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화경-2

2007. 6. 9. 23:01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법화경·관세음보문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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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법화경의 배경

법화경은 반야경의 사상을 계승한 것이라고 일러 온다. 그러나 방대한 반야경의 사상을 전 하는 말은 사뭇 적이므로 과연 반야경이 어느 정도 관계가 있는지 명확하지가 않다.

부처님 재세시에는 제자들은 자기 나름대로 부처님에게서 직접 가르침을 받았으므로 언젠가는 열반경지에 도달하여 성불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정진했는데, 부처님이 열반하신 뒤에 시간이 흘러 가면서 차차 부처님의 위대하심과 자기능력의 부족을 느끼게 되었다.여기서 부처님과 제자 사이에 넘기 어려운 절대적 차이가 있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수행하는 석문 제자들은 아무리 노력하더라도 번뇌가 다한 아라한의 지위까지는 이를 수 있지만 그 위에 대자대비의 큰 활동을 발휘할 부처님이 되 수 없다는 생각이 소승불교라는 불교도 사이에 믿어져 왔다. 이런 전통적 계통인 소승학파에 설일체유부 라는 큰 교단이 있었다. 이 교단의 교학을 정돈한 것이 대비바사론인데 여기에는 교학적으로 석문수행에 든 자는 부처님이 되는 코스에로 전향할수 없다고 되어있다. 모든 사람을 구제하는 대승불교에 의해서 불교를 이해하는 우리들로는 좀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반야경에서는 이러한 석문의 생각을 철저하게 비판한다. 유마경에서도 역시 그렇다. 유마경에서는 기성교단의 전문비구들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고루한 생각으로는 부처님께서 가르친 경지에는 도달하지 못한다고 하면서 소승불교 승자들을 비판하고 있다. 보살은 대승의 주역자가 되는데 소승의 경우에는 보살은 부처님이 될 특별한 후보자로서 전재가 인정이 되어있었다. 보살이란 원래는 부처님이 출가하여 오도하실 때까지를 이른 말인데, 이 보살에서 깨달음을 이룬 부처님은 깨달음의 지혜와 일체중생을 건지시는 자비가 혼연일체가 되어 위대한 인격자가 되시고 제자들을 인도하셨다.


5. 법화경은 때와 장소 그리고 대상을 초월한다.

'一時,佛,王舍城의 기사굴산중에 주하시어........'

법화경 첫머리는 이렇게 시작하여, 언제, 어디서라는 의문점을 밝히고 있다. 좀더 자세히 생각해 보자. 일시란<어느 때>의 뜻이다. 옛날 이야기를 시작할 때 <옛날, 옛날에......>하고 시작하듯, 서양의 이야기책들은하고 시작하여 <어느 때>를 가리키듯, 법화경의<일시>도 이와같은 때를 말하는 것이다. 법화경의 말씀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까닭도 바로 이 <어느 때>라는 말 때문인 것이다. 부처란 세존을 말하다. 왕사성이란 부처님 당시에 있던 마가다국의 도성 이름이며 현 인도의 비하르주 라디길이 바로 그 유적이 있던 곳이다. 세존께서 태어나셨을 무렵 인도는 전국시대였는데,동인도의 유력한 패자였던 마가다국은 세존께서 태어난 카비라국과는 꽤 멀리 떨어져 있으나 전국시대의 패자여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든 도시였으며 갖가지 종교가들도 모여들었다. 세존께서 수행하고 賁달음을 얻은 곳도 바로 이나라의 왕사성 근처였다. 이 지역이 보기드문 지형이어서, 수도하는 사람들에게는 좋은 수련장이기도 했다. 그것도 지금도 남아있는 성벽과 산마루에 세워진 사원으로 미루어 짐작이 된다. 지금도 참배하러가는 사람들이 있음을 볼 수 있다. 이와같이 정치.종교의 중심지에서 법화경이 설해졌다는 것은, 바른 가르침은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져야 한다는 종교적인 명제에 따른 것이라 하겠다. <일시>란 현실적인 기간이 아니라고 하면서 왕사성은 지금도 눈으로 유적을 볼 수 있는 역사 현실적인 성이라고 한다면 좀 오류가 있는 듯 하지만 법화경에는 이 기사굴산위에서 불제자들과 보살을 비롯하여 제석천, 월천자, 범천왕, 8대 용왕, 아수라들이 전부 모여있었다고 설해져 있다. 그런데 실지로 그 산정은 2백사람만 모여도 빽*할 정도로 작고 모이는 사람을 추정해 본다면 위의 그들(제석천, 월천자, 8대용왕, 아수라들)을 빼고 그들에 딸린 사람들을 포함한다면 10만은 족히 넘는다니 그 장소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는 말이 맞지않다. 하지만 좁은 장소에 이토록 많은사람, 귀신, 영혼을 모았다고 하는 것은 갖가지의 사람, 많은사람의 갖가지의 모습을 표현하려고 한 것이다. 따라서 누구나 그 자리에 있었다고 해도 무방하다.


