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양 있는 것은 허망하다

2008. 12. 11. 11:02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오매일여

728x90


 

               
      “부처님께서 중생을 제도하십니까?”

      “정말로 여래께서 제도할 중생은 없느니라.
      나[我]도 오히려 얻을 수 없는데 나 아님이야 어찌 얻을 수
      있겠느냐! 부처와 중생을 모두 다 얻을 수 없느니라.”

      “현재 부처님의 32상(相)과 중생 제도가 분명히 있는데
      스님께서는 어찌 없다고 말슴하십니까?”

      “경에서 말씀하시기를,‘무릇 모양이 있는 존재는 모두가
      허망하니, 만약 모든 모양을 보되 모양이 아닌 줄을 알면
      곧 여래를 보게 되느니라’고 하셨다.
      부처니 중생이니 하는 것은 모두 네가 허망하게 지어낸 견해
      로서,
      오로지 본래의 마음을 알지 못한 탓으로 그 같은 잘못된 견해를
      내게 된 것이니라.
      부처의 견해를 내는 순간 바로 부처에 끄달리고, 중생의 견해를
      내는 순간 중생에 끄달린다.

      범부다 성인이다 하는 견해를 내고, 더럽느니 깨끗하다느니 하는
      견해를 내는 등이 모두 그 장애를 받느니라.

      그것들이 너의 마음을 가로 막기 때문에 결국 윤회하게 된다.
      이것은 마치 원숭이가 무언가를 들엇다 놨다 하느라고 쉴 때
      가 없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진정한 배움이란 모름지기 배울 것이 없어야 한다.
      범부도 성인도 없고 깨끗함도 더러움도 없으며, 큼도 없고 작음도
      없으며 번뇌도 없고 인위적 작위도 없다.
      이와 같은 한 마음 가운데서 바야흐로 방편으로 부지런히 장엄하는
      것이다.

      설혹 네가 3승 12분의 가르침과 모든 이론들을 배운다 하더
      라도,
      그 모든 것을 다 버려야 한다.
      그러므로 ‘가진 것을 모조리 없애 버리고 오직 침상 하나만
      남겨 두고 병들어 누워 있다’고 한 말은 바로 모든 견해를 일으
      키지 않음을 말한 것이다.

      한 법도 가히 얻을 것이 없어서 법의 장애를 받지 않고,
      삼계의
      범, 성의 경계를 훌쩍 벗어나야만 비로소 세간을 벗어난 부처님
      이라고 하느니라. 그러므로 말하기를
      ‘허공처럼 의지할 바 없음에 머리숙여, 외도의 굴레를 벗어나는
      도다’고 하였다.

      마음이 이미 다르지 않기 때문에 법 또한 다르지 않으며, 마음이
      하염 없으므로 법 또한 하염이 없다.
      만법이 모두 마음으로 말미암아 변한 것이다. 그러므로 나의 마음
      이 비었기 때문에 모든 법이 공하며, 천만 가지 중생들도 모두 다
      같은 것이다.

      온 시방의 허공계가 같은 한마음의 본체이니, 마음이란 본래 서로
      다르지 않고 법 또한 다르지 않건만, 다만 너의 견해가 같질 않으
      므로 차별이 있게 되느니라.
      비유하면 모든 하늘사람들이 다 보배 그릇으로 음식을 받아 먹지만
      각자의 복덕에 따라 밥의 빛깔이 다른 것과 같다.

      시방의 모든 부처님께서는 실로 작은 법도 얻은 것이 없으니,이것을
      이름하여 무상정각이라 한다.
      오로지 한 마음일 뿐, 실로 다른 모양이 없으며, 또한 광채가 빼어
      날 것도 없고 나을 것도 못할 것도 없다.
      나을 것이 없기 때문에 부처라는 모양이 없고, 못할 것이 없기 때문
      에 중생이라는 모양이 없다.”

      “마음이야 모양이 없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어찌 부처님의 32상
      (相) 80종호(種好)와 중생을 교화하여 제도하는 일이 전혀 없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32상은 모양에 속한 것이니,‘무릇 모양 있는 것은 모두 허망하다’
      라고 한 것이요, 80종호는 색깔에 속한 것이니,'만약 겉 모습으로
      나를 보려하면 이 사람은 삿된도를 행하는 것이니 여래를 볼 수 없느
      니라’고 하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