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심명은 우리에게 무엇을,...

2010. 1. 28. 21:05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신심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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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절없이 흘러가는 세월 속에서 법당에 오시기 전 어제까지 무엇들을 하고 계셨는지 궁금합니다.


아침에 눈뜨면 가족을 위해 가정을 꾸리고자 그토록 바쁘셨는데 그렇게 소중했던 가정과 가족들을 위해 살아왔건만, 정작 가족 간에 바쁘다는 생각으로 대화가 소흘하고 서로의 생활에 매이다 보면 가장 가깝다는 가족들마저도 서로의 내면의 번뇌와 갈등을 몰라주었기에 이번 버지니아공과대학과 같은 총기사고가 나게 되는 것입니다. 


전 번 주에는 신심명 강의에 앞서 선종이 발생하게 된 동기와 배경들에 대해 말씀을 드렸고 이제 신심명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명(銘)이란 일반적으로 비석에 선대의 뛰어난 인물의 공적이나 사물의 내력이나 내용을 새긴 한문 글귀를 말하는데, 신심명은 승찬스님께서 우리가 처음 발심해서 마지막 성불할 때까지 가져야 하는 운하응주하는 마음자세에 대해서 남겨 놓으신 사언절구(四言節句)로 해서 146구 584자로 설한 운문체(韻文體)로 “조사선의 핵심을 운문의 세계” 로 나타낸 것이 특징으로 8만대장경의 심오한 불법도리와 천7백공안의 격외도리 전체가 다 포함되어 있기에, ‘선지(禪旨)를 표현한 문자 중에서 최고의 문자’라고 칭찬해 온 것으로, 참동계(參同契), 보경삼매(寶鏡三昧), 증도가(證道歌) 등과 함께 선승들에게 널리 애송되어 온 심오한 글입니다.


부처님께서 입멸하실 때, 아난이 묻기를 우리는 이제 누구에 의지하여 살아가야 합니까? 하고 묻자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이르시기를 너는 수십 년을 나의 곁에 있었으면서도 아직도 보이는 형상에 매여 있었더란 말이냐! 하고 꾸짖으시며 “나의 사후에는 너희는 자등명하고 법등명하라” 하신 대목이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일러주었던 법을 등불로 삼고 너희 스스로를 등불로 삼으라는 뜻입니다만, 이 말씀의 속뜻을 더욱 헤아려 본다면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남겨주셨던 법이란 무슨 대단한 법이 아닙니다.


그것은 생명이 있는 일체 중생이 모두 가지고 본래 자성의 존재가치를 깨닫는 “아뇩다라샴막삼보리”의 대 지혜를 찾아가는 방법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죽는 순간 자식들에게 무슨 가르침을 주고가실 것인지를 한번쯤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의 모든 종교의 가르침을 들여다보면 사람이 사람답게 선하게 살도록 가르치고 있고 믿음으로써 행복해 질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는데, “예수믿음 천국, 불신지옥”이라는 식으로 나를 믿으면 행복해지고 천국에 갈 수 있고 믿지 않으면 아무리 참되게 살아도 지옥에 간다는 식의 절대적이고 유일신관적 사고방식의 종교적 아집과 독선은 불교에서는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믿어야할 절대적인 대상이 없습니다.

있다면 자기 내면에서 순간순간 함께 움직이고 있는 불성이 있음을 자각하고 이 불성이라는 주인공이 다겁생을 돌고 돌아 윤회하면서 익혀온 온갖 오욕과 칠정과 팔만사천 가지의 내재되고 훈습되어있는 번뇌의 씨앗들을 닦고 닦아 밝고 슬기롭게 변화시켜 자기완성을 할 때 우리는 이미 부처인 것이며 보살이 된다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멋진 가르침입니까?

 

신이 전지전능하다면서 어찌 미국 버지니아 공대에서 발생한 조승희라는 학생의 비극이 존재해야 했겠습니까?


그것은 자기 내면은 보지 못하고 밖에서만 신기루 같은 절대자라는 신에게 모든 것을 의지해야 하는 종교는 인간을 위한 종교가 아니라 신을 위한 종교에 불과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물질이 풍요로워지면 그 자체가 행복이 될 것 같지만, 물질을 향해 뛰어다니다 보면 정작 내면은 공허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 세상이치일 것입니다.

우리 속담에 “개 같이 벌어 정승같이 쓴다고들” 하지만, 대부분 개 같이 버는 동안에 정승같이 사는 법을 배우지 못한지라 모은 재물은 개 같이 쓰게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성경에 분명하게 밝히셨습니다.

