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다운 보살행이란 무엇인가?/ 종범 스님

2010. 7. 6. 19:27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발심수행장·수행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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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다운 보살행이란 무엇인가?  

 

 

종범 스님

 

 

 

불 속에 있는 어린아이와도 같은 인간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의 의미를 잘 알고 계실 줄로 압니다. 그것은 바로 ‘불자는 인생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하는 문제의 해답을 찾는 것입니다. 물론 그 정답은 불자 여러분이 이미 알고 있듯이 보살행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단답형으로 대답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겠습니다만, 보살행이 과연 어떤 것인지 마치 수험생들이 논술고사를 보듯 자신의 생각을 조리 있게 표현해 보라고 하면 망설여지는 분이 적지 않을 줄로 압니다. 그 망설임의 정체는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하다는 두려움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닐까요? 그러면 인간과 인생에 대한 부처님의 재미있고도 의미심장한 비유로 이야기를 시작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인간이란 정말 오묘한 존재입니다. 불가사의한 면이 참으로 많습니다. 아는 듯하면서 전혀 모를 것 같은 것이 인간이고 모르는 것 같으면서 또한 아는 것 같은 것이 인간입니다. 인간은 생활 면에 있어서나 활동 면에 있어서나 그 방식과 양태가 너무나 다양해서 어떤 때는 낙천적인 생각이 드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어떤 때는 비관적인 생각이 드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때로는 어떠한 인생을 보고 성공하는 것 같이 느껴지기도 하다가 또 금방 실패한 인생처럼 보여질 때도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입니다. 때문에 다른 면에 있어서는 자신을 가진다 하더라도 정말로 인간 생활 그 자체에 대해서는 어떻게 하는 것이 실패한 인생인지 성공한 인생인지 여기에 대해서는 확신할 만한 사람이 흔치 않습니다. 그래서 사상이 필요하고 신념이 필요합니다. 한 인간이 일생을 살아가는 데 어떠한 사상이 없다면 마치 어떤 그릇이 겉으로 보기에는 좋으나 그 내용이 빈약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한 인간이 평생을 살아가는 데 신념이 없다면 그것은 마치 방향타가 없는 배와 같아서 매우 위험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점에 있어서 불법(佛法)의 진리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지고 이 방면에 마음을 조금씩 적셔 간다고 하는 것은 정신 면에서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모릅니다. 참으로 이 불교의 감로수에 조금이라도 인연이 있고 여기에 어떤 느낌이 있다면 그렇게 마음이 훈훈할 수가 없고 그렇게 기쁨이 넘칠 수가 없습니다.

 

불교에는 인생의 비유를 설한 경전이 많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잊혀지지 않고 감명이 아주 깊은 것은 『법화경』 「비유품」에서 인생에 대하여 오묘한 말씀을 한 것입니다. 그것은 한평생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인간들이 마치 불 속에서 놀면서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동자와 같다는 비유입니다. 이것을 일러 화택동자(火宅童子)의 비유라고 하지요.

그 이야기는 다음과 같이 전개됩니다. 하나의 큰 집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집은 예부터 내려오는 아주 커다란 집이라 어린아이들이 보기에는 한눈에 들어오지 않는 그런 집이었습니다. 아이들은 본래부터 이 집에 살고 그 집에 익숙해 있기 때문에 항상 집안에서 재미있게 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집에서 나온 한 어른이 그 집을 바라보자 불행스럽게도 불에 타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불타는 집을 보고 이 어른은 생각에 잠겼습니다. 저 불이 타도록 내버려 두면 필경 집은 불에 타 재가 될 것이고 그 집안에서 노는 어린아이들은 무참히 희생을 당할 것이라는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 어른은 집안으로 뛰어들어가 어린아이들에게 이렇게 외쳤습니다. “이 집이 지금 불에 타고 있으니까 빨리 밖으로 나가자!” 그러나 아이들은 그 불이 방안에까지 들어오는 모습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그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계속해서 놀려고 들 뿐 나가려고 하지 않은 것이지요.

 

어른은 참으로 답답했습니다. 내버려 두자니 아이들이 죽을 것은 뻔한 일이요, 데리고 나가자니 말을 듣지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른은 밖으로 나가면 좋은 장난감이 있으니까 밖으로 나가자고 말했습니다. 아이들은 집안에 있는 것보다 더 좋은 장난감을 얻기 위해 서둘러 밖으로 나왔습니다. 이렇게 해서 그 아이들은 불타는 집에서 무사히 구제가 된 것이지요.