6. 대승불교와 법화경

법화경의 연구가 점점 진전함에 따라 최근에는 여러 종류의 사본이 읽혀지고 있다. 법화경의 사본에는 네팔계와 캐시미르계 그리고 중앙아시아계 등 세 본이 잇다. 중앙아시아계에서 제일 큰 것은 제정러시아때 캐슈가르 총영사가 1903년에 입수한 것으로 페트로우스키본이 있는데 이에 의하면 불지혜가 대부분 불승으로 기술되어 있다. 또 성문승.연각승.불승으로 병렬하고 있는 데도 있다. 그러나 불지가 불승으로 쓰여지면서 삼승 중에 하나로 기술되고 있는 것은 아마도 이 본의 '화성유품'정도일 것이다. 화성유품에서 장자는 대증을 이끌어 보물이 있는곳을 향해 험난한 길을 가게 된다. 기진맥진하여 보물찾는 것을 포기하고 쓰러져가는 사람에게 힘을 불어넣어 주기 위해 도중에 가상의 호나성을 만들어 놓는다. 이 가상의 성은 중간 후게소인 성문지, 연각지이며 보물이 있는곳이 네팔계의 케른본에서는 불지혜, 중앙아시아계의 페트로우스키본에는 불승으로 되어 있으므로 성문승.연각승.불승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이 페트로우스키본의 화성유품을 제외하고는 과외에 있어 삼승 중에 하나를 불승으로 칭하는 용례는 없고 보살승이라고 한다. 여기서 페트로우스키본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느냐에 대한 문제가 생긴다. 여러 가지 견해가 있는데, 옛날에는 중앙아시아 사본이 가장 오랜 것으로 추정된 듯하나 최근에는 페트로우스키본에는 첨가한 부분이 많다든가 원문을 개변했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이 본에 개변이 있다고 한다면 본래 법화경에는 乘(승)이라고 하는 명칭도 삼승을 병렬할 때는 성문승.연각승.보살승이며 일승이라고 할 때는 불승인 것이다. 즉 일불승이라는 말은 있어도 일보살승이라는 말은 없는 것이다. 그러나 페트로우스키본에는 불지를 불승으로 치환시킨 것은 큰의미가 있다고 생각된다. 그것은 불승이란 과위예 있어 불지혜라는 점과 적어도 인위에서의 보살지는 아니라는 점이 여기서 명확히 밝혀지고 있다. 일반적으로 불승과 보살승을 동일시하기 때문에 불과 보살을 같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듯하나 적어도 법화경에는 구별하여 보아야 한다. 법화경 '방편품'에 '제불의 지혜는 심심무량하며, 그 지혜의 문은 난해난입하다. 일체 성문, 벽지불이 알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라는 유명한 말이 있다. 이것이 이승의 지와 불지혜를 대비하고 있는 것인데, 이에 대응하는 偈文(게문)에서는 이승 이외에 보살지도 추가하고 있다. 즉 부처님의 지혜는 성문.연각의 이승뿐 아니라 보살의 지혜도 초월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한다면 보살승과 불승을 단순한 의미에서 동일시하는 것은 법화경의 사고방식에 맞지 않다고 볼수 있다. 그러면 법화경이 일승에 의해 여러 가지 불교의 가르침을 통일시키고자 하면서 왜 보살승이라는 말을 <아함경>또는 <아비달마대비바사론> 등의 경우에는 삼승이 성문승.연각승.불승으로 되어 있다. 즉 보살승이라고는 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따라서 보살승이라는 말이 대승으로부터 쓰여졌다고 한다면, 불승이라는 말이 먼저이고 대승이 된후부터 보살승이라는 말로 환치되었다고 생각된다.

