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용화선원장 송담 스님, 추모 법문

2008. 7. 8. 11:42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제불조사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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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선사/고승] 전강선사 법문 오디오파일로 듣기와 송담큰스님의 전강선사 부도탑 제막식 법문: 마음공부에 도움되시길 발원하며 올립니다.

전강 선사 법문 audio file
  • 高臥 한단침(?緞枕) ; 6분 16초
  • 천원스님 이야기 ; 7분 35초
  • 법문청취와 화두 ; 5분 3초
  • 혜봉스님과 법거량(法擧揚) ; 4분 55초
  • 상량선 ; 7분 9초
  • 용성스님과의 법거량 ; 11분 43초
  • 안수정등(岸樹井藤) ; 8분 43초
  • 마조원상(馬祖圓相) ; 5분 48초
  • 만공스님의 인가 ; 2분 49초
  • 마조원상, 玄中玄, 用無生死 ; 12분 46초

    한국의 선지식 전강 선사 사리탑 제막식

    인천 용화선원장 송담 스님, 추모 법문



    만공 스님의
    수원 용주사 중앙선원 앞에 조성된 전강 선사 사리탑. 사진=고영배 기자
    법맥을 이은 근대 한국불교의 대표적 선지식인 전강 스님(1898-1975)의 사리탑 제막식이 봉행됐다.

    전강영신대종사문도회(회장 정무)는 전강 스님 입적 30주기를 기념해 4월 25일 수원 용주사에서 인천 용화선원장 송담, 석남사 회주 정무, 수덕사 수좌 설정, 불암사 회주 일면, 수원포교당 주지 성관 스님 등을 비롯 전국 선원 수좌 3백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전강선사 사리탑 제막 및 점안식’을 가졌다.

    송담 스님은 전강 스님의 오도송을 인용하면서 “전강 스님은 평소 법문에서 열반 전에 사리를 수습하거나 사리탑을 세우지도 말라는 언지가 있었지만 그
    한국불교의 대표적 선지식인 전강 스님.
    뜻을 어기고 이렇게 사리탑을 조성하게 된 것은 스님의 가르침을 정성스럽게 받들라는 주변의 권유 때문”이라며 “지금 스님의 육신을 눈으로 볼 수 없지만 스님이 남긴 법문을 법신사리로 삼아 정진하기를 바란다”고 법문했다.


    전국 선원 수좌 3백여 명 참석

    법천사 지광국사 현묘탑을 모형으로 조성



    이어 스님은 “전강 스님이 32년 전에 남긴 신골사리는 천재지변에 소멸될 수 있어도 스님이 남긴 법문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며 “사부대중은 스님의 법문을 통해 신심과 분심을 일으켜 몸과 마음에 해탈을 얻고 자각각타(自覺覺他)의 삶을 실천하라”고 당부했다.

    석남사 회주 정무 스님도 “조실 스님의 사리탑을 조성한 이유는 후학들이 수행하는데, 육신이나 물질적 가아(假我)에 속지 말고, 수행자자 직접 법신으로 깨달아 들어가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전강스님의 전법제자인 송담스님이 주장자를 들며 법문하고 있다. 사진=고양배 기자


    이날 용주사 중앙선원 앞에 조성된 전강 선사의 사리탑은 지난해 3월부터 전강영신대종사문도회가 2억 5천여만 원을 들여 조성한 것으로, 국보 제101호인 법천사 지광국사 현묘탑을 모형으로 했다.


    송담 스님의 은사, 전강 스님은 누구?

    -33세의 젊은 나이에 불지종찰 통도사 조실 지내
    -근대 한국불교 선가에 '큰 별'

    전강 스님(1898~1975)은 수좌계에서 ‘북 송담-남 진제’로 회자되는 송담 스님의 은사다. 전남 곡성 태생으로, 16세에 속가 모친과 사별하면서 출가사문의 길에 들어섰다.

    합천 해인사에서 인공 스님을 은사로 출가, 이후 응해 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받았다. 이후 스님은 8년간 곡성 태안사에서 치열한 정진 끝에 깨달음을 얻었으며, 25세에 만공 스님에게 선종 77대 법맥을 전수받았다.

    당시 33세의 젊은 나이로 불지종찰 통도사 조실로 추대됐으며, 이후 법주사 복천선원, 동화사 선원, 용주사 중앙선원 등에서 조실로 지내면서 후학을 지도했다.

