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열한 구도자, 진여 도인

2019. 2. 10. 12:18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제불조사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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任他饕虐雪兼風  그대를 모진 눈바람 속에 맡겨두고
窓裏淸孤不接鋒  나는 창가에서 淸孤히 탈 없이 지났다네.

歸臥故山思不歇  고향산천 돌아와도 그대 걱정 그치지 않으니
仙眞可惜在塵中  仙眞한 그 모습이 티끌 속에 있음이 애처롭네

* 奇明彦 : 奇大升(1527~1572, 號 高峯)

치열한 구도자, 진여 도인




진여 비구니는 관서(關西) 지방 제근(除饉:비구의 다른 이름)의 딸이며

속성은 왕 씨입니다. 그는 이른 나이에 황궁에 들어갔습니다.

뛰어난 재능을 인정받아 내부인으로 뽑혔으며, 교귀비(喬貴妃)의 내전 시녀가 되었습니다.

그는 평소 불교에 뜻을 두고 있었고 승려가 되기를 바랐습니다.

마침 불교를 숭상하던 교귀비가 이 사실을 알고 그의 삭발을 허락하였습니다.

출가한 그는 사방으로 도를 구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현재의 복건성인 민(閩)에 들어왔습니다.

마침 대혜 종고 선사가 천남 땅 소계사(小谿寺)에 주석하고 있었습니다. 진여는 곧 (대혜의)

운문 회상에 참여하여 선사의 직접 지도를 받고 이후 편지를 통해 공부하였습니다.

진여 비구니는 <속전등록>, <증집속전등록>, <선등세보>에 대혜 종고의 법제자로

올라있습니다. 대혜 종고 선사에게는 무착, 묘도, 무제, 초종 등 여러 명의 비구니

법제자가 있습니다. 이들 중 비교적 여러 전등서에 법제자로 뚜렷이 이름을 올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비구니 제자들에 비해 행적이나 문답 내용은 전해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나마 <운와기담(하)>에 그의 게송이 실려 있으며, 그에 대해 대혜 선사가 답한 게송이

있습니다. 또, 대혜 종고 선사의 편지글을 모은 <서장>에도 노 선사가 그에게 내린

자세한 가르침이 있습니다.

다음은 <운와기담(하)>에 수록된 진여 비구니의 게송입니다.

하루는 게송을 한 수 지었다.

우연히 평지에서 엎어졌다가
일어나니 도무지 할 말이 없다.
누군가 어찌 된 일이냐고 다시 물으면
웃으면서 청풍명월을 가리키겠네.


平地偶然著攧 起來都無可說.

若人更問如何 笑指淸風明月.

대혜 스님이 소참 법문에서 그를 위해 대중에게 게송을 설하였다.

오늘의 진여 비구니
옛날 왕비의 사부였을 때
몸은 비단 숲속에 살면서
거친 삼베만 입고 살았네.


今日如師姑 昔時王師父

身居羅綺叢 只著麤麻布.

입을 열면 고상한 말씀이 나오고
부처를 헐뜯는 말을 하려 하지 않았네.


開口便高談 嫌佛不肯做.

시비의 구덩이에서 뛰쳐나와
생사의 길을 단절하니,
범의 동굴 마귀 집에 들어가도
마음엔 두려움이 없어라.


趒出是非坑 截斷生死路,

入虎血魔宮 心中無怕怖.

팔양경을 되는대로 써서
스스로 3천 부를 가졌으며
운율에 어긋난 시 읊기를 좋아하여
글자 수를 맞추지 못했네.


杜撰八陽經 自有三千部

愛吟落韻詩 偏不勒字數.

행각하며 천하를 누비면서
참선해도 깨달은 바 없다가
요즘 운문에 도착하여
한꺼번에 모두 들켰으니


行脚走天下 參禪無所悟

近日到雲門 一時都敗露.

방앗공이를 잘못 알고
표주박이라 하네.


錯認碓觜頭 喚作冬瓜瓠.

이렇게 해서 비구니가 되었는데
그대에게 권하노니 적게나마 식초 맛을 보시오!
어긋난 곳, 하나 있으니
자, 말해 보라. 한 곳이 어딘가를.


如此作師姑 勸君少喫醋

更有一處乖 且道那一處

가주의 큰 불상이 구운 밀기울을 먹으니
섬부의 무쇠소가 터진 배를 움켜잡네.


嘉州大象喫炙麩 陜府鐵牛撐破肚.

