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의 선지식' 전강 영신

2008. 7. 8. 12:02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제불조사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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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불교의 선지식' 전강 영신
◇ 전강스님

현대의 고승인 전강(田岡)의 본관은 동래 정씨(鄭氏)이고, 본명은 종술이다. 법호는 전강이며, 법명이 영신(永信)이다.

1898년 11월 16일 전라남도 곡성군 입면 대장리에서 아버지 해룡(海龍)과 어머니 황계수(黃桂秀) 사이에서 태어났다. 일곱 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여동생도 나이 어려서 죽자 계모의 눈칫밥을 먹으며 자랐다. 서당조차 갈 처지가 못되는 가난한 살림살이에 그가 열두살 되던 해 갑자기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나자, 계모는 이복동생만을 남겨둔 채 도망가 버렸다. 그나마 얼마 안되는 땅을 욕심낸 친척에 의해 고향에서도 쫓겨나다시피 했다.

이처럼 유년시절의 전강은 깊은 상처와 절망으로 가득찬 인생을 보내야 했으며, 처절한 방황생활이 시작됐다. 어린 나이에 전강은 이곳 저곳 떠돌면서 사냥꾼 조수, 잡화점 점원, 유기공방의 풀무꾼, 유기그릇 행상 등 다양한 밑바닥 삶을 겪었다.
전강은 유기장사를 하러 다니다 불법과 인연을 맺어 처음에는 곡성군 옥과면에 있는 관음사로 출가했다. 이후 해인사로 옮겨 행자생활을 다시 하다, 1913년 해인사에서 인공(印空) 화상을 득도사(得度師)로, 제산(霽山) 화상을 은사(恩師)로, 응해(應海) 화상을 계사(戒師)로 득도하고 법명을 받았다.
1918년 해인사 강원에서 대교과(大敎科)를 수료한 뒤, 전강은 도반의 갑작스런 죽음을 목격하고 삶의 무상함을 다시금 느꼈다. 이에 전강은 참선공부를 발심하고 김천 직지사 천불선원(千佛禪院)에서 제산화상의 가르침을 받으며 불철주야 정진하였다.
그후 그는 예산 보덕사(報德寺), 정혜사(定慧寺) 등에서도 참선에 전력했다. 특히 이기간 동안 전강의 수행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였다고 전한다. 상기병에 걸려 덩어리 같은 피가 코와 입으로 흘러나왔고, 목에서는 노란 피가 솟았고, 머리는 뒤통수가 터져 도저히 삭발조차 할 수 없었다. 이때 전강이 엉덩이 살이 썩어 문드러지면서도 100일 동안 잠을 자지 않고 수행했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당시 수좌들은 그를 가리켜 ‘설산수행수좌’라는 별명을 붙일 정도였다.
전강은 23세 때인 1921년 곡성 태안사(泰安寺) 입구에서 불현듯
“운무(雲霧) 중에 소를 잃었으니, 어떻게 해야 소를 찾느냐? 담 넘어 참외나 따오너라”는 구절이 떠오르면서, 무(無)자 화두가 한순간에 타파되었음을 깨닫고
‘어젯밤 달빛이 누각에 가득하더니       (昨夜月滿樓)
창 밖엔 갈대꽃 하얗게 핀 가을이구나  (窓外蘆花秋)
부처와 조사도 목숨을 잃었건만          (佛祖喪身命)
흐르는 물은 다리를 지나오네             (流水過橋來)’
 
라는 오도송을 남겼다.
그뒤 전강은 당대의 선사들인 한암(漢巖), 용성(龍城), 혜월(慧月), 혜봉(慧峰), 보월(寶月) 등을 일일이 찾아가 자신의 깨달음의 실체를 확인받는 과정인 인가를 받았다.
1923년 전강은 만공(滿空)을 찾아가 예를 올리니, 만공이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는고”라 물었다. 이에 전강이 다시 예를 올렸다. 만공이 거듭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는고”라고 묻자, 그는 서슴없이 주먹을 불끈 들어 보였다. 그러자 만공이 “네 견성(見性)은 견성이 아니다”고 말하며 여지없이 부인하고 상대하지 않았다.
거기서 전강은 다시 발심하여 판치생모(板齒生毛·판대기 이빨에 털이 돋았다)를 화두로 잡고 용맹정진하였으며, 반철만에 홀연히 마조원상공안의지(馬祖圓相公案意旨)를 분명히 깨쳤다.
 
