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복보다 더 시키먼 조중동K의 속내여

2009. 6. 4. 20:01일반/금융·경제·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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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복보다 더 시키먼 조중동K의 속내여 [2009.06.05 제763호]
[표지이야기-분노의 기억]
족벌언론과 관제방송 KBS의 ’애도 저널리즘’…타살 공범관계 뒤덮으려 ‘탈정치’ 덧칠하다
당신은 슬프던가?

<조선일보> 제호 아래, 5월의 폭우를 맨몸으로 맞고 선 봉하마을 추모객들의 먹물 같은 표정 사진은 당신 심장 안으로 삼투압되던가? <동아일보> 호외판 1면 가득 실린 망자의 얼굴 사진을 보며, 30m 바위 아래로 자유낙하해 ‘쿵’ 하고 마침표를 타자(打字)한 어느 굴곡진 삶의 중력가속도가 당신 가슴에도 와서 울리던가? “그분이 다 안고 가셨는데 이젠 싸움 그만해야”라고, 자갈치 아줌마의 회한을 생선 토막 치듯 집자(集字)해 ‘화합과 단결’의 메시지로 재구성한 베를리너판 <중앙일보> 1면 고딕 제목을 볼 때, 당신도 자살 너머 망자의 유훈을 서늘하게 대면할 수 있던가?

» 시민분향소가 설치된 서울 덕수궁 대한문 옆 돌담에 신뢰하는 언론을 묻는 대자보를 시민들이 붙여놓았다. 사진 <한겨레21> 김정효 기자

난감함에 영민함 더한 지면의 흔적

당신이 이들 신문을 보면서 감정이입이 되지 않았다면 그건 당신 탓이 아니다. 최근 ‘노간지’ 사진들을 보거나 블로거들이 쓴 글을 읽으면서 가슴이 먹먹했던 경험이 있다면 더욱 그렇다. 원인은 그들 신문 안에 있는 게 확실하다. 조·중·동의 애도에는 당신의 공감을 방해하는 무언가가 있다. 그게 무얼까?

‘애도’(哀悼)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사람의 죽음을 슬퍼함’이라고 나온다. 동사의 품성을 지닌 이 명사는 ‘감정’과 ‘행동’ 사이를 아득하게 열어놓는다. 사람의 죽음을 대하니 저절로 슬퍼지는 감정일 수도 있지만, 슬퍼하는 격식을 애써 갖추는 것일 수도 있다. 조·중·동에 슬픔의 진정성이 조금이라도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슬픔에 관한 한 ‘행동’이 ‘감정’에 선행했고, 그보다도 먼저 셈 빠른 계가(計家)가 있었음은 분명하다. 그들은 노무현 전 대통령 자살이라는 난감한 사태를 접하고 숙달된 본능으로 영민하게 계산부터 했을 것이다. 지면에는 그 ‘난감함’을 ‘영민함’이 서둘러 뒤좇아간 자국들이 선명하다. 그들의 숙달된 본능은 하나의 계보도에서 유래한다.


언론이 자살을 다루는 방식은 대상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이름 없는 과객이 지하철에 몸을 던져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때는 일단 앞에서 사건 발생 개요를 정리한 뒤, 한 문장으로 된 자살 동기 분석과, 역시 한 문장으로 된 열차 운행 지연 사실을 병렬 배치하는 방식이 정형화돼 있다. 자살한 사람에게는 제가끔의 동기와 심리상태가 있기 마련이지만, 언론은 그 동기를 자신들이 만들어놓은 몇 가지 제한된 범주 가운데 하나에 기계적으로 배치한다. 생활고 비관, 성적 비관, 신병 비관, 실연 비관…. 자살 동기는 철저히 ‘개인화’하고, 사회적 맥락을 짚는 일은 거의 없다. ‘사회화’되는 것은 오직 ‘열차 운행 지연’이라는 공중에게 분산된 피해뿐이다. 이런 보도 방식은 최근 택배 노동자 고 박종태씨의 자살을 다루는 데도 그대로 연장된다.

