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꿈은 생명의 양식

2010. 4. 12. 21:04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꿈과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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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 꿈은 생명의 양식 ♡

 

인간은 꿈을 잃을 때 건강을

잃어 가는 것이다

꿈이야 말로 인간 생명의 원기이며

그 사는 에너지인 것이다

 

꿈이 있는 인간은 부지런해진다

쉴 사이가 없는 것이다

할 일이 많은 것이다

 

인간의 수명에는 한도가 있기 때문이다

일정한 시간을 살다가 죽어서

다른 곳으로 떠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이렇게 누구나 자기에게 배당 된 시간을 살다가는

 보이는 이 세상에서 보이지 않는 저 세상으로 

떠나야만 하는 것이다 

 

그 잠깐 동안을 인생이라는 장소에서 

머물고 있는 것이다 

 

머무는 동안 병도 들고 고민도 하고 울기도 하고

아웅 거리기도 하고 돈을 벌려고 

애쓰기도 하고  미워하기도 하고 싸우기도 하고

실로 욕망과 좌절과 고독과 성취와

그 희비애락 그인생을 살고 있는 것이다

 

건강과 장생 이것을 이 시궁창 속에서 건져내려면 

먼저 그 시궁창을 만들어 내는 그욕망과 

그 허영 그 허욕 과도한 자기 과정에서

벗어나야만 하는 것이다 

 

오르지 순결한 꿈을 간직하면서 

그 순결한 인생의 길을 찾아서 걸어야 하는 것이다

 

[ 옮긴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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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님!!

 나에게 주어진 하루라는 가장 큰 선물에
감사의 마음 담아 하루를 시작하며
기쁨과 행복을 내것으로 만들어 보는건 어떨련지요?

곳곳에 피어나는 봄꽃들의 향연이 펼쳐지는
아름다운 봄 날에
상큼한 향기 가득담아 따뜻한 차 한잔으로
여유로운 하루 맞이 하세요~~


맑은 햇살처럼 고운 미소가 함께하는 하루
아름다운 봄꽃 향기 속에 행복이 넘치는 날이 되세요?
 

오늘 하루도 웃음 가득한 날이 되시길~~ 

 

 

또 다시 봄은 왔는데....|

또 다시 봄이구나

 

3월 내내 눈 오는 날이 더 많던 겨울나라에 살다보니 이곳에도 꽃피는 봄날이 오기는 올까? 하는 의구심마저 들었는데

4월 들어 눈이 진눈개비가 되다가 비로 변하면서 겨우내 하얗게 쌓였던 내 정원의 눈과 집 앞 계곡의 얼음장도 어느새 녹아 버렸어요.

이젠 계곡에서 빨래도 하고 며칠 전에는 실내에서 꽃을 피운 구근들을 화단에 내다 심기도 하면서 봄을 실감했지요

한낮 햇볕은 제법 따가울 때도 있어요.

 

시절은 이렇게 봄을 지나 여름을 향해 가고 있는데 내 인생은 아직도 기나긴 겨울의 터널에 갇혀버린 것 같아요.

 

2년 전 남편이 병환으로 떠나고 나자 나와 함께 살고자 이 산골로 들어와 열심히 표고농장 일을 돕던 아들이

작년 3월 교통사고로 아빠 곁으로 가고 말았어요

오빠의 빈자리를 대신해 한동안 영국으로 유학 간 남편을 따라가지 않고 내 곁을 지켜주던 딸도 지난 겨울

뒤미쳐 영국으로 떠나자 나도 다 버리고 어디론가 사라지고 싶었어요.

그들처럼 나도 이곳을 떠나 그냥 어디론가 훌쩍 떠나버리고 싶은 마음 뿐 이었어요.

 

아무도 나를, 나도 그들을 전혀 모르는 곳으로.

마치 금생을 떠나 내생으로 간 것처럼.

언제 돌아온다는 기약도 없이 집으로 돌아오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 질 때 까지 그냥 떠돌면서 내 마음대로

금방 돌아갈 수도 없는 곳에서 한동안 나를 그냥 바라보고 싶었어요.

내 인생에 무슨 일이 일어났던가.

내 남은 인생을 어떻게 꾸려갈 것인가?

큰 슬픔 뒤엔 큰 위로가 따른다고 하지만 나는 그 누구의 위로를 기다리는 대신 내 자신이 나를 위로해 주기로 했어요.

‘민숙아, 그동안 많이 힘들었지? 이제 좀 쉬렴!’ 하고.

