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2. 4. 19:34ㆍ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발심수행장·수행법
오늘이 일년동안 보름씩 해서 24절기가 시작되는
첫 번째에 해당되는 입춘절기입니다.
인간도 자연의 일부인지라 자연의 섭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기에 자연의 순환이치를 알면 우리가
살아가는데 필요한 지혜가 솟아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봄에 산길을 가다가 둔덕을 지나다 보
면 누가 밟지도 않았는데 흙이 혼자서 부스스 소리를 내며 떨어져 흘러내리거나, 산을 절개하여 도로를 낸 곳을 지나다 보면 낙석이 떨어져 있는 것을 흔히 보게 됩니다.
그 이치는 겨우내 얼어붙어 서로 결합되어 있던 흙들이 날이 풀리면서 소위 팽창이라고 할 수 있는 결합력이 풀어지면서 생겨나는 자연현상인것입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겨우내 얼어붙어 있던 몸이 날이 풀리면서 무너져 내리는 이치와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해동이 되면서 나이드신 분들이 조심하셔야 하는 것이고, 젊음이 여기서 무너져 가는 것입니다.
이렇듯 우리 인간도 자연의 일부이기에 자연의 순리를 따르게 되면 마치 바람의 흐름을 이용하는 뱃사공의 지혜로움을 알게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럼 24절기란 무엇인가.
인간이 역(曆)을 만드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계절의 변화를 알기 위해서였습니다.
음력(陰曆)은 달의 운동에 근거하여 만들어지기 때문에 달의 변화는 잘 나타내 주지만 태양의 움직임은 잘 나타내 주지 않습니다.
계절의 변화는 태양의 운동에 의하여 결정되므로 음력 날짜와 계절의 변화는 잘 일치하지 않습니다.
이런 문제점을 보완하기 위하여 음력에서는 계절의 변화, 즉 태양의 운동을 표시하여 주는 24절기(또는 24기)를 도입하여 같이 사용합니다.
따라서 음력은 태양의 움직임을 24절기로 표시하여 주기 때문에 태음태양력이라고 합니다.
즉 달(태음)과 태양의 운동을 모두 고려하여 주는 역법이란 뜻입니다.
24절기는 태양의 운동에 근거한 것으로 춘분점으로부터 태양이 움직이는 길인 황도를 따라 동쪽으로 15。간격으로 나누어 24점을 정하였을 때, 태양이 각 점을 지나는 시기를 말합니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천구상에서 태양의 위치가 황도가 0도일 때 춘분 15도일 때 청명.....300도일 때 대한으로 정합니다.
예전의 24절기는 중국에서부터 시작이 되었는데,
24절기의 이름은 중국 주(周)나라 때 화북지방의 기후를 잘 나타내 주도록 정해졌다고 합니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기후와는 약간 차이가 날수 있습니다.
중국력법은 달의 위상변화를 기준으로 하여 역일(曆日)을 정해 나가는데, 이것에 태양의 위치에 따른 계절변화를 참작하여 윤달을 둔 태음태양력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역법으로는 계절의 구분이 뚜렷하지 않아 특별한 약속 하에 입춘·우수·경칩·춘분 등 24기의 입기일(入氣日)을 정하기로했던것입니다.
그 정하는 방법에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평기법(平氣法)이고, 다른 하나는 정기법(定氣法)이있습니다.
예전에는 장구한 세월에 걸쳐서 평기법을 써왔습니다.
이것은 1년의 시간적 길이를 24등분하여 황도상의 해당점에 각 기를 매기는 방법인데, 동지(冬至)를 기점으로 하여 순차로 중기·절기·중기·절기 등으로 매겨나가는 방법이었습니다.
따라서 동지의 입기시각을 알면 이것에 5.218425일씩 더해가기만 하면 24기와 입기 시각이 구해졌던 것입니다.
정기법은 훨씬 뒤늦게 실시되었습니다.
6세기반경에 북제(北齊)의 장자신(張子信)에 의해 태양운행의 지속(遲速)이 발견된 후, 수(隋)의 유탁(劉倬)이 정기법을 쓸 것을 제창하나 그후 1,000년 이상이나 방치되었고, 청나라 때 서양천문학에 의한 시헌력(時憲曆)에서 처음으로 채택되었다.
