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5. 18. 19:32ㆍ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발심수행장·수행법
2.기도의 원리
1)자력과 타력은 둘이 아니다
모든 불보살님들은 본원과 별원에 의해 수행하여 그것을 성취하였기 때문에 무량한 공덕을 갖추고 있다. 이것을 확신하는 수행이 기도이므로 불보살과 감응하여 가피를 얻는 것이다. 이러한 타력신앙의 관점은 불교의 기본적인 입장이 자력수행이다 보니 교리적으로 모순되는 것 아닌가 하는 논란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타력이란 자력과 상관없는 별개의 타력이 아닌 자력이면서 타력이고 타력이면서 자력이다. 왜냐하면 불보살님의 위신력에 감응하여 가피를 얻기 위해서는 기도하는 자가 일심이 되어야 하는데 이 일심 속에서는 자력과 타력이 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점을 잘 명심한다면 기도수행을 하는데 맹신이라는 장애와 의심이라고 하는 장애를 없앨 수 있을 것이다.
부처님께서 아난과 위제희 부인에게 말씀하셨다.
“이미 연화대를 관조하였으면 다음에는 부처님을 생각하여라. 어째 그런가하면 모든 부처님은 바로 온 세계인 법계를 몸으로 하는 것이니, 일체 중생의 마음속에 들어 계시느니라. 그러므로 그대들의 마음에 부처님을 생각하면 그 마음이 바로 부처님의 32상과 80隨形好인 것이니라. 그래서 이 마음으로 부처를 이루고 또한 이 마음이 바로 부처니라. 모든 부처님의 위없는 바른 지혜는 마음에서 생기는 것이니, 마땅히 일심으로 생각을 골똘히 하여 저 아미타불과 그 지혜 공덕인 여래, 응공, 정변지를 깊이 관조해야 하느니라.” <관무량수경>
불보살의 위신력이 분명히 있어 기도 중에 가피를 받게 되지만 그것은 외부에서 온 것이 아니고 바로 자기 마음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관무량수경>에서도 말씀하셨듯이 부처님은 중생의 마음 속에 계시며 그 마음으로 부처를 이룸을 명심해야 마구니에게 홀리지 않고 부처의 참모습을 볼 수 있다. 앞의 염불수행에서 유심정토와 타방정토가 둘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자력과 타력은 둘이 아닌 것이다.
2)기도성취의 원리
왜 자력과 타력은 둘이 아닌지, 기도성취의 원리를 보면 더욱 확실하게 알 수 있다. 기도의 첫 번째 기능은 소원성취라고 했다. 그런데 그 기도의 대상은 관세음보살일 수도 있고, 지장보살일 수도 있고, 하나님일 수도 있고, 바위일 수도 있다. 또 같은 대상을 두고 기도를 해도 어떤 사람은 이루어지고 어떤 사람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또 어떤 원리가 있길래 도저히 불가능해 보이는 일이 현실로 이루어 지는가.
불교에서는 불보살님의 위신력이라고 하고,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의 권능이라고 하며 무속에서는 무당의 힘 또는 그 무당이 받드는 신의 힘 또는 바위가 신령해서 라고 한다. 과연 그런 힘이 거기에 있다면 왜 모든 사람이 똑같은 결과를 갖지 않는가. 믿음이 부족해서, 정성이 부족해서라고 말한다. 여기서 왜 믿음이라든가 정성이라고 하는 것이 중요한가 하는 것을 생각해 보면 문제는 간단히 풀린다. 아무리 타력이라고 해도 실은 자력을 기반으로 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물론 무속에서 일부 신통력이나 어떤 부분적인 능력에 의해 외부의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경우가 아주 없진 않지만 기도라고 할 때는 기원하는 주체가 어떤 목적과 방법으로 했느냐하는 것이 관건이지 기도의 대상은 방편일 뿐이라는 것을 자각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이것을 방편이라고 하지 않고 외부의 어떤 절대적인 존재가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 맹신이고 이것을 조장하는 것이 사이비이다. 만일 외부에 절대적 존재가 있다면 그리하여 그가 기독교의 하나님이라면 왜 사랑의 하나님이 무조건적으로 모든 사람을 다 구원하지 않고 오직 예수를 믿는 자만, 예수를 통해서만 구원받을 수 있다고 하는가. 또한 관세음보살이나 지장보살은 자비의 화신인데 왜 먼저 와서 구해주지 않고 중생이 그 이름을 불러 주기를 기다리는 것인가. 또한 관세음보살이나 지장보살은 한 모습이 아니고 상인으로도 승려로도 여자로도 남자로도 아이로도 노인으로도 나타난다 했는데 그럼 이때 도움을 준 그 사람은 관세음보살인가 지장보살인가.