    만년에는 인천 용화사에 법보선원을 개원, 중생교화를 했으며, 지난 1975년 법납 61세, 세수 77세로 열반에 들었다


    “전강 스님 육성법문이 바로 진신사리

    척사현정의 전강 스님 법문 따라 사리탑 봉행 조성


    수원 용주사 중앙선원 앞에 조성된 전강 선사 사리탑. 사진=고영배 기자


    다음은 인천 용화선원장 송담 스님이 전강 선사 입적 30주기를 맞아 4월 25일 수원 용주사에서 열린 ‘전강 대종사 사리탑 제막 및 점안식’에서 법문한 법어 전문.


    송담 스님 추모 법어 전문

    (주장자를 한 번 내리치고)

    작야월만루(昨夜月滿樓)
    창외노화추(窓外蘆花秋)
    불조상신명(佛祖喪身命)
    유수과교래(流水過橋來)


    어젯밤 달빛은 누각(樓)에 가득하더니
    창 밖은 갈대꽃 가을이로다.
    부처와 조사도 신명(身命)을 잃었는데
    흐르는 물은 다리를 지나오는구나.


    이 게송은 오늘 사리탑을 봉안하게 된 전강 영신 대종사의 오도송입니다. 이 오도송을 짓게 된 동기는 조실 스님께서 누데기를 입고 팔도를 생각하고 돌아다니실 때, 곡성의 강을 건너다가 ‘여하시조사서래의(如何是祖師西來意: 어떤 것이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인가?’라 생각하니, ‘담 넘어 온 거’라고 했다에서 비롯됩니다.

    조실 스님께서 그동안 가행정진 용맹정진을 해서, 상기가 치솟아 머리에 수십 개의 종기가 터지고, 코 구명과 목구멍에서는 벌건 피를 주야로 흘리시면서 정진을 쉬지 않고 그렇게 고행을 하셨습니다. 그러다가 툭 터져서 ‘어떤 것이 조사서래의요’ 하니, ‘산 넘어 온 것이라’ 했다. 거기에 이르러 천지가 무너지고 불조와 삼세제불과 역대조사가 그 안전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게송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그 이후로도
    법문에 앞서 주장자를 치켜든 인천 용화선원장 송담 스님.
    조실 스님은 계속 팔도를 두루 걸식하면서 그렇게 다니셨습니다. 그러다가 통도사에 이르렀을 때 머리는 완전히 깎지 않은 채, 옷은 누덕누덕 기운 누데기를 입고 들렀습니다.

    거기에 (마침) 구참 납자들이 조실 스님을 알아보고 “경봉 스님이 지금 법광이 나서 음담패설을 가리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니 당신이 오신 김에 경봉 스님을 만나보고 가십시오”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조실 스님은 “미친 사람을 만나 무슨 소용이 있나. 안 만나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니 대중이 밀고 끌고 가 경봉 스님 앞에 대면을 시켰습니다.

    그때 경봉 스님은 눈이 퍽 뜨여 정말 법광이 일어난 상태였습니다. 조실 스님이 그 앞에서 원상을 딱 그려 놓고 “입야타 불입야타(入也打 不入也打:들어가도 치고, 들어가지 아니해도 친다)”고 말하니, 경봉 스님이 손으로 땅에 그린 원상을 뭉갰습니다. 그러니 조실 스님이 큰 고함을 지르며 “네 송장 치려라”라고 했습니다. 거기에서 경봉 스님이 기상이 달라지며 무릎을 치면서 “옳다. 다시 물어라” 말했습니다. 벌써 기상이 다르니까 조실 스님이 경봉 스님을 골자기로 끌고 가니, 대중이 따라 나섰습니다. 그러자 조실 스님이 대중들에게 “여기서부터는 따라오면 안 된다”면서 딱 못 오게 막았습니다. 그리고 경봉 스님과 단 둘이 끌고서 딱 물으니, 여지없이 일러줬습니다. 거기서부터 경봉 스님의 법광이 일시에 싹 없어졌습니다. 그리고서 정말 여법한 수행을 계속하다가 조실 스님이 33살 때 통도사 조실이 됐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 33살 청년이면, 어떻게 그런 젊은 새파른 청년을 불지종찰 통도사 조실로 모실 수가 있겠습니까? 조실로 모실 때, 통도사 입구에서부터 당시 김구하 스님을 비롯해 통도사의 대원로 스님이 양쪽 마중을 나와, 33살짜리 영신 수좌가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돼서 통도사 보광선원 조실을 필두로 해서 전국 큰 선원의 조실을 두루 영림하시고, 무문관 조실 등 수십 곳의 조실로 지내다가 결국은 인천 용화사의 갯벌가에 선원을 창설하셨습니다. 그러다가 1963년에 용주사에 중앙선원을 창설한 것입니다.