정기법에서는 황도상에서 동지를 기점으로 동으로 15° 간격으로 점을 매기고 태양이 이 점을 순차로 한 점씩 지남에 따라서 절기·중기·절기·중기 등으로 매겨나가는데 이 경우 각 구역을 지나는 태양의 시간간격은 다르게 되는 차이가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이 입춘일입니다. 오늘부터 한해의 24절기가 시작되는 첫 절기의 날이기 때문에 농경사회의 일원이었던 조상들은 오늘을 그리도 중요하게 여겼던 것입니다만,
사실은 아까도 말씀드렸다 싶이 인간도 자연의 일부이기에 자연의 흐름을 안다면 훨씬 건강과 삶의 지혜를 터득할 수 있기에 중요한 것입니다.
그럼 입춘일은 어떻게 정해지느냐!
양력 2월 4일경, 태양이 시황경 315°에 왔을 때를 입춘 입기일로 하여 이후 약 15일간이 입춘기간에 해당합니다.
음력으로는 정월의 절기로 동양에서는 이 날부터 봄이라고는 하지만, 추위는 아직도 강하고, 입춘 전날이 절분(節分)인데 이것은 철의 마지막이라는 뜻입니다.
이날 밤을 해넘이라고 부르고, 콩을 방이나 문에 뿌려서 귀신을 쫓고 새해를 맞는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입춘을 마치 연초(年初)처럼 보게된 것입니다.
옛날 중국에서는 입춘 15일간을 5일씩 3후(候)로 갈라서, ① 동풍이 불어서 언땅을 녹이고, ② 동면하던 벌레가 움직이기 시작하고, ③ 물고기가 얼음 밑을 돌아다닌다고 하였습니다.
잡절(雜節)은 입춘 날을 기준으로 하여 결정되는데,
밭에 씨앗뿌리기가 시작되는 88야(夜), 태풍시기인 210일, 220일 등은 각각 입춘 날로부터 88일, 210일, 220일째가 되면 씨를 뿌리는데 가장 좋은 조건이 되는 날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듯 자연에 순응하고 살아가는 삶의 지혜가 들어있는 것이 바로 24절기인 것입니다.
이렇듯 새롭게 시작되는 24절기의 첫 번째에서 지금의 나를 되돌아보십시다.
여러분은 법당에 오셔서 불상을 통해 부처님을 만나고, 뵙고 수없이 절을 하며 온갖 속 터지는 하소연과 가슴아픈 일들과 간절히 바라는 다급함을 부처님께 털어놓고 계시지만 사실은 온갖 하소연과 온갖 바램과 온갖 복을 가져가기 위해서 인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누가 들어오던, 공양물을 올리던 말든, 잘난이가 오든 말든, 돈 많은 이가 오든 말든, 속 터지는 이가 오든 말든, 눈을 내리깔고 저리 가만히 앉아계시는 것은 몸으로 설법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바로 이 법문인 것입니다.
나는 지금 행복이 없는 곳에서 행복을 찾고 있는 것이 아닌지, 지금 만족이 없는 곳에서 만족을 찾고 있는 것이 아닌지, 지금 평화가 없는 곳에서 평화를 찾고 있는 것이 아닌지, 지금 기쁨이 없는 곳에서 기쁨을 찾고 있는 것이 아닌지, 지금 사랑이 없는 곳에서 사랑을 찾고 있는 것이 아닌지, 지금 안정이 없는 곳에서 안정을 찾고 있는 것이 아닌지, 지금 희망이 없는 곳에서 희망을 찾고 있는 것이 아닌지
여러분, 내가 지금 있는 곳부터 살펴봅시다.
올 한해 모두가 성불을 성취하십시다.
정월 보름 정초신중기도 회향법문
오늘은 정월 대보름입니다.
남방 불교권에는 하안거가 있고 북방 불교권에서는 추운 겨울을 효과적으로 보내고 대중의 힘으로 공부를 이루고자 생겨진 동안거가 오늘을 기점으로 해제하는 기간입니다.