불교에서는 일체유심조라고 한다. 그러므로 마음에서 한치의 의심이나 간격도 없이 온전히 부처를 이루고 관세음보살을 이룰 때 기도도 성취되는 것이다. 간절히 원하라 그러면 이루어질 것이다. 두드리라 그러면 열릴 것이다. 네 이름을 부르면 곧 삼재팔란을 면할 것이다. 이 모두가 “네가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중생의 마음이란 변덕이 심하고 믿을만한 것이 못된다. 따라서 마음에 의지한다는 것은 습관적으로 해오던 분별하고 의심하던 알음알이를 내려놓고 본심에 의지한다는 말이다. 이 때 올바른 방편이 필요한 것이다. 중생심에 익숙해져 있던 터라 쉽게 근본으로 돌아가지지 않는다. 따라서 부사의한 공덕을 갖춘 불보살님의 명호를 부르거나 진언을 염송하는 것이다. 이때 바른 방편은 본심을 여의지 않으므로 바른 길로 인도한다. 본심을 한마음이라고도 하고 자성이라고도 하고 주인공이라고도 한다. 마음이라고는 하나 나와 너, 안과 밖이 없는 거기에 의지하면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진다. 이것이 바로 기도의 원리이다.
네가 바로 진리의 주인공이다 / 광덕스님
진리의 운동이 일어나야 한다
초에다 불을 켜놓았는데 바람이 불면 얼마나 오래 지탱할까요?
이 불을 지키려면 창을 달아 바람을 막아주고 산소라도 더 많이 공급해주어서
불길이 잘 타오르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사람은 지극히 고귀한 절대적이고 궁극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을 지키기 위해서는 스스로가 이 진리를 깨닫고 사회제도가 이 생명의
가치를 참으로 발휘할 수 있도록 바뀌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 운동을 일으켜야
할 것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완성되고 더불어 이 사회를 지킬 수 있는
진리의 운동이 일어나야 합니다.
저는 우리의 호법(護法)이 이 일을 해낼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창조력을 가진 자기 자신에 눈뜨는 이가 불자다
우리들은 모두가 불성(佛性)을 갖춘 진리인 자신, 창조력을 가진 자기 자신에
눈떠야 합니다. 그리고 이 진리가, 불성이 곧 부처님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불자의 믿음은 여기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이것을 믿지 않으면 불법을
믿는다고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지 최우선으로 알도록
합시다. 부처님이 세간에 나오셔서 하신 말씀은 이것밖에 없습니다.
‘네가 바로 진리의 주인공이다’ 이렇게 일러 주셔서 진리의 주인공다운 자기
확인을 하고, 그 다음에 자기 권능을 발휘해서 자신과 자신이 사는 국토와
역사를 진리로써 바꾸는 데 부처님의 가르침의 본뜻이 있습니다.
밝은 마음에서 밝은 일이 모여 든다
밝은 마음에서 밝은 일이 모여들고 어두운 마음에서 어두운 일이 모여듭니다.
불행을 만나서 불행을 생각하고 있으면 불행한 일이 좀처럼 떠나지 않습니다.
사태가 어렵게 되었거든 무엇보다 온갖 생각을 버리고 마음을 바꾸어
부처님에게로 향해야 합니다. 완전한 지혜, 무한한 자비인 부처님에게로 마음을
돌려야 합니다. 자기를 무(無)가 되도록 열심히 염불하여 부처님의 지혜 속으로
뛰어들어야 합니다. 거기에는 악도 불행도 없는 것입니다.
