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6. 29. 19:34ㆍ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선불교이야기
참선경어 / 박산 무이 스님
큰스님의 가르침에 대해 평하는 글
1. 쓸데없이 마음을 쓰지 않다
조주 스님이 말씀하셨다. 30년 동안 쓸데없는 마음을 쓰지 않았다. 옷 입고 밥 먹는 것 빼고는 모두 쓸데없는 마음을 쓰는 일일뿐이다.
나는 이렇게 평한다. 아예 마음을 쓰지 말라는 얘기가 아니라 쓸데없는 마음을 쓰지 말라는 뜻일 뿐이다. 이른바 마음을 한 곳에만 쏟으면 무엇이고 안될 일이 없다 는 뜻이다.
2. 참구에만 집중하라
조주스님이 말씀하셨다. 그대들은 오직 도리를 참구하는 일만을 하라. 20, 30년씩 참구해 보아도 깨닫는 바가 없다면 내 목을 잘라 가라.
나는 이렇게 평한다. 조주스님은 그까짓 죽는 일이 무엇이 그렇게 급하단 말인가? 그렇기에 하나 날이 갈수록 20년, 30년씩 다른 마음먹지 않고 오직 외길을 지키는 사람을 찾아볼래도 정말 찾기 힘들다.
3. 가산(家産)을 타파하는 소식
조주스님이 말씀하셨다. 나는 18세에 가산을 타파하는 소식을 깨달았다. 그때까지 나는 하루 24시간의 노예로 살아왔지만 지금은 하루 24시간을 맘껏 부리며 산다.
나는 이렇게 평한다. 가산에다가 살아나갈 계책을 세우다 보니 24시간의 노예가 되었지만, 가산을 깨어버린 자는 24시간을 부릴 수 있다. 홀연히 어떤 스님이 와서 무엇을 가산이라 합니까? 하고 묻는다면, 나 참선은 이렇게 대답하리라. 그 가죽주머니를 벗어버리면(죽을 때) 그때 가서 말해주마.
4. 벙어리가 되라
조주스님이 말씀하셨다. 그대들이 만약 평생 총림을 떠나지 않으면서 5년, 10년 동안 아무와도 말하지 않고, 또 아무도 그대들을 불러주는 이 없이 벙어리가 된다면, 그런 다음에야 부처님도 그대를 어찌 할 수가 없을 것이다.
나는 이렇게 말한다. 말을 하지 않는다 함은 마음을 번거롭게 쓰지 않는다는 뜻이니, 가사를 입고 생사문제의 큰 도리를 참구하지 않는 납자는 위와 같은 경계와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이다.
5. 화두를 설명하는 일은 알음알이다
천태 덕소 국사께서 말씀하셨다. 설사 폭포처럼 유창하게 대답과 설명을 쏟아놓는다 하더라도 이것은 단지 전도된 알음알이일 뿐이다. 만일 그런 것만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참선하는 일이 무엇이 어렵다고 하겠는가? 이러한 사람은 다른 납자에게 무익할 뿐 아니라 자기의 잘못을 남에게 거듭 팔아먹는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다.
나는 이렇게 평한다. 지금 사람들은 겉핥기식으로만 공부하여 보통 때에 오며 가며 법을 물으면서 불법을 얘기거리로나 여기고 있으니, 이런 태도는 공부에 무익할 뿐 아니라 많은 허물을 이룬다. 지금 세상에는 쓸모 없는 말들을 마음대로 지껄이고는 그것을 선(禪) 도리라 우겨대고 있으니, 앞서 소개한 국사의 말씀에 비추어보면 낯이 두꺼운 사람들이다.
6. 판단이나 암기 등은 다 알음알이에 속한다
국사께서 말씀하셨다. 스님네들이 이제껏 공부해 온 판단이나 문답, 암기 속에는 도리를 설명한 부분이 매우 많다. 그런데 어째서 의심이 끊어지지 않고 옛 스님들의 방편을 들으면 본래 뜻은 깨닫지도 못하고서 오직 빈틈만 많고 실속은 적다고 여기는가?