앞에서 서술했듯이 <아함경>이나 아비달마 등에서 보살승이라 말하지 않고 불승이라고 부를 경우의 불승이란 도대체 무엇을 가리키고 있는 것일까. <대비바사론> 등을 보면 역시 보살은 부처님이 되는 길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소승불교에서는 일체 중생이 곧 대승보살이라는 대승불교의 입장을 무시하고 인정하지 않는태도를 취하기 때문에 이같은 해석이 있을수 없다. 아비달마에서 보살이란 대개 부처님 전생을 가리키며 일체 중생이 보살이라고는 말하지 않는 것 같다. 불승이라 했을때의 보살이 어떤 의미의 보살이냐에 대한 설명이 없다. 이 경우 이중의 의미를 갖고 있다고 생각된다. 즉 <대비바사론>시대에는 대승이 성립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소승 쪽에서 본다면 불승은 석가보살이 부처님이 되는 길을 설한 것이지 일체 중생이 부처님이 된다는 보살승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불승을 소승의 바깥 쪽에 있는 대승측에서 본다면 일체중생이 부처님이 된다는 보살승과 같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불승은 이같은 이중적 의미를 지니고 소승아비달마에서 쓰여졌다고 생각되므로 어쨌든 불승이 바탕이 되어 거기서 보살승이 발달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불승이야말로 대승불교 발달의 원점이며 법화경은 그것을 보여 주고 있다 하겠다. 출가자의 부파교단에서 볼 때 불탑은 어디까지나 포교의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았을 수 있으며, 불탑의 가치를 승원의 중심적인 것으로 보지 않고 부속적인 하나의 포교수단으로 간주했었다. 즉 출가교단은 학문을 중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포교라는 한 단계 낮은 수단에 아무런 통제도 가하지 않았다. 따라서 불탑이라는 장소를 매개로 하여 자유스런 활동이 행해졌으며 이윽고 부파로부터 분리되어 대승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불탑은 대승과 소승을 잇는 장소가 되는 것이다. 법화경을 살펴보면 그것도 불탑숭배에 바탕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보탑품'의 서술에 의하면 대지가 갈라지고 거기서 백두산의 몇배나 되는 다보탑이라는 탑이 공중에 솟아오른다. 이는 현실적.물질적인 불탑은 아니며 정신적 의미를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이같이 불탑신앙에서 출발했지만 이를 초월하려고 했던 데서 대승불교는 발전했으며 <법화경>의 가르침은 불승을 기점으로 삼승을 통일하는데 있었다. 통상 삼승은 성문.연각.보살이라는 세 가지 형태의 순위로 되어 있으나 어느 쪽도 불제자라는 점에서 본다면 삼승에 순위가 있는 것은 아니다. 삼승 모두 부처님이 대한 신앙이라는 점에서는 같은 위치에 있으며 그러한 사람들이 부처님에 대한 신앙에 의해 통일된다는 점을 <법화경>은 가르치고 있다고 한다.


7. 법화경 바탕을 흐르는 것

법화경 가운데서 어느 점이 핵심이라고 할 것인가는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를 것이나, 신앙적 입장에서 본다면 역시 여래수량풍이 중심이라 할 것이다. 부처님은 먼 옛날에 이미 성불하셨지만 중생을 위하여 거짓 이 세상에 몸을 나투시는 것을 말하는 것인데 이것을 주체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신앙을 떠나 학문적 입장에서 보면 방편품을 중심으로 하는 성문 성불쪽이 법화경의 중심이라고 보는 편이 유력하다. 그 방편품에는, 부처님이 이 세간에 나타나신 것은 사람들에게 불지혜를 알리고 불지혜로 인도하여 깨닫게 하고자 하는 일 때문이라고 역설하신 것처럼 법화경 전체를 통하여 부처님의 자비가 흘러 내려오고 사람들에게 간절한 마음을 일으키기 위하여 80세에 입멸하신 뒤에도 부처님 보기를 원하며 일심으로 부처님을 생각하고 간절히 신행한다면, 부처님은 항상 그 앞에 모습을 나타내어 구원의 손을 펴신다고 말씀하고 있다.