천금 같은 사람 목숨과 길어야 몇십 분인 열차 운행 지연이 하나의 천칭저울 위에 올려지는 이런 유사 공리주의적 시각은, 그러나 유명 연예인의 자살을 만나면서 180도 뒤집어진다. 조문 오는 동료 연예인들 모습 사진 한장 한장까지 뉴스로 다루는 방식으로, 언론은 한 개인의 죽음에 과도하게 몰입한다. 이름하여 ‘조문 저널리즘’이다. 이 과정에서 자살 동기와 관련해 온갖 추론이 쏟아지고, 추론들은 다시 대중의 ‘쑥덕공론’과 괴소문으로 확산되며, 언론은 그걸 받아 다시 보도하는 확대재생산 순환 고리가 형성된다. 그러나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자살한 개인의 존재감은 지하철 투신 자살자와 별반 다르지 않다. 살아서 상품으로 유통됐던 연예인은 죽어서도 여전히 소비 대상일 뿐이다. 드물게 나오는 애도 표현조차 마케팅 용도를 넘어서는 법은 없다.

자살 동기는 일단 개인화하고 본다

연예인의 자살이 상품화를 넘어 첨예한 정치·사회적 이슈가 되는 경우도 있긴 하다. 고 최진실씨가 자살하자 정부·여당은 일명 ‘최진실법’을 도입하겠다고 나섰다. 이 법의 핵심은 고소·고발이 없어도 수사기관이 사이버상의 글의 모욕성 여부를 수사해 기소할 수 있도록 하는 사이버 모욕죄다. 일부 언론은 두 손 들어 환영했다. 그러나 최진실씨의 상장례(喪葬禮) 전 과정을 샅샅이 생중계했던 것이 그녀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었듯이, 최진실법도 그녀의 넋을 달래기 위한 제도는 아니다. 공권력이 사이버 여론을 쉽게 통제할 수 있는 무소불위의 권한을 손에 쥠으로써 표현의 자유가 억압받을 것은 자명하다. 최진실씨의 죽음은 상업적 목적뿐 아니라 정치적 목적으로도 ‘활용’됐다. 그녀의 자살을 악성 댓글 탓으로만 돌린 정부·여당과 일부 언론에게 ‘자살 동기 규정’은 그 자체로 권력이다.

» 지난 4월20일, 100여 개 시민사회언론단체 회원들이 서울 중구 태평로 조선일보사 앞에서 ‘장자연 리스트’에 언급된 언론사 대표의 이름을 공개한 국회의원과 시민단체 대표들을 고소한 <조선일보>를 규탄하고 있다. 사진 연합 형민우

같은 연예인이면서도 고 장자연씨 자살 사건은 거꾸로 언론의 보도 행위가 매우 자제(?)된 경우다. 특정 언론이 사건에 연관된 것이 이런 이례적 상황이 연출된 직접적 배경이었다는 건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우화만큼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자살한 연예인의 사생활을 저인망 쌍끌이로 바닥까지 훑어 상품화하는 것도, 정반대로 유통 자체를 틀어막는 것도 모두 언론 자신이다. 특히 장자연씨 자살 보도(또는 보도 통제) 행태는 한 개인의 자살 동기를 철저히 개인화하는 보도가 그저 저널리즘의 기법 문제를 넘어선 것임을 암시한다. 개인의 자살은 외부와 연관된 ‘사회적 타살’인 경우가 대부분이며, 언론도 거기에 얼마든지 직·간접적으로 연관되거나 개입될 수 있다. 따라서 자살 동기를 한사코 개인화하는 언론의 보도 행태는 정치적 맥락에서 읽어내야 한다.

언론이 자살을 다루는 방식은 대상에 따라 크게 달라지는 것 같지만, 변하지 않는 것들도 있다. 첫째, 자살 동기를 개인화한다는 것, 둘째 특정한 목적에 따라 담론을 주조한다는 것인데, 둘 다 언론이 그 자살과 맺고 있는 관계(연관·개입)의 결과물들이다. (최진실씨 자살 보도의 경우 그녀의 죽음을 특정한 목적 아래 복무시켜 사회적 의제로 전치한 예외적 사례처럼 보이지만, 개인화가 개인의 주체성을 인정하지 않는 ‘배제’의 논리와 ‘소외’의 양태라는 점에서 숨진 최진실씨 자신에게는 같은 결과로 나타난다.) 언론의 자살 보도는 이들의 함수관계에 ‘자살자가 누구냐’라는 변수를 대입해 이뤄지는 변주다. 노무현 전 대통령 자살 보도도 이 틀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저널리즘의 관점에서 노 전 대통령 자살의 가장 큰 특징은 ‘서거’로 규정된 사건의 ‘사이즈’다. 언론도 자주 접하기 힘든 초대형 사건이다. (사건의 크기가 커질수록 언론의 ‘선택권’은 제한되고, 일단 보도부터 해야 한다.) 그 압도적 크기가 모든 언론에 당혹감 속에서도 애도부터 표명할 수밖에 없게 한 요인이다. 방송들은 서거 당일 곧바로 특집을 편성해 사건 초반 고만고만한 팩트들을 돌려가며 종일 방송을 쥐어짰다. 많은 신문들이 방송과 인터넷보다 훨씬 느리면서도 제작 공정은 번잡하고 도달 범위마저 좁은 호외를 발행한 것도 적극적으로 애도를 나타내기 위한 ‘미장센’이라고 볼 수 있다.