나는 이렇게 평한다. 판단이나 암기 등은 모두 알음알이에 속하는 일이다. 그러니 생사의 뿌리가 끊어지지 않았는데 어떻게 옛사람의 뜻을 깨달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예로부터 이런 말이 있다. 오묘한 말씀이 마음을 꽉 메우면 도리어 알음알이의 소굴이 되고 만다. 참된 도는 바로 눈앞에 있는데도 말이나 모습을 통해서 파악되는 경계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7. 지식의 굴레를 벗고 그 자리에서 깨치라
국사께서 말씀하셨다. 스님들이 바로 자기 선 자리에서 문득 깨치는 것이 상책이다. 이것은 무슨 도리인가? 하는 화두를 들고, 또 자기에게 의심거리가 되어 줄 만한 어떤 법문이 있으면 그 의심을 풀려고 애써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이제껏 공부랍시고 해왔던 일들이 생사의 근원이었으며, 지옥에서 살길을 꾀하는 바보 같은 짓이었음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옛날 어떤 스님도 지식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면 마치 물 속에 어린 달과 같다고 지적하셨던 것이다.
나는 이렇게 평한다. 지식과 사고가 누군들 없겠는가마는 중요한 것은 여기에서 한 번 탈바꿈을 해야만 비로소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만일 공부와 상응하지 못하면 수정궁 속을 뚫고 나왔다 하더라도 끝내 깨달음과는 관계없게 된다. 옛 큰스님은 알음알이가 마음속에 들어가게 되면 마치 기름이 국숫물에 들어간 듯 끝내 거기에서 나올 기약이 없다 고 하셨으니, 삼가지 않으면 안 된다.
8. 무엇을 하든 다 나의 마음이라는 생각은 망상이다
소암스님이 말씀하셨다. 납자들이여, 오늘 임금께서 그대들을 초청하신 까닭은 오직 그대들의 마음 밝히는 일을 돕고자 해서이지 딴 뜻이 아니다. 여러분은 자기 마음을 밝혔는가? 여러분은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누군가와 대화하거나 말문을 닫고 묵언할 때, 또는 선지식을 찾아뵙거나 도반들과 토론할 때, 산수를 구경하거나 아예 보고 듣는 일들을 딱 끊었을 때, 이 모든 것이 나의 마음이로다. 그러나 이와 같은 견해는 모두 마귀나 도깨비가 달라붙은 것이니, 이를 두고 어찌 마음을 밝힌다고 할 수 있겠는가?
나는 이렇게 평한다. 말을 해도 틀리고, 침묵을 지켜도 틀리며, 경험을 통한 지식을 긍정해도 부정해도 다 틀린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여야 도(道)를 깨달을 수 있겠는가? 오늘의 납자들이여, 법통을 어지럽히지 말아야 하느니라.
9. 몸 바깥에 본래면목이 있다는 견해를 짓지 말라
소암스님께서 말씀하셨다. 망상덩어리인 이 육신을 떠난 바깥에 또 다른 해와 달, 그리고 허공을 포함하는 하나의 세계가 있는데, 이것이 바로 본래면목이라고 생각하는 무리들이 있다. 그러나 이들 역시 외도의 견해일 뿐 마음을 밝힌다고는 할 수 없다.
나는 이렇게 평한다. 이런 사람을 공(空)에 치우친 외도라고 부르니, 어떻게 몸과 마음이 하나여서 이 몸을 떠나서는 다른 아무것도 있을 수 없다는 도리를 알 수 있겠는가? 지금의 납자들은 다른 사람은 만나보지도 않고 스스로 최고라고 생각하여 공(空)만을 주장하는 외도의 견해에 떨어지는 사람이 많다.
10. 집착을 버리면 망상이 없어진다
스님께서 계속해서 말씀하셨다. 그리고 납자들이여! 알아듣겠는가? 마음이 옳다고 긍정하는 일이 없는 사람은 바로 모든 것이 다 옳다고 받아들이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그대들이 집착하고 헤아리고 하는 한 어떻게 깨달을 수 있겠는가?
나는 이렇게 평한다. 앞에 거론된 옳다 아니다의 두 가지 병통은 집착에 그 원인이 있으니 내가 처방을 하리라. 오직 시비를 따지는 것과 집착이 없기만 하면 이 병은 즉시 낫는다.
11. 지식을 배움은 참선이 아니다
본선스님께서 말씀하셨다. 선문답을 하거나 그 뜻을 논리적으로 따지는 일, 또는 대어(對語 ; 남이 대답치 못한 말에 나더러 대신 대답하라면 이렇게 했을 텐데)나 별어(別語 ; 이 기연에 대해 나는 다른 말을 붙이겠다) 등을 배우는 일을 가지고 참선한다고 할 수는 없다. 또한 경론에 나오는 그럴듯한 이론이나 조사스님들의 파격적인 언어에 천착하는 일을 가지고 참선한다고 말할 수도 없다. 위에서 열거한 공부에 그대들이 비록 무애자재(無碍自在)하게 통달했다 하더라도 불법 중에 나름대로 어떤 경지를 체험하지 못했다면, 그런 이들을 쓸데없는 지식만 쫓는 무리라고 부른다. 그대들은 들어보지도 못했는가. 똑똑함만 가지고는 생사문제와 대적할 수 없다는 말을! 쓸데없는 지식만으로 고통의 수레바퀴를 면할 수 있겠는가.
