몸은 오히려 니코틴이 들어오면 몸이 놀라서 거부 반응을 일으키죠. 기침과 재체기의 증상이 그 증거입니다. 나도 국민학교 때 슬쩍 경험해 보았는데,  재체기, 눈물, 콧물을 쏙 뺐습니다. 어른들이 걱정하는 것이 이해되지 않습니다. 몸이 거부 반응을 일으킵니다. 그런데 담배를 계속해서 피우면 몸이 마치 그것을 만들어 내는 것으로 압니다. 금단현상이라는 것이 그래서 오는 것입니다. 담배를 끊게 되면 몸에서 니코틴이 만들어지지 않으니 이제는 몸이 죽을 것 같게 되는 것입니다. 담배를 처음 피울 때와 끊을 때의 몸의 반응을 보면, 자기 방어의 모습을 보이는 면에서는 같다고 할 것입니다.

 

처음과 끝이 같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이 잘 안되죠. 우리는 시험을 본다며 머리띠를 졸라 맵니다. 그러나 시험이 끝난 순간 겨우 맨 그 띠를 풀어 던져 버립니다. 작심삼일이 그런 것입니다. 처음과 끝이 같지 않은 것입니다. 처음과 끝이 같은 것이 담배이죠. 처음에는 니코틴에 대해 몸이 거부 반응을 일으키고, 나중에 끊으면 니코틴이 더 이상 몸에서 생성되지 않아 금단현상이 일어납니다.

 

정선에서 태백으로 넘어가는 길에 정암사라는 절이 있습니다.  그 절에서 20여리 넘어가면 심적암(深寂庵)이라는 토굴이라면 토굴, 암자라면 암자가 있습니다. 함백산 자락인 이 곳에 봄이면 두릅이 많기로도 유명합니다. 아직도 그런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이 암자에 어느 날 스님 세 분이 동안거를 하겠다고 세 사람분의 양식만을 걸머지고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결제일에 노스님 한 분이 '나도 같이 함세'라며 동참합니다. 불가에서는 결제날에 오는 스님은 쫒아낼 수 없다는 불문률이 있습니다. 그러니 양식은 3인분인데 늙은 스님까지 동참하면 넷이서 양식을 나누어야 할 것이니, 동안거가 쉽지 않다고 이들 세이서 판단합니다. 그래서 강제로 내려가게 할 수 없으니 밀어 붙여서 스스로 내려가게 할 궁리를 합니다. 그래서 노스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저희들은 여기 올라올 적에 도를 이루지 못하면 죽을 각오를 하였습니다. 그래서 용맹정진을 계속하기로 했습니다." 용맹정진은 잠을 자지 않는 수행입니다. 이 스님들은 20대의 젊은 스님으로, 노스님이 지쳐그만두게 하려는 심산이었던 것입니다. 해인사는 안거때 용맹정진을 하는 전통이 있습니다. 용맹정진의 수행은 마음은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참 힘듭니다. 그러니 젊은 스님이나 늙은 스님이나 용맹정진 때는 매타작을 면하기 어렵습니다. 이 제안에 대해 노스님이 '그렇게 하자'고 받아들입니다. 막상 시작하고 나니 예상대로 힘없는 노인은 노상 졸아, 매타작이 끊이지 않습니다. 이대로만 갔으면 좋으련만, 노스님이 1주일이 되도록 내려가지 않습니다. 작전대로 안된 것입니다. 1달 정도 지나자 전세가 역전됩니다. 이제는 노스님은 잠을 자지 않는데, 젊은 스님들이 자게 되어, 겨울 내내 노스님에게 매타작을 당하였습니다. 결국 동안거를 마치면서 그들은 자기들이 올라올 때 도를 이루지 않으면 내려가지 않겠다는 맹세를 이 노스님 덕에 이루었다고 합니다. 전하는 얘기는 그 노스님이 부처님의 화신이라고 합니다.