 

20년 전부터 혼자 인도 배낭여행을 보름동안 한 것을 비롯해서 그동안 여러 잡지에 여행기를 기고하며

여비를 충당하면서 즐겁게 고달픈 여행을 주로 해왔지만 이번엔 다른 세계에 대한 호기심이나 동경이 아닌

현실도피적인 떠남이라 그런지 도무지 어디 가서 무얼 먹고 어디서 잘지를 챙기는 기본적인 것도 생각하고 싶지가 않았어요.

이곳 저곳 다니며 짐을 쌌다 풀렀다 하는 것도 귀찮고 그렇다고 한 곳에만 죽치고 있는 것도 지루할 것 같았어요.

그래서 몸만 가면 다 알아서 챙겨줄 것 같은 배를 타는 것이 제일 낫겠다 싶었어요.

이제까지 아주 작은 똑딱선 말고는 진짜 배다운 배를 타본 적도 없었거든요.

 

그래서 배를 타고 망망대해를 그냥 떠다니며 요즘 애들 표현으로 ‘멍 때리고“ 있고 싶었어요.

'sweetness of doing nothing'

아무 것도 안해도 되는 빈둥거림의 달콤함에 빠져 세상만사를 다 잊고 싶었어요.

 

늘어지게 자다가 배고프면 차려논 밥 먹고 럭셔리한 스파에서 폭신한 흰 타올가운 입고

따끈하게 데워진 온돌방 같은 황금 빛 긴 의자에 발 뻗고 길게 누워 책을 보다가

어느새 깜빡 잠 들었다가 깨면 갖가지 음식이 차려져 있어 식성대로 골라 먹으면 되고,

방 청소는 식사하러간 동안 담당 스튜어드가 하루 세번씩이나 말끔히 정리해주니

고민거리라면 이번에는 어느 식당에서 무얼 먹을까 정도인 때도 있더군요.

내가 꿈꾸던 별세계 바로 그런 곳이었어요.

 

만창장에는 드레스 코드가 정장이라서 옷차려입기가 귀찮지만 머리부터 발끝까지 치장한 사람들

구경하는 것도 재미있고 음식이 훌코스 성찬으로 제공되기 때문에 랍스터가 메인디쉬인 날은

나도 성장을 하고 만찬장으로 향했지요.

만찬 후에는 매일 밤 예술의 전당보다 화려한 극장에서 각종 공연이 있어 모처럼 공연예술도 맘껏 즐길 수 있었어요.

그런데 이때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늦은 밤 공연이 끝나도 택시나 지하철 혹은 넓디 넓은 지하 주차장에서 내 차를 찾아

집까지 가야하는 번거로움이 없다는 거예요.

3층 공연장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7층 내 방으로 가기만 하면 되니까.

 

그래도 아침에 눈을 뜨면 10층에 있는 갑판에 나가 바다에 떠오르는 태양을 향해

108배를 하고나서 한동안 참선을 하곤 했지요.

 

아는 사람이 없는 배를 타고 싶어서 일부러 인터넷으로 미국에 있는 에이전트를 통해 예약을 해서

식사 때는 매일 다른 나라 사람들과 담소하고 있다보면 내가 처한 상황은 남의 일처럼 잊고 지낼 때가 많았어요.

나는 혼자 여행을 하고 싶었으나 배 삯과 식사를 포함한 모든 비용이 2인 1실로 책정이 되어 있어서

혼자 두 배의 비용을 내고 여행하는 것이 아까워 영국에 있는 딸을 불러 함께 지냈어요.

우리는 한 방에서 잠만 같이 자고 식사 때 어느 식당에서 만날지 약속하고는 하루 종일 따로 지내니까

각자 책 한권을 끼고 도서관에 처박혀 있던 노트북을 끼고 카페나 바에 앉아 있던 서로 마음 내키는 대로

지내기로 하니까 동행이 있어도 크게 마음 쓰이지 않았어요.

이번엔 동행조차도 없는 게 낫겠다 싶었지만 진정으로 배려를 해주는 딸과의 동행은 그래도 큰 위안이 되었어요.

 

배가 항구에 정박하는 날에는 같이 시내나 해변을 쏘다니며 사진을 찍기도 하고.

배에서 내린 승객들 대부분이 유명 관광지나 쇼핑센터 등으로 몰려가는 동안

나는 현지의 마을버스를 타고 이 마을 저 마을 다니며 현지인들의 꾸밈없는 진솔한 삶의 현장을 들여다보기도 하고

눈에 띄는 산동네로 무작정 올라가 집안을 다 들여다봐도 개의치 않고 문과 창문을 활짝 열어놓고 사는

서민들과도 눈인사를 나누며 골목 골목을 쏘다니면서 어디나 사람 사는 풍경은 같구나 하는 사실을 새삼 깨닫기도 했어요.

