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로 윤회할까?

2010. 3. 5. 21:11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728x90

정말로 윤회할까?

 

사람들에게 불교를 생각할 때 제일 먼저 떠오르는 단어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여러 대답을 하겠지만, 많은 이들이 윤회를 꼽는다.

영화 ‘리틀 붓다’나 ‘쿤둔’에 나오는

티벳 승왕 달라이 라마의 환생을 보면 더욱 큰 느낌을 갖게 된다.

때론 전생이 텔레비전 프로그램의 흥미있는 소재가 되기도 한다.

참으로 신기하다는 생각과 함께 그것이 사실일까 하는 의심을 가지기도 한다.

 

인도를 정복한 메난드로스(미린다)왕이 나가세나 존자에게

부정적인 뉘앙스를 풍기며 윤회가 사실인가를 물었다.

그러자 존자는 다음과 같이 명쾌하게 대답한다.

“윤회란,

어떤 사람이 잘 익은 망고를 먹고

씨를 땅에 심어 그 씨로부터 망고나무가 성장하여 열매를 맺고,

다시 그 나무에 열린 망고를 따먹고 씨를 땅에 심어

다시 나무로 성장하여 열매를 맺게 되는 것과 같이

계속 끝이 없는 것을 뜻합니다.”

 

『심지관경』에서는 보다 더 직접적으로 표현한다.

“유정有情은 윤회하여 육도六道에 태어난다.

대개 수레바퀴의 끝과 시작이 없는 것과 같이,

혹은 부모도 되고, 혹은 남녀도 되어

세세생생 서로에게 은혜가 있다.”

 

여기에서 유정은 중생,

즉 깨달음을 얻지 못한 존재 중에서 생각하는 존재,

즉 사람이나 동물을 의미한다.

요즘 일각에서는 식물도 생각을 한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식물은 유정일까 무정일까?

지금까지 보아 온 불교적 관점에서는 무정無情에 속한다.

내 생각은 조금 다르지만...

 

윤회는 인도 고대어로 ‘삼사라Samsara’이다.

사람·동물·초목을 막론하고 몸은 죽어 없어지더라도

그가 한 행위인 업은 영원히 다른 육체로 옮아가

수레바퀴가 돌듯이 여러 가지 환경과 삶의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

어리석음의 생사를 끝없이 되풀이한다는 사상이다.

 

그런데 윤회를 믿을 수 있느냐고 물으면

일반인은 물론 불자나 스님들까지도 확실히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이다.

윤회는 불교만의 이론은 아니지만,

불교인이 모르거나 믿지 않는다면 곤란한 일이다.

반면 윤회를 믿다가 윤회 자체가 불교 수행의 목적인 것으로 잘못 알아서도 안 된다.

 

그러면 윤회를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물론 있다.

그것은 바로 자연과 과학적인 방법을 활용하는 것이다.

 

물은 영상 0도에서 녹고, 섭씨 100도에서 끓으며, 영하 0도에서 언다.

같은 물이 녹았다가 끓고 수증기로 변해서 하늘로 올라갔다가

비나 눈, 우박 등의 모습으로 내려와 기온이 내려가면

얼음으로 변했다가 다시 녹는 모습을 ‘물의 순환’이라고 부른다.

 

유기 물질은 식물의 양분으로 흡입되고,

식물은 초식동물의 먹이가 되며,

초식동물은 육식동물의 배를 채우게 된다.

또 육식동물은 사람에게 먹히거나 죽어서

미생물에게 먹히고 분해되어 원소로 돌아가게 된다.

이 관계를 먹이사슬이라 하고,

먹이사슬이 돌고 도는 것을 생태계의 순환이라고 한다.

 

사람이 태어나서 어린이가 되고

청년으로 성장하여 장년으로 변하고 노인이 되는 것처럼,

지구 또한 유년기, 성년기, 장년기, 노년기의 세월을 보내는데,

그것을 지구의 순환이라고 한다.

 

이렇게 돌고 도는 존재의 형태를 자연 과학에서는 순환이라 부른다.

비슷한 형태나 성질의 것들이 그 삶의 형태를 바꿔 가는 것은 이해하기도 쉽고,

자연 과학의 용어를 써서 얼른 마음에 와닿는다.

그런데 사람과 동물, 동물과 식물 등

얼핏 전혀 관계가 없는 것으로 생각되는 것들이

어떤 관계 속에서 삶의 모습을 달리해 만난다는 것은 얼른 이해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내용이 같고 이름만 다르다면 같이 볼 수 있는 것 아닌가?

 

홍길동은 부하들에게는 대장이지만 홍 판서에게는 아들이다.

홍길동이 결국 같은 인물인 것처럼,

윤회와 순환은 다 같이 돌고 도는 삶이라는 의미에서 같은 것이다.

 

깨달아 부처가 되지 않는 한 모두 윤회한다.

따라서 윤회를 믿고 거기서 벗어나는 것이 목표이다.

이 윤회를 벗어나기 위해 불교 즉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고 수행을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