「모든 사람이 내가 멸도에 든 것을 신복하여 질직하고 유연한 마음이 되어 일심으로 부처님을 보고자 하여 신명을 아끼지 않으면 그때에 내가 대중과 함께 영취산에 나타나리라.」말씀하고 있는데, 여기에서 법화경은 부처님의 대자비 위에 성립된 신앙경전이라는 것이 분명하다. 다시 말하면, 싸늘한 우주의 진리가 아니라 위대한 부처님의 생명의 흐림이 영원한 과거에서부터 현재로, 다시 미래로 흐르고 있고 그 가운데 우리들이 살고 있다는 것이 강조되고 있다고 본다. 그리고 법화경의 많은 부분에 어떠한 고난이라도 무릅쓰고 부처님 진리에 이르도록 정진 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으며 법화경을 널리 펴기 위하여는 모두를 희생하고 자기 몸마저도 버리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반복 설하고 있다.

이 점에서 흑자는 법화경이 광신을 설하는 기묘한 경전이라 하든가 또는 거기서 어떤 저항감을 품는 사람도 있으나 당시의 인도에서 보면 만인의 성불과 평등을 말하는 법화경은 대단한 이단 사상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큰 반발도 있었을 것이다. 이 점은 법화경뿐만 아니라 반야경에도 처음에는 마설 이라고 생각된 때도 있었고 또한 반야바라밀을 구하는 보살들이 신명을 버려 노력하는 것도 역설되어 있다. 신명을 아끼지 않고 진리를 구하며 가르침을 널리펴는 것은 대승 경전 전반에 통하는 보살의 이상인 것이다.

법화경의 근본은 부처님의 절대적인 자비심과 그것을 신뢰하고 신앙하는 사람들 사이의 너그러운 마음의 교통을 설하고 있는 것을 알아주었으면 한다.


8. 한국·중국의 천태종

1) 한국의 천태종

우리나라의 천태종은 고려 숙종 2년(1097)에 대각국사께서 개경(開京)에 창건한 국청사(國淸寺)에서 천태교관을 강의한 것을 개종(開宗)의 기원으로 삼으나, 천태교의는 이미 그 이전인 삼국시대부터 전래되어 활발히 유포되었다.

신라의 현광(玄光)법사는 중국에 건너가서 남악(南岳) 혜사대사(慧思大師)의 가르침을 받고 법화삼매를 증득하고서 귀국하여 대중을 모아놓고 소증(所證)의 법문을 전해서 그 문하에 깨달은 자가 적지 않았다고 한다.

고구려의 파야(波若)법사는 수(隋)의 개황(開皇) 16년(596) 법을 구해 중국에 들어가 천태지자대사를 모시고 공부하여 얼마 안되어서 크게 깨달은 바가 있었으며, 그리고 지자대사의 지시로 천태산 화정봉(華頂峯)에 올라가서 16년 동안 수행하고 대업(大業) 9년(613) 2월에 비로소 하산하여 불롱사(佛 寺)에 머물다가 곧 국청사(國淸寺)에 이르러 세상을 떠났다.

그 뒤에 신라의 연광(緣光)법사가 지자대사의 강하에서 수학하였고, 법융(法融) 이응(理應) 순영(純英) 등 3인이 중국 천태 제 5 조인 좌계현랑(左溪玄朗)대사의 강하에서 연찬하고 당의 개원(開元) 18년(730)에 세사람이 함께 법을 전지하여 본국에 돌아와서 전법 하였다고 한다.

