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이 중도(一異中道)이다

2010. 3. 1. 21:05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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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중도이다 ../ 바라밀님

일이중도(一異中道)


일이중도는 영혼과 육체는 동일한 것인가 다른 것인가 하는 모순된 두 견해를 물리치기 위해 이야기한 것이다. 앞에서 살펴본 단상중도는 일이중도와 근본적으로 다름이 없다. 죽으면 그만이다는 단견은 육체와는 별개의 영혼은 없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고, 육체가 죽은 후에도 ‘자아’는 죽지 않고 내세에 가서 태어난다는 상견은 육체와는 별개의 죽지 않는 영혼이 있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단상중도와 일이중도는 내용상의 차이는 없으나 올바른 수행을 위하여 영혼과 육체에 대한 모순된 견해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잡아함 297경>에서 세존은 다음과 같이 일이중도를 이야기한다.


영혼이 곧 육신이라고 하는 주장도 있고, 영혼과 육신은 서로 다르다고 하는 주장도 있지만 이들 주장은 결론은 한가지 인데 서로 다르게 주장될 뿐이다. 만약 영혼이 곧 육신이라고 한다면 거기에는 해탈을 위한 수행이 있을 수 없으며, 영혼이 육신과 다르다고 해도 해탈을 위한 수행이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이 모순 대립하는 두 견해를 따르지 않고 도를 향할지니, 그것은 현성이 세간에 나와 전도되지 않고 여실하게 바로 보아 알아낸 것이다. 소위 무명을 연하여 행이 있고...


이 경에서 세존은 영혼과 육신이 같다고 해도 해탈을 위한 수행이 있을 수 없고, 다르다고 해도 수행이 있을 수 없기 때문에 해탈을 추구하는 수행자는 마음을 중도로 향해야 한다고 하고 있다. 영혼과 육체가 같다는 것은 육신이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는 견해이다. 육신의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난다면 죽음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없을 것이다. 수행은 생사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하는 것인데 근본적으로 벗어날 길이 없다고 한다면 수행은 무의미한 것이 되고 말 것이다. 따라서 단견은 근본적으로 수행을 부정한다. 과학적 지식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현대인은 대부분 이러한 단견에 빠져 있다. 그래서 출가 수행하는 것을 염세적인 현실도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한편 영혼은 불멸한다는 상견에도 수행이 있을 수 없다. 영혼이 본래 태어나지도 죽지도 않는다면 생사에서 벗어나기 위해 수행할 필요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단견과 상견은 수행을 부정한다는 동일한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수행은 진리에 대한 바른 이해가 있을 때 바르게 실천 할 수 있다. 즉 중도에서만 수행이 가능하다. 대승불교에서는 ‘본래성불’을 이야기한다. 모든 중생은 본래부터 성불해 있다는 것이다. 이 말을 잘못 이해하면 수행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 된다.


이미 성불했는데 성불을 위한 수행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러나 ‘본래성불’의 의미는 그런 것이 아니다. ‘본래성불’이라는 말은 수행의 바른길을 제시하기 위해 이야기된 것이다.

마조 도일 선사가 남악 회양 선사에게 가서 공부할 때의 일이다. 도일 선사는 날마다 가부좌를 틀고 앉아 부처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열심히 수행을 했다. 그것을 본 회양 선사가 도일에게 물었다.


“그대는 무엇 하러 좌선을 하는가?”


도일 선사가 대답했다.

“부처가 되기 위해 좌선을 합니다.”

이 말을 듣고 회양 선사는 기왓장을 가지고 와서 숫돌에 갈았다. 이것을 보고 도일 선사가 물었다.

“스님은 무엇 때문에 기왓장을 숫돌에 갈고 계십니까?”

회양 선사가 대답했다.


“이것을 갈아서 거울을 만들 셈이네”

그러자 도일 선사가 다시 물었다.

“스님, 기왓장을 간다고 해서 그것이 거울이 되겠습니까?”

그러자 회양 선사는 기다렸다는 듯이 도일 선사에게 물었다.

“좌선을 한다고 해서 부처가 되겠는가?”

