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은 거울은 언제나 덧붙이지도 빼지도 않는다 / 숭산 스님

2010. 6. 17. 19:05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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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 거울은 언제나 덧붙이지도 빼지도 않는다 / 숭산 스님 

 

 

 

 

우리는 이미 진리의 세계에 살고 있다.

만물은 공하므로 모든 것이 이미 완벽한 길이다.

이것을 지적으로 혹은 학문적으로 이해하려면 안 된다.

수행을 통한 어떤 깨달음이 필요하다.

그리하여 실제로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 절대이고 경계가 없으며,

나의 모든 행동이 순간 순간 중생을 향한 큰사랑과 자비라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사실, 본래 '나'라는 것은 없으므로 다른 중생을 위한다는 말조차 틀린말이다.

'나'와 '남'의 경계가 없는 것이니 말이다.

 

그 길에는 생각도 없고 고통도 없다.

아무 것도 방해하는 것은 없다.

이렇게 되면 순간 순간의 할일이 명확해진다.

순간 순간의 모든 행동은 진리이며 완벽하게 다른 중생의 고통과 닿아 있다.

 

"어떻게 내가 당신을 도와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내가 그를 도와줄 수 있을까?"

 

이것이 진정한 인간의 길이며 완벽한 길이며 진리이다.

이런 자비 어린 행동은 어떤 관념이나 특별한 행동이 아니다.

본질 그 자체이며, 이것이 보살의 길이다.

 

'나'라는 것은 본래 없기 때문에 중생과 나는 둘이 아니다.

그들의 고통은 나의 고통이며 그들의 행복이 나의 행복이다.

 

나는 단지 모든 사람들을 위해 있을 뿐이다.

이것이 바로 '대자대비심', 위대한 사랑과 자비를 가진 마음, 즉 절대 길이다.

 

우리는 모든 것이 똑같이 우주의 실체이며 기본적으로 공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 다음 이 우주 만물의 수많은 이름과 모양이 공하므로 '나'라는 것이 본래 없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이것이 바로 중도이며 진리의 길, 바른 길이다.

 

여기서부터는 어떤 법칙, 어떤 이름, 어떤 모양이든지 모두 진리여서 우리를 방해하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 이런 무애의 마음을 얻으면 우리의 모든 행동은 있는 그대로 진리이며 부처의 행동이다. 순간 순간의 행동이 모든 존재와 사물과 함께 나누는 우주적 본질에 닿아 있다.

 

더이상 '너'와 분리된 '나'는 없다.

이미 우리의 행동은 대자대비이다.

 

어느 날 제자 한 사람이 나에게 물었다.

"대승불교의 주요 가르침 중 모든 것이 공하다는 것과 모든 것이 그대로 진리라는 것이 무슨 말입니까? 어떻게 모든 것이 공한데 그게 진리란 말입니까?"

 

아주 좋은 질문입니다.
답은 쉽다.

집에 가서 거울을 한 번 봐라. 거울 속엔 아무 것도 없다. 완벽하게 공하다.

거울 앞에 붉은 공을 갖다 대면 붉은 공이 나타나고, 하얀 공을 갖다 대면 하얀 공이 나타난다. 있는 그대로 모든 것을 비출 뿐이다. 붉은 공을 치우면 거울에는 더 이상 붉은 공이 없다.

오로지 그것을 비출 때만 상(像)이 나타난다.

 

맑은 거울은 언제나 완벽히 공해서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어떤 것도 아무런 장애 없이 비춘다. 모든 것은 이 공한 우주라는 거울 앞에서 있는 그대로 왔다갔다하며 비춘다. 아무 것도 덧붙이지도 빼지도 않는다. 모든 것을 비추는 거울이나, 거울에 비친 상 역시 공(空)하므로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 진리이다.

 

그러나 우리 인간의 마음은 이렇지 못하다. 마음의 거울에 붉은 것을 갖다대면 우리 역시 붉은 것을 비출지도 모른다. 하지만 붉은 것을 치운 뒤 하얀 것을 갖다 대면 우리 마음의 거울은 여전히 '붉은 것'을 '생각'하고 있다.

 

'붉은 것보다는 하얀 것이 낫지 않을까?'

혹은 '다음에 다시 붉은 것이 나타날까?'

혹은 '지금 앞에 있는 하얀 것은 좋지 않아. 붉은 것이 더 좋아 아니야, 아니야. 하얀 것이 더 좋아.... 아,잘 모르겠다.'하고 '생각'한다.

 

하얀 것이 앞에 있지만 우리 마음은 언제나 그것을 '제대로' 혹은'그대로' 비추지 않는다. 다른 것에 집착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처럼 언제나 세상을 있는 그대로 비추지 않는다. 아주 강한 욕심이나 집착을 갖고 있기 때문에 순간 순간 다른 사람을 위해 자비롭게 행동하는 대신 이세상의 좋고 나쁨에 집착한다. 그것들은 모두 우리 스스로 만든 것이다.

 

우리는 있는 그대로 부처이다. 모든 것이 공해서 결국 모든 것이 같다는 깨달음을 얻으면 우리 사는 삶은 모두 중생을 위해서 사는 삶이며, 그것이 바로 부처의 삶이다. 이런 상태에서 자비심은 저절로 나온다. 대보살의 삶이란 특별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있는 그대로 모두 부처이다. 만물이 '공'(空)해 결국 모두가 하나라는 깨달음을 얻으면 우리 삶은 모두 중생을 위한 삶이다. 그것이 바로 부처의 삶이다. 자비심은 절로 나온다.

 

'나'가 있으면 욕심이 나오고 모든 것과 내가 분리된다.

