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스님을 추모하며

2010. 3. 24. 20:55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제불조사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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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법정스님 돌아가셔서 무척 서운했겠어요?”

“아이구 뭐, 저만 그랬겠어요?”

스님의 입적 소식으로 온 나라가 술렁이지 않았는가.

그러고 보니 그날이 스님의 초재 날이었다.

스님이 “젊었을 때부터 원자씨, 법정스님 책을 많이 읽고 좋아했지.” 라고 하셨는데, 

출가하기 전에 우리 집에 왔다가 나의 방 벽에 걸어놓은 법정스님 사진을 보았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생각난다. 초여름 초록빛 숲을 배경으로 찍은 법정스님의 사진을 벽에 걸어놓았었다.

당당한 모습이 얼마나 근사했던가. 

직설적이고 남성적인 성격의 선배도반 한사람도 벽에 걸어놓은 사진을 보고 혀를 끌끌 차며 한 마디 했었다.

“이그, 이건 우상숭배야, 우상숭배!”

 

 

 

대학생일 때 법정스님의 ‘무소유’를 처음 읽었다.

서클 지도 교수님이 그 책을 권해서 읽고 난 다음 스님의 팬이 되었다.

‘본래무일물, 본래 한물 건도 없다’는 말을 그때 스님의 책에서 처음 접한 것 같다.

젊었을 땐 그 의미를 잘 몰랐으나,

나이들어 보니 그것은 삶의 한가운데를 관통하는 연기법이며 ‘공空’이며 중도였다.

모든 경계를 직관하게 하는 얼마나 통쾌하고 기막힌 철학인가.

 

봉은사 다래헌에 사실 때 도둑맞은 탁상시계를 청계천 고물상에서 발견하고 다시 사다놓으셨다는 이야기, 젊은 날 입적한 도반 수연스님이야기는 아직도 기억에 남아있다.

 

 '필요없는 것은 소유하지 말라'는 스님의 철학이

먹기 살기 어려웟던 그시절 ' 무소유'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던 걸 보면 

스님은 역시 역시 앞서가신 분이었다. 이번에 입적하시고 나서 들으니, 그때 출판사 사장이 

지금 시대에 '무소유'라는 제목이 독자들에게 어필할 수 없다며 다른 제목으로 할 것을 제안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미 이름을 지어오신 스님의 완강한 고집으로 그냥 제목을 '무소유'로 했다고하는데,

스님께선 꼭 필요한 것만 적게 소유한 청빈한 삶만이 진정한  존재양식임을 말씀하고 싶으셨던 것 같다.

그리고 스님은 그 철학을 자신의 삶에서도 시종일관 지키셨던 것으로 안다. 영혼이 담긴 글을 인해 생긴

막대한 인세를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들에게 남김없이 회향하고, 입적하시기 전 병원에 입원하셨을 때는 

원비가 없어 길상사에서 빌리셨다는 후문이다.   

스님이 실천하셨던 무소유 정신은 세월이 가도 모든이들에게 깊은 철학으로 남아 물신이 지배하는

사회에 경종이 될 것이다. 

 

 

‘무소유’ 다음에 나온 ‘서있는 사람들’이라는 책을 읽으면서 생각했었다.

‘아! 다음 생엔 나도 이렇게 한번 살아봤으면, 얼마나 당당하고 멋진 삶인가,’ 하고.

스님의 글 속에 들어있는 그 빳빳하게 살아있는 자존과 고독을 동경했던 것 같다.

(그런데 왜 새로운 삶을 선택할 그 젊은 나이에 출가를 다음 생으로 미루었을까.

지중한 업!!이 그 답이겠지만,..)

 

새벽에 깨어나 스님의 책을 읽으면서 스님과 동시대를 함께 한다는 사실에 가슴이 벅차오르기도 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서있는 사람들’은 결혼하고 나서 마음이 답답할 때마다 꺼내 읽었던 기억이 난다.

 중국어 공부를 한답시고 홀로 번역을 시도하기도 했던 책이다.

그 책 뒷표지에 실린 스님의 뒷모습은 정말 압권이다. 지금까지 나는 그렇게 위의 단정하고 당당한 수행자의 뒷모습을 본 적이 없다.(물론 나의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이십대 후반 무렵, 아마 미타암 스님이 출가한 이후일 것이다.

선배 한 사람과 함께 송광사에 갔다가 스님이 계시는 불임암에 올라갔다.