음에 제관(諦觀)법사는 국내에서보다 송(宋)에 들어가 활동하였다. 그 당시 중국 불교 사정은 당무종(唐武宗)의 폐불(廢佛)과 주세종(周世宗)의 배불(排佛) 등의 법난을 겪고 또 5대의 병란 때문에 불전(佛典)은 분실되고 사탑(寺塔)은 파괴되었다. 특히 천태장소가 흩어져 없어짐으로써 강학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천태교학이 쇠미하였다. 그래서 이를 개탄한 누계의적(螺溪義寂)대사의 권유로 오월왕전숙(吳越王錢澁)이 사신을 고려에 보내어 천태전적(天台典籍)을 구하였다.

고려 광종(光宗) 11년(960)에 제관법사가 왕명을 받들어 많은 천태종 문헌을 가지고 송나라에 들어가 전해주었다. 이것이 송나라 천태종 부흥의 계기가 되었다. 제관법사는 중국에서 머문 지 10년, 유명한 천태사교의(天台四敎儀) 1권을 남기고 그곳에서 입적하셨다. 천태사교의는 천태교의의 강요(綱要)를 가르쳐보인 천태종의 입문서로서 중국*한국*일본 천태종에서는 필수교재로 사용되어 왔다.


2) 중국의 천태종

중국천태종 중흥에 기여하신 보운의통스님(242)

천태종 제16조 보운의통 (寶雲義通)스님은 우리나라 분이다. 중국에 건너가 명성을 떨친 우리나라 스님은 적지 않지만 한 종단의 조사가 된 예는 스님을 제외하고는 없다. 이런 점에서 천태종은 우리 민족하고는 더욱 각별하다. 의통스님은 천태 부흥조 담연존자 이후 천태를 부흥시킨 분이다. 스님이 활동하던 당시는 회창 폐불의 여파와 당말 오대의 혼란으로 선종을 제외한 불교계 전반이 침체에 빠져 있었던 때였다. 이러한 때 외국에서 유학온 의통스님이 다시 교학을 연구하고 지관을 수행하여 천태종을 다시금 중흥시킨 것이다. 의통스님은 진나라 년 간에 중국으로 건너갔는데, 먼저 법안종 덕소국사가 주석하고 있는 천태산 운거사 (雲居寺)에서 깨달음을 구하였으나, 이어 천태 제15조 나계의정 (螺溪義寂) 문하에 들어가 일심삼관(一心三觀)의 이치를 배웠다. 그리고는 "원돈의 교학이 여기에 다 있구나"하며 감탄하였다고 한다. 그러한 어느 날 스님은 일심삼관의 도를 조국에서 펴고자 행장을 꾸려 길을 떠났으나, 도중에 군수를 맡고 있던 태사 (太師) 전유치 (錢惟治)를 만나 귀국 포기 종용을 받고 중국땅에 그대로 머무르게 되었다. 송나라 개보 (開寶) 원년(968), 조사 (漕使)직을 맡고 있는 고승휘 (高乘徽)가 스님의 가르침을 여러 차례 받은 뒤 자신의 집을 전교원 (傳敎院)으로 희사하여 스님께 머물기를 청하였다. 이때에는 뒷날 천태 17조가 되는 법지지례 (法智知禮)가 스님의 문하로 들어왔다. 태평흥국 7년에는 보운선원 (寶雲禪院)이라는 사액을 하사 받았는데, 천태종 증흥도량인 보운원 이라는 절 이름이 여기서 비롯된다. 뒷날 법지지례와 같이 천태종을 이끈 자운준식 (滋雲遵式)도 이때에 제자가 된다. 의통스님이 이곳에서 천태교관을 세상에 편지 20여년, 단공 (端控) 원년(988) 10월21일에 오른쪽으로 누워 입적하시니 세수가 예순 둘이었다. 다비를 하니 사리가 뼈 속에 가득차 있었다. 이 사리는 아육왕사 (阿育王寺) 북서쪽에 안치되었다. 아육왕사는 중국 절강성에 있는데, 아육왕이 전한 사리탑이 있다. 이 절의 스님들이 평소 의통스님을 청해 법문을 듣는 일이 많았으므로 이곳에 안장한 것이다. 나중에 오석산으로 옮겨진 이 사리는 오색 광채가 영통하고 두드리면 옥과 쇠가 부딪치는 맑은 소리가 났다고 한다. 의통스님은 평소 사람을 부릴 때 "고향사람(鄕人)"이라고 하였다. 누가 그 까닭을 물으니 "나는 정토를 고향으로 삼는데 사람들이 다 이곳에 왕생할 것이기에 모두 나의 고향 사람이다"고 답했다고 한다. 의통스님에게는 관경소기 (觀經疏記)와 광명현찬석 (光明玄贊釋) 등 여러 저서가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하지만 스님의 사상은 제자 사명지례로 이어져 많은 저술을 낳게 한다. 의통스님의 또 하나의 제자인 자운준식은 스님을 이렇게 평하였다. "장안존자는 이미 돌아가셨고 형계스님도 떠나신 마당에 의통스님이 태어나시어 그 빛을 계승하였다. 우리 천태 일가의 큰 가르침이 이 세 현인에게 다 모여 있다"고 하고, 또 "의통스님은 천태 일가의 가르침 중 형계스님이 기록하지 못한 것을 다 기록하였고 사람들이 수행하기 어려운 사종삼매를 다 실천하였다"고 찬탄하였다. 스님께서 천태교관을 중흥시킨 데에는 스승 의적스님의 전적 수집과 제관법사의 저술 그리고 지례, 준식 등 뛰어난 제자가 있었기에 가능한 점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고국으로 귀국치 않고 이역 만리에서 천태중흥을 위해 매진한 스님이 계셨길래 가능하였음은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으리라.