이로써 진여 스님의 행적을 대략 알 수 있다.

- 운와기담(하)

진여 비구니는 출가 후 여러 곳을 전전하면서 행각하였습니다.

그러나 깨달음을 얻지는 못했습니다. 마침 대혜 선사가 명성을 떨치고 있을 때

운문 회상에 참여하여 자신의 안목을 비춰 보였습니다.

본래 아무 일이 없는데, 온갖 것이 있다고 여기다가 이 모든 것을 떨쳐내고 보니

할 말이 없다는 것입니다. 누가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물으면 눈앞에 있는 청풍명월을

가리켜 보이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대혜 선사는 진여의 게송을 듣고는 법에 눈을 뜨지 못했음을 알았습니다.

다니면서 보고 들은 지식으로 한 말이지, 진정 진여의 살아있는 법성이

열리지 않았다는 것을 간파했습니다.

대혜 종고 선사의 게송을 보면 진여 비구니가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황제의 비를 가르치는 사부여서 황궁에서 살았지만, 그는 소박한 삶을

좋아했습니다. 그곳에 있으면서도 불법을 염원하여 바른 행실을 보였고 결국

생사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출가를 하였습니다.

<팔양경>에 의지하여 공부하였는데, 3천 번이나 필사하였습니다.

이 경전은 천지 음양의 8가지 이치와 혼인, 해산, 장례법을 설한 경입니다.

불법을 곧바로 밝힌 경전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 아직 깨달음의 요체를 밝히기에는 부족한 공부를 해온 것입니다.

‘운율에 어긋난 시, 글자 수를 맞추지 못했다’는 것이 이 뜻입니다.

이런 까닭에 천하를 행각하며 참선을 해도 깨달은 바가 없다가 이제 운문 회상에

참여하여 그릇된 경계를 진실하다고 여기는 공부를 해왔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곧바로 이 맛을 보라고 권합니다.

자, 어긋난 곳이 한 곳 있는데, 그것이 무엇이냐!

가주의 큰 불상이 구운 밀기울을 먹으니
섬부의 무쇠소가 터진 배를 움켜잡네.

가주는 지금의 사천 땅 낙산입니다. 가주대상(嘉州大象)은 낙산대불을 말합니다.

백 명의 사람이 불상의 발등에 올라앉을 수 있는 큰 불상입니다.

섬부는 하남성의 섬부입니다. 섬부철우(陜府鐵牛)는 섬부에 있는 황하의 수호신으로

주조된 거대한 무쇠소입니다. ‘가주의 큰 불상이 구운 밀기울을 먹으니 섬부의

무쇠소가 불러 터진 배를 움켜잡고 있다’는 말은 뜻으로 알 수 없는 말입니다.

먹은 이가 배가 부른 법인데, 어찌 먹은 이 따로 배부른 이가 따로 있을 수 있겠습니까?

생각으로는 도저히 파악할 수 없는 곳에 불법의 분명한 뜻이 있습니다.

불법은 이해나 이치, 지식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생각으로 알 수 없고, 말뜻으로 판단할

수 없습니다. 어떤 생각과 말이 일어나더라도 그것에 사로잡히지 않는다면

모든 생각과 말이 바로 평등한 하나의 성품입니다.

대혜 선사의 말은 ‘뜰 앞의 잣나무’, ‘이 뭐고’와 다름이 없습니다.

말 끝에 문득 분별하는 마음이 사라진다면 그 말이 그대로 법성입니다.

대혜 종고 선사가 뒤에 진여 비구니에게 보낸 법어가 있습니다.

그 내용을 보면 공부하는 사람들에 대한 선사의 자상하고 엄밀한 가르침이 엿보입니다.

다음의 글은 1145년 대혜 종고 선사가 57세 때 쓴 글로 유배지에서

도인에게 보낸 글로 보입니다.

진여 도인에게 보임(示眞如道人)

‘불타는 집의 번뇌는 언제 끝날까요? 하루라도 안락하면 곧 천만일의 본보기가 됩니다.

하루라도 마음이 치달려 찾지 않고, 허망한 생각을 하지 않고, 모든 경계에 관여하지

 않는다면, 곧 과거·현재·미래의 모든 부처와 모든 큰 보살과 서로 일치하여 일부러

화합하지 않더라도 저절로 하나가 됩니다.
......

