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수가 보현에게 보낸 쪽지

2009. 8. 7. 21:22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금강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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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수가 보현에게 보낸 쪽지

 현종스님 

 

오래전 한 스님이 문수보살님을 친견하고 지혜를 얻고자 했다. 스님은 그것을 수행의 제일목표로 삼고 자나깨나 문수보살님을 부르고 늘 그 생각에 젖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길을 가다가 마을 어귀에서 늙은 농부 한명을 만났다. 농부는 처음 만난 스님에게 도움을 청하였다. 농부는 마을 쪽을 가리키며 “스님! 저 마을로 들어가서 몇 번째 골목을 지나게 되면 길가에 허름하게 생긴 집이 하나 있습니다. 그 집에 어미 돼지 한 마리가 새끼를 많이 낳아 젖을 먹이고 있을 겁니다. 그 돼지 밥통에 이 쪽지를 던져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라고 부탁했다.

 스님은 어차피 지나가는 길이고 하니 “그러죠”하고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면서 쪽지를 받아들고 마을로 갔다. 농부가 말한 대로 찾아가니 역시 커다란 어미 돼지 한 마리가 누워서 이제 갓 태어난 여러 마리의 새끼들에게 젖을 먹이고 있었다. 스님은 농부의 부탁대로 무심코 그 쪽지를 밥통에 던져주었다. 그러자 어미 돼지가 주둥이로 몇 번 쪽지를 뒤적이더니 우적우적 삼켜버리는 것이었다.

 그런데 잠시 후, 그 어미 돼지가 죽어버리는 게 아닌가!

 스님은 이상하게 생각하며 새끼 돼지들을 난감한 마음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바로 그때 밖에 나가 일하던 집주인이 돌아오더니 어미 돼지가 죽어 있는 것을 보고는 깜짝 놀라면서 스님을 붙잡고 ‘아니, 이게 어찌된 영문이요?’라고 다그쳐 물었다.

 난감해진 스님은 자초지종을 말하였다. 하지만 농부는 그 말을 믿지 않고 종이쪽지 하나 먹고 돼지가 죽을 리가 없다며 이유를 대라고 우격다짐을 계속했다. 결국 돼지의 배를 가르게 되었는데 거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이보게나, 축생의 몸으로 너무 오래 있다간 잘못하면 매하는 수가 있네!

 -문수가 보현에게


 보현보살이 돼지의 몸으로 변해서 신심 좋은 농부를 돕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문수보살은 보현보살이 축생의 몸으로 너무 오래 있다가 식識이 어두워질까 봐 걱정이 되어 쪽지를 보낸 것이었고, 어미 돼지가 쪽지를 보고 금방 죽은 이유는 보현보살이 문수보살의 충고를 듣고 축생의 몸을 버린 것이었다. 물론 축생의 몸으로 있다고 해서 보현보살의 식이 어두워질 리 없다. 두 보살님은 생사윤회에 속박되지 않고 보이지 않게 자유자재로 사바세계에 다니시며 중생을 제도하는 보살의 원력과 자비행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그 스님은 문수와 보현 두 보살님을 함께 친견하였으니 그 느낌은 어떠했을까?


 우리는 매일 오전11시를 전후해서 부처님 전에 공양을 올린다. 그러면서 부처님을 청하는 대목에서 다음과 같은 게송을 노래한다.

 

부처님 몸은 우주 안에 널리 가득 차 계시니

 佛身普遍十方中(불신보변시방중)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부처님도 이와 똑같네.

 三世如來一切同(삼세여래일체동)

 그 크고 넓은 원력의 구름은 항상하여 다함이 없고

 廣大願雲恒不盡(광대원운항부진)

 넓고 넓은 깨달음의 바다는 아득하여 헤아리기 어렵네.

 汪洋覺海渺難窮(왕양각해묘난궁)


 이처럼 부처님은 원력의 구름으로서 이 우주에 가득 차 계신다. 그러니 부처님 뵙기를 간절히 그리워하면 뵐 수 있다. 우리는 과거 의상대사가 낙산사 관음굴에서 각고의 기도 끝에 살아계시는 관세음보살님을 몸으로 뵈었던 일이나, 진표율사가 금산사 근처에서 피나는 용맹정진으로 역시 살아계시는 지장보살님과 미륵보살님을 친견했던 일, 그리고 오대산 상원사에서 세조 임금이 문수동자를 만나 나병을 고쳤다는 사실을 역사를 통해서 알고 있다. 뿐만 아니라 다섯 살 난 동자승을 혼자 놔두고 멀리 탁발을 나갔는데 그만 눈이 와서 올라가지 못하게 되어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를 하니 눈이 녹을 때까지 관세음보살님이 다섯 살짜리 동자승을 키워주었다는 데서 이름 지어진 ‘오세암’에 얽힌 이야기를 늘 듣고 있다.

 다시 몇 년 전 이야기이다. 잘 아는 신도 보살이 절을 많이 하다가 무릎에 이상이 생겼다. 여러 가지로 치료해 보았으나 잘 낫지 않던 차에 피를 빼면 좋아진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래서 피를 빼는 치료를 했지만 상태는 오히려 훨씬 악화되어 절에 나오는 것마저 어렵게 되었다. 당시 그 신도가 절에서 맡고 있던 소임은 새벽 일찍 절에 가서 절의 대문을 여는 것이었다. 그래서 누구보다  새벽 일찍 일어나 절에 나가야 하는데 무릎이 심하게 아파 난감한 상황에 빠지게 되었다.