 

처음과 같은 끝을 그대로 가져가기란 어렵습니다. 젊은 스님들이 처음에는 힘으로 밀어 부쳤지만, 나중에는 힘을 너무 써 힘들어 합니다. 우리는 자기의 생각과 마음을 벗어나기가 어렵습니다. 오감을 통해 축적된 것이 마음이다 보니, 코를 푸는 것도 제 마음입니다.(강론 중 스님 코 풀다.) 우리는 항상 오감을 통해 대상을 만나는데 열린 마음으로 만나지 못합니다. 오감이 행복해지려면 내가 대상에 스며들고, 대상 또한 내게 스며들어야 합니다. 그럴려면 마음이 오픈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대상은 오픈되어 있는데, 내가 오픈되어 있지 못합니다.

 

다른 표현으로 해 보겠습니다. 이 세상에는 오직 나와 대상만이 있을 뿐입니다. 이 세상에는 두 사람의 인간 밖에 살지 않습니다. 남자와 여자입니다. 남자와 여자 빼고 다른 사람은 없습니다. 이 지구 상에 사는 사람은 남자와 여자와 단 두 종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남자와 여자는 기본적으로 의식이 다르죠. 남자는 단순하죠. 한 가지 밖에 못합니다. 즉 한가지 생각밖에 못합니다. 여자는 동시에 여러 생각을 할 수 있고, 여러가지를 할 수 있습니다. 남자와 여자는 기본적으로 같은 자리에 앉기 어렵습니다. 즉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서 호흡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서로가 마음을 오픈시키지 않으면, 충돌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대상과 만납니다. 내가 마음을 오픈시키지 않으면 충돌합니다. 왜? 그는 내가 아니고, 나 또한 그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를 위해 죽어 줄 수는 있지만, 그를 대신해 줄 수는 없습니다. 이 이야기는 무엇을 말하느냐하면, 나는 그가 될 수 없고, 그도 내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불편한 진실이죠.

 

제가 지지난 주 강론에서 '인간은 오직 자기 자신을 위해 산다'라고 했는데, 이 또한 불편한 진실이죠. 중국의 위대한 성인인 공자 이후, 그의 사상을 계승한 2인으로 맹자와 순자를 꼽습니다. 맹자는 송대 이후 공자님의 사상적 계승자로 숭앙을 받습니다. 순자 역시 공자의 사상적 계승자임에도 불구하고, 명나라 시대 육묘에서 쫒겨납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듯이, 맹자는 성선설, 순자는 성악설의 주창자죠. 그러나 어떤 분은 순자야 말로 진정한 공자의 계승자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순자는 거기에 걸맞는 대접을 받지 못했습니다. 순자가 불편한 진실을 말했기 때문입니다. 순자는 원래 조나라 사람인데, 조나라는 진나라와는 국경이 맞닿아 있어 끊임없이 충돌합니다. 그런던 중 진나라 장수 백기가 조나라군사 30만명을 생매장한 일이 있었습니다. 순자가 그 상황에서 도저히 인간이 선한다고 생각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의 조국이 끊임없이 침입을 받고 그의 형제들이 진의 군대로부터 생매장을 당하는 그런 일이 벌어졌는데, 인간이 본디 선하다고 생각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인간이 자기 생각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은 여기서 볼 수 있습니다. 순자는 자기의 경험과 체험으로 인간이 선하다고 할 수 없었습니다. 맹자는 공자 백년 뒤의 사람, 순자는 맹자의 백 년 뒤 사람이라고 하는데, 맹자의 말년에 순자가 태어났다고도 합니다. 순자의 사상에는 자기 경험과 체험이 그 바탕에 깔려 있는 것입니다. '저 아름다운 무지개를 봐라' 순자가 그러기에는 마음의 여유가 없는 것입니다.

 

요즘 대한민국의 핫 이슈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연평도 포격? 그건 한참 지난 얘깁니다. 재벌 2세의 맷값 폭행이야기입니다. 즉 돈을 주면 패도 된다는 어느 재벌 2세의 이야기입니다. 폭행을 당한 피해자는 처음에는 인권위, 국민권익위, 경찰  등지를 찾아다니며 하소연해 봤지만 아무도 귀 기울여 주는 곳이 없었다고 합니다. 운 좋게도 MBC의 시사 2580 팀이 기사화 해주었습니다. 이걸 보면  MBC라는 방송국이 존재해야 하는 이유가 설명됩니다. 보도가 된 이후에 호떡집에 불난듯이 정부기관에서 난리가 났다고 합니다. 그래서 힘있는 자들이 언론을 장악하려 하는지도 모릅니다. 