원래 해제기간이란, 捨敎入禪으로 참선공부를 하는 동안에 부처님 말씀에 대한 공부가 부족한 부분을 채우기 위해 경전공부를 한다든지, 다겁생래의 업장을 녹이기 위해 기도처에서 업장소멸을 하는 기간이 바로 해제기간으로 소위 자유정진의 기간이 바로 이 해제기간이건만, 요즘의 풍속은 이에 미치지 못하는 수행자의 경우를 종종 보게됩니다.
이제 우리절은 천삼십일 기도회향이 몇 달 남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회향 목전에 백팔다라니를 염송하는 백일 정진기도를 더해보고자 하는 생각이 있으니 동참하실 분들은 참여해주시기 바랍니다.
요즘 들어 부쩍 많은 분들이 살기 힘들다고 하시는 분들도 많고 기도가 잘 안 된다는 분들이 많습니다.
현실에서 겪는 여러가지 일상의 번뇌를 만들어내는 사건들과 기도나 수행을 행함으로서 얻어지는 마음공부 사이에서 벌어지는 괴리감 때문일 것입니다.
"신의 의식을 지녔던 예수도 자신의 육체와 동일시한 나머지 많은 갈등과 혼란과 괴로움과 회의가 있었다."하는 말이 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에 혼선이 빚어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었답니다.
성경에서도 일부분 암시가 되었듯이 예수님께서도 많은 시행착오를 일으켰습니다.
예루살렘 상인들에 대한 과격한 행동과 유대의 율법학자들에 대한 폭언은 결과적으로 십자가형에 처해지는 결정적인 원인이 됬으며 ,제자들까지도 모두 등을 돌리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예수님의 제자들은 자신의 스승에 대해 실망을 했던 것이지 결코 배신을 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배반했던 것으로 알려진 유다만 하더라도 그렇습니다.
유다는 민중혁명가였고 독립투사였습니다.
그런 유다에게 처음에 예수님은 분명히 공약을 했습니다.
선택받은 민족 이스라엘인들의 왕국을 건설하겠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나중에 사정이 여의치 않게 전개되자 예수님은 유다에게 자각을 통한 신의 왕국을 역설하지만 유다는 이러한 사실을 이해했을 리도 이해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유다는 최후의 만찬으로 불리우는 자리에서 자신이 예수의 곁에 다가가 잔을 올리면 그가 예수인 줄로 알라고 로마인들과 약속을 하고 예수님께 다가가 잔을 올리게됩니다.
그러나, 유다의 속셈은 예수님께서 신의 아들로서 그런 상황에 닥치게 되면 신통력으로 로마인들을 물리치고 이스라엘을 구원해줄 것다는 혼자 생각으로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림으로써 예수의 기적을 바랬으나, 예수님께서 고난의 십자가로 사형을 당하자 유다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탓하며 자살하게됩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자신의 애 제자였던 아난에게 팔만사천가지의 깨닫지 못한 이유를 지적 받아야 했습니다.
물론 그 내용은 깨달은 자는 이런 생각을 해서는 안되고, 이런 말을 해서는 안되고, 이런 행동을 해서는 안된다는 아난의 주관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예: 사냥꾼과 사슴/ 세존께서의 거짓말)
아난의 눈에 비춰진 부처님의 모습과 행동은 결코 만족스러운 깨달은 자의 그것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수십년 동안을 부처님 옆에 있으면서 부처님을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다시피 했던 아난은 결국 부처님이 열반에 이를 때까지도 깨달음을 얻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과 유다, 부처님과 아난 ,이들의 관계에서 우리는 무엇을 생각해 볼 수 있나요. 누가 맞고, 누가 틀리고, 누가 옳고, 누가 그르고, 누가 진실이고, 누가 거짓인가의 판단인가요.
예수님과 유다, 부처님과 아난, 이들 두 사람들의 관계에서 우리는 무엇을 볼 수 있습니까?
예수 안에는 유다가 있었고, 부처 안에는 아난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유다의 안에는 예수가 없었고, 아난의 안에는 부처가 없었습니다.
이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예수 안의 유다는 갈등이었고, 부처 안의 아난은 혼란이었던 것입니다.
유다가 겪는 갈등, 아난이 느끼는 혼란은 예수님과 부처님에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그것을 이해할 수 있는 자각이 있었고, 그것을 포용할 수 있는 깨우침이 있었습니다.