나는 이렇게 평한다. 요즘 납자들은 모두 위와 비슷한 사람들이니 이른바 진짜 금은 내던지고 기와조각을 줍는 사람이다. 진실 되게 참구하려 하지 않고 구두삼매를 마음대로 하니 마치 향엄지한스님이 하나를 물어보면 열을 대답하고 열을 물으면 백을 대답한 일과 같다. 이렇듯 총명하면 불법에 통달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겠는가마는 직접 보아낸 경지가 없었으니 부모미생전 소식에 대해서는 어쩌 해보지 못하였다. 자, 말재주를 배우는 무리들은 한번 말해 보아라! 그렇게 공부하여 과연 어떤 일들을 건지려 하는가?
12.진실되게 참구하라
본선스님께서 말씀하셨다. 참구를 하려거든 모름지기 진실되게 참구해야 비로소 깨달음을 얻게 된다. 길을 갈 때에는 길가는 대로 참구하고, 서있을 때는 서있는 대로 참구해야 한다. 앉거나 잠잘 때, 또는 대화하거나 묵언하며 다른 어떤 일들을 할 때도 마찬가지다. 이미 이러저러한 모든 때에 참구하게 되거든, 이제는 자신에게 물어 보아라! 지금 참구하고 있는 사람이 도대체 누구이며, 또한 참구하고 있는 내용은 무엇인가를. 여기까지 되었으면 모름지기 스스로 명백하게 보는 바가 있어서 비로소 깨달음의 경지를 얻게 된다. 만약 이렇게 하지 않으면 작심삼일의 무리라고 부르니, 깨닫겠다는 뜻이 원래 없었던 사람들이다.
나는 이렇게 평한다. 중요한 것은 내가 참구하는 이 도리가 대체 무슨 도리이며 참구하는 이 사람은 또 누구인가를 절실하게 참구하는 일이다. 이 도리, 이 사람을 참구해 알아내지 못하면 그저 허송세월 하는 것일 뿐 참선한다고 할 수는 없다.
13. 위급한 상황에서 살 길을 찾듯 하라
파초산 혜청스님께서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이 길을 가다가 앞에는 만길 낭떠러지이고 뒤에서는 산불이 타 들어오며 양옆은 가시덤불인 상황을 만났다고 하자. 앞으로 나아가자니 낭떠러지로 떨어지겠고, 되돌아가자니 타 죽겠고, 옆으로 몸을 돌리자니 가시덤불에 찔리게 되어 있다. 여기서 어떻게 하면 헤쳐나갈 수 있을까? 만약 빠져나갈 수가 있다면 살 길이 열리게 되지만, 빠져나가지 못하면 꼼짝없이 죽는 상황이다.
나는 이렇게 평한다. 다만 위태롭다느니 죽는다느니 하는 생각을 내지 말아야 비로소 살 길이 하나 트인다. 그러니 조금이라도 어떻게 할까? 하고 생각을 짜냈다가는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어버리게 된다. 혜청스님의 이 말씀은 공부에 가장 긴요하다. 그런데 납자들이 흔히 지식을 찾다가 심오한 이론 속에 도가 있다는 착각에 빠져들어서 이와 같은 철저한 참구에는 마음을 두지 않으니 일생을 헛되이 보낸다고 하겠다.
14.선문답으로는 도를 믿지 못한다
운문스님이 말씀하셨다. 이런 식으로 거짓공부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 말하자면 남의 이론이나 우려먹고 한 무더기 닳아빠진 옛말이나 주워 챙겨가며, 가는 곳마다 꼴사납게 떠들어대면서, 나는 선문답을 5번이고 10번이고 이해했노라 과시하고 다니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들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문답을 하고 이런 식으로 겁을 지나도록 논해보았자 꿈속엔들 도를 볼 수 있겠는가?
