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장경 뜰마 보리방편문 궁글리기

2010. 2. 4. 19:14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발심수행장·수행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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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계의 뜨거운 번뇌가 마치 불타는 집과 같은데 어찌하여 그대로 머물러 긴 고통을 달게 받을 것인가. 윤회를 벗어나려면 부처를 찾는 것보다 더한 것이 없다. 부처란 곧 이 마음인데 마음을 어찌 먼데서 찾으려고 하는가. 마음은 이 몸을 떠나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육신은 헛것이어서 생이 있고 멸이 있지만 참마음은 허공과 같아서 끊어지지도 않고 변하지도 않는다...(중략)...

 

법을 구하고자 하면서도 멀리 성인에게 미루고 부처를 찾고자 하면서도 자기 마음을 살피지 않는다. 만약 마음 밖에 부처가 있고 성품 밖에 법이 있다고 굳게 고집하여 불도를 구한다면 이와 같은 사람은 티끌처럼 많은 세월이 지나도록 몸을 사르고 살을 태우며 뼈를 부수어 골수를 내고 피를 내어 경전을 쓰며 항상 앉아 눕지 않고 하루 한 끼만 먹으면서 대장경을 줄줄 외고 온갖 고행을 닦는다 할 지라도 그것은 마치 모래로 밥을 지으려는 것과 같아서 아무 보람도 없이 수고롭기만 할 것이다. 자기의 마음을 바르게 알면 수많은 법문과 한량없는 지혜를 구하지 않아도 저절로 얻게 될 것이다”

 

도현 거사님은 새해이므로 이번 모임은 지난 1년의 공부를 총 개괄한다고 하셨었는데, 특히 이번에 새로 오신 거사님(불참하셨지만)에 맞추어 강좌를 구성하셨다. 그리고, 보리방편문 개괄의 첫 출발점으로 위의 보조국사 수심결 문구를 택하셨다.

 

나라면 보리방편문을 본 적 없는 분들에게 어떻게 첫 말문을 뗄 수 있을까. 모임안내를 쓰다보며 더 곰곰해졌었다.

 

얼마전 동대 김성철 교수님이란 분이 한 동영상강좌에서 보리방편문을 언급하신 것을 보았다.

부처님 성도의 과정중 깨달음의 내용, 바로 그 대목이 화엄경이며, 화엄경은 초기불교의 가르침을 대승불전으로 신화화한 것이다, 티벳에서는 최근 ‘티벳 사자의 서‘같은 것도 화엄경과 같이 비장경 (비밀스럽게 숨겨놓은 경전-뜰마)이라 칭하는데, 삼매속에 경이 심어진 분들이 계속 윤회하며 티벳 불교를 끌어가는 만큼 시대에 맞는 경이 자꾸 씌어진다. 최근 우리나라에도 있다. 금타화상님으로부터 청화스님이 전수받으신 용수보살의 보리방편문이 이 뜰마이다. 그렇게 이어지며 소개된 보리방편문 단어는 흐름이 문득 생소했기도 했고 우선 반가왔다.  

 

“(어쩌구저쩌구)...거사님께선 어떻게 안내하시겠어요?” 모임 끝날 때 도현거사님께도 여쭈었다.

“현대물리학이요.“라고 간단히 얘기하셨다.

 

왠만한 고등학생만 해도 쉽게 납득이 가는 이 ’에너지‘란 말을 적용하면 너무도 알아듣기 쉽게 불교에 접근할 수 있다고 하시는 것이다. 우리가 태양의 빛을 8분 후에 볼 수 있다는 사실로부터 시작해서, 성인들의 말씀이 사라지는 것이 아닌 시간이 지나면 언젠가는 만나는 것을 간단히 보편화하시니 그 답변하신 몇 초 이후로, ‘삼매 속에서 전수된..‘이라는 뉘앙스가 전과 달리 특별한 사람들에게나 일어나는 사건이 되지 않고 신화적으로 다가오지도 않았다. 그러니 젊은이들을 위한 강의를 빨리 해주셨으면 하는 바람도 함께 짙어졌다. 불교와의 첫 만남이 어떠한지에 따라 젊은이의 한 세월이 천양지차로 전개될 테니까...