유다 안의 예수는 진실이었고, 아난 안의 부처는 지혜인 것입니다.
그러나 유다에게는 갈등만 있었을 뿐, 예수의 진실이 없었으며, 아난에게는 혼란만 있었을 뿐 부처의 지혜가 없었습니다.
바로, 유다와 아난에게는 자신의 갈등과 혼란을 이해할 수 있고 포용할 수 있는 진실과 지혜의 깨달음이 부족했던 것입니다.
오늘은 정월보름입니다.
금년들어 처음으로 가장 밝은 빛을 내는 정월보름달을 대하시면서 여러분의 마음 속과 가정에 보름달을 품듯이 부처님도 청해보시기 바랍니다.
부처님의 품안에 들려고만 하지 마시고 여러분의 마음 속에 부처를 품으시기바랍니다.
일상의 삶 속에서 가족 간에, 형제 친척간에, 주변의 이웃들과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그 온갖 갈등과 번뇌와 진심이 일어날 때마다, 견디기 힘들 때마다,
지금 이 순간에 부처님이 이 자리에 계신다면 부처님은 어떤 판단을 내리셨을까?
이 견디기 힘든 순간에 부처님께서는 저 사람에게 어떤 행동을 하셨을까?
부처님께서는 어떻게 저 사람에게 어떤 말을 해주었을까?
부처님께서는 저 사람에게 어떻게 대해 주셨을까를 생각해볼 때,
그 순간이 바로 여러분의 마음 속에 부처를 품게되는 것입니다.
일상의 한 생각에 따라 각자의 마음 속에 지옥도 생기고 극락도 생길 것입니다.
예수님의 진실과 부처님의 지혜가 바로 이러한 때에 여러분 각자의 마음 속에 자리잡게 될 것입니다.
모두 성불하십시오.
목요대비주 정진기도 법문
오늘 아침 “특별한 아침”이라는 프로에서 미혼모가 아닌 미혼부가 태어난지 5일 밖에 안된 자신의 아이를 아파트 복도에 자기보다 더 좋은 조건에서 키워주길 바라는 마음에서 버리고 갔던 사건이 방영되었습니다.
그 방영을 보고 듣는 순간 또 다시 중생의 인연복과 업이라는 무게가 화두가 되어왔었습니다.
“맹구우목이라” 사람 몸 받기가 그리도 어렵건만,
사람 몸을 받았다 치더라도 기아로 죽어가는 전 세계의 어린이들의 수가 600만을 넘어서고 있다는
데서 다시한번 두 손 모아 간절히 기도를 올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 살아가는 대한민국은 지금 너무나 많은 여유
로움과 욕구에 휘둘리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남보다 더 잘살아야하고 남 누리는 만큼은 누려야하고 잘 나가던 시절에 했던 만큼은 해야 하고 이런 저런 생각으로 힘든 일, 더러운 일 남세스러운 일은 하기 싫고 번듯하고 폼나는 일만 찾다보니 세상이 뜻대로 되지 않아 조상과 부모와 주변과 사회를 원망하는게 요즘 세태인거 같습니다.
제 어릴 때만 해도 시골할아버지 집에 가면 사랑방에 새끼 꼬고 가마니 짜던 아저씨들이 있었습니다.
후에 어른 되어 알고보니 그 삼촌들이 머슴들이었습니다.
요즘은 그 삼촌들이 다 외국노동자들로 채워져 있는 우리의 현실들,...
이제 우리 불자들은 적어도 부처님 법을 알고 살아간다는 우리들은 다만, 한번 왔다가는 유한한 이
삶에서 섣부르게 살아가고 허송세월하기 보다는
더욱 진지한 하루하루를 보냈으면 합니다.
그저 예배당에서 기도만 한다고, 무릎이 닳도록 절
만한다고 다 되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아니함보다는 낫겠지만, 지금 주변을 둘러보고 내가 올해엔 나 아닌 우리 가족 아닌 남을 위해 무엇을 했던가를 둘러봅시다.
그리고 한 해가 가기 전에 보다 진지하게 이 한번
뿐인 삶을 겸허하게 마무리하시길 바랍니다.
