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기도수행의 주의사항/6.기도의 공덕

2010. 5. 21. 21:47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발심수행장·수행법

728x90

 

 

불기2554년 4월8일

 

[양력:2010년 5월 21일] 금요일

 

부처님 오신날 !

 

 

 

 

 

법우님들 붓다법안에서

 

여여 하옵소서

 

 

5.주의사항


  기도는 간절하게 하면 반드시 성취된다. 다시말해 영험이 있다. 그러나 그것이 외부에 어떤 힘의 실체가 있어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하면 그것이 바로 미신이다. 앞에서 누차 말했거니와 나의 본래면목이자 모든 존재의 근원, 우주의 참모습은 원래 모든 공덕이 다 갖추어져 있으며 지금 있는 그대로가 다 부처님의 모습이다. 단지 내가 그것을 알지 못하므로 삿된 견해를 세워 나다 너다 구분하고 분별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기도를 간절히 하여 절을 하던 염불을 하던 그것을 일심으로 하다보면 순간이나마 그런 분별을 놓게되고 본래 그 자리로 돌아가게 되므로 원하는 바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기도성취 후에는 모든 존재 그 자체에 감사할 뿐, 다른 어떤 특정한 것에 공을 돌리지 말아야 할 것이다.

  또한 무슨 힘든 일이 있을 때만 ‘부처님’하고 매달리고 그것이 해결되고 나면 한참 잊어버리고 정신없이 살다가 또 힘들어지면 그제야 ‘아이고 부처님 살려주십시오’하지 말아야 한다. 좋고 나쁜 것을 피하려고 하거나 저항하려하지 말고 모두 내가 지은 것이니 내가 다 감당해야겠다는 마음을 갖아야 할 것이다. 역경계는 그대로 공부의 재료가 되는 것이고 순경계에는 더욱 경계하여 나태해지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니 다만 기도를 통해 그렇게 살 수 있는 힘을 기르고자 한다면 다른 수행과 마찬가지로 성불이라는 목표를 향해 가는 훌륭한 나룻배가 될 것이다.


6.기도의 공덕


  앞에서 기도의 기능이 소원성취, 업장소멸, 자기점검이라고 했다. 이것들이 바로 기도의 공덕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매일의 기도는 수행자의 자세를 가다듬어주고, 이 힘으로 선업을 쌓고 악업을 멀리 여의게 하므로 계·율수행이 저절로 된다. 또 기도를 하다보면 지금 겪고 있는 고통의 원인이 나로부터 일어난 것이었음을 알게되고 저절로 참회하고 용서하며 자비스런 마음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이 과정을 통해 업장이 소멸되며 얽히었던 인연을 녹여 순조롭게 풀어나간다. 이렇게 하는 중에 삼매가 깊어지고 삼매를 통해 지혜가 밝아지며 탐진치 삼독을 멀리 여의어 마침내 깨달음을 얻게 되는 것이다.



맺음말


  수행은 어렵지 않다. 또한 쉽지 않다. 오직 삶의 전부를 걸때에만 궁극의 목표에 이를 수 있다. 삶을 건다는 것은 일상생활 24시간 전부가 수행의 시간이고 공간이라는 것이다. 일상생활을 떠난 수행은 없다. 수행을 어떤 특별한 장소와 시간 동안에만 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면 일부밖에 얻을 수 없을 것이다. 반대로 일상생활이 수행이라고 하여 아무런 노력도 없이 살아간다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 따라서 부처님도 한거정처하라 하였다. 틈나는 대로 수행처를 찾아 수행법을 익힐 것이며, 일상생활에서도 수행법을 놓치지 않아야 한다. 아무리 높은 깨달음을 얻었다 하더라도 다시 일상생활로 돌아오지 않을 수 없다. 일상생활과 단절된 깨달음은 결코 완전하지 못하니 수행과 생활의 조화를 이루어내야 할 것이다.

  거듭 당부하지만 어느 하나만을 높다하여 다른 것을 그르다 하지 말며, 다른 사람과 더불어 시비하지 말아야 한다. 여기 제시된 수행법 외에도 더 많은 수행법들이 있으나 우선 이 글을 참고하면서 자기가 힘 닿는데로 힘써 실천하기 바란다. 여기에 대한 영명연수스님의 말씀을 인용하는 것으로 이 글을 매듭짓고자 한다.

  

  대성께서는 대자대비하시어 마침내 호광(虛誑)히 베풀지 아니하시므로 팔만의 법문이 모두가 해탈법 아님이 없고, 일념의 미미한 선행이라 할지라도 낱낱히 진여로 나아가는 것이나, 다만 중생의 근기가 초심도 후심도 있어서 인(隨順忍)이나 법인(無生法忍)을 낼 따름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높은 것만을 집착하여 낮은 것을 배척하지 말 것이며 낮음으로서 높음을 시기하지 말고 모름지기 때를 알아서 스스로 근력을 헤아릴지니, 남의 좋고 나쁨을 평하여 억지로 시비를 세워서는 안되리라. 왜냐하면 말이란 재앙의 시초라 스스로 업장만 부르기 때문이다. 또 무생인을 얻은 보살로서 비록 아법(我法)의 이공(二空)을 증득하였으나 중생을 이롭게 하기 위해 간탐의 더러움을 파하고 오히려 소비(燒臂)하고 분신(焚身)도 하셨으니, 곧 약왕보살이나 승애와 같은 유(類)라. 그러나 만일 인을 갖추지 못한 이라면 비록 지혜의 불길로서 번뇌의 섶을 태우며, 이공(二空)을 요달하여 신견(身見)을 내지 않을 줄 안다 하더라도 혹 현행의 업장이 무거우면 상응함을 얻기 어려울 것이니, 부디 용맹심을 일으켜 진실행을 운용하며 부처님께 공양하여 은혜를 갗고 또한 중생의 고통을 대신하여 자비를 행할 것이다.

  조도의 문을 이루고자 한다면 희구(希求)의 생각을 일으키지 말지니, 다만 서로 속이지만 않는다면 일마다 헛되이 버려지지 않으려니와, 그렇지 않고 혹 지안이 밝지도 못하면서 오히려 아집을 내거나 인과만을 구하거나 뜻이 귿세지 못해서 선배들의 자취를 본받기에도 의심을 내는 이들은 실로 날이 갈수록 도업과는 아득히 거리가 멀어지고 말 것이다. 대개 중생은 근기가 같지 않고 그해서 숭상하는 바도 각각이므로 부처님께서 이르시기를 “만일 중생이 허망된 마음으로도 해탕을 얻을 수 있다 한다면 나도 또한 거짓말하는 사람이리라”고 하신 것이다.

  이러므로 알라. 사(事)는 비록 천갈래로 벌어지나 이(理)는 마침내 한 근원으로 돌아가는지라 모두가 대자비의 선권방편이시니, 혹은 신명을 버림으로 해서 단박에 법인에 들며, 혹은 일심으로 선정을 수습해 밝게 무생을 깨닫기도 하며, 혹은 근본이 청정함을 요달하여 실상문을 증득키도 하며, 혹은 부정관을 지어 원리도(遠離道)에 오르기도 하며, 또 혹은 칠보방사에 앉은 채 성과에 오르기도 하고 혹은 총간수하(塚間樹下)에 처한 채 열반에 나아가기도 하는 것이다. (<만선동귀집> 제2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