당시 스님은 몇 권의 책과 한 달에 한 번 월간지 ‘샘터’에 기고하는 글로 유명세를 타고 계실 때였다.

송광사 본절을 참배하고 불일암에 올라갔더니, 댓돌에 스님의 고무신과 까만 운동화 두 켤레가 보였다.

우리는 밖에서 ‘손님이 왔나보다.’ 하면서 주위를 어슬렁거렸다.

툇마루에 홀로 놓여있던 보랏빛 수선화 한 그루는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선명하다.

 

“밖에 누구 왔습니까?”

우리 두 사람의 인기척이 들렸나보다.

“네.”

“왔으면 들어와서 찬 한잔 마시고 가요.”

이게 웬 횡재인가,하고  얼른 들어갔더니 두 분의 수녀님이 손님으로 와 계셨다.

법정스님께선 차를 따라주시면서 어디서 왔는가, 그리고 우리의 신분을 물으셨다.

가까이 선 뵌 스님은 사진에서처럼 선이 굵고 당당한 모습이었다.

(그때 중학교 생물선생이었던 선배도반은 지금 어느 학교 교감선생님으로 아직 독신이다.

한참 소식이 끊겼는데 어느 날 학교 도서실에서 ‘나의 행자시절’을 발견하고 연락을 해와 몇 년 전 다시 만났다.)

 

 

그리고 얼마 후였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송광사엘 또 갔었다. 그때는 여러 도반들과 함께였을 것이다. 사하촌에 머물렀는데, 새벽에 눈이 떠져 홀로 불일암에 올라갔다. 늦가을쯤이었을 것이다.

스님은 아궁이에 군불을 지피고 계셨다.

나는 밖에서 불을 때고 계시는 스님을 한참 바라보았다.

그 불일암 아침의 고요함, 침묵속에 서 있던 나무들과 숲속의 냄새를 잊지 못한다.

인기척을 느낀 스님께서 흘끗 고개를 돌리셨다. 합장으로 인사하는 나를 보고 스님께선 아무 말씀 안하시고 다시 불을 때셨다.

스님의 무표정한 얼굴. 아궁이 앞에 불을 지피고 계시던 담담한 모습은 나만의 아름다운 추억일 것이다.

 

 

입적하시기 몇 달 전, 제주도 바닷가 근처에서 지내셨다고 하는데, 지인 한사람이 여쭈었다고 한다.

“스님, 죽음은 무엇입니까?”

바닷가를 거닐던 스님께서 조용히 말씀하셨다고 한다

 

“우레와 같은 침묵으로 돌아가는 것이다.”라고.

 

우레와 같은 침묵.

나는 그 이야기를 어느 지면에서 보고 탄식했었다.

한평생을 침묵 속에서 지낸 스님만이 말할 수 있는 답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오래 자고, 많이 먹고, 텔레비전 보고, 잡다한 세상일과 사람에 대한 시비를 멈추지 않으면서 사는 동안 스님께선 강원도 오두막집에서 홀로 침묵하셨다. 그 많은 시간 침묵속에 있으면서 스님은 무엇을 보았을까. 무엇과 맞닿으셨을까.

깊이를 알 수 없는 침묵의 심연에서 맞닿았던 것은 불성이었으리라 믿는다.

가장 맑고 깨끗하며 밝게 빛나는 존재 본연의 자리, 불성.

그 위대한 침묵 속에서 나온 영혼의 말씀이 저 스무 권의 저서로 태어났기에,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위로받고 자신을 성찰했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스님은 침묵의 중요함에 대한 말씀을 많이 하셨던 것 같다.

‘무소유’ 중 ‘침묵의 의미’라는 소제목 속에 이런 글이 있다.

 

 

“말이 많으면 쓸 말이 별로 없다는 것이 우리들의 경험이다.

하루하루 내 자신의 입에서 토해지는 말을

홀로 있는 시간에 달아보면 대부분 하잘 것 없는 소음인 것이다.

사람이 해야 할 말이란 꼭 필요한 말이거나 ‘참말’이어야 할 텐데

불필요한 말과 거짓말이 태반인 것을 보면 우울하다.

시시한 말을 하고 나면 내 안에 있는 빛이 조금씩 새어나가버리는 것 같아

말끝이 늘 허전해진다.”

 

얼마나 간결하고 깊은 메시지가 있는 말씀인가. 1974년 마흔 셋에 쓰신 글이다.