호외 발행은 애도 드러내려는 미장센

그러나 노 전 대통령의 자살은 단순히 초대형 사건이 아니라 전형적인 ‘정치 사건’이다. 언론에 등장하는 모든 사건은 정치적 맥락이 있고, 앞에서 말한 대로 자살 사건은 크든 작든 그 맥락성이 도드라지지만, 노 전 대통령 자살 사건은 맥락적인 정치성을 뛰어넘어 ‘정치’ 자체를 직접 지시한다. 그리고 언론들은 예외 없이 그의 자살에 어떤 식으로든 정치적으로 깊이 연관돼 있다. 개중 조·중·동은 그의 정치인생 전반에 걸쳐 가장 적대적 관계에 있었으며, 그의 자살과 직접적인 인과관계에 있는 검찰 수사 과정에서도 정황을 피의 사실로 확정해 대서특필하는 데 앞장서왔다. (이 부분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한국 언론은 거의 없다. 특히 지난해 사장이 강제 교체된 뒤 빠르게 관제방송화하고 있는 한국방송은 조·중·동과 함께 추모 시민들의 집중적인 비난을 받고 있다. 이 글 안에서 ‘조·중·동’의 현재적 의미는 ‘조·중·동·K’다.)

한 가지만 예를 들어보자. 노 전 대통령이 자살 전 가장 가슴 아파했다는 ‘명품시계’ 사건 보도는 검찰과 언론이 합작해낸 의제 가운데 단연 걸작이었다. 수사 중인 사건에 대한 수사기관의 발표와 언론 보도에 확정판결 전 무죄 추정의 원칙과 피의 사실 공표죄 조항을 적용할 수 있는지는 심각한 논쟁거리이지만, 검찰이 공식 발표 대신 특정 언론에 추문 성격의 의혹을 슬쩍 흘리고, 언론은 제대로 확인하지도 않고 이를 대서특필하는 ‘짬짜미’ 관행은 논쟁 대상에서도 예외다. 명품시계 보도도 검찰 발표가 아닌 검찰 내부 ‘빨대’(취재원을 가리키는 언론계 은어)가 한국방송 기자에게 얘기를 흘려 나온 것이다. 검찰 수사 책임자도 “인간적으로 형편없는 빨대”라며 ‘색출’을 다짐했듯이, 이같은 검찰과 언론의 ‘부창부수’는 도덕성과 청렴의 이미지를 가진 노 전 대통령의 아킬레스건을 절단하려는 정치적 공격이었다.

그 뒤 언론들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선정 보도를 이어갔다. 그 백미는 지난 4월24일 <조선일보>가 장식했다. 그동안 ‘P’라고만 보도됐던 시계가 ‘피아제’였다며, 1억원대 피아제 시계 사진과 함께 국내에 5~6개밖에 없는 모델이라고 밝혔다. 기사 하나만 놓고 보면 <조선일보>의 표현은 절제돼 있다. 그러나 다른 관련 기사들과의 맥락에서 보면, 모델의 희소성을 강조함으로써 기호학적 함의는 빵빵한 풍선처럼 잔뜩 부풀어 있었다. 이를테면 이 기사는 컷과 컷을 이어붙여 서사적 이미지를 창조하는 ‘몽타주’라는 영상편집 기법이 발휘된 기사다(<조선일보>는 지난해 촛불정국 때 문화방송 〈PD수첩〉의 미국산 쇠고기 편에 대해 ‘몽타주 기법을 악용한 거짓 선동’이라고 공격한 바 있다).