    조실 스님은 사리를 수습하지 못하도록 엄명을 내리셨습니다. 평소에 사리에 대한 법문을 대단히 엄격하게 또 기회가 있을 때마다 설하셨습니다. 즉 “사리가 나와서 오색방광을 하니 도인이다. 그것이 바로 불법의 표현이다. 이런 생각을 갖는 것은 삿된 소견”이라고 하셨습니다. ‘척사현정(斥邪顯正)’의 법문을 늘 하셨습니다, 이후 조실 스님이 1975년 인천 용화선원에서 신도 49재 법문을 설하고 점심 공양을 한 뒤 열반에 드셨습니다.


    전강영신대종사문도회 스님들이 송담 스님의 법문을 듣고 있다.


    조실 스님이 ‘사리를 수습하지 말라. 탑을 세우지 말라’라고 구체적인 그런 말씀을 안 하셨다고 해도, 일생동안 설하신 법문 내용 가운데 충분히 ‘척사현정’의 법문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조실 스님이 열반에 드시자, 다비를 모셨다. 그해 겨울은 혹독한 추위가 몰아쳤습니다. 화장을 짚으로 했는데 5일간 해도 다비가 끝이 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5일되는 날 다시 장작을 쌓아 다비 마무리를 지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수십 명의 사부대중이 그릇과 젓가락을 갖고 둘러앉아서 차근차근 사리를 주워 담았습니다. 그리고 내가 그 자리 옆에 앉아 사리를 줍는 대로 곧바로 쇠절구통 안에 넣었습니다. 사리가 그 쇠절구통에 가득 찼습니다. 그 모양이 마치 산초나 송이를 따나가 모아놓은 것처럼, 푸른 것도 노란 것도 있었습니다. 그것을 다 모아진 다음에 제 손으로 쇠절구 공이로 ‘쿡쿡’ 찧었습니다. 찧어서 담아 배를 타고 인천 앞바다에 들어가 뿌리고 돌아왔습니다. 돌아와 다비를 모신 던 법당 앞마당을 평지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런데 문중의 권속 몇 사람이 들어와서 “부처님이래로 역대 조사들이 모두 사리탑을 모셨는데, 조실 스님의 사리탑을 모실 사리는 잘 간수했습니까?”라고 제게 물었습니다.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찰나간에 ‘아까 조실 스님 화장 모신 곳을 흙을 다시 뒤집고 물에 씻으면 사리탑에 모실 사리가 많이 나올 것이다’라고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그리고서 대중 울력으로 다시 흙을 뒤집고 물에 씻어보니, 조실 스님의 사리가 한 주먹이 나왔습니다. 사진도 찍어놨습니다. 그리고서 인천 용화사 법당에 앞에 사리탑을 모시게 됐습니다. 그 때 모신 사리 일부를 이번 용주사 사리탑에 모시게 됐다.

    조실 스님은 ‘사리를 수습하거나 사리탑을 조성하지 말라’고 했는데, 그 뜻을 어기고 이렇게 사리탑을 모시게 된 허물을 제가 다 지겠습니다. 스스로 뜻을 어긴 그 허물을 제가 지겠습니다. 어째서 스승의 뜻을 어기면서까지 이렇게 사리탑을 용화사와 용주사에 모시게 된 것은 조실 스님이 사리를 수습하거나 사리탑을 조성하지 말라고 했기 때문에 조성한 것입니다. 조실 스님이 사리탑을 잘 조성하라 했으면, 제가 사리탑을 조성하지 말자고 앞장을 섰을지 모릅니다. 조실 스님이 사리탑을 새우지 말라고 했기 때문에, 제가 여러 권속과 용주사 주지 스님과 신도들의 정성스런 신심을 받들어서 사리탑을 모시게 됐습니다.