“하느님 나라가 여기에 있다, 저기에 있다, 하더라도 쫒아가지 말라 하느님 나라는 바로 너희 가운데 있다.”고 하셨듯이 그 모든 팔만사천가지가 넘는 온갖 번뇌와 갈등과 증오는 사실은 “자작자수라” 내 안에서 불타고 있음이요, 천하에 원수도 사랑할 수 있는 자비와 사랑도 내 안에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바로 이러한 무궁무진한 능력을 담고 있는 자기 안에 있는 내면의 불성을 찾는 방법을 알려주셨던 것이고, 그 내면을 찾는 첫 열쇠가 바로 올바른 이성적인 신심인 것입니다.


바로 승찬스님은 우리에게 가장 슬기롭게 자기 안에 내재된 전지전능한 불성이자, 보살심인 자성의 근본을 스스로 깨우칠 수 있는 무상정등정각의 “아뇩다라샴먁삼보리”의 대 지혜를 우리에게 전해주고자 해서 신심명은 생겨났던 것입니다.


육조 스님도 깨닫고 나서 첫마디가 “하기자성본자청정(何期自性本自淸淨)”이라, “내 자신이 본래 아주 뛰어난 존재요, 내 자성은 본래가 청정했다는 것을 오늘 아침에야 알았다”고 하시며 본래 불생불멸인 것을 내 그것을 꿈엔들 알았겠는가. 내 자신이 본래 불생불멸의 존재라는 것을 이제 알았다고 했습니다.


신심명은 글 자체가 뛰어날 뿐만 아니라, 신심이란 도(道)의 근본이자 참답게 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진실로 등불로 삼아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 글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불자들은 마음에 새겨두어야 할 가르침일 것입니다.


화엄경에는 “믿음은 도(道)의 근원이요 공덕의 어머니다.” 라고 했습니다.

또, 믿음은 선하게 살아가는 일체의 근본을 기른다고 했습니다.


불법을 믿고, 알려고 노력하고, 알았다면 일상의 생활 속에서 실천이 있어야 하는 것이고 이런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이것이 진실이다”라는 굳건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렇게 볼 때, 비록 정신적인 편식증에 떨어졌다고 볼 수도 있는 기독교인들의 신앙생활이 부럽기도 합니다.

일부 기독교인들의 올바른 이성적 접근이 없는 맹목적인 신앙과 종교적인 편견으로 지나치면 눈먼 맹신이 되고, 맹신이 지나치면 앞뒤도 가리지 않는 미친 광신이 되어버리고 말 것이지만, 우리 불자들은 너무도 점잖은지라 점잖음이 지나쳐 소극적인 면이 참 많다 할 것입니다. 


부처님의 말씀이 거짓이 아니라 삼라만상과 두두물물에 두루 존재하는 진리 그 자체라는 사실을 믿음은 도를 공부하는 기초가 되고, 믿음으로 부처의 눈을 뜰 수 있으며, 발심할 때부터 마지막 성불할 때까지 가져야 하는 믿음으로 불법의 큰 바다에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승찬대사는 수(隋)나라의 양제(煬帝) 대업(大業) 2년 10월 5일(서기 606년)에 입적하셨으며, 승찬대사가 돌아가신 지 150여 년 뒤 당(唐)나라 현종(玄宗)황제가 감지선사(鑑智禪師)라 시호(諡號)를 올리고 탑호(塔號)를 각적(覺寂)이라 하였으며 그 당시 유명한 재상인 방관(房琯)이 탑비문을 지었다고 합니다.


28대조사인 보리달마대사가 깨치고 나서 말씀하신 게송입니다.

“일체만법(一切萬法)은 자성(自性)을 떠나지 않는 것이요, 자성은 본디부터 깨끗하고 고요한 것이다.

자성은 본래 생멸하지 않고, 원래 스스로 구족(具足)한 것이요, 자성이 동요가 없어야 능히 만법을 생(生)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스스로 본성을 볼 수 있어야 비로소 능히 성불(成佛)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신심명은 바로 스스로의 본성을 볼 수 있게 해주는 말씀으로, 급하게 흐르는 개울물 같은 자신의 내면의 밑바닥을 볼 수 없는 중생심을 고요히 가라앉혀 스스로 밑바닥을 볼 수 있도록 해주는 가르침인 것입니다.


자, 이제 신심명의 첫머리를 보게 되면,


“至道無難(지도무난)이요 唯嫌揀擇(유혐간택)이니,”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음이요, 오직 간택함을 꺼릴 뿐이라,


지극한 도(道)란 곧 무상대도(無上大道)인 무상정등정각을 말합니다. 