 

수심결 다음으로 현대물리학적인 전제설명이 이어졌다.

 

현대물리학에서는 에너지와 마음의 관계만 잡아주면 설명이 쉬워질 것이다. 현대물리학에서는 물질이라고 표현하지 않고, 파동함수 하나로 표시한다. 즉 그렇게 현대물리학적인 방정식 하나로는 설명이 가능하다 되어있으나, 맞는지는 개인적으로 모르겠지만, 어쨌든 지금 하나로 통일은 되어있다고 하셨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수행을 해서 행복한 게 목적이지 이걸 따져 알아 정확한 것을 아는 것이 목적은 아니다. 그 에너지의 근본실상 또는 에너지의 성품이 마음이라고 했고, 또한 그것이 부처라고 했고, 그 마음 즉 에너지는 파동으로 이루어졌다...

 

이제는 본격적인 보리방편문.

마음은 텅빈 에너지 필드니까 비어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공이다. 그러나 에너지 필드가 비었다고 해서 아무것도 없느냐 에너지가 있다. 허공적 심계에 에너지가 꽉 차있고, 온 우주가 에너지로 되어있고, 에너지의 본체가 마음이고, 그 마음이 아미타불이다.

 

결과적으로 심은 허공과 등할새, 허공에는 모양이 없다. 모양이 없으니 생사도 없고 크고 작고 경계도 없고..

즉 보리방편문을 하다보면 경계도 없어지고 모양이 없어지고... 이것을 아는 도리이다. 

 

보조스님이나 청화스님, 기타 책들에도 ‘마음‘의 정의는 영지, 곧 귀신같이 신령스럽게 아는 것이라 하셨는데 실은, 에너지는 뭐가 탁하고 때리면 정확히 안다. 실리콘등 도구에 비춰보아도, 혹은 전기가 되는 과정을 살펴도, 그런 것을 딱하고 안다. 부딪치면 즉, 주파수가 오면 거기에 맞추어 행동을 한다. 그것이 영지. 에너지의 본 성품, 마음이다.

그렇지만 이렇게 해도 마음이 뭐냐고 질문하면 실은 대답하기가 어렵다....

 

얼마전 간화선 하시는 분이 보리방편문의 사유관찰에 대해 이의를 다신 적이 있지만, ‘심수만경전’에 대해 해석들이 약간씩들 다르다.

참고로, 1)석존 22대 후손 고승은 ‘마음은 만가지 모습에 따라 느끼고’(전=느끼다) 2) 청화스님은 ‘마음이 만가지 경계로 궁군다’로 3) 보조스님은 ‘마음은 경계따라 흘러간다’로 해석하셨다. 뉘앙스가 비슷할 수도 다를 수도 있다.

 

마음은 텅 비었다. 텅 빈 것이 무한대로 아무것도 없다. 경계가 없다. 그런데 그 안에 빛이, 에너지이 충만되어 있다. 에너지들이 인연따라 이런저런 것으로 생긴다. 텅 빈 곳에는 뭐가 나타나면 연 따라 간다, 수연.

그 대목에선 이렇게 저렇게 흘러가는 담배 연기를 생각해보자. 즉 마음은 공이지만 공만이 아니고 불공이 된다. 공과 불공을 동시에 갖고 있다. 여기서 혼동들을 한다.

 

“공(에너지 필드)도 마음이고, 성(에너지)도 마음이고, 상(에너지 흐름)도 마음이다.“

라는 말이 입증된다면 부처님 말씀이나 청화스님 말씀, 현대물리학이 모순이 없이 일치하는 결과가 된다.

 

보리방편문을 하는 이유는, 우리가 부처가 되는 것이고, 괴로움에서 벗어나 행복하게 되는 게 목적이다.

그럼 어떻게 수행을 할 것인가.

 

우리의 목적은 1심으로 가는 것이다.