 

이 이야기는 부처님께서 온 인간을 생사의 고통에서 구제하신다는 비유입니다. 여기서 불타는 집은 이 세상이요, 우리의 육체입니다. 그리고 아이들은 바로 우리의 정신, 즉 우리의 영혼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몸은 지금 점점 늙어 가고 있고 쇠약해져 가고 있습니다. 우리의 머리가 희어지고 척추가 굽어 가고 하는 것은 바로 그 불타고 있는 집이 불 때문에 서까래가 내려앉고 기둥이 기울고 대들보가 휘어지는 것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속에서 마냥 오래 살기만을 바랄 뿐 영혼의 자유와 마음의 해탈을 위해서 어떠한 사상과 소신을 가지고 인생을 멋있게 장식하고자 하는 각오나 노력을 세우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불 속에 있는 어린아이들과 같이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 계속 -

 

 

깨달음을 통해 완전한 자유인으로
 
그럼 이번에는 보다 구체적이고 재미있는 비유 한 가지를 더 들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것은 『빈두로돌라사위우타연왕설법경(賓頭盧突羅倒  爲優陀延王說法經)』에 나옵니다. 경의 이름이 좀 어렵게 들립니다만, 이것은 빈두로 존자가 우타연왕을 위해 설법한 경전이라는 뜻입니다.
 

한 사나이가 있었는데, 이 사나이는 훤히 펼쳐진 벌판을 어슬렁어슬렁 태연하게 걷고 있었습니다. 이때 그 사나이의 뒤에서는 험악하게 생긴 코끼리가 달려왔습니다. 이 사나이는 코끼리를 피하기 위해서 마구 달아나기 시작했습니다. 한참 달아나다 보니까 우물이 하나 있어서 그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마침 우물 속에는 칡넝쿨이 드리워져 있어서 그것을 타고 밑으로 내려가기 시작했지요. 조금 내려가다 보니 그 밑바닥에는 무서운 독사들이 아가리를 쩍 벌리고 노려보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다시 올라가려고 했지만 아직도 코끼리가 돌아가지 않고 성난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이 사나이는 밑바닥으로 내려갈 수도 없고 위로 올라갈 수도 없어서 중간에 매달려 있는 형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우물의 벽 사방에서는 조그마한 뱀들이 나왔다 들어갔다 하면서 이 사람을 깨물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조금 있자니 자기가 매달려 있는 칡넝쿨을 하얀 쥐 한 마리와 검은 쥐 한 마리가 와서 갉아 대기 시작했습니다. 정말로 큰일이 났습니다. 위로 올라가자니 사나운 코끼리가 버티고 있고 밑으로 내려가자니 무서운 독사가 버티고 있으니 말입니다. 방법은 그대로 매달려 있는 것뿐인데, 하얀 쥐와 검은 쥐가 칡넝쿨을 갉아 대기 시작하니 그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그런데 하나 재미있는 것은 어디선가 벌 다섯 마리가 날아와 왔다 갔다 하면서 꿀을 한 방울씩 떨어뜨려 주는 것입니다. 이 사나이는 이렇게 위급한 지경에 있으면서도 그 꿀 한 방울 한 방울에 재미를 붙여서 왜 더 많은 꿀을 떨어뜨려 주지 않나 생각하면서 그 꿀을 먹는 데 정신이 팔려 있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인생을 정말 아주 재미있게 비유한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사나이는 바로 우리 인간을 말하는 것이요, 그 벌판이라고 하는 것은 세상을 말하는 것이며, 뒤에서 따라오는 코끼리는 무상하게 덧없이 흘러가는 세월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우물은 우리의 몸을 말하는 것이요, 밑바닥에 있는 독사는 마지막의 죽음을 뜻합니다. 또한 칡넝쿨은 생명의 한계를 말합니다. 그것은 며칠이 될 수도 있고 몇십 년이 될 수도 있지만, 결국은 한계가 있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하얀 쥐는 낮을 말하는 것이요, 검은 쥐는 밤을 가리킵니다. 밤낮이 자꾸자꾸 흘러가기 때문에 생명은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물의 벽 사방에서 작은 뱀들이 나왔다 들어갔다 하는 것은 가끔씩 우리 몸이 아픈 것을 뜻합니다. 끝으로 다섯 마리의 꿀벌은 인간의 다섯 가지 욕망을 가리킵니다. 다섯 가지 욕망이란 (1) 재물, (2) 이성(異性), (3) 식사, (4) 명예, (5) 편안함입니다. 그 벌들이 떨어뜨려 주는 꿀을 먹는다는 것은 인간이 다섯 가지 욕망에 정신이 팔려 죽음이 닥쳐오고 있는 것을 까맣게 모르고 있다는 뜻이지요.