나는 이렇게 평한다. 운문스님이 그 당시 대놓고 꾸짖은 사람은 열에 하나 둘뿐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너나할것없이 다 그렇다. 이런 사람이 언제 한번 피부에 닿듯이 절실하게 참구해 보았겠는가! 설혹 꼼짝 않고 좌선하고 있을 때라도 마음이 혼침(昏沈)하지 않으면 산란(散亂)한 상태이다. 이것은 아마도 그 뱃속에 들어 있는 올가미가 토해도 나오지 않고 칼로 베어도 끊어지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영리한 납자라면 운문스님께서 거론한 이런 말씀을 듣는 순간 매우 부끄러운 마음이 들것이니, 그래야만 비로소 되었다고 할만하다.
15. 안이한 마음을 먹지 말라
운문스님이 대중에게 설법하셨다. 여러분들은 절대로 안이하게 시간을 보내지 말고 매우 빈틈없이 공부해야 한다. 옛 스님들은 마음속에 번거로움이 뒤엉킬 때 설봉스님의 온 누리가 전부 내 몸이다 하신 말씀과, 협산스님의 온갖 것에서 나를 찾아내고 시끄러운 저자거리에서 천자를 찾아내 보라 하신 말씀을 오로지 생각하셨다. 또한 낙포스님의 티끌 하나가 일자마자 온 누리를 그 속에 거두어들이고, 하나의 털끝에 사자의 온몸을 받아들인다는 말씀만을 생각하셨다. 그러므로 그대들은 위의 모든 말씀을 철저하게 깊이 생각하라. 세월이 오래 가면 자연히 깨닫게 되는 점이 있게 될 것이다.
나는 이렇게 평한다. 위의 세 분 스님께서 하신 말씀은 그대들을 도에 들어가도록 이끄는 말씀이니, 중요한 것은 그대들 자신이 깨달으려 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그런 의지가 없다면 도깨비굴 속에서 살아날 꾀를 내보는 꼴이다. 그대들이 만일 도에 들어간다면, 자연히 마음이 가라앉고 조용해져서 산하대지가 있는 줄도 보지 못하고 자기 자신이 있는 줄도 알지 못하게 된다. 자, 이제는 찾아보느냐 찾지 않느냐 이 두 갈래 길뿐이다.
16. 법신에 대한 두 가지 병통
운문스님이 말씀하셨다. 빛이 통과하지 못하는 데는 두 가지의 병통이 있기 때문이다. 사방 깜깜한데 앞에 무엇인가가 있는 경우와, 또 모든 것이 공(空)임을 철저히 알고도 암암리에 어떤 것이 있는 듯하다고 보는 경우가 다 그 원인이다. 또한 법신에도 두 가지의 병통이 있다. 하나는 법신을 깨닫고서 법집을 떨어버리지 못하고 나는 법신을 깨달았노라 하는 견해가 아직 남아 법신 쪽에 눌러 앉는 경우이다. 한편 법신을 깨닫고서 그것을 놓아버려서도 안되니 자세히 검토해보아 어떤 기미라도 있으면 병통이 되는 것이다.
나는 이렇게 평한다. 이 병은 오로지 알음알이에서 살길을 꾀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한 번도 앉은 그 자리에서 번뇌망상을 끊지 못하여 법신을 깨닫지도 못했으며, 자유롭게 몸을 움직여 숨을 토해내지도 못해 보았으니 만일 이런 상황에서 또 다른 망념이 생겨나게 되면 마귀, 도깨비가 자기 속에 들어앉게 되는 꼴이다.
17. 지혜와 근기가 뛰어나야 한다
현사스님께서 말씀하셨다. 반야를 배우려는 모든 보살은 모름지기 공부할 만한 근기와 지혜가 뛰어나야만 될 수 있다. 만일 지혜가 있다면 당장 에라도 이곳-번뇌의 사바세계-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렇게 평한다. 근기가 뛰어나다 함은, 한 가지를 들으면 천 가지를 알아듣고 무량한 법문을 깨치는 이를 말한다. 앞서 벗어난다는 말은 처음부터 방편으로 하신 것이다. 무슨 까닭인가? 본래부터 얽매여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18. 둔한 근기는 절실하게 노력하라
현사스님이 말씀하셨다. 근기가 둔한 사람이라면 다만 밤낮으로 애써 공부하여 고단함도 잠자는 것도 잊고, 먹는 것도 마치 부모상을 당했을 때처럼 해야 한다. 이렇게 다급하고 절실하게 일생을 공부하다가 보면 문득 선지식의 도움을 받을 날이 있을 것이다. 이토록 뼈를 깎는 노력으로 참구해야 무엇인가가 구체적으로 되어나가는데, 하물며 지금 같아서야 누가 이러한 공부를 감당해낼 수 있겠는가.