 

내가 70년대 말 사진을 처음 시작했을 때 돈암동, 옥수동 등 고지대에 빼곡히 있던 판자촌 동네를

주로 찍어 첫 전시회를 했기 때문인지 나에겐 아직도 산동네 풍경과 그곳에서 사는 사람들이 친근하게 느껴져요.

이때의 내 사진을 보고 건축가 김수근 선생은 한국 사진도 이정도가 됐나 하시면서

그 당시에는 사진을 예술로 안보던 시절인데도 처음으로 선생님 소유의 공간화랑에서

사진 전시회를 하도록 허락해주셨었지요.

원로화가 박고석 화백, 원계홍 화백 등도 내 사진을 무척 좋아하셨는데

특히 원계홍 화백은 내 산동네 사진이 유트릴로의 그림 같다며 매일 전람회장에 오셔서

밥도 사주시고 조형감각이 탁월하다며 격려도 해주셨는데 나중에 그분이 돌아가신 후

과천 현대미술관에 걸려있는 그분의 그림을 보고 그 분의 그림이야말로

유트릴로를 닮았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되었어요.

 

남편 공부 뒷바라지 하느라 정작 내 공부는 삼십대 중반에야 시작하게 되었지만

시작부터 각광을 받고 명문 예술대학인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에서 공부하고

최초의 사진학 석사가 되어 돌아왔지만 내가 맞닥트린 한국의 현실은 참담했어요.

교수를 채용하는 모 대학 사진학과에 지원서를 냈는데 갑자기 학과장이 돌아가셔서 졸지에 공석이 둘이나 생기고

당시로서는 유자격자가 나밖에 없었는데도 교수회의 결과 ‘여자라서 안된다.

우리 남자 제자가 지금 유학중인데 2년 안에 돌아올 거니까 그냥 공석으로 놔두겠다.’ 면서

 ‘왜 미국유학까지 가서 University를 안나오고 학원을 나왔나?’ 라는 거예요.

이 교수들은 MIT나 줄리아드도 학교이름에 University가 없다고 학원이라고 할 사람들이예요.

당시의 사진학과 교수들은 국전 입상 경력으로 교수가 된 사람들이라서 외국 대학에 대한 정보가 너무 없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신문방송학과 출신으로 일간지 기자를 한 인연으로 나는 신문방송학과가 있는

고대, 이대, 서강대, 외대 등에서 포토저널리즘을 가르치고 덕성여대 , 홍대 등 사진학과가 아닌 미술대학에서

사진을 가르치는 강사를 할 수 밖에 없었답니다.

 

결혼하고 나서부터 내 인생은 없었던 것 같아요. 시다바리 인생이랄까?

유학가는 남편 뒷바라지 하러 유명 일간지 기자를 그만 두고 따라 가서

시카고 한국일보 기자를 하다가 남편이 귀국하면 그곳에서의 일 다 그만두고 따라오고,

남편이 파리에 있는 대학의 초빙교수로 가면 하던 내 강의 다 집어치우고 따라가고,

아들이 아파서 대수술을 받게 되었을 때도 하던 일 다 때려치우고 병구완에 매달리는 등

내 인생의 무대에는 언제나 가족이 주인공 역활을 하고 나는 막간에만 잠깐씩 무대위에 오르다가

남편이 뇌출혈로 쓰러지고 8년간 투병생활을 하는 동안 무대 구경은 커녕 내 갈 길이 어딘지도 모르게 되었어요.

 

옛 동료들의 활약상을 메스컴을 통해 알게 되고 이따금씩 찾아와서 나와 절친했던 사진작가가

모 미술관에 10억에 사진원고를 넘기고, 또 다른 절친은 현대미술관에 몇억에 사진 한 셋트를 넘겼다는

소식을 전할 때는 절친들의 성공에 박수를 보내면서도 한때는 그 분야에서 누구보다도 앞섰고

미국의 사진 관련 컨퍼런스에 참석해 대가들의 작품세계를 가까이 접하면서 ‘나도 그 정도는 할 수 있어’라는

자만심이 팽배했던 적도 있던 내가 이 산골에서 뭐하고 있나 하는 생각도 든답니다.

 

며칠 전에도 유명 사진전문화랑 주인이 전화를 해와 “선생님 전시회 한번 하셔야죠?” 하는 거예요.

1년 전부터 “준비되면 연락주세요.” 했지만 그럴 경황이 없었는데,

아직도 관심을 갖고 자기 화랑에서 전시회를 하자고 독려를 해요.