이 비유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 인간에게 결과적으로 찾아오는 것은 죽음입니다. 자기가 원하든지 원하지 않든지 간에 빨리빨리 지나가는 세월에 밀려서 마침내 죽음과 맞닥뜨릴 수밖에 없는 것이 바로 우리의 암울한 현실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비유를 긍정적으로 해석해 볼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 처해 있는 사람이 어떻게 해야 코끼리도 물리치고 독사의 아가리도 피해서 완전한 자유인이 되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바로 깨달음을 통해서입니다. 만약 그 사나이가 꿈에 그런 현상을 당했다가 꿈 한번 딱 깨면 그 순간 독사도 우물도 코끼리도 칡넝쿨에 매달렸던 자기 자신도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완전한 자유와 참다운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비유는 우리가 불법의 참다운 뜻을 이해해서 새롭게 인생의 의미를 자각할 때 현실에 대한 온갖 고뇌와 애로의 역경을 다 떠나서 완전한 기쁨과 감로의 즐거움을 누리게 된다는 것을 상징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 계속 -

 

 

인간을 사랑하고 인간을 보살피는 생활
 
지금까지 본 것과 같은 여러 가지 경전의 말씀을 종합해 본다면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그렇게 장구한 것도 아니고 그렇게 천연덕스러운 것도 아님을 다시 한 번 통감하게 됩니다. 바로 이때 우리 불자는 새로운 마음을 일으킬 필요가 있습니다. 경전에서 비유로 말씀하고 있는 인생의 실상을 똑바로 자각해서 새로운 정신으로 늘 순간순간 새 출발을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불교에서는 신심(信心)과 발심(發心)이라는 말을 많이 씁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깨달은 진리를 믿고 그 진리에 따라 생활하는 가운데 행복이 있고 보람이 있다고 철저히 믿는 것이 신심입니다. 이 신심이 있을 때, 이루지 못하는 것을 이룰 수 있고 따분한 가운데에서도 기쁨이 있고 어려운 가운데에서도 쉽게 성취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신심만을 가지고 평생을 지내기에는 조금 아쉬운 점이 있습니다. 신심이라고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의존적인 것에 그치는 것이지 자발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불교의 종교심은 신심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자발적인 마음이 일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발심이라고 합니다. 발심이라고 하는 것은 자발적인 종교심입니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누가 하라고 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확실히 인식하고 확실히 그렇게 결정해서 다른 사람이 아무리 하지 말라 해도 그것을 하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는 그러한 마음가짐과 행동가짐이 바로 발심의 생활관입니다.

 
이 고도의 자발적 종교심으로서 발심의 단계를 『기신론(起信論)』에서는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구분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직심(直心)과 심심(深心) 그리고 광대심(廣大心)이 그것입니다.

 
먼저 직심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우주와 인간을 똑바로 보는 마음입니다. 이 세상에는 순간적인 것이 있는 동시에 또 영원한 것도 있습니다. 그러나 보통사람들은 순간적인 것과 영원한 것을 혼동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세상에는 헛된 것이 있는 동시에 참된 것도 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헛된 것과 참된 것을 잘 구분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에 직심이라고 하는 것은 분명하게 똑바로 보는 것입니다. 헛된 것을 헛되게 보고 참된 것을 참되게 보아서 분명히 내가 가야 할 것과 가지 않아야 할 것, 해야 할 내용과 하지 않아야 할 내용을 명명백백(明明白白)하게 분명히 구분하고 선택하고 판단하는 것이 바로 직심인 것입니다.

 
다음에는 심심입니다. 심심은 깊은 마음입니다. 보통 사람들의 감정에는 의존심이 많습니다. 부모에게 의존하고 스승에게 의존하고 선배에게 의존하고 후배에게 의존하게 됩니다. 이래서 자기가 무엇을 해서 스스로 베풀려고 하는 감정보다는 다른 사람이 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많습니다. 이러한 의존심 때문에 항상 고마움을 알지 못하고 자기가 무엇을 하려고 하는 마음이 부족합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에게 바라는 마음 때문에 늘 불만이 많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이 불만 때문에 다른 사람이 베풀어 준 은혜에 감사할 줄 모르고 이 불만 때문에 잘못하면 은혜를 원수로 되돌려 주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에 깊은 마음이 필요합니다. 하나하나를 깊이 보고 분명하게 보고 다른 사람의 허물을 용서할 줄 알고 다른 사람의 잘못을 이해할 줄 알아서 원망하고 분노하기보다는 앞서서 이해하고 수용하는 깊은 마음이 바로 관세음보살의 마음입니다. 관세음보살은 모든 인간을 다 동정하고 모든 인간의 잘못을 다 용서해서 하나의 자비로 승화시킨 분입니다.