이 무상 대도는 전혀 어려운 것이 없으니 오직 간택(揀擇)하지 말라는 하는 말입니다.

간택이란 무슨 뜻 인가하면, 취하고 버리는 것을 말함으로 취하고 버리는 마음이 있으면 지극한 도는 양변(兩邊), 즉 변견(邊見)에 떨어져 마침내 중도의 바른 견해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세간법(世間法)을 버리고 불법(佛法)을 취해도 불교가 아니고, 마구니(魔軍)를 버리고 불법을 취해도 불교가 아니라, 무엇이던지 취하거나 버릴 것 같으면 실제로 무상대도에 계합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참으로 불법을 바로 알고, 무상대도를 바로 깨치려면 간택하는 마음부터 먼저 버리라 한 것입니다. 


절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오는 사람 막지 말고 가는 사람 잡지 말라”

이 말의 속뜻은 너는 시주 잘하니 어떻게든 붙잡아야하니 가면 안되고 너는 별 볼일 없으니 안와도 된다는, 중생의 욕심으로 일어나는 어리석은 분별심을 버리라는 뜻입니다.


바로 여기서 유혐간택이라, 욕심 가득한 분별심으로 사람과 사람의 관계나 모든 일에 있어 이익과 손해됨을 가려서 택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但莫憎愛(단막증애)하면 洞然明白(통연명백)

이라,

미워하고 사랑하지만 않으면 통연히 명백하니라.


미워하고 사랑하는 이 두 가지 마음만 없으면 무상대도는 툭 트여 명백하다는 것입니다.

부처는 좋아하고 마구니는 미워하며, 불법은 좋다하고 세간법은 싫어하는 증애심(憎愛心)만 버리면 지극한 도는 분명하고 또 분명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무상대도를 성취하려면 분별해서 취하고자 하는 간택하는 마음을 버려야 하는데,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미워하고 사랑하는 마음, 즉 증애심입니다.


좋다고 내 편이고 나와 맞지 않는다고 싫어하고 멀리하는 편 가르기를 하지 않는다면 우리 주변은 항상 편안할 것입니다.


허나, 중생은 태어나면서부터도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부터 배우고 한국의 요즘의 교육제도 자체가 편 가르기를 익숙하게 길들이고들 있지 않습니까. 

중생들이 이 증애심만 완전히 버린다면 무상대도를 성취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상의 네 귀절이 바로 信心銘의 근본 골자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신심명을 바로 알고자 한다면 중생심을 뿌리로 한 미워하거나 사랑하는 마음을 버려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증애심만 떠나면 중도정각(中道正覺)인 것입니다.


대주스님은 돈오입도요문(頓悟入道要門)에서

“증애심이 없으면 두 성품이 공하여 자연히 해탈한다.”고 말했습니다.


따라서, 이 첫 네 구절이 신심명의 핵심이고 뒤의 구절들은주해의 뜻으로 이해하여야 할 것입니다. 


임제종 선맥의 정맥을 이어받은 낭야각(瑯邪覺)선사에게 한 재상이 여쭈었습니다.

“신심명은 불교의 근본 골자로서 지극한 보배라고들 합니다. 이 글에 대하여 자세한 주(註)를 내려주십시오.”하자,


낭야 선사가 답하기를, “至道無難 唯嫌揀擇이니 但莫憎愛 洞然明白이라” 이 첫 구절만 큼지막하게 쓰고, 나머지 뒷구절은 모두 조그마하게 써서 주해로 붙여 버렸습니다.


신심명의 근본 뜻은 네 구절에 있으므로 나머지 구절은 주해 또는 사족과 같다는 뜻입니다.

후세 사람들은 낭야 스님의 답장을 신심명에 있어 최고의 주해라 하여 극찬을 했다고 합니다.


신심명을 바로 알려면 간택심을 갖지 말아야 하고, 간택심 중에서도 증애심을 버려야만 합니다.

이 증애심만 버리면 구경각(究境覺)은 저절로 성취될 것이라고 합니다.


“毫釐有差(호리유차)하면 天地懸隔(천지현격)하나니” 털끝만큼이라도 차이가 있으면 하늘과 땅 사이로 벌어지나니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다. 취하고 버리는 마음과 미워하고 사랑하는 마음만 버리라”고 하니, 아! 그렇구나, 천하에 쉽구나!" 라고 생각할는지 모르겠지만, 이 뜻이 털끝 만큼이라도 어긋나게 되면 하늘과 땅 사이처럼 차이가 난다는 뜻입니다.


