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륙재

2007. 6. 9. 22:25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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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륙재◈(水陸齋)


이는 물과 육지에서 헤매는 외로운 영혼과 아귀를 달래며 위로하기 위하여 불법을 강설하고 음식을 베푸는 불교의식으로 수륙무차평등재의(水陸無遮平等齎儀), 극행수륙대재(國行水陸大齋), 수륙회(水陸會), 비제회(悲濟會)라고도 한다. 수륙재의 시원은 중국 양(梁)나라의 무제(武帝)가 불심이 두터워 유주무주(有住無住)의 고혼(孤魂)들을 널리 구제함이 제일가는 공덕이라 생각하고 스님들과 상의한 후 스스로 의식문(儀式文)을 만들었다. 그 의식문에 따라 서기 505년에 금산사(金山寺)에서 재를 베푼 것이 그 시초이다.


우리나라에서 수륙재가 설행된 것은 고려 때부터이다. 광종 때에 때때로 성대히 열린 바 있었는데 970년(광종 21)에 갈양사(葛陽寺)에서 개설된 수륙도량이 그 최초의 예이다.


조선시대에는 비록 억불정책에 의하여 불교의식이 유교의식으로 많이 바뀌어졌음에도 불구하고 태조(太祖)는 진관사(津寬寺)를 국행수륙재(國行水陸齋)를 여는 사사(寺社)로 지정하여 크게 재의를 행하였다. 뿐만 아니라 1395년(태조 4)에는 견암사(見巖寺)와 석왕사(釋王寺), 관음굴(觀音窟)등에서 고려 왕씨의 영혼을 달래는 수륙재를 베풀었다.


그 이후 배불정책에 따른 불교의식의 유교화정책은 수륙재를 국행으로 거행하는 문제를 놓고 많은 논란을 벌이게되나 오랜 전통으로 계속되어 온 수륙재를 쉽게 폐지시키지 못하였다. 억불정책으로 이름이 높던 태종(太宗)도 국행수륙재 폐지의 상소문을 받고 대대로 거행하여온 유풍을 쉽게 폐해서는 안된다고 하여 국행을 고집하였다.


수륙재는 처음에 매년 2월 15일에 거행되었으나 1415년(태종15)부터는 1월 15일로 변경하여 실시하였다. 이 수륙재는 대체로 1515년(중종 10)경까지 크게 변동됨이 없이 계속되었다. 왕실의 여러 궁에서 직접 그 시주자가 되어 때때로 수륙재가 열림에 따라 유생들의 시비와 비난을 받았으나 1606년(선조 39) 6월에 창의문밖에 있었던 수륙재나 1433년(세종 15)에 효령대군이 시주자가 된 한강에서의 수륙재는 양반, 평민 등이 인산인해를 이루어 길을 메울 정도로 성황을 이루었다.


그러나 중종 때에 이르러 유생들의 강력한 반대에 의해 수륙재가 국행으로 설행됨이 금지되었고 민간을 통해서만 전승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석문의 범(釋門儀 範)>>에 기록된 수륙재의 의식절차를 간단히 요약해보자.


먼저,


ⓐ. 재를 여는 취지를 밝히고,
ⓑ. 영혼이 불보살로부터 설법을 들을 수 있도록 보리심을 일으키게 하고,
ⓒ. 명부사자를 맞기 위한 분향의식을 한다.
ⓓ. 그 다음 명부사자를 초청하여 공양하고 축원을 봉송한다.
ⓔ. 명부사자를 대접해 보내고 불법승 삼보에 공양을 드린다.
ⓕ. 그 다음 호법제신 중 천, 팔부신당, 용왕을 청하여 공양을 드린후 비로소 삼보를 청하여 공양하고 불단에 모시게 된다.
ⓖ. 그리고는 천도의 대상인 영혼을 청하는데, 먼저 불보살 앞에 나아가기 전에 조욕의식을 행한다. 이는 몸을 청결히 하고 새 옷으로 갈아입는 의식을 말한다.
ⓗ. 이제 고혼에게 음식을 대접하는 의식이 펼쳐지는데, 이때의 음식은 모두 법식으로 변한다.
ⓘ. 마지막으로 참회와 사홍서원을 펼쳐지는데, 이제 고혼은 올바른 불제자가 되어 비로소 구제를 받게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수륙재의 전과정이 끝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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