 
이제 광대심이 남아 있군요. 광대한 마음이란 오늘 이 순간만을 위해서 무엇을 결정하고 선택하는 것이 아닙니다. 보다 크고 넓은 세계에 관심을 가지는 것입니다. 이 광대심은 바로 보현 보살의 마음입니다. 보현 보살은 자기 한 사람의 영광과 한 사람의 이익을 위해서 사시는 분이 아니라 모든 인간의 고통을 다 덜어 주기 위해서 사시고 모든 인간의 이익을 위해서 노력하는 분입니다.

 
이렇게 해서 불교에는 문수보살이 있고, 관세음보살이 있고 보현보살이 있는 것입니다. 문수보살의 마음은 바로 허상과 실상을 똑바로 보는 직심이요, 관세음보살은 심심이요, 보현보살은 광대심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생활에 임한다면 바로 보살이 되는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원대한 이상을 가지고 현실의 모든 고통을 헤쳐 나가는 사람을 보살이라고 합니다. 보(菩)는 보리(Bhoddhi)의 약어로 진리를 추구한다는 말이요, 살(薩)은 살타(Sattva)의 줄인 말로 현실을 헤쳐 나간다는 뜻입니다. 인간은 현실 가운데에서도 이상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고 또 이상을 가지는 데 그칠 것이 아니라 현실을 개척하고 창조할 수 있는 그러한 끈기와 노력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철학적 인간, 개척적 인간, 미래를 향한 광대심을 가진 인간을 보살이라 합니다. 이 보살의 마음에 의해서 하나하나 창조적으로 잘해 나가는 것을 자비라고 합니다.

 
이 자비는 현실의 고통을 즐거움으로 바꿀 수 있고 어두운 현상을 밝은 것으로 바꿀 수 있는 중요한 사랑이요, 강력한 실천입니다. 자비가 있는 사람은 미래를 개척하고자 하는 소원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원력(願力)입니다. 자비의 실천과 미래의 원력에 의해서 어떤 꾸준한 정신적 생활을 한다면 그것이 바로 보살행입니다. 이 보살행으로 인격이 연마되고 보살정신으로 사상이 축적된다면 바로 그것이 훌륭한 인생관이요, 훌륭한 생활관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항상 진리를 버리지 않고 인간을 보살피는 것이 보살입니다. 보통 인간은 다 허약하고 의존적인 감정이 많기 때문에 진리를 사랑하기보다는 자기의 욕망을 사랑하고 인간을 보살피기보다는 자기의 영광에 집착합니다. 보살의 생활관이라는 것은 바로 인간을 사랑하고 인간을 보살피는 생활입니다. 이렇게 보살의 고상한 뜻과 훌륭한 생활관을 본받아서 항상 불심으로 생활해 나가는 것이 불자의 생활상의 이상이자 인생의 본보기인 것입니다. - 계속 -

 