이 대화를 잘 음미해보자. 회양선사가 도일 선사에게 좌선을 하지 말라고 그렇게 말한 것은 아니다. 많은 수행자들이 부처가 되기 위해서 수행을 한다. 이 사람에게는 부처와 중생이라는 분별심이 있다. ‘나는 중생이다. 좌선을 다하여 깨달으면 중생에서 부처로 변할 것이다.’이런 기대를 가지고 수행하는 사람은 바른 수행을 하는 것이 아니다. 기왓장을 숫돌에 간다고 해서 기왓장이 거울이 될 수 없듯이, 중생과 부처가 따로 있다면, 중생이 수행을 한다고 해서 부처가 될 수는 없다.

수행은 허망한 생사의 세계를 일으키고 있는 무명과 분별심을 멸하여 자신이 본래 생사가 없는 부처임을 자각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 그런데 도일 스님은 오히려 중생과 부처를 분별하고 있었기 때문에, 회양선사는 이것을 깨우쳐 바른 수행을 하도록 하기 위해서 기왓장을 숫돌에 갈았던 것이다.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본래성불’은 이러한 의미가 있다.

이 이야기는 불교수행의 핵심을 보여주고 있다. 대승불교에서 이야기하는 ‘본래성불’은 ‘자아’는 죽지 않는다는 상견도 아니고, ‘자아’는 죽는다는 단견도 아니다. 생사라는 생각 자체가 무명에서 일어난 망상이므로 무명이 있으면 망상에 의해 생사의 세계가 벌어지고 망상이 사라지면 생멸이 없어 본래 청정한 법계의 실상이 드러난다. 이것이 연기하는 세계의 모습이다. ‘본래성불’은 이와같이 연기하는 세계의 모습을 이야기 한 것이다.

다시 일이중도의 문제를 생각해보자. ‘자아’가 죽는다는 단견을 가져도 수행이 있을 수 없고, ‘자아’는 죽지 않는다는 상견을 가져도 수행이 있을 수 없다면, 세존이 주장하는 중도에서는 어떻게 수행이 가능할까? 십이연기에 이러한 의문의 해답이 있다. 십이연기의 마지막 부분은 생로병사하는 우리의 현실이다. 십이연기는 이러한 우리의 현실이 무명에서 비롯된 것임을 보여준다. 무명이 있으면 생사가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십이연기는 유전문(流轉門)과 환멸문(還滅門)이 있다. 무명이 있으면 행이 있고, 이렇게 계속 연기하여 마지막에 생과 노사가 있다는 것은 유전문이다. 그리고 무명을 없애면 행이 없어지고 이렇게 계속 없어져서 마지막에 생과 노사가 없어진다는 것이 환멸문이다. 이와 같이 생사는 유전문에서는 있지만 환멸문에서는 없다.

그렇다면 유전문은 어떤 것이고, 환멸문은 어떤것인가? 유전문은 무명의 상태에 있으면서도 자신의 무명속에 있다는 것을 모르는채 허망하고 거짓된 나를 집착하고 살아가면서 생사의 고해를 떠돌아 다니는 중생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법문이다. 그리고 환멸문은 우리의 생사윤회가 무명과 욕탐에서 비롯된 것임을 깨닫고, 무명과 욕탐을 없애기 위해 팔정도와 같은 중도수행을 하는 수행자의 모습을 보여주는 법문이다.

따라서 십이연기의 진리를 깨닫게 되면 상견이나 단견에 떨어지지 않고, 어리석은 생각(무명)에서 비롯된 허망한 생사의 괴로움에서 벗어나 본래 생사가 없음을 깨닫고 열반을 성취하는 중도수행, 즉 팔정도를 실천하게 된다. 이와 같이 연기법이라는 중도에 서게 되면 생사를 벗어나기 위한 진정한 수행이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1.  3 월

 

2  입춘대길

 

 

3 정월 대보름

 

국내 최대규모를 자랑하는  정월 대보름

청도 달집태우기 모습입니다.                       2010. 2. 28  pm 7:13 

 

 

4  봄은 어느새 겨울의 강을 건너고

 

 

 오늘 밀양 산내에서 겨울의 강을 건너오고 있는

봄을 만났습니다

 

 

5  봄이 오는 길

6  매화가 피었습니다

 

 

 

올해도 어김없이 매화가 피었습니다.