만약 그 불타는 집 속에서 믿음이 생겨 알게 되어서, 유치한 놀이에 즐겨 집착하지 않고

마음이 치달려 찾지도 않고 허망한 생각을 일으키지도 않고 모든 경계에 관여하지도

않는다면, 이 불타는 집의 번뇌가 곧 삼계를 벗어나 해탈하는 곳입니다.
왜 그럴까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모든 경계에서 의지함도 없고 머묾도 없고 분별도 없이, 법계가 광대하게 펼쳐져

있음을 밝게 보고, 모든 세간과 모든 법이 평등하여 둘이 없음을 깨닫는다.”
......

번뇌의 짝이 여래의 씨앗입니다. 경전 가운데 분명한 글이 있습니다.

“비유하면, 높은 언덕 위에 연꽃이 나는 것이 아니라,

낮고 축축한 진흙 속에서 연꽃이 난다.”
불난 집의 번뇌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헤아릴 수 없는 고통을 겪고 있다가,

문득 고통 속에서 싫어하여 떠나고자 하는 마음이 나오면 비로소 위없는 깨달음의

마음을 내는 것이니, 번뇌의 짝이 여래의 씨앗이 된다는 것은 바로 이것을 말합니다.
......

속인(俗人)은 불타는 집 속에서 가고·머물고·앉고·눕고 하는 사이에 탐욕과 진에(瞋恚)와

우치(愚癡)를 벗으로 삼고 있으니, 행하는 일이나 보고·듣는 것이 악업이 아님이 없습니다.

그러나 만약 이러한 속에서 뚫어낸다면, 그 힘은 도리어 우리 출가한 사람보다도

백 천만 억 배나 더 뛰어납니다.

뚫어내고 나면, 비로소 번뇌가 곧 보리요, 무명이 곧 큰 지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본래 드넓고 고요하고 묘한 마음속은 깨끗하고 두루 밝고 텅 비었으니

장애가 될 한 물건도 없습니다. 마치 커다란 허공과 같아서 불(佛)이라는 한 글자도

여기에서는 바깥 물건인데, 하물며 다시 경계니 번뇌니 은덕이니 자애니 하는 것들과

상대하겠습니까? 불타는 집 속에서 뚫어낸다면, 출가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하 생략)

-대혜보각선사어록4(대혜종고 지음, 김태완 옮김, 소명출판)

이외에도 순간순간 끊어지지 않게 공부하고, 말에 의지하지 말고 뜻에 의지하여

공부하라고 지도하고 있습니다. 말과 침묵이라는 두 가지 병을 없애야 하고, 무엇보다도

아는 것에 머물러 묘한 깨달음을 찾지 않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라고 당부합니다.

지금까지 알려진 전등서와 글을 통해 진여 비구니는 일찍부터 불법에 뜻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황궁에서 누릴 수 있는 부귀영화를 마다하고 몸소 거친 옷을 입고 도를 구하였습니다.

세속적인 영화를 마다하고 출가하여 누구보다도 치열하게 법을 구하였습니다.

식지 않는 구도의 열정으로 나라 곳곳을 행각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명안 종사인 대혜 종고 스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당시 대혜 선사는 반역 모의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를 받고 유배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선사는 진여 도인이 밖으로 찾는 마음을 멈추게 하였습니다.

선사의 가르침을 통해 끝내 대혜의 법을 이을 수 있었습니다.

깨달음에 대한 열정이 대단하다고 하더라도 눈밝은 선지식을 만나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인연인지 알 수 있습니다. 만약 이런 인연이 없다면 허망한 꿈과 같은 경계를

쫓아 방황하는 삶을 멈추지 못할 것입니다.

도는 이미 우리 각자에게 완전하게 갖추어져 있습니다.

다만 안팎으로 찾는 마음이 도를 가립니다. 찾는 것이 도이고, 보는 것이 도이고,

말하는 것이 도인데 자꾸 여기에 눈뜨지 못하고 보여지는 모습에 속습니다.

지금 이대로의 삶, 불타는 집 속의 삶이 해탈하는 곳입니다.

지금 여기에서 ‘유치한 놀이에 즐겨 집착하지 않고 마음을 일으켜 밖으로 찾지 않으며,

허망한 생각에 사로잡히지도 않고, 모든 현상에 상관하지 않는다’면,

지금 이대로의 삶이 하나로 평등한 마음임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도는 찾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한 생각 일으켜 찾으려 할 때 이미 있는 소식입니다.  


- 릴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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