나는 이렇게 평한다. 온 누리 사람이 다 이 공부를 감당해낼 수가 있다. 오직 무지하고 신근을 갖추지 않은 사람을 빼고는. 설사 석가 부처님이 빛을 놓아 대지를 뒤흔드는 위엄을 보이신다 하더라도 그런 사람을 어찌 하겠는가.
19. 남의 말을 외우려 하지 말라
현사스님이 말씀하셨다. 납자들은 오직 말을 외우는 데 힘써서는 안된다. 이는 마치다라니를 외는 것과 같아서 제자리걸음으로 전진하려는 격이다. 이렇게 입속에서는 어린애 반벙어리 같은 소리를 중얼거리다가 어떤 사람에게 붙잡혀서 질문이라도 받게 되면 꼼짝없이 피할 곳이 없다. 그리하여 발칵 성을 내면서, 그대는 나더러 지금 선문답을 하라는 말인가? 라고 하니, 이런 사람에게는 공부하는 일이 매우 고통스러울 뿐이다. 알겠느냐!
나는 이렇게 평한다. 남의 말이나 외우는 일은 잡독(雜毒)이 마음속으로 들어갔다고 하니, 그것이 바른 견해를 막기 때문이다. 보통 세간에서 글 읽는다 하는 사람도 글 자체를 외우는 경우가 많으나, 내용을 소화해내지는 못하고 있다. 그런데 하물며 출세간법을 참구하려는 납자가 남이 흘린 침이나 받아먹어서야 되겠는가.
20. 거짓 몸짓으로 법을 보여주는 잘못
현사스님이 말씀하셨다. 선상(禪床)에 앉아 있으면서 선지식이라 불리는 어떤 화상들이 있다. 그런데 이들에게 법을 물으면, 몸을 흔들고 손을 움직이며 눈을 깜박거리고 혓바닥을 내밀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 사람을 쏘아보곤 한다.
나는 이렇게 평한다. 이런 무리들은 온몸이 마(魔)이며 온몸 그대로가 병통이니, 죽을 때까지도 시끄러운 속세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21. 오온신(五蘊身) 속에 소소영영(昭昭靈靈)한 주인공이 있다는 망상
이렇게 말하는 이들도 있다. 또렷하고도 신령스런 마음바탕이 있어서, 보고 듣고 하면서 오온의 육신 속에서 주인공이 된다라고. 그러나 이런 식으로 선지식이 된 이는 크게 사람을 속이는 것이고. 그 까닭을 알겠는가? 내 그대들에게 물어보겠다. 만일 또렷하고도 신령스런 마음바탕이 그대의 진면목이라고 생각한다면 어찌하여 잠이 든 상태에서는 그 소소영영한 상태가 안 되는가? 잠이 든 상태에서 소소영영하지 못하다고 한다면 어째서 깨어 있을 때에서야 다시 알아보는가? 이런 것을 도적을 아들인 줄 안다 고 한다. 이는 생사의 근원이니 망상이 인연이 되어 생긴 상태이다.
나는 이렇게 평한다. 이는 정신을 농락하는 인간들이다. 깜박 잠이 든 상태에서 주인공이 될 수 없다면 죽는 마당에 가서 어떻게 자재(自在) 안락한 경지를 얻을 수 있단 말인가? 이런 사람은 일생동안 소란만 피우다 갈 뿐이니, 어찌 다른 사람만 웃겨줄 뿐이겠는가. 스스로도 웃을 일이다.
22. 오온신(五蘊身)에서 주인공을 찾고자 한다면
현사스님이 말씀하셨다. 그대들이 오온(五蘊)으로 된 이 몸에서 주인공을 찾고자 한다면 자신의 비밀금강체를 알아내기만 하면 된다. 옛 스님도 말씀하시기를 원만하게 성취된 정변지가 모래알 같이 수많은 세상에 두루 깔려 있다 고 하셨다.
나는 이렇게 평한다. 비밀금강체가 바로 원만하게 성취된 정변지이니, 이것이 모래알 같이 수많은 세계에 두루 깔려 있다. 그대들에게 분명히 말하건대, 모름지기 온몸으로 부딪쳐 들어가야 비로소 얻을 수 있다.