    사리탑은 조실 스님의 분신입니다. 조실 스님이 31년 전에 열반을 했지만, 용화사와 용주사 등의 모든 수행자들은 조실 스님이 현재 살아계시는 것으로 믿고 그 법문에 의지해 정진하고 있습니다. 비록 조실 스님의 육신은 우리 눈으로 뵐 수가 없지만, 조실 스님의 법문은 신심 있는 눈으로 보면 조실 스님의 법신을 뵐 수 있습니다.

    사리에는 2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화장을 모셔 나온 사리는 신골사리라고 합니다. 부처님이나 조사스님, 큰 스님네들이 남겨놓은 법문이 법신사리라 합니다. 비록 신골사리는 천재지변이 일어나면 언젠가는 소멸이 될 수가 있지만, 남겨 놓은 법문은 영원불멸인 것입니다.

    전강 영신대종사는 신골사리도 남기셨고, 영원불멸한 법신사리도 남겨놓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결제해제 때, 그밖에 안거 중에도 언제라도 녹음법문을 통해 조실 스님의 법문을 들을 수 있습니다. 삼세제불과 역대조사가 있으셔서 이 사바세계에 훌륭한 조사와 선지식이 있었지만, 그 법문이 글자이나 경판으로 남아있어도 육성을 듣기는 어렵습니다.

    조실 스님은 말년에 아침마다 법문을 녹음한 것을 대단히 많습니다. 비록 녹음법문은 녹음기계에서 나오는 것이지만, 그 음성 속에는 조실 스님의 살아계시는 법신이 설법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스님은 만공 대선사의 법을 이으셨고, 만공 선사는 전법게를 이렇게 해주셨습니다.

    불조미증전(佛祖未曾傳)
    아역무소득(我亦無所得)
    차일추색모(此日秋色暮)
    원소재후봉(猿嘯在後峰).


    부처와 조사가 일찍이 전하지 못했는데,
    나도 또한 얻은 바 없도다.
    이날에 가을빛이 저물었는데
    원숭이 휘파람은 뒷 봉우리에 있구나.


    경허 스님의 법을 이으신 만공 대선사. 그 밑에 많은 선지식이 배출됐습니다. 그 여러 큰 스님들에게 전법게를 내리셨습니다. 그 만공 스님이 전강 영신선사에게 이 전법게를 내리셨습니다. 만공 스님이 내리신 많은 전법게 가운데 비교를 하면, 전법게 마다 만공 스님의 뜻이 그 속에 담겨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생각하기에, 이 전법게는 과거와 미래의 어떠한 전법게보다도 이렇게 훌륭한 전법게는 드물 것이라고 봅니다.

    이 전법게 속에는 만공 선사의 위대한 활구참선, 최상승법의 사상이 담겨있습니다. 또 전강 스님의 깨달음을 인증하는 투철한 인가의 거룩한 뜻이 담겨있습니다. 우리는 다행이 그런 선지식의 법을 의지해서 공부할 수 있는 복을 받고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조실 스님의 녹음법문을 신심으로 잘 듣고 열심히 참선하면, 부처님에게 최상승법을 깨달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아까 제가 사리에는 신골사리와 법신사리가 있다고 했습니다. 선배동료 여러 스님들, 형제자매, 청신사 청신녀 여러분, 조실 스님의 법문에 의지해 열심히 철저히 정진하시면, 여러분 몸속에 진신사리가 나오게 될 것이고, 그 진신사리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조실 스님의 다비를 모시고 그 많은 사리가 나왔습니다. 부처님 사리도 지혜로 사람에 의해 8등분으로 해 나눌 것을 제안, 싸움 없이 모든 나라에 전해졌습니다. 한국에는 오대산, 설악산 정암사, 통도사, 사자산 법흥사, 범어사, 화엄사에 모시게 됐습니다. 그런 사리를 소중히 여기는 뜻은 부처님의 분신이고 그 분신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불법을 믿는 마음을 승화되기 때문입니다.

    여기 전강 스님의 사리를 모시게 됨으로써 사부대중은 이 사리탑을 돌면서 마음의 때를 씻고, 과거의 잘못을 참회하면서 신심과 분심을 내서 열심히 정진하십시오. 부처와 조사와 전강 스님의 뜻을 몸과 마음에 체득해 실천하십시오. 자각각타(自覺覺他), 부처님의 근본 사상을 우리 몸으로 실천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두서없는 말로 말을 맺고자 합니다.


    (주장자 한 번 치고 내려오다)

  • <출처 - 현대불교신문/ 선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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