여기 오늘 아침에 메일에 좋은 글과 음악을 함께 보내주신 서련화 보살님의 글을 옮기고 뒤에는 무상 법문을 옮겨보았습니다. 모두 성불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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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보시게 친구 / 서산대사
살아 있는 게 무언가? 숨 한번 들여 마시고 마신 숨 다시 뱉어내고 가졌다 버렸다버렸다 가졌다
그게 바로 살아 있다는 증표 아니던가?
그러다 어느 한 순간 들여 마신 숨 내뱉지 못하면 그게 바로 죽는 것이지. 어느 누가, 그 값을 내라고도 하지 않는 공기 한 모금도 가졌던 것 버릴 줄 모르면 그게 곧 저승 가는 것인 줄 뻔히 알면서 어찌 그렇게 이것도 내 것 저것도 내 것, 모두 다 내 것인 양 움켜쥐려고만 하시는가?
아무리 많이 가졌어도 저승길 가는 데는 티끌 하나도 못 가지고 가는 법이리니 쓸 만큼 쓰고 남은 것은 버릴 줄도 아시게나.
자네가 움켜쥔 게 웬만큼 되거들랑 자네보다 더 아쉬운 사람에게 자네 것 좀 나눠주고 그들의 마음 밭에 자네 추억 씨앗 뿌려 사람사람 마음속에 향기로운 꽃 피우면 천국이 따로 없네,
극락이 따로 없다네. 생이란 한 조각 뜬 구름이 일어남이요, 죽음이란 한 조각 뜬 구름이 스러짐이라. 뜬 구름 자체가 본래 실체가 없는 것이니 나고 죽고 오고 감이 역시 그와 같다네.
천 가지 계획과 만 가지 생각이 불타는 화로 위의 한 점 눈(雪)이로다.
논갈이 소가 물위로 걸어가니 대지와 허공이 갈라지는 구나 삶이란 한 조각구름이 일어남 이오 죽음이란 한 조각구름이 스러짐이다 구름은 본시 실체가 없는 것 죽고 살고 오고 감이 모두 그와 같도다.
"생종하처래 사향하처거
생야일편부운기요. 사야이편 부운멸이로다
부운자체본무실이니 생사거래역여연이로다.
독유 일물 상독로요 담연불수 어 생사라".
본디 우리의 태어남은 어디로부터 왔슴이요.
우리 죽어가는 곳 또한 어디로 가던가.
사람이 태어남은 저편 하늘가에 흰 구름 한 조각 일어남과 같았고, 사람이 죽는 것 또한, 일어났던 흰 구름 한 조각 스러짐과 같더라.
뜬 구름은 인연따라 생겨났다 바람 부는 대로 흩어지니 본래가 실다운 모습이 없더라.
사람의 나고 죽음도 이와 같을 지나, 다만 한 물건이 있어 살아생전에 보고 듣고 말하고 기쁘고 슬프고 원망하며 증오하던 볼래야 볼 수 없고 찾을 래야 찾을 수 없다던 그 한 물건이 있어 다겁생래를 혼잡하게 살아왔으니 수많은 생의 나고 죽음이 못 가운데 비치는 달그림자와 같더라.
이제 우리는 현재의 순간까지 바쁘게만 살아왔던 삶에서 잠시의 여유를 가지고 가파른 언덕길에 올라 비지땀을 닦으며 올라온 길을 되돌아보며 내려갈 길을 쳐다보듯, 지난날을 되돌아보며 앞으로 살아갈 얼마남지 않은 삶의 여정에서 보다 값지게 나만의 삶의 방안을 청소하고 아름답게 꾸밀 줄 아는 삶들이 되어지시길 간절한 마음으로 지극하게 축원 드리겠습니다. 성불하십시오.
동지기도 입제 법문
오늘은 을유년 금년도 다 지나가는데 24절후의 하나인 동지절기로 24절기는 입춘(立春)부터 시작해서 보름에 한번씩 바뀌는 절기들로 우수(雨水) 경칩(驚蟄) 춘분(春分) 청명(淸明) 곡우(穀雨) 입하(立夏) 소만(小滿) 망종(芒種) 하지(夏至) 소서(小暑) 대서(大暑) 입추(立秋) 처서(處暑) 백로(白露) 추분(秋分) 한로(寒露) 상강(霜降) 입동(立冬) 소설(小雪) 대설(大雪) 동지(冬至) 소한(小寒) 대한(大寒) 등이 있습니다. 오늘은 동지로 년 중에 밤이 가장 길고 낮이 가장 짧은 날로 오늘 새벽 3시24분에 동지가 드는 시간입니다.