그러나'나'가 사라지면 분리는 일어나지 않는다.

 

참선 수행을 통해 이런 진리를 깨달으면 우리에게는 아무런 장애가 없다. 마음에 장애가 없으면 자비로운 대보살의 행동은 저절로 나타난다. 반야심경에 나오듯 '얻을 바도 없으며, 얻을 것도 없다.' 순간 순간 중생을 돕는 일만 있을 뿐이다.

 

 

 

      
      이름모를 그사람 / 정수경
      눈감으면 떠오르는 그얼굴
      살며시 미소 짓는데
      눈을 뜨면 저멀리 사라져가는
      이름모를 그사람
      아~ 누구일까 설레는 이마음
      아~ 누구일까 그사람 그사람
      눈감으면 떠오르는 그얼굴
      살며시 미소 짓는데
      눈을 뜨면 저멀리 사라져가는
      이름모를 그사람
      
      

 

중국 魏(위)나라 王 文侯(문후)가 전설적인

名醫 扁鵲(편작)에게 물었다.

“그대 형제들은 모두 의술에 정통하다

들었는데 누구의 의술이

가장 뛰어난가?”

편작이 솔직하게 답했다.

“맏형이 으뜸이고, 둘째형이 그 다음이며,

 제가 가장 부족합니다."

그러자 문왕이 의아해하며 다시 물었다.

"그런데 어째서 자네의 명성이 가장 높은 것인가?"

편작이 말했다.

"맏형은 모든 병을 미리 예방하며

발병의 근원을 제거해 버립니다.

환자가 고통을 느끼기도 전에 표정과

음색으로 이미 그 환자에게 닥쳐올

큰 병을 알고 미리 치료합니다.

그러므로 환자는 맏형이 자신의

큰 병을 치료해 주었다는

사실조차 모르게됩니다.

그래서 최고의 진단과 처방으로

고통도 없이 가장 수월하게 환자의

목숨을 구해주지만 명의로 세상에

 이름을 내지 못했습니다.

이에 비해 둘째 형은 병이

 나타나는 초기에 치료합니다.

아직 병이 깊지 않은 단계에서

 치료하므로 그대로 두었으면

목숨을 앗아갈큰 병이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다들 눈치 채지 못합니다.

그래서 환자들은 둘째 형이 대수롭지 않은

병을 다스렸다고 생각할 뿐입니다.

그래서 둘째 형도 세상에

이름을 떨치지 못했습니다.

이에 비해 저는 병세가 아주 위중해진

다음에야 비로소 병을 치료합니다.

병세가 심각하므로 맥을 짚어 보고

 침을 놓고 독한 약을 쓰고 피를

뽑아내며  수술을 하는 것을

다들 지켜보게 됩니다.

환자들은 치료 행위를 직접

보았으므로 제가 자신들의

 큰 병을 고쳐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심각한 병을 자주 고치다

 보니 저의 의술이 가장

 뛰어난 것으로잘못

알려지게된 것입니다."

 

요즈음은 자기 PR시대라고

 할 정도로 모두 다

시끄럽게 큰 소리 내기를좋아

하는 세상이지만 진실로

 속이 꽉 찬 사람은 자신을 드러내지 못해

안달하지 않는다.

짖는 개는 물지 않고 물려는

개는 짖지 않듯 大人은

虛勢를 부리지 않고 是非를 걸어 이기거나

다투어 싸우고자 하지 않는다.

시끄럽게 떠들고 이기고자 함은 속이 좁은

탓에 빗어지는 허세일 뿐이다.

마음이 넓고 깊은 사람은 알아도 모른 척하며,

재주를 과시해 자기를 돋보이려 하지 않는다.

 

어떤 아이가 시끄러운 공장에서 집안 대대로

내려오던 회중시계를 잃어버렸다.

아이는 사방을 뒤졌으나 찾을

길이 없어 아버지에게 사실대로 말했다.

직원들과 함께 찾아도 도저히 찾을 수가 없자

아버지는 모든 하던 일들을

멈추고 전원을 끈 채 조용히 있어 보자고 했다.

잠시 침묵이 흐른 후 얼마 되지 않아 째깍째깍 소

리가 들리기 시작했다.시계는 주위 환경이

조용해지자 구석진 바닥에서

자신의 위치를 주인에알리고 있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말했다.

“얘야. 세상이 시끄러울 때도

 조용히 있어 보거라.

잃어버렸던 소중한 것들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침묵 속에 오히려 참된

 가치와 위대함이 있다.

고요한 물은 깊이 흐르고,

깊은 물은 소리가 나지 않듯

(정수유심, 심수무성-靜水流深,

 深水無聲) 고요함 속에 

참 진리가 있는 것이다.

 침묵은 밭을 갈고 씨앗을 뿌린

후에 새싹이 돋아나기를

기다리는 농부의기다림과 같다.

긴 인내와 희망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사람이 태어나서 말을

배우는 데는 2년이 걸리지만

침묵을 배우기 위해서는

60년이 걸린다고도 한다.

 

 

최고의 경지에 오른 사람은

누가 자신을 알아주지 않아도

 

상처 받지 않고 또 자신을 알리지

못해 안달하지도 않는다.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고,

말하는 사람은 알지 못한다.

 

침묵의 위대함을 깨우쳐 갔으면 한다.

 

 

 

名醫 扁鵲은 자신이 유명해지기 위해서

병세가 아주 위중한 사람을 치료해 주었을까요?

아니지요.

항상 생각의 겸손함으로

남을 자신보다 존중할 줄 아는

名醫 扁鵲의 아름다운 겸손이지요

 

당신이 존경스럽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