쉽다는 것은 간택심과 증애심만 버린다면 중도를 성취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고, 성불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으며, 무상대도를 성취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지만, “이 간택심을 버린다, 증애심을 버린다.”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이 뜻을 털끝만큼이라도 어긋나게 되면 하늘과 땅 사이만큼이나 벌어진다고 하니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것은 중생심을 바탕으로 한 분별심과 이로인한 간택심을 버리고 일체 중생을 차별없이 자비로 섭수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천지현격의 차이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생들이 살아가는 현실은 그렇게 살 수만은 없을 것이니 이 갭을 어찌해야 할 것인가? 여기에서 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부처님 가운데 토막으로 살기가 어렵다는 말입니다.

 

“欲得現前(욕득현전)이어든 莫存順逆(막존순역)하라” 도가 앞에 나타나길 바라거든 따름과 거슬림을 두지 말라.

     

“무상대도를 깨우치려면 따름(順)과 거슬림(逆)을 버리라”는 뜻입니다.

따름과 거슬림은 상대법으로서, 따른다 함은 좋아한다는 것이고, 거슬린다 함은 싫어한다는 것이니, 이는 표현은 다르나 내 맘에 들고 나와 생각이 같으면 끼리끼리 모여들고 서로가 분별하여 “싫어하고 좋아한다”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지극한 도를 얻으려면 역시나 중생심에 억겁에 훈습되어 있는 분별심을 바탕으로 한, 따름과 거슬림의 마음을 내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違順相爭(위순상쟁)이 是爲心病(시위심병)이

니” “어긋남과 다름이 서로 다툼은 마음의 병이 됨이니,” 어긋난다, 맞는다 하며 서로 싸운다면, 이것이 갈등이 되고 모순이 되어 마음의 병이 된다는 말입니다.


고부간에도 그렇고 주변의 인간관계에 대해서 중생은 모두가 자기는 다 잘했고 상대방은 틀렸다는 중생심을 바탕에 깔고 있는 것입니다.

   (황희 정승과 남종여종의 다툼)

 

“不識玄旨(불식현지)하고 徒勞念靜(도로염정)

이로다”

“현묘한 뜻은 알지 못하고 공연히 생각만 고요히 하려 하도다.”

     

“참으로 양변을 여읜 중도의 지극한 도를 모르고 애써 마음만 고요히 하고자 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대도를 성취하려면 누구든지 가만히 앉아서 고요히 생각해야지, 다른 방법이 없다고 고집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이런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대도(大道)라는 것은 간택심(揀擇心)과 증애심(憎愛心)과 순역심(順逆心)을 버리면 마음의 평화는 물론 일체의 외경에 끄달림이 없이 자기 안에서 꿈틀거리는 부질없는 욕구와 분별심과 오욕칠정을 들여다보고 관조한다면 상락아정을 상취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는 것이므로, 마음을 억지로 고요하게 해서도 안되고, 그렇다고 분주하게 해서도 안된다는 뜻입니다.


마음을 고요히 하면 안된다고 하니 분주하게 하면 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을 할지 모르지만, 움직임과 고요함의 이 두 가지가 다 병으로서 움직임이 병이라면 고요함도 병이고 어긋남이 병이라면 맞음도 병입니다.


왜냐, 이 모두가 상대적인 변견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상대를 버려야 대도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성불하십시오.

30대 중반의 아줌마가 이혼을 하고 7~8세 된 쌍둥이 자식들을 키우면서 자기 자신도 주체하지 못하는 울화증을 이겨내지 못하고 자기 자식들에게 온갖 매질을 하고 밤이면 자식들을 죽여버리고 싶은 충동을 갖게 되고 철없는 아이들을 한 밤중에 차에 태워 아무도 없는 곳에 버리고 와 버리는 일들을 서슴없이 하다가 자기 스스로 s.o.s에 전화하여 도움을 요청했던 상황을 말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단순히 남편과 이혼하고 나서 오는 적개심과 분노와 증오를 남편의 핏줄이라는 생각으로 자식들에게 자신의 카타르시스를 그렇게 풀었다는 현대의학의 정신심리분석적인 방법으로만 바라봐야 할까요?

제 생각엔 아마도 아닐 겁니다.

 

그것은 부부들의 이혼이라는 악연 이전에 아이들의 전생 업이 먼저일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악연인 것입니다.