 

아, 이 글을 쓰면서 그 옛날 보던 ‘서있는 사람들’을 책장에서 찾아냈다.

책 뒤 표지 스님의 뒷모습 옆으로 이런 글이 실려 있다.

 

 

열린 귀는 들으리라.

한때 무성하던 것이 저버리고 만

텅빈 들녘에서 끝없이 밀려드는

소리 없는 소리를

 

 

스님의 글 가운데 한귀절일 것이다.

스님의 한평생 가장 가까운 친구는 절대 고독속의 침묵이었으리라.

사십대 후반에 그 책을 내셨으니 스님은 오랜 동안 침묵과 친구삼아 지내신 것이리라.

 

 

 

다시, 저 불일암을 방문해서 스님을 뵈었던 때로 돌아가서,

새벽녘의 불청객이 반갑지 않으셨을 것이다. 그 즈음 스님께선 책을 읽고 시도때도 없이 찾아오는 독자들 때문에 몸살을 앓고 계실 때였다. 나는 바로 돌아서며 죄송함을 전했다.

“스님, 새벽에 불쑥 올라와 죄송합니다. 내려가겠습니다.”

 

그 이후 몇 년마다 한 번씩 나오는 스님의 책을 섭렵했다. 이번에 입적하시고 나서 들으니, 그간 20여 권의 책을 내셨다고 한다. 몇 권 빼놓은 것도 있겠으나 스님의 책이 발간될 때마다 기쁜 마음으로 구입해서 숙독했었다. 휘청휘청, 비뚤비뚤, 그럭저럭 살아가는 내 모습을 거울처럼 비춰주는 글들이었다.

 

 

그러다가 40대 중반에 나는 내 인생의 최대 위기를 맞게 되었다.

모시고 있던 시아버님께서 중풍으로 쓰려지신 것이다.

시어머님이 안 계신 데다가 외며느리였던 나의 절망은 깊고도 깊었다.

결론적으로 의식을 찾지 못하신 채 아버님께선 병원에서 6개월을 보내시고

집에 오셔서 5개월을 병상에 누워계시다가 돌아가셨는데,

아버님 병상을 지키면서 매일 스님의 책을 읽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부터 아예 대학노트에 내용을 베껴쓰기 시작했다.

'버리고 떠나기'라는 책이 아니었나 싶다. 

스님은 말씀하고 계셨다.

“괜찮다”고.

‘인생은 인연에 수순하면서 사는 거라’고,

온갖 폭풍 속에서도 꽃을 피우는 저 나무들의 의연함을 보라고..’

나는 그때 조용히 이렇게 결론을 내리고 안정을 되찾았었다.

‘아무 것도 예측하지 말고 인연에 따르자.’

‘어떤 결과가 오든 그것에 감사하자!’

나는 그 앞날을 알 수 없었던 일 년을 큰 회한없이 잘 보냈다. 법정스님께서 주신 선물이다.

평생 두고두고 감사할 것이다.

 

종의 초조이신  달마스님께서도 가르치신 바 있다.

 

어떤 일에도 원망함이 없이 참고 견디며

순리대로 인연에 따르며

아무 것도 구하지 않으며

진리에 맞게 살면서 도를 실천한다.

 

나는 저 말씀이 좋다. 마음이 황폐해져서 울음이 터져나올 것만 같았던 그 당시에

아마 법정스님의 책에서 저 말씀을 찾아냈을 것이다.

 

 

지금은 연재가 끝난 ‘나의 행자시절’을 ‘해인’지에 쓰고 있을 때 법정스님의 행자시절 원고를

받았으면 하는 생각을 가끔 했었다. 글을 잘 쓰시는 분이니까 취재할 필요는 없고,

 직접을 써주셨으면.. 하고 바랬는데, 번거로운 것을 싫어하시는 분이라 짐작하고

감히 말씀드려보지도 못하고 말았다.

 

 

그리고 또 세월이 많이 흘렀다.

예기치 않게 스님을 뵐 수 있는 기회가 왔다. 3,4년 전의 일이다.

울산 석남사에 주석하시다 입적하신 비구니계의 선지식인 인홍스님의 평전을 쓰기로 했는데,

그 책의 서문을 법정스님께서 써주시기로 한 것이다.

인홍스님 문도회 대표 가운데 한분이셨던 금강굴의 불필스님께서 허락을 받아놓으셨다고 했다.

