삿된 지식 버리고 마음의 눈으로 광명보자

2008. 7. 17. 10:00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제불조사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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삿된 지식 버리고 마음의 눈으로 광명보자”
혜암스님

“본성은 영원하고 무한하여 
하늘과 땅 무너져도 
자기는 변함없어요” 
불법은 본래 부처님과 
달마스님이 오기 전에도 있었습니다. 
남산에 구름 일어나면 북산에 비 내리고, 
구름 흩어지면 청산이 나타나지 않았습니까. 
이 곳에 모인 대중들에게 묻노니 한 마디 일러 보시오.
 “대체 만 길 되는 구덩이 속에 있는
 사람을 어떻게 해야 구해내겠는가?” 
공의 경계 걱정말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밝은 달을 바라보면 옛 길을 밟으리라. 
푸른 구름과 들의 학은 짝을 지어 오가는데 
흰 바위 푸른 솔은 온몸을 드러내네. 
큰 도(道)에 이르는 문은 없습니다. 
그러나 본질을 떠난 지식과 학문은 깨끗하고 순진한 
인간의 본래 마음을 더렵혀서
 인간을 타락하게 하기가 일쑤입니다. 
아무리 좋은 보물도 깨끗한 눈에서는 장애가 되고 
거울 위에 먼지가 쌓일 수록 마음의 눈은 
더욱 더 어두워지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마음의 눈을 가리는 삿된 지식과 학문을
 미련없이 버리고 허공보다 깨끗한 마음으로 돌아가 
마음의 밝은 눈을 활짝 열어 무한의 광명을 뚜렷이 바로 봅시다.
 이것이 바로 조사선입니다. 
우리 자신은 원래 구원되어 있습니다. 
본래 모습은 먼지에 덮인 구슬과 같습니다. 
먼지가 아무리 쌓여도 구슬의 본 성질은 변함없지 않습니까. 
먼지를 닦아내면 본래 깨끗하고 
아름다운 구슬을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또 닦아낸 구슬은 오래도록 빛날 것입니다. 
본성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영원하고 무한합니다. 
설사 허공이 무너지고 땅이 없어져도 자기는 변함이 없습니다.
 우주의 삼라만상이 모두가 자기이기에 미물, 곤충, 
유·무정물 할 것 없이 모두 자기인 것입니다. 
모든 진리는 자기 속에 구비되어 있기에 만약 자기 밖에서 구하면, 
이는 바다 밖에서 물을 구함과 같으며 잘못된 법입니다. 
현대는 물질만능에 휘말려 자기를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자기는 바다와 같고 천상천하에서 최상의 보물입니다. 
바다를 봐야지 거품을 따라서는 안됩니다. 
거품은 물질일 뿐입니다. 
따라서 부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대중을 구원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이 세상이 본래 구원되어 있음을 
가르쳐 주려고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깨달음을 얻으시고 21일 뒤 녹야원에서 
아약교진여 등 5비구에게 최초로 설법하실 때 
“나는 중도를 정등각했다”고 하신 것입니다. 
부처님의 중도설은 모든 양변(兩邊)을 여읜데서 하시는 
말씀이기에 중도와 변견(邊見)을 다 버리고
 정등각(正等覺)을 이루어야 합니다. 
중도는 부처님 당시에만 쓰던 것이 아니고, 
고금을 막론하고 불교의 
근본적인 가르침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런 이유로 중도를 알면 불법을 알고, 
불법을 알면 조사선(祖師禪)을 알며 
견성(見性)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선의 궁극적인 목적은 견성성불이며 구경각입니다.
 즉 깨달음을 증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견성의 내용이 무엇이냐 하면 바로 
중도를 정득각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견성했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것은 진정한 깨달음이 아닙니다. 
조사선은 도(道)를 깨닫는 것이 아니라 
깨닫는 그 자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깨달음을 증득한 수행자라면 반드시 
스승의 한 마디에 대해 분명히 두 마디로 받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은 한 길이며 한번의 견성은 
모든 것과 통하기 때문입니다. 돈오돈수니 
점수니 하는 논쟁이 필요없는 까닭도 여기에 있습니다. 
스님들이 속세를 등지고 출가한 목적은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견성성불을 위해 출가한 것이 아닙니까. 
견성에 이르는 길 중에서 가장 
좋은 방편이 바로 화두 참구라고 생각합니다. 
깨달음은 일반적인 알음알이를 투과하지
 않으면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모든 사람들의 스승이 될 수 있습니다. 
물론 활구참선을 정진하고 있다는 
대전제를 달아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생활 태도는 우리가 일하고
 장사하는 동안에도 계속되어야 합니다.
 화두를 놓지않고 계속 의심하며 곱씹어야 합니다.
 앉으나 서나, 기쁘나 슬프나 화두를 
항상 잡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느 순간에 낮과 밤을 잊어버리고 결국 
우리 자신 또한 잊어버리게 됩니다. 
이것이 올바른 화두 참구법이다.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세간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당연히 대부분 삼독에 찌들어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는 부처님의 도를 이룰 수 없습니다. 
일등 신도가 되기 위해서는 
세간 속에서도 참선을 지속해야 합니다. 
참선에는 간화선, 염불선, 묵조선 등이 있습니다. 
이중에서 간화선이 으뜸입니다. 
바로 화두에 대한 ‘의심’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의심 삼매가 다 지나고 나면 아주 깊은 
깨달음 즉 견성을 이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최상승의 도(道)인 만큼 시간과 
노력을 허비하지 말고 수행정진해야 합니다. 
어제도 이렇게 공부를 안하고 
지나가니 죄와 허물이 하늘에 넘치고 
오늘도 닦지않고 이러하니 호랑이 밥이로다. 
둘 셋은 묻지 않거니와 격 밖의 한 마디는 어떻게 하려는가. 
동쪽에 해가 뜨니 낮과 같이 광명이 비치고 
무차선회를 하니 비로불이 광명을 놓네. 
주인공아, 예예 하는 것이 이뭣고. 
백암산 꼭대기 뿌리없는 나무는 
가을바람 아니라도 단풍이 아름답네. 
수좌: “참다운 도와 실상관에 대해 일러주십시오” 
혜암스님: “미혹과 깨달음을 쳐부수니 
하늘과 땅이 밝아지도다. 이것을 잘 이해하면 
참다운 도를 알 수 있어. 깨달음 그대로가 실상이며
 삼라만상 그대로가 실상이야. 깨닫고,
 못 깨닫고가 문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