매년 통도사 홍매가 피면 남녘의 봄소식을 전했는데

올해는 지나치다 우연히 발견하게 된

우리동네 가정집 담벼락에 반갑게 피어있는 매화로

남녘에는 봄이 왔음을 알려드립니다.                                   2010. 2.17  pm 02:24

 

7  강능 산복사지에서

 

 

  - 신복사 터

  - 신복사지석불좌상 <보물 제84호>

  - 신복사지삼층석탑 <보물 제87호>

  - 강원 강릉시 내곡동.

  - 고려시대

  - 2009. 10 .11 pm 4:40

 

간혹 동해안을 따라 강원도로 길을 잡으면

꼭 찾아보려고 노력하는 곳이

설악산 진전사지의 도의선사 부도와

강릉시 내곡동에 있는 신복사 터다.

 

설악산의 도의선사 부도는

지극히 개인적인 작은 인연이 있어 찾아가게 되지만

강릉 신복사 터는 거부할 수 없게 잡아끄는 묘한 힘이 있다.

그 힘은 신복사지만이 풍길 수 있는 정제 된 조촐함이 아닌가 한다.

 

신복사지에는 이곳저곳의 이름 있는 폐사지에서

흔히 마주치게 되는 황량함이나 장대함

혹은 슬픈 화려함 같은 것이 삭제되어 있다.

 

포근하게 둘러싸인 자그마한 동산 안에서

늘 정갈한 얼굴로 맞이하는 신복사지는

오히려 폐사지이기에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더도 덜도 아닌 딱 고만큼의 공간만을 소유한 절터와

가히 감탄사를 자아낼 만큼 아름답고 중후한

2개의 문화재가 만들어내는 단출한 조화로움은

보는 이의 가슴에 잔잔한 너울을 그리며 다가온다. 

 

98%를 포기하고 나머지 2%만 가져도 완전하다고 느껴지는

폐사지가 과연 몇이나 있을까?

신복사지에 서면 나는 이 2%만으로도 완전함을 느낀다.

 

 

8. 란에 대한 단상

 

 

 며칠 전 제 방에 있는 蘭이 꽃을 피웠습니다.

 평소 화초관리는 꾸준히 해오고 있지만

한동안은 바쁘다는 이유로 잘 돌보지도 않았을 뿐더러

녀석의 이름을 몰라 단 한 번도

그 이름을 불러준 적이 없었는데

그런 것과는 아무 상관없이 묵묵히 꽃을 피웠습니다.

 

어느 날 문득 코끝을 살짝살짝 스치는

은근한 향기의 근원지를 찾아보다가

비로소 별로 관심을 가져준 적도 없는 녀석이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너였구나, 네가 거기서 나를 부르고 있었구나!"

그제야 나는 녀석의 존재감을 느끼고 화답했습니다.

 

간사한 인간인 나는 단지 향기로운 꽃잎을 열었다는 이유만으로

녀석에게 시선을 던지고 반색을 하고 있지만

아주 오래 전부터 녀석은 이 한 떨기 꽃잎을 피우려고

얼마나 긴 인고의 시간을 견디어 냈는지를

나는 결코 알지 못합니다.

진정 봄부터 소쩍새가 왜 그리도 울었는지를

나는 뼈저리게 느끼지 못합니다.

 

"내가 만약 너였다면 그렇게 긴 무관심의 시간을 인내했을까?"

반갑고 고맙고 그리고 미안했을 뿐입니다.

아니 솔직히 참 부끄러웠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녀석의 이름을 몰라

그 이름을 불러주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쁘게도 집안의 蘭草가 꽃잎을 열었으니

은은히 茶물을 다리며 벗을 부름이 마땅한지라

 

여기 이렇게 벗님들께 고하는 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