법정스님께서 젊은 시절 통도사에 머물면서 불교사전 편찬을 준비했는데, 가끔 통도사에서 가까운

석남사를 방문해 인홍스님을 찾았던 인연이 있다는 것이다.

 인홍스님께서 법정스님을 매우 아끼셨고 스님께선 인홍스님을 어머니처럼 생각하셨다고  했다.

책 발간의 일정에 대해서 자세히 말씀을 드리고 원고 마감일을 말씀드리는 것이 나의 임무였다.

 

서울 길상사에서 정기법문을 하시기 위해 강원도 오두막을 떠나오셨던 어느 봄날이었을 것이다.

나는 그 날, 길상사 마당에 서서 스님의 법문을 들었다.

하실 말씀을 미리 원고로 작성해가지고 오셔서 원고대로 법문하시던 모습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30여 분쯤 하실 말씀만 딱 하시고는 법상을 내려가셨는데, 꼼꼼하고 용의주도한 그 모습을 보면서

참, 스님답다고 생각했다. 군더더기 없이 간결하고 삶을 성찰하게 하는 법문이었다.

법문을 끝내시고 그날 무슨 행사가 잠깐 있어서 법당에 가부좌하고 앉아 계셨는데,

아, 그 당당하고 기품있는 뒷모습은 세월이 흘렀어도 여전하셨다.

그리고 그날 오후, 일을 다 마치고 강원도로 떠나시면서 사람들의 배웅을 받으며 차로 성큼성큼 걸어가시는 모습이라니!

진정코 젊은 시절보다 더 멋진 뒷모습을 간직하고 계셨다. 스님이 살아온 시간들을 느낄 수 있었다.

 

그날, 점심을 먹고 스님이 몇 시간 머물다 가시는 주지실에서 스님을 뵈었다.

스님을 뵙고 싶어하는 여러 사람들과 함께였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시는 스님을 가까이서 뵈니, 비로소 얼굴에 노년의 모습이 역력했다.

어느덧 칠십대 중반의 연세이시니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눈빛은 형형하셨다. 일체에 동요됨이 없을 것 같던 눈빛.. 

 

스님께서는 그날 손수 남은 과자를 접시에 놓아주시면서 ‘자, 이건 원자씨 먹어요.“ 하시면서

친절하게 대하셨다. 칼칼하고 무뚝뚝하기로 호가 난 스님께서 이름을 그렇게 부르시다니,

나중에 저 멀리 섬에 들어가 수행하고 있는 한 지인에게 흥분을 감추지 못한 채 전화하면서 

이 일을 전했더니, ‘에구 그 나이에...’ 하면서 혀를 끌끌 찼다.( 그때 생각을 하면 늘 웃음이 난다)

그런데 지인이 그렇게 혀를 찰 만 했다. 몇 달 후 원고 받을 약속 날짜에 길상사로 서문 원고를 받으러 갔는데, 스님께서 이러시는 게 아닌가.

“여기 이 원고 끝에 작가 이름이 생각나지 않아 쓰지 못했는데 이름을 채워 넣으세요.”

나도 모르게 불쑥 “아니, 스님, 그땐 원자씨라고 부르시더니요.‘하고 항의하고 말았다.

그런데 스님께서는 웃지도 않으시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 나는 만나는 사람 이름을 그날 하루만 기억해요.”

으악, 그때의 무안함이란.^^

그러나 스님의 입장에서는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한두 번 만난 사람의 이름을 어떻게 다 기억할 수 있겠는가. 거기다가 별 특징도 없는 사람의 이름을.

스님께서 입적하신 지금, 그 모든 일이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았다.

 

 

그리고 나서 스님을 한 번 더 뵈었을 것이다. 먼발치에서..

스님께서 편찮으셔서 한참 동안 길상사 정기 법문을 하시지 못하고 있었는데,

건강이 조금 나아져 다시 법문을 재개하기로 한 날, 길상사에 갔다.

그날, ‘한참 앓고 나니 꽃이 피고 지는 일이 그렇게 고맙고 아름답게 느껴질 수가 없습니다.’ 하셨던

말씀이 기억난다. ‘그간 사람들에게 친절하지 못한 게 후회스럽다.’고도 하셨다.

어느 자리에서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부처님이 친절부처님’이라고 하셨다던가.

 

꽃들이 피어나던 봄날이었던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이 법당에서, 마당에서 스님의 말씀에 조용히 귀를 기울이고 있던 모습이 생각난다.