절기 중 아홉 번째인 하지로부터 낮이 짧아지고 밤이 길어지기 시작하여 동짓날에 이르러 극에 도달하고, 다음날부터는 차츰 밤이 짧아지고 낮이 길어지기 시작한다는 날인데, 동지는 글자 그대로 겨울에 이르렀다는 뜻으로 태양이 가장 남쪽으로 기울어져 밤의 길이가 일 년 중 가장 긴 날로, 이 날이 지나면 하루 낮 길이가 1분씩 길어지는데 옛 사람들은 태양이 기운을 회복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동지를 음이 주고 양이 살아난다하여 애설이라 g하여 설날로 삼기도 했었습니다.
옛사람들은 이날을 태양이 죽음으로부터 부활하는 날로 생각하고 축제를 벌여 태양신에 대한 제사를 올렸었고, 중국 주(周)나라에서 동지를 설로 삼은 것도 이날을 생명력과 광명의 부활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며, 역경의 복괘(復卦)를 11월, 즉 자월(子月)이라 해서 동짓달부터 시작한 것도 동지와 부활이 같은 의미를 지닌 것으로 판단하였기 때문입니다.
동짓날에 우리가 새해인사인 세배를 드리듯 천지신과 조상의 영들께 제사하고 신하의 조하(朝賀)를 받고 군신의 연예를 받기도 하였습니다.
동국세시기에 의하면, 동짓날을 아세(亞歲)라 했고, 민간에서는 흔히 (작은 설)이라고도 했습니다. 태양의 부활을 뜻하는 큰 의미를 지니고 있었고 그 풍습으로 동지를 지나야 한살 더 먹는다고 동지팥죽을 먹어야 진짜 나이를 한살 더 먹는다 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동짓날에는 동지팥죽 또는 동지두죽(冬至豆粥), 동지시식(冬至時食)이라는 오랜 관습이 있는데, 팥죽을 다 만들면 먼저 사당에 올리고 각 방과 장독, 헛간 등 집안의 여러 곳에 담아 놓았다가 식은 다음에 식구들이 모여서 먹게되는데 동짓날의 팥죽은 시절식(時節食)의 하나로, 팥죽에는 축귀(逐鬼)하는 기능이 있다고 보았으니, 팥은 색이 붉어 양색(陽色)이므로 음귀(陰鬼)를 쫓는 데에 효과가 있다고 믿기에 집안의 여러 곳에 놓는 것은 집안에 있는 악귀를 모조리 쫓아내기 위한 것이고, 사당에 놓는 것은 천신(薦新)의 뜻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찰에서 점안의식이나 귀신을 쫓는다는 구병시식을 할 때 팥을 사용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또, 전염병이 유행할 때에 우물에 팥을 넣으면 물이 맑아지고 질병이 없어진다고 하며 사람이 죽으면 팥죽을 쑤어 상가에 보내는 관습이 있는데 이는 상가에서 악귀를 쫓기 위한 것이며, 동짓날에 팥죽을 쑤어 사람이 드나드는 대문이나 문 근처의 벽에 뿌리는 것 역시 악귀를 쫓는다는 같은 의미이고 경사스러운 일이 있을 때나 재앙이 있을 때에도 팥죽, 팥떡, 팥밥을 하는 것은 모두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동짓날에도 애동지에는 팥죽을 쑤지 않는 것으로 되어 있고 동짓달에 동지가 초승에 들면 애동지, 중순에 들면 중동지, 그믐께 들면 노동지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동짓날 팥죽을 쑤게 된 유래는 중국의 (형초세시기 荊楚歲時記)라는 책에 의하면, 공공씨(共工氏)의 망나니 아들이 동짓날에 죽어서 역신(疫神)이 되었는데, 그 아들이 평상시에 팥을 두려워하였기 때문에 사람들이 역신을 쫓기 위하여 동짓날 팥죽을 쑤어 악귀를 쫓았다는 것입니다.
