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에서의 궁극적 실재

2008. 7. 17. 16:05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728x90

    ♡ - 불교에서의 궁극적 실재 - ♡ - (2) 궁극적 실재는 실체 아닌 깨달음 속에 존재 금강경(金剛經)에는 “만약 형상으로 나를 보려거나 음성으로 나를
    찾는다면 이 사람은 사도(邪道)를 행함이라 여래를 능히 보지 못하리라”
    고 경계하고 있는 것이다. 참된 부처님의 모습은 부증불감(不增不減)한
    제법의 진여 실상 그 자체이다. 〈화엄경〉 세간정안품(世間眼品)에
    “부처님 몸은 청정하고 항상 고요하다. 시방(十方)세계를 비추더라도
    그 자취가 없고 형체를 나타내지 않으며 마치 허공에 뜬 구름 같다.
    이처럼 부처님의 몸은 고요한 선정의 경지이므로 어떤 중생도 생각으로
    헤아릴 수 있다.
    부처님 몸은 다할 수 없으며 모양이 없으니 무엇에나 걸림이 없다”
    고 설하고 있다.
    대승의 반야사상에서는 법신을 공(空)의 다른 표현이라고도 본다.
    공성의 도리를 용수(龍樹)는 “소멸되지도 않고, 생기지도 않으며,
    단일하지도 않고, 여럿도 아니며,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는다”고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평등일미 (平等一味)한 제법의 진실상이 곧 공성 (空性)이며
    진여(眞如)라고 하는 것이다. 쓰이는 맥락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으나, 법성(法性)·불성(佛性)·
    여래장(如來藏) 등의 용어도 본질적으로는 진여와 동일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법성(法性)은 항상 변하지 않는 법의 본래의
    성품이자 체성(體性)이다. 〈승만경〉에는 “법신을 떠나지 않고
    여래장(如來藏)이 있고, 또한 여래장을 떠나지 않고 법신이 있다” 고 보고 있으며, 〈대승기신론〉에는 진여는 적정한 무활동의 체가 아니라
    무명(無明)의 연을 만나면 진여의 체는 생멸하는 만유가 된다고 논하고있다.
    이것은 마치 물과 파도의 관계와 같다고 비유한다. 중생계를 떠나지 않고
    법신이 있으며 법신을 떠나지 않고 중생계가 있다는 것이다.
    〈돈오입도요문론(頓悟入道要門論)〉에서는 “마음이 무너지지 아니함을
    아는 것이 실상법신(實相法身)이며, 마음이 만상을 포함함을 아는 것이
    공덕법신(功德法身)이며, 마음이 무심임을 아는 것이 법성법신(法性法身)
    이며, 근기따라 응하여 설법함이 응화법신(應化法身)이며, 마음이 형상이
    없어 얻을 수 없음을 아는 것이 허공법신(虛空法身)이다” 이는 5종 법신설을 들고 있다. 또한 “이러한 법신은 증득할 것 조치 없으며,
    얻음이 있음을 증득으로 삼는 이는 곧 삿된 견해를 지닌 증상만인(增上慢人)
    이며 외도“라고 단언하고 있다. 여기에서 불교의 궁극적 실재를 이해함에 있어서 특히 주의해야 할 것은
    궁극적 실재는 존재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실상을 바르게 보는 깨달음
    속에서만 존재한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궁극적 실재를 불교에서는 언제나
    이원적 분별을 떠난 인식과 체험적인 차원으로 설명하고자 하는 것이다.
    법신을 일심(一心)이나 여래장(如來藏), 불성(佛性)과 같이 마음의 문제로
    이해하려고 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