가사장삼을 수하신 채 상좌들을 대동하고 경내를 거닐면서 사람들에게 합장을 하시고 지나시던 모습이

마지막이었다. 여전이 걸음이 힘차고 위의 있으셨는데....

이제 그 모습을 다시는 뵙지 못하게 되었다.

 

 

3월 11일 오후. 밖에 있다가 학교에 있던 막내딸의 전화를 받았다.

“엄마, 법정스님 돌아가셨대!”

한 세기를 빛냈던 별이 졌구나 생각했다.

 

다음날, 마침 도반의 친정아버님 49재가 있어서 통도사에 갔다가 함께 갔던 도반들과 송광사로 갔다.

스님의 운구가 오후에 길상사에서 송광사로 옮겨진다는 소식이었다.

'법정스님 입적', 프랭카드에 그렇게만 적혀 있던 것이 생각난다.  

막 운구가 도착한 다음이어서 스님께 삼배로 인사드릴 수 있었다. 눈빛 형형한 영정사진을 한참 바라보다 나왔다.  

 

 

 

 

 

그 옛날 스님을 처음 뵈었던 불일암에도 가보고 싶었지만 시간이 늦어 발걸음을 돌렸다.

날이 따뜻해지면 운동화 신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송광사로 가는 버스를 탈 것이다. 불일암에 올라가 뜰 앞의 후박나무와 작은 걸상, 검소한 부엌을 바라보리라.

 

 

다음날, 텔레비전으로 스님의 다비식을 지켜보았다.

마지막 가시는 모습도 스님다운 마무리였다.

영결식 등 일체의 형식적인 행사를 생략한 채 다비만 하는 것을 보면서

조금의 틈도 없이 언행일치의 삶을 살다가신 스님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관도 하지 말고 수의를 만들지 말 것이며 입던 옷에 가사를 둘러 화장하라‘고 하신 스님의 유언에 따라

대나무 평상에 가사에 덮인 채 누워계신 스님의 모습은 충격적이었다.

스님의 몸체가 그대로 드러난 모습을 보면서 진정, 삶과 죽음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대, 어떻게 살다가 갈 것인가?”

"그대는 누구인가?"

무상한 모습을 보이시면서 그렇게 묻고 계신 것 같았다.

아, 스님은 끝까지 우리에게 인생의 가장 중요한 문제를 화두로 던지고 가신 것이다.

 

 

 

 

그날, 할아버지 스님의 영정을 들고 맑은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던 손상좌의 모습에

믾은 사람들이 눈시울을 붉혔으리라.

 

초재 날, 스님의 유언장이 발표되었다.

세상사람들과 제자들에게 당부하신 말씀이다.

신문에 난 유언을 읽는데 왈칵 눈물이 나왔다.

유언 전문이 마치 스님의 수필처럼 간결하면서도 아름답다.

 

1. 모든 분들에게 깊이 감사드립니다. 어리석은 탓으로 제가 저지른 허물은 앞으로도 계속 참회하겠습니다.

2. 내것이라고 하는 것이 남아있다면 모두 '사단법인 맑고향기롭게'에 주어 맑고 향기로운 사회를 구현하는 활동에 사용토록 하여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그동안 풀어놓은 말빚을 다음 생으로 가져가지 않으려 하니, 부디 내 이름으로 출판한 모든 출판물을 더 이상 출간하지 말아주십시오.

 

3. 감사합니다. 모두 성불하십시오.

 

 

내 이름으로 발간된 책을 절판하라.

내가 풀어놓은 말빚을 다음 생까지 가지고 가고 싶지 않다는 것이 그 이유다.

역시 스님답지 않은가.

‘모든 분들에게 깊이 감사드립니다. 어리석은 탓으로 제가 저지른 허물은 앞으로도 계속 참회하겠습니다.’

이 말씀 앞에서도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위안도 된다. 스님처럼 잘 살다가신 분도 허물을 계속 참회하시겠다니, 허물 투성이요 참회할 일이 너무 많은 내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모른다.

 

제자들에게 하신 유언은 정말 감동적이다.

아버지가 사랑하는 자식에게 남긴 말씀처럼 인간적이다.

