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의 가르침은 실천에 의한 자기 해탈이 목적이다.
이 목적을 위해 계와 정과 지혜의 삼학이 필요한 것이다.
이 삼학은 해탈을 위한 매우 심오한 방편이다.
그러나 마음에 평화와 해탈을 얻기 위해 방편으로 필요한
것이지만 삼학이란 자체를 수행의 궁극적인 목적으로 삼
아서는 않된다. 사상(四相)에 집착된자는 세속적인 대의와
불교의 대의를 요해하지 못하고 착각하고 있는 자다.
마치 뗏목을 잘 역고 단단히 매는 것은 강을 잘 건너기 위
한 것이지 뗏목 자체를 잘 만들어 화려하게 꾸미고 치장
하여 남에게 자랑하기 위해서가 아닌 것 처럼. 목적이 강을
건너는데 있다면 건너기만 하면 뗏목의 목적은 달성 된 것
이라 할 수 있는 것 처럼. 불자들이 마음에 해탈을 목적으로
불교를 공부한다면 남의 허물을 꾸짖는 일에 힘쓸 것이 아니
라 삼학이란 방편으로 자신의 몸과 마음을 살피고 다스리는
데 힘써야 하는 것이다.
그르므로 자기의 마음을 등불로 삼고 법을 등불로 삼고 정진
하고 수행하라고 한신 것이다.
자기 마음의 정체를 바르게 관찰하고 이해할 수 있어야 그
마음을 다스리고 해탈에 이르게 할 수 있고 남의 마음도 헤
아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이 사바세계의 중생계의 유정 무정은 서로서로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를 구성하고 있기에 건전한 사회를 만들기 위
해서는 이웃 간에 윤리나 도덕적인 간섭이나 비판도 필요 하
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진정한 비판이나 간섭은 먼저 자신의 마음의 정체를
바르게 관찰하고 이해하고 있을 때 진정한 비판이 될 수 있
는 것이다.
자기 마음도 행동도 잘 모르면서 남을 비판하는 것은 진정한
비판이라 할 수 없는 모순적인 행동이고 그것은 어리석은 자
들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어리석은 자가 마치 남의 집 소를 자기소 인냥 착각하여 세
고 있지만 실은 자신에게는 아무소득도 없는 것처럼. 은행
직원이 하루종일 남의 돈을 세고 있지만 결국 자기 돈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것 처럼, 남의 허물이나 살피고 꾸짖기
를 좋아 하지만 자신에게는 아무 이득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지혜로운 자는 자신의 몸과 마음과 행동을 살피고 다스려 근
심이나 걱정이 영원히 없어지고 궁극에는 완전한 해탈을 얻고
열반에 들게 되는 것이다.
-무심지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