 

히틀러 시대 나찌의 2인자로 불리는 선전선동의 대가 괴벨스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거짓말을 하게 되면, 처음에는 아무도 믿지 않는다. 그런데 다시 거짓말을 하면 긴가민가하여 거짓말을 잘 판단하지 못한다. 그 다음 또 거짓말을 하면 그 때는 그 거짓말을 믿는다."  우리가 맷값을 던져준 최철원 이야기를 하는 것은 그 시대 순자가 '이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라고 말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사람의 사유 체계를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사회란 열린 사람들이 모여 있는 열린 사회입니다. 우리는 아직도 야생의 시대에 머물러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야생의 시대인 석기 시대에서는 오로지 생존하기 위해 삽니다. 그 시대의 절대절명은 생존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의 잠재의식 속에서 그것이 남아 있어서 언제나 우리의 열린 마음을 방해합니다. 열린 마음이 방해받기 때문에 대상을 만나는데 어려움을 겪는 것입니다.

 

남과 여가 만나 서로 자기 식으로 이해합니다. 그것은 열린 마음이 잘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인식하고 있듯이 관계성의 동물입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관계맺기를 합니다. 관계맺기를 넘어서 연대가 되어야 하는데 그게 잘 안됩니다. 처음에는 관계가 좋습니다. 쪽집게 도사가 이르기를, '하늘이 두 쪽 나도 너희들 관계는 문제가 없다. 이런 궁합은 처음 본다'고 합니다. 그러난 그런 사람들도 관계 맺기에는 성공하지만 그 관계를 이어 나가는데 어려움을 겪습니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생각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생각이 다르면 삶의 방식이 다릅니다.

 

우리는 대상을 지배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대상이 잘 지배되지 않습니다. 이리 내 밥 먹고 컸는데, 누구 말이라고 듣겠어? 대상을 진짜 지배하려면, 대상이 지배 당하는지 모르게 해야죠. 요새 라디오에서 '삼국지'라는 드라마를 해줘요. 거기 보면 동탁이 제일 나쁜 사람으로 나오는데, 나는 동탁보다 더 훌륭한 사람이 없다고 봅니다. 이런 얘기를 하는 것은 동탁에게 뭘 받아 먹어서 하는 얘기가 아닙니다. 이유(李儒)는 동탁의 모사꾼이자 사위인 인물입니다. 그런데 동탁은 모사꾼 이유의 건의를 한 번도 거절한 적이 없습니다. 이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절 대 권력을 가진 사람은 자기 뜻대로 하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우리는 남의 말은 잘 듣는데 자기 가족의 말은 잘 안듣죠.  특히 마누라 말은 더 그렇습니다. 중요한 것은 정작 귀 기울여야 할 것은 가족이라는 것입니다. 남편은 아내에게 '바가지 긁지마!', 아내는 남편에 '너나 잘 하세요' 라고 말합니다. 동탁은 사위의 말을 잘 듣습니다. 그런 면에서 훌륭하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참으로 이상합니다. 가까운 사람들의 말은 죽어도 안듣습니다. 오죽하면 '마누라 말을 잘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긴다'는 말이 있겠습니까? 이 말을 들을 정도로 남편들이 마누라 말을 잘 안듣기 때문입니다. 동탁은 결국 그의 양자인 여포에게 살해 당하는 끝맺음을 하지만, 가까운 사람의 말을 잘 듣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새로운 왕조를 못 열러 악인으로 평가 받지만, 그가 새로운 왕조를 열었더러면 영웅일 것입니다. 동탁은 자기가 필요로 하는 사람이라면, 직접 본인이 허리를 굽혀서  손수 자기 수레에 모시고 왔습니다. <삼국지연의>라는 소설을 보면 동탁에게 본받을 점이 있습니다. 적어도 사람을 얻는데 있어 열린 마음을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명문장가로 알려진 후한의 채옹 역시 동탁의 열린 마음을 보았기 때문에 그의 초청에 응한 것입니다.    