 그렇게 지내던 어느 날이었다. 여전히 무릎은 아프지만 법당문을 열어야 하니 새벽 일찍 일어나 법당에 나갔다. 법당 탁자 청소를 하다가 문득 아무 생각 없이 어린아이처럼 부처님 무릎을 살며시 만지며 ‘부처님 제가 새벽에 법당문을 열어야 되잖아요? 그러니 제발 제 무릎 좀 고쳐주세요!’하고 말했다. 그랬더니 순간 무릎이 시원해지면서 그 자리에서 무릎 통증이 깨끗하게 낳는 것이었다. 그 후 지금까지도 아프지 않고 잘 지내고 있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부처님께 공양 올릴 때 외우는 게송처럼 언제 어디서나 불보살님이 계시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럼 어떻게 하면 불보살님을 뵐 수 있을까? 그것은 불보살님을 뵙고자 하는 마음이 간절하여 정말 진실한 일념一念이 되었을 때나 부처님의 진실한 뜻이 세상에 널리 퍼질 수 있는 계기가 되었을 때이다.

 세상의 라디오나 TV 방송국에서는 항상 전파를 보내고 있는데 거기에 주파수나 채널을 잘 맞추면 방송을 듣고 볼 수 있다. 그와 마찬가지로 부처님께서도 원력의 빛과 전파를 항상 보내고 계시는데 우리가 기도와 정진이라는 방법을 통해 마음을 부처님의 주파수에 맞추면 항상 부처님을 보고 들을 수 있다. 우선 주파수를 맞추는 것도 중요하지만 깨끗한 화질과 음질로 방송을 수신하기 위해서는 트랜지스터라디오나 TV 단말기가 불순물이 없이 깨끗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참회하는 마음과 오롯한 신심 그리고 간절한 일념이 되어 의심이나 망상 분별이 없는 상태가 되어야 비로소 우리도 맑은 삼매 속에서 부처님을 만날 수 있다.


 <금강경>에서도 ‘부처님은 이 금강경을 듣고 청정한 믿음을 일으키는 사람들을 다 아신다’ 고 하였다. 또 ‘미래 선남자 선여인이 이 경우 수시 독송하면 여래는 부처의 지혜로 이 사람들이 모두 한량없는 공덕을 성취하게 될 것임을 다 알고 다 본다’고 설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부처님께서 늘 우리 주변에 계시다는 사실을 굳게 믿고 뵙고자 해야 한다.

 그러나 한편 <금강경>에는 ‘부처님께서는 오고 감이 없고, 앉거나 누움이 없다’고 설해져 있고 또 ‘형색이나 음성으로써 부처님을 찾으면 그 사람은 삿된 길을 가는 사람’이라고 설해져 있으니 우리와 같은 형색이나 인격성으로만 부처님을 찾는다면 그것 또한 부처님의 형색이나 음성을 집착하는 것이 되어 크게 문제가 된다.

 그럼 우리는 불보살을 어떻게 생각하고 뵙고자 해야 할까?

 우선 불보살님들께서는 중생을 떠받치는 불가사의한 원력과 빛으로 그리고 복전으로 항상 어디에나 계신다. 그러나 결코 형색이나 음성으로서의 집착 대상이 될 수 없다. 오직 사량思量이나 분별分別을 넘어선 간절한 원력과 순수한 무념삼매無念三昧 속에서만 그때그때 불가사의하게 뵐 수 있다. 부처님을 뵈면 <반야심경>에 나오듯 사바세계에 넘실대는 일체 고액의 바다를 건널 수 있다.


출처; 현종스님 ‘너와 나의 마음고향‘ 조계종 출판사 p48-56

 


 


 

    성격과 습관

     

     

    성격은 마음가짐이며 습관은 연속된 마음가짐이다.

    성격이 습관을 만들고 다시 습관이 성격을 만든다.

     

    성격이 나쁘면 좋지 않을 습관을 갖게 되며

    좋지 않은 습관을 가지면 성격이 더 나빠진다.

     

    성격이 좋으면 좋은 습관을 갖게 되며

    좋은 습관이 계속되면 더 좋은 성격을 갖게 된다.

     

    성격이나 습관은 잠재적 성향으로 자신의 행위에 대한

    과보이고 오랫동안 계속된 것이라서 쉽게 바뀌지 않는다.

     

    바뀌지 않은 것을 바꾸려 하는 것이 괴로움이므로

    바꾸려 하지 말고 단지 대상으로 알아차려야 한다.

     

    성격이나 습관을 있는 그대로를 알아차리게 되면

    고요함과 지혜가 생겨 변화될 수있는 여지가 있다.

     

    성격과 습관은 바뀌지 않지만 알아차리는 힘을 키워서

    스스로 걸리지 않는 것이 성격을 극복하는 유일한 길이다.

     

                                   - 물 위에 떠있는 공처럼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