23. 고정된 방법은 불도가 아니다
현사스님이 말씀하셨다. 불도는 탁 트여 있어서 정해진 길이 없으니, 아무 방법도 쓰지 않아야 해탈에 이르는 방편이며 어떠한 마음도 내지 않아야 도인의 마음이다. 또한 불법은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 속에 있지 않으므로 흥망성쇠가 없다. 그러므로 어떤 것이라도 세웠다 하면 진(眞)에 어긋나니, 인위조작에 속하는 법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이렇게 평한다. 만약 이 뜻을 깨달을 수 있다면 실오라기 만한 노력도 들이지 않고 선 자리에서 곧 부처가 된다. 아니, 부처가 된다는 이 말에서 된다는 것조차 오히려 군더더기다.
24. 동(動)이나 정(靜)에 치우치지 말라
현사스님이 말씀하셨다. 움직이면 생사의 본원이 일어나게 되고, 조용하면 혼침(昏沈)한 경계에 빠져들게 된다. 그렇다고 동과 정을 모두 쓸어 없애면 단견[공무(空無)]에 떨어지며 두 가지를 다 받아들이면 얼굴만 훤칠한 알맹이 없는 불성이 되리라.
나는 이렇게 평한다. 납자들이 흔히 움직이는 것을 싫어하고 조용한 것을 좋아하나, 조용함이 오래되면 다시 움직일 것을 생각하게 된다. 반드시 눈썹을 치켜세우고 동정의 소굴을 깨버려야만 비로소 도인의 공부가 되는 것이다.
25. 무심과 중도의 수행
현사스님이 말씀하셨다. 바깥의 티끌 경계를 마주해서는 죽은 나무나 꺼진 재처럼 되었다가 마음을 써야 할 때 가서는 중도를 잃지 말아야 한다. 거울이 모든 물체를 비추지만 자기 빛을 잃지 않고, 새가 공중을 날면서도 하늘 바탕을 더럽히지 않는 것처럼.
나는 이렇게 평한다. 죽은 나무나 꺼진 재처럼 하라 함은 무심(無心)하라는 말이고, 중도를 잃지 말라 함은 사물에 응하는 태도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 어찌 아무 감각 없이 꺼진 재처럼 되어버린 사람과 같은 수준으로 평가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자기 빛을 잃지 않는다 거나 하늘 바탕을 더럽히지 않는다고 한 것은, 바깥 경계는 경계일 뿐이니 그것이 나를 어쩌겠는가? 하는 의미에서 한 말이다.
26. 팔만의 문에 생사가 끊겼다
현사스님이 말씀하셨다. 시방(十方) 어디에도 그림자가 없고 삼계(三界)에도 자취가 끊어졌으며, 오고가는 인연 속에 떨어지지도 않고 중간에도 머물 뜻이 없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이 가운데 실오라기만큼이라도 미진한 부분이 있으면 마왕의 권속이 될 것이다. 이 구절의 속뜻은 납자들이 알기 어려운 경지이니, 이것이 곧 이 한 구절이 하늘에 닿으니 팔 만의 문(門)에 생사 뚝 끊겼다 하는 소식이다.
나는 이렇게 평한다. 여기에서 중요한 대목은 이 한 구절이 하늘에 닿으니...... 하는 부분이다. 시방세계 어디에도 실오라기만한 빈틈과 이지러진 곳이 없고, 터럭만한 그림자와 자취도 없으니 과연 찬란한 빛으로 살아 움직이는 경지라 하겠다. 그런 불조(佛祖)니 중생이니 할 것 없는 자리에 생사란 또 웬말인가?
27. 분명한 경계라 해도 그것은 생사심이다
현사스님이 말씀하셨다. 가령 가을 물에 비친 달 그림자처럼, 고요한 밤에 들리는 종소리처럼 치는 대로 틀림없이 들리고 물결 따라 흔들리며 흩어지지 않는 경지에 들었다 하자. 그러나 그것은 아직도 이곳 생사언덕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나는 이렇게 평한다. 참선하는 사람들이 만일 이러한 경지에 이르지 못했다면, 아니 도달했다손 치더라도 이는 아직 생사 쪽의 일이니 반드시 스스로 살길을 찾아내야 비로소 되었다 하리라.
28. 꼿꼿한 마음가짐으로 수행하라
현사스님이 말씀하셨다. 불로 얼음을 녹여 다시는 얼음이 되지 않고, 화살이 한 번 시위를 떠났으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는 형편처럼, 수행자라면 이렇게 처신해야 한다. 이것이 편안한 곳에 가두어 두어도 머물려 하지 않고, 누가 불러도 돌아보지 않는 이유이다. 성인은 어디에도 안주하지 않았으므로 지금까지 일정한 처소가 없느니라.