자기 마음이 하나도 걸림이 없는, 번뇌가 없는 그 자리는 깨우치는 자리가 아니다 (깨우침과는 틀리다), 그 자리에 도달할 때까지 수천수만 전생의 했던 일을 하나하나 벗겨내는 수밖에 없겠다. 불교의 목적은 괴로움을 없애는 게 목적이지 깨닫는 게 목적이 아니다.

 

자기가 텅 빈 자리에 가서 -청화스님 육조단경에서도 말씀하셨듯- 없는것도 아니고 있는것도 아닌 양변을 벗어나는 방법은 사마타관(지관)과 위파사나관(관관)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보리방편문에서는 계속 염하고 관하라고 하셨다. 결과적으로 사마타관과 위파사나관 두 개를 동시에 하라시는 것이다.

금타화상이 청화스님께 말씀하신 견성오도의 방법. 실상염불을 하라. 실상염불의 방법으로 보리방편문이 있다. 즉 내가 보리방편문으로 아미타불이 될 때까지 계속 하라고 하신다.

부처님께서 하신 수행의 말씀을 하나도 벗어나지 않고 이렇게 보리방편문에 지관수행을 함께 묶어놓으셨다.

 

초지를 넘어가는 것은 참 어렵다. 대승기신론에서도 말하듯 2지에서 7지까지 가는 것이 자아를 몽땅 뽑아야 되는만큼 무척 어렵다. 그러나 보리방편문을 하면 2지까지는 올라갈 수 있다. 보리방편문이 자신에게 맞다면 이것저것할 것 없이 하나만 열심히 하여 견성오도를 하면 초지 2지, 5지까지 갈 수 있다고 희망을 갖자.

 

강한 희망을 금강카페 그룹에서 본다. 그 분들은 생업을 가진 재가불자 그룹인데, 어떤 페이지는 금강지와 희락지에게만 공개된다는 메시지가 뜨기도 하고, 정말 찬찬히 그 분들의 글을 읽어보면 상당한 수행의 경지에 이르렀음을 볼 수가 있다. 얼마전 모교수가 자신이 위파사나로 사선정까지 가봤는데 요즘은 안해서 다 잊어버렸다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그러는 한편 일상생활을 하며 아무 말없이 보리방편문을 하는 경주법사님의 금강 재가불자들은 이미 상당한 경지에 오르고 있음을 잘 입증하고 있다. 카페에 들어가보면, 이 보리방편문을 꾸준히 하는 것으로 금강지와 희락지는 보장이 된다는 자신감의 인상을 받았다.

 

자, 이 보리방편문 하나가 이미 지관수행법으로 되어있고, 또한 재가불자들이 금강지 희락지를 하고 있는 레코드도 있고, 우리가 부처님으로 향하는 길(해탈십육지 순서를 찬찬히 밟아)을 따라가다보면 초지나 2지까지 갈 수 있다. 그렇게 도현거사님은 말씀하셨다.

 

다른 분들의 법담도 이어졌다.

-행복한 것이 무엇이냐. 어떤 생을 받던, 어떤 경계를 맞던 자유로와지는 것 마음경계가 적어지도록 가는 것이다.

-처음부터 지관 두가지가 동시에 가기가 힘드므로 무리를 해서라도 계속 읽어야한다고 본다. 그래서 익어졌을 때야 동시에 가게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초지보살의 단계가 엄청나다고 생각하는데, 보리방편문은 단순한 것이 아니라 관하고 염하고 관하고 염하고.. 관은 뚫어지게 보고 (놓치지 않고) 인연을 생각하면서 정혜쌍수를 계속 하도록 체제가 되어있고, 항상 공성상일여를 비추어 생각하는 그것이 지혜이니, 우주 전체를 하나로 아미타불로 묶어 항상 하여 몸에 익도록 하다가 여기서 견성오도를 하신분이 먼저 자수(?)를 하시기로 하자. 그렇게 함께 계속 나아갔으면 좋겠다.

(이 대목에서 c보살님- 좋은 게 아니죠. 그렇게 돼야죠!)