동짓날에 궁 안에 있는 내의원(內醫院)에서는 소족을 고아, 여기에 백강, 정향(丁香), 계심(桂心), 청밀(淸蜜) 등을 넣어서 약을 만들었는데 이 약은 악귀를 물리치고 추위에 몸을 보하는데 효과가 있다고 했답니다.
또, 동짓날에는 관상감(觀象監)에서 새해의 달력을 만들어 궁에 바치면 나라에서는 동문지보라는 어새(御璽: 옥새)를 찍어 백관에게 나누어주었다고합니다.
각사(各司)의 관리들은 동짓날이 부흥과 부활을 뜻하고 이날부터 태양이 점점 오래 머물게 되어 날이 길어지므로 한 해의 시작으로 보고 새 달력을 만들어 서로 달력을 선물하였으며, 이조(吏曹)에서는 지방 수령들에게 표지가 파란 달력을 선사하였다.
매년 동지 무렵이 되면 제주목사는 특산물로서 귤을 상감에게 진상했었고 궁에서는 대묘(大廟)에 올린 다음에 여러 신하에게 나누어주었고, 멀리에서 바다를 건너 귤을 가지고 상경한 섬사람에게는 그 공로를 위로하는 사찬(賜餐)이 있었으며, 또 포백(布帛) 등을 하사하고 임시로 과거를 실시해서 사람을 등용하는 일이 있었는데, 이것을 황감제(黃柑製)라고도 했습니다.
또, 동짓날의 부적으로 뱀사(蛇)자를 써서 벽이나 기둥에 거꾸로 붙이면 악귀가 들어오지 못한다고도 전해지고 있고, 동짓날 일기가 온화하면 다음해에 질병이 많아 사람이 죽는다고 하며, 눈이 많이 오고 날씨가 추우면 풍년이 들 징조라고들 합니다.
동지 팥죽은 잔병을 없애고 건강해지며 액을 면할수 있다고 전해져 이웃 간에 서로 나누어 먹었습니다.
농촌에서는 '동지한파'라는 추위가 닥치기 전 보리밟기를 해서 땅속의 물기가 얼어 부피가 커지면서 지면을 밀어 올리는 서릿발로 인해 보리 뿌리가 떠오르는 것을 막고 보리의 웃자람을 방지하기 위해 과거엔 겨울 방학을 앞두고 학생들을 동원해 대대적인 보리밟기를 하기도 했고,
동짓날 한겨울 기나긴 밤에는 새해를 대비해 복조리와 복주머니를 만들었답니다.
복조리는 산죽을 쪄와 사등분으로 쪼개어 햇볕에 말리고 물에 담근 뒤 그늘에서 건조시켜 만드는데 새해부터 정월 대보름까지 복조리를 팔았고, 대보름이 지난 뒤 팔러 다니면 상놈이라 욕을 먹기도 했는데, 복조리를 부엌 부뚜막이나 벽에 걸어두고 한해의 복이 그득 들어오기를 기원했던 우리의 미풍이 다 없어지는 요즘입니다.
그러나, 이제 서서히 음이 양으로 바뀌는 아세를 맞이하는 갑신년 동지날을 기해서 우리 신도 분들 가정마다 모든 일들이 원만해지고 소원성취들이 있으시기를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그리고 오늘 밤엔 구명시식이 있습니다.
( 구명과 구병의 차이점 설명)
집안에 사업하시는 분들이나, 시험을 앞둔 학생, 어려운 일이 닥쳐 있는 가정에서는 오늘 밤에 행하는 시식에 동참하시어 소위, 건물을 리모델링하듯, 생각과 말과 행동의 삼업들을 정화시켜가시기 바랍니다.
제주도에선 매년 초엔 안택고사라는 풍습이 있어 스님들이 매우 바빠지는 시기이기도 합니다만, 모두들 몰라서 그렇지, 세속에서 년 초에 집안의 모든 일들을 위하여 최소한 삼일 기도라도 입제하여 조상천도를 하시고 회향 날에 이렇게 구명시식을 해드리면 참으로 좋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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