그 길로 만공을 찾아가 오도처를 이르자, 만공이 그의 확철대오(廓徹大悟)를 인가하고, 옛 조사들의 중요한 공안에 대한 탁마(琢磨)를 낱낱이 점검해 주었다. 그뒤 전강이 만공의 곁을 떠나려 하자, 만공이 묻기를 “부처님은 계명성(啓明星)을 보고 깨달았다는데, 저 하늘에 가득한 별 가운데 어느 것이 자네의 별인가”라 했다. 그러자 전강이 곧 엎드려 땅을 더듬는 시늉을 하니, 만공이
 
부처와 조사가 일찍이 전하지 못하여    (佛祖未曾傳)
나 또한 얻은 바 없다네                        (我亦無所得)
오늘 가을빛도 저물었는데                    (此日秋色暮)
원숭이 휘파람은 뒷산 봉우리에 있구나  (猿嘯在後峯)’
 
라는 전법게와 함께 법호를 내리고, 선종 제 77대의 법맥(法脈)을 전수하였다.
 
이후 전강은 십여년 동안 전국을 돌면서 거지 차림으로 법거량과 만행을 통해 한국선종의 웅대한 경지를 이루었다.
마침내 전강은 33세 때인 1931년 통도사 보광선원(普光禪院)의 조실을 시작으로, 1932년 범어사 조실, 1934년 법주사 복천선원(福泉禪院), 1936년 김천 수도선원(修道禪院), 1948년 광주 자운사(紫雲寺) 등 전국의 유명한 선원의 조실을 역임하면서 후학을 지도하였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전강이 광주에 구멍가게를 차리고 장사하면서 제자 송담(松潭)의 오도를 위해 심혈을 기울였던 일화가 유명하다.
그뒤 전강은 1955년부터 해남 대흥사 주지, 담양 보광사 조실, 인천 보각사 조실을 역임하였고, 1959년에는 구례 화엄사 주지 및 전라남도 종무원장이 되었다. 1960년에는 망월사 조실로 있다가, 1963년 인천 주안동 용화사(龍華寺)에 법보선원(法寶禪院, 현 용화선원)을 개설하여 그곳에서 15년동안 후학을 지도하였다.
이외에도 1962년 대구 동화사 조실, 1966년 부산 범어사 조실, 1967년 천축사 무문관 조실 및 대한불교조계종 장로원 장로를 역임하였으며, 1970년에는 용주사에 중앙선원을 창설하였고, 1974년에는 지리산 정각사(正覺寺) 선원의 조실도 역임했다.
 
전강은 “부처의 가르침은 방편에 불과하니, 언하대오(言下大悟)하라”는 말을 즐겨 썼다. ‘살아있는 단 한마디의 말’로 ‘무명의 덫’에서 벗어나라는 할(喝)이다. 전강은 평생을 활구참선(活句參禪)을 제창했으며, 판치생모 화두로써 학인들을 제접했다. 또한 그는 입적하는 날까지 10여년 동안 새벽마다 수행자들에게 설법했으며, 특히 700여 개의 육성 테이프를 남겨 후학들이 참선공부를 할 수 있는 지침을 마련하였다.
전강은 1975년 1월 13일 제자들을 모아놓고
무엇이 생사대사(生死大事)인고,
할(喝)!
구구(九九)는 번성팔십일(飜成八十一)이니라”
는 법문을 남기고, 좌탈입망(坐脫入亡)하니 세수 77세, 법랍 62세였다.
제자로는 전법제자인 송담을 비롯, 정공(正空), 정우(正愚), 정무, 정대(正大), 정락 등 50여명과 손상좌 200여명이 있다. 그가 남긴 저서로는 제자들이 엮은 ‘전강법어집’이 전한다.

 
전강은 마조(馬祖)의 즉심즉불(卽心卽佛, 마음이 곧 부처)이라는 돈오적(頓悟的) 인식과 임제(臨濟)의 무위진인(無位眞人)의 법음(法音)으로 중생의 무명(無明) 거울을 닦아주던 독창적인 개안종사(開眼宗師) 였다. 그리고 그는 경험이나 지식을 철저히 배제한 즉각적인 깨달음을 강조하였고, 거침없고 번뜩이는 선기(禪機)와 치열한 정진력을 갖춘 정신적 거인이었다.
특히 전강은 20대 초반에 깨달음을 얻고 30대 초에 조실로 추대된 ‘선가(禪家)의 대종장(大宗匠)’으로서 ‘한국의 달마선사’로 추앙받는다. 또 그는 독창적 오도(悟道)의 세계를 열어 당대에 ‘지혜 제일’의 선승으로 일컬어지며, 수많은 수행자를 길러 한국 근대선종의 법맥을 정립시키고 꽃피운 선지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