요즘 흔하게  버려지는 신생아들의 유기나 온갖 비정의 일들이 단순하게 정신심리적인 측면으로만 해석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러한 악연을 만날 수밖에 없는 인과 연이 마주쳤기 때문에 벌어지는 현상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다음 생에 그런 악연을 만나지 않고자 발원을 하고 참회를 하고 악업을 소멸하고자 불보살님들이 상주하시는 우리절 도량에 모여 도량을 청정히 하고 불보살님들을 찬탄하고 경배하면서 예경을 하고 참회하고 공덕을 짓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겁생을 돌고 돌며 생명이 있는 정식으로 태어나 알게 모르게 지었던 그 모든 죄업들이 참회되기를 발원하고 소멸되어지기를 원을 세워 다음 생이나, 다다음 생에라도 이러한 악연의 고리를 끊어버리고자, 아니 벗어나고자 하는 원을 세워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조사선에서 말하는 “공”도리를 깨우쳐 돈오를 이룬다면 모든 인과와 인연으로 부터 걸림이 없겠지만, 그러한 수행경지의 근처에도 못 가본 이들이 입으로만 "공" 도리를 다 아는 것처럼 입에 올린다는 것은 다음 생에 또 다른 인과를 받게 되는 씨앗을 뿌리는 짓 밖에는 안 되는 것입니다.


불낙인과와 불매인과의 공통점은 내가 있음으로 하늘도 땅도, 처자식도, 부모형제도 존재가치와 존재의 의미가 있음이요, 그 차이점은 바로 나라는 주체가 어떤 의업을 일으켜 현재를 깨달아 스스로 자기 삶의 주인공이 되는 삶을 살고 있느냐, 아니면 허깨비 같은 육신에 매여 결국에는 주인공을 배반하고 무너지고 마는 생노병사의 테두리 안에서 팔만사천가지의 번뇌와 갈애로 떠밀려 살아가는 뭇 중생들의 일부로 한 생을 살다 갈 것인가는 스스로에게 달려있다 할 것입니다. 


하여, 우리는 순간순간 깨어있는 의식으로 찰나 찰나에 육근의 대상이 되는 객관의 경계에서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육식으로 인해 온갖 욕구와 망상심이라는 헛것들이 일어나고 스러짐과 경계에 부딪쳐 일어나는 충동심과 허욕의 동요를 바라보며 알아차리며 자기 스스로 자기를 깨닫게 되기 시작할 때, 우리는 이미 부처의 수행경지에 들어간 것입니다.


수행은 꼭 산에 들어가서 살아야만 되는 것도 아니고 더구나 절에서 살아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현실의 사바세계에서 되려 자기 안을 볼 수 만 있다면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자기의 망상심을 순간순간 깨닫고 알아차릴 수만 있다면 산에 들어가 수행하는 순경계의 수행보다 훨씬 더 수승한 공부를 할 수 있는 역경계의 수행처가 바로 이 사바  욕계세계일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는 이정표가 바로 승찬대사의 신심명일 것입니다.

 


아델라이데(Adelaide) / 베토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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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elaide "


Einsam wandelt dein Freund im Fruhlingsgarten,
외로이 거닌다 당신의 친구가 봄의 정원에서,
Mild vom lieblichen Zauberlicht umflossen,
온화하고 사랑스러운 마법의 빛에 둘러싸여,
Das durch wankende Blutenzweige zittert,
빛은 흔들리는 꽃핀 나뭇가지를 관통하여 전율한다,
Adelaide!
In der spiegelnden Flut, im Schnee der Alpen,
거울처럼 빛나는 큰물결 안에서, 알프스의 눈속에서,
In des sinkenden Tages Goldgewolken,
침몰하는 낮의 황금빛 구름들 안에서,
Im Gefilde der Sterne strahlt dein Bildnis,
별들의 광야 안에서 반짝입니다 당신의 이미지가,
Adelaide!
아델라이데!
Abendluftchen im zarten Laube flustern,
저녁바람이 상냥한 나무그늘 속에서 속삭인다,
Silberglockchen des Mais im Grase sauseln,
오월의 은방울들이 잔디에서 바스락거린다,
Wellen rauschen und Nachtigallen floten:
파도가 포효하고 밤꾀꼬리는 노래한다:
Adelaide!
아델라이데!
Einst, o Wunder! entbluht, auf meinem Grabe,
언젠가, 오 기적이여! 꽃필것이다, 나의 무덤에,
Eine Blume der Asche meines Herzens;
꽃한송이가 내 심장이 타고난 재에서;
Deutlich schimmert auf jedem Purpurblattchen
선명하게 번쩍일 것이다 모든 보라색 잎들 위에서
Adelaide!
아델라이데! 


테너 ... (Fritz Wunderlich)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

내 안에 어쩌면 여전히 억눌려 있는

내 순수함이 이렇게 아름다운 음악을

들으면 기쁨의 눈물로 피어나는지도 모르지

아~지금의 내가 그립다.--

생명의 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