 

삼국지의 주인공이 누굴까요? 유비, 관우, 장비? 아닙니다. 제갈공명입니다. 그는 기재로 별 볼일 없는 유비를 선택합니다. 유비가 제갈공명에게 선택받기 이전에는 문간방에 세들어 사는 신세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를 왜 선택했을까요? 유비의 열린 마음을 봤기 때문입니다. 공명은 그의 생각을 유비가 거부하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 공명은 자기의 생각을, 자기의 꿈을 이룰 수 있다는 신념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거기에 응한 것입니다.

 

부처님은 우리가 행복하려면 오감이 행복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오감이란 눈, 귀, 코, 혀, 몸을 말하는 것으로, 그것은 결국 나입니다. 나는 언제나 대상과 만나고, 그 대상과 관계를 맺고, 그 관계를 이어갑니다. 주체인  대상과 객체인 대상은 다릅니다. 남과 여의 의식세계가 다르듯이. 전혀 다른 두 개의 대상이 만나려면, 열린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스며 듭니다. 물과 우유는 스며듭니다. 그러나 물과 기름은 스며들지 않습니다. 이 때 스며드려면 중화제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흔히 '저 사람은 자의식이 강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자의식이 강한 것과 서로 스며드는 것은 별개입니다. 가장 무식한 사람이 '못먹어도 고!'를 외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멋있어 보이는지 몰라도 조심해야 합니다. 왜냐구요? 고스톱을 치는 이유는 먹기 위해서입니다. 이런 사람은 불을 보고 달려든 나방과 같기 때문입니다. 진정으로 지혜로운 사람은 자기의 자의식이 오픈되어 잇는 사람입니다. 자의식을 열어 놓는 사람입니다. 내 자의식을 열어 상대의 마음을 내 마음 속에 스며들게 하는 것, 그래야만 우리의 오감이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나만 행복하면 무슨 소용입니까? 대상이 행복해야 나도 행복한 것입니다. 왜냐구요? 이 세상에서 나 하나만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멀리서 출발할 것도 없습니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출발하면 됩니다. 중국의 오랜 외교정책은 원교근공(遠交近攻) 입니다.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과는 친교를 맺고, 가까이 있는 사람은 공략해서 굴복시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중국의 어느 왕조에게도 작용되는 일관된 정책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가까운 나라는 철저히 공략해 왔던 것입니다. 오감행복도 원교근공과 같습니다.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서 동의를 얻어야 합니다. 멀리 있는 적은 내가 무시해도 당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가까이 있는 적을 무시하게 되면 호되게 당하게 됩니다. 당한 뒤에 두 배, 세 배 갚아준다고 크소리 쳐봐야 소용 없습니다. 가끔 영화를 보면 막차를 보내고 나서, 그 뒤에 발길질을 해대고 욕을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것과 같습니다. 가장 가까운 적을 무시하면 호되게 당합니다. 가장 가까운 데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가장 가까운데서 도와주기도 하고, 적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동탁도 양아들이 그의 목을 치는데야 당할 수 없었습니다. 박정희도 육사동기이자 고향 후배인 김재규에게 당한 것입니다.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열린 마음으로 대해야 합니다. 속담에 '웃는 얼굴에 침 못뱉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진정으로 내가 열린 마음으로 다가가면, 그 또한 나를 그리 대접할 것입니다. 내가 귀한 대접을 받고 싶으면, 내가 귀한 대접을 해줘야 합니다. 내가 커피 대접을 받았을 때, 맛없다는 반응을 보이면, 내가 대접한 것은 귀한 대접이 아닙니다. 이솝우화에 여우와 두루미 얘기가 나옵니다. 내가 귀한 대접을 받고 싶으면 대상을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열린 마음으로 다가가는 것입니다. 오감행복이란 바로 그것입니다.

 

오감이 안정되어 있어야 행복하다고 부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옛날에는 '나를 따르라'고 외치는 지도자가 환영받았습니다. 요즘은 그런 사람은 환영받지 못합니다. 그런 식으로 하면 요새 병사들은 '다녀 오세요'라고 할 것입니다. 공감을 이끌어 내는 지도자가 중요합니다.  그건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장 가까운 사람이 공감하지 않으면 멀리 있는 사람이 공감하지 않습니다. 공감은 감정이 교류하는 것입니다. 그 감정의 교류가 열린 마음으로 오픈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스며듭니다.