 

상좌들 보아라

1. 인연이 있어 신뢰와 믿음으로 만나게 된 것을 감사한다. 괴팍한 나의 성품으로 남긴 상처들은 마지막 여행길에 모두 거두어가려 하니 무심한 강물에 흘려보내주면 고맙겠다. 모두들 스스로 깨닫도록 열과 성을 다해서 거들지 못하고 떠나게 되어 미안한 마음 그지없다. 내가 떠나더라도 마음 속에 있는 스승을 따라 청정수행에 매진하여 자신 안에 있는 불성을 드러내기 바란다.

2. 덕조는 맏상좌로서 다른 생각하지 말고 결제 중에는 제방선원에서, 해제 중에는 불일암에서 10년간 오로지 수행에만 매진한 후 사제들로부터 맏사형으로 존중을 받으면서 사제들을 잘 이끌어주기 바란다.

3. 덕인, 덕문, 덕현, 덕운, 덕진과 덕일은 덕조가 맏사형으로서 존중을 받을 수 있도록 수행을 마칠 때까지는 물론, 그 후에도 신의와 예의로 서로 존중하고 합심하여 맑고 향기로운 도량을 이루고 수행하기 바란다.

4. 덕진은 머리맡에 남아있는 책을 나에게 신문을 배달한 사람에게 전하여 주면 고맙겠다.

5. 내가 떠나는 경우 내 이름으로 번거롭고 부질없는 검은 의식을 행하지 말고, 사리를 찾으려고 하지도 말며, 관과 수의를 마련하지 말고, 편리하고 이웃에 방해되지 않는 곳에서 지체없이 평소의 승복을 입은 상태로 다비하여 주기 바란다.

2010년 2월 24일 법정(속명 박재철)

 

 

상좌들에게 남기신 이 말씀은 많은 수행자분들에게도 귀감이 되리라고 믿는다.

 

내가 떠나는 경우 내 이름으로 번거롭고 부질없는 검은 의식을 행하지 말고, 사리를 찾으려고 하지도 말며, 관과 수의를 마련하지 말고, 편리하고 이웃에 방해되지 않는 곳에서 지체없이 평소의 승복을 입은 상태로 다비하여 주기 바란다!! 

 

아름답다!! 그 어느 열반송보다 경건하지 않은가.

 

 

젊은 시절, 법정스님의 글을 읽으면서 나는 스님과 동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이 행운이라고 생각했었다.

주옥같은 많은 말씀 가운데서도 늘 기억하고 있는 것이 있다. 지키고 싶은데 잘 안 되는 말씀..

 

 

입안에 말은 적게

뱃속에 밥은 적게

 

잠자다가 일어나면 다시 눕지마라

 

 

실행하고 싶은 말씀인데 아직 요원하다.

다른 것은 몰라도 저 세 가지만은 남은 세월 지켜보리라, 다짐해본다.

 

 

법정스님께서 입적하시고 며칠 뒤 우체국에 볼일이 있어 갔더니, 평소 친절했던 여자 직원분이 묻는다.

“혹시 무소유란 책 있으세요?”

“네..”

빌려달라는 말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저는 그 책을 읽지 못했어요. 혹시 여러 권 있으시면 파셨으면 해서.”

내가 책을 많이 부치니까 출판업자로 안 것일까?

아무튼, ‘무소유’ 한 권 값이 얼마를 한다던가, 세간에 떠도는 소문이 입증되는 순간이었다.

다음에 우체국에 갈 땐 집에 있는 ‘무소유’를 복사해서 선물할까 생각해본다.

문고판으로 115쪽이니까 부담스럽지 않을 것 같다.

이참에 나도 집에 있는 스님을 책들을 다시 한번 읽어보고 내 삶을 점검해봐야 겠다.

 

 

홀로 있어도 누군가 등뒤에서 지켜보는 것같아 함부로 살수 없다시던 스님,

호롱불 밑에서 바람소리와 함께 조용히 책 읽는 것을 사랑하셨던 스님,

침묵으로 걸러진 영혼의 말씀으로 세상과 깊이 소통하셨던 스님, 

익숙한 모국어가 좋아서 다음 생에도 이땅에 태어나고 싶다시던 스님!

어떤 모습으로 다시 이 땅 우리 곁에 오실 지 궁금하다.

 

 

 

미타암 스님을 만나 뵙고 오는 바람에 법정스님과의 추억에 오래 잠겨보았다.

그런데 감정에 겨워 스님의 말씀을 또 지키지 못했다.

 

입안에 말은 적게.

 

스님, 죄송합니다. 나무아미타불.

 

 
Forever / / Ocarin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