9. 법화경과 일승사상

부처님의 본래 정신은 일반 민중을 구제하는 것이고 그 정신을 민중 가운데 살려가는 것이 이상이었다. 그러므로 부처님에 대한 절대적 찬양이 생기게 되고 신앙이 두터워 갔던 것이다. 이러한 사상에서 전문가에 의한 출가 불교를 소승이라고 비판하고 일반 민중을 지도하는 새로운 불교를 대승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래서 소승인 성문과 연각은 성불하지 못한다고 비난했던 것이다. 그러나 돌이켜 생각해 볼 때 이처럼 소승인을 제외해 버리는 것도 또한 본래의 부처님의 뜻과는 역행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반성도 일어난다. 이런 생각을 대표한 것이 법화경이다. 성문 연각을 포함한 모두가 성불한다고 하는 것이 본래 불교라는 말이다. 그래서 모두가 성불한다는 일승사상이 나타나 2승, 3승이라는 구별을 넘어서 통일된 입장에서 깨달음을 구해가자는 것이다.

법화경 서품에서 제9분 수학무학인기품까지는 성문이 등장하여 지금까지의 가르침은 과정의 가르침이고 참된 가르침은 누구나 성불하는 일불승의 가르침이라고 하였다. 거기에는 성문제자들을 차례로 불러 이제까지의 성문수행에서 보살 수행을 함으로써 부처가 된다고 보증을 하였다. 수기란 부처님이 미리 성불을 보증하는 것으로서 부처님과 제자 사이에 절대적 신뢰가 없으면 될 수 없는 것이다. 이 사실은 성불의 근본이라고 생각되어온 지혜를 얻는 일 이 신앙의 확립이라는 형태로 바뀐 것을 보이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성문 성불이라는 것이 법화경의 중심사상의 하나라고 말하게 되고 부처님이 모든 사람을 성불시킨다는 자비심과 그것을 절대적 신뢰하는 제자와의 마음의 교통이 그 바탕에 있어서 비로소 가능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그리고 다음에 부처님의 대자비에 근거하여 모든 사람이 성불하는 가르침을 어떻게 사바세계에 넓혀가느냐 하는 것이 하나의 안목으로 되어 있어 부처님의 사자로서 사바세계에 그 가르침을 넓혀 가는 보살의 활약상을 반복하여 말씀하고 있다.