 

오늘 강론의 주제가 오감 행복입니다. 부처님께서는 행복하지 않으면 해탈을 이룰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행복하다는 것은 오감이 안정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즉 대상과 나 사이에 서로 열려 있어야, 오픈되어 있어야 합니다. 벽이 있으면 안됩니다. 벽이란 '다 너 때문이야' 이런 거죠. 이건 그 전에 이종용인가가 다 했습니다. 아닙니까? 이장희인가요? '그건 너!' 라고.  울릉도에서 조용히 살고 있는 가수 이장희가 이미 말했습니다.

 

다 내 때문이야!  제가 저 먼저께 하나의 원리가 작동된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인간이라고 하는 시장에 교환의 원리가 작동한다는 거죠. 모든 게 교환됩니다. 내 것이 교환되지 않으면, 세상 사람들을 원망하기 이전에 내 물건에 무슨 문제가 있는지 먼저 살펴봐야 합니다. 짚신 장사를 하는 두 부자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짚신은 잘 팔리는데, 아들의 것은 잘 안팔립니다. 똑같은 짚신인데 말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가 죽기에 이르렀는데, 아들이 급히 묻습니다. '왜 아버지 짚신은 잘 팔리는데, 내 것은 그렇지 않을까요?' 그러자 아버지는 '털, 털, 털'하고 죽어갑니다. 아들은 다시금 생각해 봅니다. '털이 도대체 무슨 말인가?' 그러던 어느 날 자기 짚신과 아버지 짚신을 하루 종일 보고 있는데, 저녁 햇빛이 들어 무엇인가 반사되었습니다. 그제서야 눈이 번쩍 띄었습니다. '바로 이것이구나!' 아버지가 만든 짚신에는 작은 보푸라기조차 없었습니다. 옛날에 양반들은 버선을 신었지만, 나머지 평민들은 양말없이 맨발이었습니다. 그래서 짚신의 잔털이 없는 신이 좋은 것입니다. 그 잔털을 밤새 닦아냈더니, 손님이 '이제서야 아버지와 같아졌구만'이라고 인정했습니다.

 

철저히 자기분석을 해야 합니다. 철저한 자기 분석이 있어야 열린 마음이 됩니다. 그건 너! 이런 식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렇게 이쁘고 착한 여자가 바가지를 긁는다면, 그게 바로 너(당신) 때문인 것입니다. 그것은 상대적입니다. 어느 누구 때문이 아니라 너 때문이야!  니가 나를 변하게 만든 거야!  이렇게 생각하면 벽이 생겨 열린 마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열린 마음이 생겨야 오감이 생깁니다. 그래야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오늘 아침 이영희 선생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라디오에서 들었습니다. 젊은 시절 내 마음의 스승이자, 세상을 보고 이해하는 방식을 가르쳐 준 분이시기도 합니다. 오늘 강론은 이영희 선생에게 바칩니다.  

 

 

사기 白起列傳

백기는 전국시대 진나라 장수로 공손기(公孫起)라고도 하며, 용병술에 뛰어났다. 소왕(昭王)때 무안군에 봉해졌으며, 그 유명한 장평전(長平戰)에서 조나라 군사를 대파하여 포로 40여만명을 산채로 묻어버렸다. 후에 범수의 시기를 받아 칼을 받고 자결했다.

 

이솝우화 여우와 두루미

여우가 두루미를 초대했다. 여우는 두루미에게 납작한 접시에 콩국을 담아냈다. 여우는 혓바닥으로 맛있게 먹었지만 두루미는 긴 부리로 접시만 콕콕 찍을 뿐 먹을 수가 없었다. 두루미가 남긴 콩국은 여우가 먹어치웠다. 이번에는 두루미가 여우를 초대, 생선국을 호리병 속에 차렸다. 긴 부리로 맛있게 먹은 두루미와 달리 여우는 먹을 수가 없었다. 이솝우화의 여우와 두루미 이야기다. 나와 남이 같지 않은 삶의 여정에서 나와 다른 남을 배려하라는 교훈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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