나는 이렇게 평한다. 수행자의 마음가짐은 마땅히 이래야 한다. 이 말씀을 자세히 연구하여 몸에 익히기만 하면 뒷날 저절로 깨닫게 되고 물들거나 끄달릴 이는 조금도 없게 될 것이다. 그런데 만일 알음알이를 일으켜 그곳에 쏠리면 이른바 발심(發心)부터 진실되지 못하여 잘못된 결과를 초래한다는 경우가 되고 만다.
29. 함부로 세상일에 관여하지 말라
현사스님이 말씀하셨다. 요즘 사람들은 이 도리를 깨닫지 못하고서 함부로 세상일에 뛰어든다. 그리하여 가는 곳마다 물들고 하는 일마다 얽매이게 된다. 그런 사람은 도를 깨달았다 해도 바깥 경계를 만나면 금새 분주해지니, 깨달았다고 하는 것은 유명무실할 뿐이다.
나는 이렇게 평한다. 가는 곳마다 물들고, 하는 일마다 매이는 이유는 참구하는 마음이 절실하지 못하여 미세한 번뇌를 끊지 못하고 죽지 않으려고 버둥대기 때문이다. 진정한 납자는 마치 전염병이 돌고 있는 마을을 지나가듯 물 한 방울도 묻지 않을 만큼 조심해야 비로소 철저하게 깨닫게 된다.
30. 억지로 망념(妄念)을 다스려 공무(空無)에 떨어지는 병통
현사스님이 말씀하셨다. 이런 식으로 수행하는 사람들이 있다. 마음을 단단히 검속하여 모든 현상(事)을 싸잡아 공(空)으로 귀결시키고, 눈을 딱 감고서 겨우 망념(妄念)이 일어날라치면 갖은 방법으로 부숴 없애고, 미세한 생각이 일자마자 곧 억눌러버린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은 단견(斷見)에 빠진 외도[공무외도(空無外道)]로서 혼만 흩어지지 않았을 뿐 영락없는 죽은 사람이라. 깜깜하고 아득하여 아무런 느낌이나 인식이 없다. 이는 마치 자기 귀를 틀어막고 남도 못 듣겠거니 하면서 방울 달린 말을 훔친다는 이야기와 같으니 부질없이 자기를 속일뿐이다.
나는 이렇게 평한다. 이러한 사람의 병통은 의심을 일으키지 않고 공안을 참구하지도 않으며, 온몸으로 깨달아 보겠다는 의지 없이 그저 알음알이로 망념(妄念)만을 다스리려 하는 데 그 원인이 있다. 설사 이런 사람은 맑고 고요한 경지에 이르렀다 해도 사실은 미세한 번뇌까지는 끊지 못하였으니 결국 참선하는 납자라고 할 수는 없다.
31. 생사애증에 미련을 두지 말라
현사스님이 말씀하셨다. 그대들은 오직 생사애증의 그물에 길이 미련을 두지 말아야 하니 그렇게 되면 선악의 업장(業障)에 끄달려 자유가 없는 형편이 되고 만다. 이렇게 되었을 때 설사 그대들이 몸과 마음을 허공처럼 닦을 수 있고, 또한 마음이 맑아서 흔들리지 않는 경지를 이루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알음알이를 벗어나지 못한 경계이다. 옛 사람은 이것을 두고 급류가 거침없이 흐르는 데도 알지 못하고 허망하게도 고요하게 여기는 경계라고 말하고 있다.
나는 이렇게 평한다. 알음알이가 끊어지지 않았으면 비록 심신을 허공처럼 닦는다 하더라도 악업에 끌려간다. 또한 마음이 맑아 흔들리지 않는다고 한 경지가 바로 알음알이의 경계이니 어떻게 생사를 벗어날 수 있겠는가. 간추려 말하자면, 큰 도리를 참구해서 깨치지 못했으면 다 허망하다는 뜻이다.
32. 도안(道眼)을 갖추기 전에는 윤회를 벗지 못한다
현사스님이 말씀하셨다. 어떤 수행을 하더라도 모두 또 다른 윤회를 낳게 하여 여전히 윤회를 떠날 수 없게 한다. 그러므로 제행무상 을 설하신 것이다. 그러니 삼승(성문, 연각, 보살)의 노력이 실로 엄청난 줄은 알겠으나 도를 볼 수 있는 안목이 없다면 완전히 깨달았다고 할 수는 없다.