 

...이틀전만해도 오늘은 그동안 참여하셨던 열 분이 모두 오시기로 되어있었다. 그런데 결과는 예상보다 반수 도반님들. 갑자기 심하게 체하셔서, 혹은 심한 몸살로, 그러니 옆에서 가료를 도와야 하셔서, 갑자기 일이 생기셔서... 그러저러한 동기들이 기대보다 빈자리를 낳았고 그 옆자리에서 나는 동시대에 태어나 같은 법석에 마주한다는 것은 얼마나 큰 인연일지 되새겼다. 전생부터 같은 공부를 하셨던 분들이 서기 이천년 미국 서부 북쪽에 사셔야 하고, 연령상으로는 학교 다니는 자식들로부터 한풀 놓여나거나 생계로부터 시간을 낼 수 있어야 하고, 뭣보다 이렇게 몸과 마음의 돌발상황이 없어야 하고....

 

한두 분이 부득이 빠지신다고 미리 연락을 주셨기로, 실험차 오늘은 캠코더를 챙겨갔다. 전에 노트북 마이크로 실험했더니 녹음이 잘 안되었던 경험이 있다. 집에 돌아와 확인하니 벽에 쏜 슬라이드 화면이라 많이 뿌옇지만 강의 목소리가 잘 들린다 야호. 한편으론 뚜꿍, 대용량파일이라 이메일 전송이 안된단다. 다음 강의 전까지 드리고 싶은데 하며 혼자 갸우뚱하며 이렇게저렇게 실험하는 중이다.

 

보리방편문으로 정말 행복해 하시고, 매 강좌를 준비하여 나누어 주시는데에 기뻐하시는 도현거사님을 뵈며, 도반님들은 참 좋아하신다. 또한 이 좋은 법을 더 많은분들이 참여하지 못하는 것을 많이 안타까워하시고...

 

함께 공부하시는 분들께서 아프시지 말았으면 좋겠다.

60이 넘으시니 연세가 더 드시기전에 해 볼 것을 해보신다고 몇주전 성도절에 천 배를 하시기도 했고 4시간 내리참선경험을 해보시기도 했다. 특히 몇 달전부터 산호세 사시는 두세 분은 매일 수선회 새벽 5시 선방에 도착해 108배와 1시간 참선을 하는 것으로 일과를 시작하고 계신다. 그렇게하시고 출근길을 가시는 보살님은 참...

고개가 숙여지고 숙여지는 요즘이다...

 

......모든 분들께서 늘 여여하시길 빕니다.....

 

감사합니다.

 

      ◈ 사랑은 인생의 흐뭇한 향기 ◈ 사랑은 인생의 흐뭇한 향기이자 우리의 인생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는 인생의 따뜻한 햇볕입니다. 가정에서 사회에서 그리고 이웃간에 흐뭇하고 아름다운 정을 나누고 삽니다. 그 고운 정 속에는 아름다운 사랑이 있습니다. 이러한 사랑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인생을 희망과 용기와 기대를 가지고 살아 갈 수가 있습니다. 인간에게는 정의 아름다움과 흐뭇함이 있기 때문에 괴로운 인생도 기쁜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상대방에 대하여 따뜻한 관심을 갖는 것입니다. 내가 사랑의 주체가 되어 누구를 사랑하는 동시에 내가 사랑의 객체가 되어 누구의 사랑을 받아야 합니다. 내가 사랑할 사람도 없고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도 없을 때 나의 존재와 생활은 무의미와 무가치로 전락하고 맙니다. 사랑이 없는 인생은 풀 한 포기 없는 사막과 같고 샘물이 말라버린 샘터와 같습니다. 생에 빛을 주고, 향기를 주고 기쁨을 주고 서로 믿기 때문에 같이 잘살 수 있고 같이 일할 수 있고 같이 친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 협동, 화목, 대화, 희생, 봉사 등 인간의 아름다운 덕이 모두다 믿음과 신의의 토대 위에서 비로소 가능합니다. 신의와 믿음의 질서가 무너질 때 모든 것이 무너지고 맙니다. 사랑과 믿음 그리고 행복은 하나의 가치임과 동시에 삶의 기초입니다. 사랑과 믿음과 창조의 토대 위에 행복의 탑을 쌓고 즐거운 생활의 요람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런 우리일 때 인생은 아름다워 집니다. [ 좋은글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