검증 불가능하게 된 희화화한 가십들

‘공소권 없음’으로 검찰이 수사를 종결해 노 전 대통령이 재임 중 600만달러에 대해 알았는지, 대가성이 있었는지는 물론 명품시계 사건의 실체적 진실을 가려줄 사법적 절차도 모두 중단됐다. 노 전 대통령의 자살에 어떤 영향을 얼마나 미쳤는지 알 수 없지만, 이 부부를 희화화한 가십들도 영영 진실 검증이 불가능하게 됐다. 다만 노 전 대통령이 망인이 되고 난 뒤, 그가 생전 동창생들에게 “억대 시계는 본 적도 없다. 박연차 회장이 자신의 비서실장을 형님(노건평씨) 집으로 보내 회갑 기념으로 대신 전달해달라고 요청했던 것으로 나는 한번도 보지 못했다”고 말했다는 보도가 나왔을 뿐이다. 이 보도에 따르면, 건평씨 부인의 전화를 받은 권양숙씨가 “되돌려주든지 형님이 가지시라”며 거절했다고 한다.(<한국일보> 5월27일치 “동창생들 ‘억대 시계 본 적도 없다고 억울해해’”)

노 전 대통령의 자살이 ‘정치적 타살’로 읽힐수록 언론은 난처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난처함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도 언론 자신에게서 나왔다. 그것이 바로 ‘애도 저널리즘’이다. 모든 언론이 일시에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빌고 나섰다. 조·중·동도 뒤질세라 의관을 갖추고 지면을 통한 조문 행렬의 맨 앞에 섰다. 그러나 언론의 애도는 그 대상이 누구든 자신을 위한 정치적 계산을 자락에 깔고 있다. 특히 자살자의 죽음에 연관된 흔적을 가리는 데 애도 저널리즘은 교묘하게 활용된다. 그들의 조사(弔詞)는 고인의 몫이 아니라 그들 자신을 위한 어지러운 방언이자 주술이다.

<조선일보>는 “노 전 대통령이 편히 잠들 수 있게 하자”면서 “유서에서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 아니겠는가.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고 했다. 그런 노 전 대통령이 자신의 죽음이 또 다른 정치적 혼란이나 사회적 갈등을 부르고 국민 사이에 대립과 분열이 격화하는 계기가 되기를 원치 않았을 것이다”(5월25일치 사설)라고 주장했다. 청자가 특정되지 않은 유서이니 해석의 여지가 큰 게 사실이지만, 죽음을 앞둔 고인의 심경을 이처럼 ‘초현실적’으로 번안하는 짜깁기 재주가 놀랍다. 세상 민심이 뜻대로 가지 않으니 공포 섞인 신경질도 부른다. “고인이 편히 쉬도록 국민장을 화합과 통합의 장(場)으로 만들어야 한다. …‘검찰과 정권 그리고 일부 언론의 합작 살인’ 운운하는 것은 무책임한 망발이다. …정부가 주눅이 들어 일부 과격세력에 휘둘리는 나약한 모습을 보인다면 큰일이다.”(<동아일보> 5월28일치 사설)

조·중·동은 한사코 고인의 죽음에서 정치적 맥락을 지우라고 요구한다. ‘탈정치화’의 기획이다. 하지만 그런 주장을 펼칠수록 그 자체가 고도의 정치 행위일 수밖에 없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비는 것은 노 전 대통령이 일생에 걸쳐 축적한 메시지를 온전히 지워버리고 저승에서 그저 1인분으로 편히 살도록 하자는 개인화 전략이다. 남은 사람들은 기억을 모두 지우고 오로지 생로병사와 윤회의 헛헛함에 대해 슬퍼해야 한다고 겁박한다. 고 장자연씨의 자살에 대해 그러했듯이 죽음과 관련된 어떤 사회화도 용납할 수 없단다. 당신들의 애도는 ‘배설’일 뿐 ‘표출’이어서는 안 된다는 얘기다.

강요 또는 공포 섞인 신경질

이들에 비하면, 고인의 죽음에 대해 입에 담기 힘든 망발을 서슴지 않는 극우 논객들은 구순기 발달 단계도 거치지 못한 자의 인정 투쟁이거나 그저 튀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는 처세술의 달인이려니 싶어 그나마 측은함이라도 든다. 누가 그들의 얘기에 조금이라도 귀를 기울이겠는가. 그저 자기들끼리 학예회 수준의 죽음의 굿판을 벌이라고 놔둬도 된다. 그러나 조·중·동의 애도 저널리즘은 고인에 대한 죽임의 공범 관계를 덮으려는 교묘한 현장부재증명(알리바이)이자, 앞으로도 정치적·사회적 타살을 끝없이 양산하려는 현란한 언어의 권력투쟁이다. 그들의 애도를 보고 슬픔을 느끼지 못하는 건 문제가 아니다. 두려움을 느끼지 못하는 게 진짜 위험한 문제다.

안영춘 <미디어스>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