반드시 자신을 둘러싼 사건들을 해결할 길이 열리게 됩니다.
감각에 매달려 탐착할 때 불행한 경계를 만나게 된다
불행을 만나고 악도에 떨어지고 하는 것도 전부가 감각에 매달려서,
향락에 빠져서 거기에 탐착하고 깊이 빠져 들어가기 때문에 그만큼
자기 자성의 원만함을 잊어버려 불행한 경계를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염불을 하거나 바라밀 염송을 하거나 관법을 닦아서 삼매에 들면
즉 안정된 마음, 깊은 마음이 되면 눈에 보이는 것이 없어지고,
귀에 들리는 것이 없어집니다. 부처님의 경우, 벼락이 떨어져서 사람이 죽고
소가 죽고 그런 난리가 나도 그 경계에 빠지지 않아
“나는 그 소리를 듣지 못했다.”고 하셨습니다. 경계에 빠지지 아니하고
안정된 본심대로 머무를 때에 정말 안정된 자기의 생애가 열리는 것입니다.
법보시는 근본적인 보시이며 해탈의 길
우리들이 부처님의 법을 전하고 가르치는 것은 사람을 바르게 일으키는 것입니다.
법보시가 좋은 이유는 첫째, 정신적으로 바르게 일으켜줌으로써 이 세간에서
바르고 씩씩하게 살고 장애가 없이 살 수 있도록 힘을 넣어주기 때문이고,
둘째 이 세간에서 살아가는데 남을 도울 수 있도록 바르게 사는 길을 가르치기
때문이고, 셋째, 이 세간에서뿐만 아니라 생사의 길을 넘어서서 깨달음의 길을
갈 수 있는 해탈의 길을 가르쳐 주기 때문입니다.
세간을 장애 없이 살며 불멸의 길을 가르쳐 준다는 의미에서 법보시가 근본적인
보시이며 해탈의 길입니다. 해탈의 길이라는 법보시는 금생뿐만 아니라
영원한 생을 이어가게 하기 때문입니다. 법보시를 통해서 깨달음을 얻으면
물질적인 것, 기능적인 것 등 온갖 것들이 다시 나오는 것입니다.
염송은 만 가지 병을 고치는 영약
거슬리는 말을 들어 참기가 어렵거든 입에서 말이 나오기 전에 우선 호흡을
들이마셔 보세요. 호흡을 들이마시고 아랫배에다 힘을 조금만 주면 그 사이
생각이 쉬어집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말이 나오든지 손이 나가든지
할 일이 생겨도 그렇게 마음을 돌리고 자꾸 훈습을 쌓으면 참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는 것도 마음에 여유가 있어야 되지 안 될 수가 있습니다.
근본적으로는 염송해야 합니다. 열심히 염송을 해놓으면 바깥에서 들어오는
일들에 자기도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그저 반응하는 그런 조건반사 같은 것이
없어집니다. 사라져버립니다. 그래서 역시 만 가지 병을 고치는 약은 염송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의 마음가짐
기도하는 사람은 절대로 누구를 미워하면 안 되며 원망을 버려야 합니다.
미움·대립· 원망의 감정을 가지고 있으면 부처님하고 척을 짓는 것이기
때문에 기도를 성취하려면 그 척을 헐어버려야 합니다. 이것이 기도의 중요한
요건입니다. 미움이나 배척하는 감정이 일어난다면 그 사람은 부처님과
대립한 사람입니다. 부처님과 대립하면서 부처님 앞에 기도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의 본성을 부처님으로 알고 있으면 그 사람들을
존경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절로 절하게 되고, 칭찬하게 되고, 감사하게 되고,
친절하게 섬기게 됩니다. 그렇게 하는 사람이 바로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해야 부처님과 하나로 통할 수 있고 부처님의 복력, 부처님의 지혜,
부처님의 신력이 그대로 내 가슴과 통해서 내 기도가 성취되는 것입니다.
- 월간 불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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