모든 건 다 때가 있는데 한창 때를 놓친 내가 이제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카메라를 들고 들로 산으로 헤매고 다니면서 소위 발로 찍는 사진은 건강만 허락하면 언제라도 찍을 수 있지만

내 작품세계는 눈으로 보이는 실체를 아름답게 찍는 것이 아니라 생각을 사진매체로 표현하는 식이라

creativity가 발동하지 않으면 할 수가 없기 때문이지요.

지금처럼 맥 놓고 멍 때리고 있어서는 절대 할 수 없는 일이거든요.

 

예를 들어 한창 때 앨빈 토플러의 ‘제3의 물결’을 읽고 감명을 받아 그가 글로 표현한 미래세계를

사진으로 표현해 전시회를 한 적도 있는데

시점도 미래이니 카메라를 들이 댈 실체가 없어도 상상으로 그리는 것이 아닌

사진으로 찍은 것처럼 표현하는 식이니 표현방법조차도 독창적이어야 하지요.

 

내가 한동안 절 사진을 많이 찍으러 다녔지만 절이나 스님을 잘 찍은 실체가 있는사진이 아닌

불교의 정신세계를  표현하기 위해 한 장의 사진에 수십컷의 이미지가 들어가 있는 만다라로 표현하기도 하지요

 

이렇게 내가 추구하는 사진세계가 누구나 보고 찍을 수 있는 실체가 분명한 것이 아니고

시점도 과거나 미래일 수도 있고,  현실이 아닌 꿈이나 상상의 세계, 정신세계 등이니

모든 감수성이 팔팔 살아 움직이지 않으면 가능하지가 않아요.

그런데도 나는 죽기 전에 한 번쯤은 전시회를 위해서가 아니라 무엇을 대하던 사진예술로 표현하고 싶어

신기 들린 사람처럼 상상력이 넘치던 그 때의 그 에너지를 느껴보고 싶은거예요.

 

 

첫 번째 배는 샌디에고를 출항해 9일간 아카풀코 등 멕시코의 여러 휴양지를 경유해서

다시 샌디에고로 돌아가는 코스인데 나는 출항 3일 전에 샌디에고에 가서 영국에서 오는 딸을 기다렸어요.

밤 10시가 넘어 공항에서 호텔로 돌아 온 우리는 내가 한국서 가져간 비상식량인 햇반 두 개와

1회용 포장의 종갓집 김치와 김으로 샌디에고에서의 첫 만찬을 즐겼어요.

이 때의 식사가 얼마나 맛있던지 우리 딸은 호화 여객선에서 연일 호사스런 식사를 하면서도

첫날 호텔에서 먹었던 햇반과 김치 맛을 잊을 수 없다고 되뇌이곤 했어요.

 

9일 간의 항해 후 샌디에고에 내려 하루를 더 머물고 다음날 뉴욕으로 갔어요

3일간 뉴욕의 미술관과 센트럴 파크를 거닐며 10년만의 뉴욕구경을 즐기다가

맨하탄에서 또 다른 배를 타고 자유의 여신상 앞을 지나 이번에는 태양이 작렬하는 바하마로 향했어요.

또다시 9일간 카리브해를 항해하며 눈보라치는 강원도 산골 추위같은 것은

전생의 일인 듯 까마득히 잊은채 뜨거운 태양아래서

“Life is always sunny." 인 것처럼 지냈어요.

 

9일 후 다시 뉴욕의 추운 날씨에 현실로 돌아와 딸아이는 영국으로 보내고

나는 시카고에 있는 동생네 집으로 향했어요.

동생네 집에서 한동안 있다가 딸이 있는 영국으로 가려고 했는데

딸이 한국으로 온다고 해서 나도 보름만에 서둘러 귀국을 하느라 방랑생활이 좀 짧아졌어요.

사위는 호주의 한 연구소 객원 연구원이라 방학 때면 그 연구소로 가기 때문에

딸이 혼자 영국에 남게 되자 사위가 차라리 엄마한테 가 있는게 어떠냐고 해서

이곳으로 와서 추운 겨울을 함께 보내고 지금은 외교통상부의 3등 서기관 자리를 그만두고

년봉이 많은  외국계 회사에 취직해서 나갔어요.

 

그래서 나는 이제 정말 누구의 시다바리도 아닌 온전한 내 삶의 주인공으로 살 수 있게 됐어요.

언제나 내 인생의 주인공으로 살기를 원했었는데

내가 정작 가고자 했던 길이 어디였는지 이제는 생각이 나질 않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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