나는 이렇게 평한다. 위의 몇 줄 법어의 내용을 검토해 보자면, 모두 완전히 깨닫지 못한 경지에 대한 설명이다. 성문, 연각, 보살의 지위에 있는 사람이 비록 6바라밀과 온갖 수행을 다 한다 해도 이것은 모두 생멸법(生滅法)이다. 이들은 실제 도리를 보고서 잠시 기뻐하지만 道와는 아무 관계없는 것이다.
33. 쉬라고만 가르치는 외도
경산사 대혜스님이 말씀하셨다. 요즘 이런 외도가 있다. 즉 자기 안목은 밝지 않으면서 사람들을 죽은 갈단(달旦 ; 이리같이 생긴 힘센 괴물, 여기서 죽은 갈단은 기력 없음을 비유함)처럼 쉬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쉰다면 천불이 세상에 다시 나온다 하더라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도리어 마음은 더욱 번민(煩悶)에 싸일 뿐이다.
나는 이렇게 평한다. 의정을 일으키려 하지 않으면 미세한 번뇌가 끊어지지 않으니, 미세한 번뇌가 끊어지지 않았다면 쉬어 보았자 되지도 않는다. 이 쉰다는 말이 바로 생사의 근본이니, 비록 백천 겁을 지난다 해도 끝내 깨달을 기약이 없을 것이다.
34. 주관이 객관을 관조하는 망념
대혜스님이 말씀하셨다. 다음과 같이 납자들을 지도하는 부류가 있다. 어떠한 연을 만나든지 주인공을 잃지 말며 생각을 잊고 묵묵히 관조하라 고. 그러나 이런 식으로 해나가다 보면 그 결과는 마...(책이 잘 안보임) 뿐 끝마칠 기약은 없다. (책이 잘 안보임...두 줄 생략)
주관과 객관이 대립한 것이니 망념이 아니고 무엇인가. 만약 망념을 가지고 참구한다면 문득 자기 마음에서 자재할 수가 없게 된다. 오직 제자리에서 생사를 끊어버려 주관과 객관이 일지 않게 해야 마음속에 꽉 막혔던 응어리가 물통 밑바닥이 빠져나가듯 쑥 빠질 것이다.
35. 고요함과 상대되는 또렷함은 참구가 아니다
대혜스님이 말씀하셨다. 이렇게 납자들을 지도하는 무리가 있다. 이 일에 너무 얽매이지 말고 그저 다만 쉬어라. 이렇게 쉬어질 수 있으면 미혹한 생각이 일어나지 않게 된다. 이때 도달한 경지는 깜깜하게 인식작용이 없는 것이 아니고 또렷하게 깨어 있는 경지이다 라고. 이런 사람들은 납자들에게 독을 주고 그들의 눈을 애꾸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니 참으로 큰일 날 일이다.
나는 이렇게 평한다. 비록 또렷하게 깨어 있는 경지에 도달했다 해도 그것은 고요함과 상대되는 상태일 뿐 참구는 아니다. 만약 참구를 하려면 바로 생사대사를 파헤쳐 밝혀내고자 해야 하는데 이미 그렇지 못하니, 해독 스럽지 않겠는가.
36. 생사심을 타파하라
대혜스님이 말씀하셨다. 오래 참구했거나 먼저 깨쳤거나를 막론하고 참으로 고요한 경지에 도달하려면 모름지기 생사심을 깨뜨려서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 참선하는 데는 생사심이 깨어지면 저절로 고요해진다.
나는 이렇게 평한다. 의정이 일어나면 그것이 뭉쳐서 한 곳에 엉켜 있게 되고, 그 의정이 깨어지고 나면 생사심도 깨어진다. 이런 자리에서는 요동하는 모습을 찾을래야 정말로 찾지 못한다.
사랑은 계절따라 / 박건
가을이면 가버리고
가을에 만난 사람
겨울이면 떠나가네
어디서 왔다가
어느 곳으로 가는지
계절이 다시 오면
그대 오려나 그대는 오려나
그대는 떠나가도
계절만은 돌아오고
사랑은 떠나가도
그대만은 못잊겠어요
웃으며 만났다
아 웃으며 떠난 그 사람
계절이 다시 오면 돌아와주오
돌아와주오
그대는 떠나가도
계절만은 돌아오고
사랑은 떠나가도
그대만은 못잊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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