다시 나아가 견보탑품에는 부처님께서 성문이 성불하신다는 것을 말씀하시자 별안간 땅에서 거대한 탑이 솟아 오른 것을 말하고 있다. 그 탑 가운데 다보여래가 계셔서 석가 부처님의 말씀은 진실이라고 큰 목소리로 증거하신다. 다보여래는 과거 먼 옛날부터 좌선하고 계시는데 이것은 영원한 부처님 법신의 표현이라고 생각된다. 이 다보여래의 권을 따라 석가 부처님이 그 곁에 앉으시니 이것을 이불병좌라 한다. 이것은 영원한 부처님과 현세에 인격적으로 완성하여 성불한 사람이 하나가 된 것을 나타내는 것이라 해석되고 있다. 즉 영원한 이법을 의미하는 법신과 우리들과 함께 살며 자기 완성을 한 석가모니불이 된 사람이 일체가 됐다는 것으로서 이것은 또한 석가불이 진리의 모습으로서 이 세계에 오신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런 가르침은 「견보탑품」에서 「종지용지품」,「여래수량품」에로 이어져 설명되고 있다.


10. 우리나라의 법화경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에 중국의 스님 순도에 의해 불교가 전래된 뒤 고구려의 혜자스님이 일본에 건너가 당시 일본왕의 태자였던 성덕에게 법화경을 가르쳤으며, 백제의 현광대사는 중국의 남악혜사대사로부터 법화경안락행문을 전수 받고 당시 백제 땅이었던 웅주 옹산에서 법화경을 폈고 또 신라의 원효대사는 법화경종요를 지어내고 會三歸一一佛乘(회삼귀일일불승)사상으로 삼국을 통일하는 원동력이 되게 하였다.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유교를 받들고 불교를 배척하기도 했으나, 천태종의 조구화상을 국사로 삼았으며, 세조는 간경도감을 두어 한글로 법화경을 인출하면서 신미대사와 함께 직접 법화경을 언해하였다. 한편 생육신의 한사람이었던 매월당 김시습은 법화경별찬을 지었는데 이것은 제1서품부터 제28품까지 모두를 찬양한 것이다. 특히 우리가 간과 할 수 없는 사실은 고려 고종 23년 (1236-1876)부터 조선조 고종 13년까지 약 640년간에 제일 많이 인출된 경전이 법화경이라는 사실이다. 이처럼 법호경이 수없이 번역되고 수지. 독송. 해설. 서사 되었던 까닭은 무엇일까. 이는 법화경이 삼승을 모아서 일승으로 돌아간다는 것과 석가모니께서 가야성을 떠나 6년 고행 끝에 도를 얻으신 것이 아니라 구원한 옛적부터 이미 부처님이었다는 사실 때문이다. 또 석가여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우리 일체 중생이 모두 다 법화경으로 성불할 수 있다는 증거를 보여 주시기 위해서라는 점이다.

이와 같은 겨리 내용에 따라 상하만민이 신앙으로 융합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도 종파를 가리지 않고 대승경전인 법화경을 수지 독송하고 있다.

법화경은 이처럼 우리 민족의 얼 속에 깊이 뿌리를 내린 불교사상의 정수라 할수 있다.


11. 참고 문헌

이 경전에 대한 주석으로는 楕의 天台大師가 저술한 法華三大部만큼 압도적인 영향력을 발휘한 주석서는 없다.

《법화현의》《法華文句》《마하지관》이 그것인데, 이것들의 저술을 통해 법화경을 주석했다기보다는 天台의 사상을 구성하는 재료로서 법화경을 사용했다는 느낌이 든다. 그러나 이 주석서들은 아직까지도 심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국내에서는 洪庭植 박사의 논문 〈法華佛敎硏究〉(1974)가 법화경의 역사 및 사상을 잘 정리하고 있다. 근래에 일본에서 발간된 문헌으로는 Shoko Watanabe《Saddharmapu**a **ika Manuscripts found in Gilgit 》(Tokyo : The Reiyukai, 1975)와 中央公論社에서 발행한 《法華經》Ⅰ,Ⅱ《大乘佛典》4,5,19,79,1976)가 있다. 법화경에 대한 최근의 연구서로는 春秋社에서 발행한 《法華思想》《講座·大乘佛敎》제3,1983)가 여러 학자들의 연구 성과를 정리하고있다.

출처: 성통공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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