자기가 하는 일에 최대의 정열과 정성을
 
이와 같이 불교에서는 이 훌륭한 마음, 즉 신심, 발심, 이 모두를 합해서 불심이라고 합니다. 부처님을 공경하는 마음, 또 부처님을 추모하는 마음, 부처님께 순종하는 마음, 이런 모든 마음을 불심이라고 합니다. 불심을 위해서는 바로 미래를 위해서 원을 세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을 원력이라고 합니다. 원을 세울 때 힘이 생깁니다. 원이 없는 사람은 힘이 없습니다. 부처님은 훌륭한 능력과 끝없는 자비를 성취하셨습니다. 어떻게 이와 같은 것을 성취하셨겠습니까? 바로 원을 세우셔서 그 원을 이루셨기 때문에 그렇게 되신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이나 보살님들은 원을 크게 세우셨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여래십대 발원문, 아미타불의 48가지 서원, 약사여래불의 12가지 서원 그리고 보현보살의 10대 행원이 바로 그러한 원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경전에서 자비와 원력에 의한 실천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하고 대표적인 경전이 바로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화엄경』입니다. 『화엄경』은 우리나라에서 신라시대 때부터 많이 독송되고 연구된 경전이자 자비원력으로서의 보살행에 아주 중요한 경전입니다. 『화엄경』의 제일 앞에 있는 「세주묘엄품(世主妙嚴品)」에는 많은 이름이 나옵니다. 그것은 부처님께서 『화엄경』을 설하실 때 사람들만 모인 게 아니라 천신(天神), 지신(地神), 허공신(虛空神)과 하수신(河水神)을 비롯해서 많은 신들이 모였다는 뜻입니다. 여기에서 하나 중요한 것은 그들이 각자 자리에서 완전한 하나의 일가견, 즉 하나의 성취를 이루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 신들은 여러 신대로 하나를 성취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보살은 보살대로 하나의 세계를 이루었고 또 우바새는 우바새대로 하나의 세계를 이루어서 어떠한 신분에 있는 존재이든지 다 자기대로 하나의 세계를 성취했습니다. 이러한 존재들이 한 곳에 모임으로써 대방광불화엄경이라고 하는 세계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바로 해탈문입니다. 이 해탈문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가 있는 그 자리에서 바로 하나씩을 성취해 나가는 것입니다.

 
『화엄경』에서 말하는 53선지식(善知識) 가운데는 비구도 있고 비구니도 있고 거사(居士)도 있고 뱃사공도 있으며 보살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분들은 다 자기의 처지에서 자신을 가지고 긍지를 가지고 항상 정열을 다해 집중합니다. 이렇게 선지식들은 작은 일에 정열을 바침으로 말미암아 큰 뜻을 이룹니다. 이것이 제일 중요한 일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을 하느냐, 지금 어디에 속해 있느냐,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기가 하는 일에 최대의 정열과 정성을 바치는 생활이 중요한 것입니다. 자기가 하는 일에 정열을 바칠 때 그 사람의 가슴은 항상 흐뭇합니다.

 
경전에는 하나의 티끌 속에 앉아서 우주만상을 운전한다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보통 현상으로 볼 때는 전체의 우주 속에 하나의 티끌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이 느껴집니다만 사실은 한 티끌이 없으면 우주는 성립이 되지 않습니다. 하나가 없으면 열도 성립되지 않고 하나가 없으면 천만도 성립되지 않습니다. 바로 천만과 같은 수많은 숫자도 역시 하나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이 우주는 한 티끌로부터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입장에서 자신이 하는 일에 긍지를 가지고 희망을 가지고 정열을 바쳐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자비원력으로서의 보살행입니다.

 
우스운 이야기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처음 절에 가서 음식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그때 나물을 무치는데 다른 사람이 나물을 무치면 맛이 있는데 제가 무치면 전혀 맛이 없었습니다. 그 이유가 뭔지 고심하던 중 나중에 살펴보니 다른 사람이 나물을 무치면 그냥 간단하게 무치는 것이 아니라 양념이라든지 기타 모든 것을 넣고 한참씩 주무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도 그 다음부터는 나물을 무칠 때 양념과 여러 가지를 넣고 잘 주물렀습니다. 자꾸자꾸 오랫동안 주무르니까 그 맛이 훨씬 좋아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저는 ‘바로 이것이구나’ 하고 깨달았습니다. 나물 한 가지를 무치는 데도 건성으로 무치면 맛이 없고 정성을 들여서 자꾸자꾸 주무를 때 양념과 나물이 하나가 되어 전체의 맛이 잘 우러납니다. 바로 이것이라고 철저히 느꼈습니다. 무엇을 하든지 자기의 일에 정성을 쏟고 정열을 바치는 생활이 중요합니다. 이 조그만 일에 정성을 바칠 때 큰일을 이루는 것이지 작은 일에 정열을 바치지 않는 사람은 큰일도 이룰 수 없습니다. 바로 이것이 중요한 일이라고 하겠습니다.  

 
불교에서는 하나의 티끌 속에 시방우주(十方宇宙)가 포함되어 있다고 합니다. 하나의 티끌을 떠나서는 우주가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철저히 느끼고 조그만 일을 성취하지 못하면 결코 큰일이 이루어질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디에 처해 있든지 자기의 처지에서 정성과 정열을 바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렇게 해서 항상 원대한 원을 가슴속에 간직하면서 어렵지만 쉽게 생각하고 힘들지만 능히 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해서 늘 자기의 노력을 기울이고 자기의 정성을 쏟아 넣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이 바로 무상한 인간이 영원을 살아가는 방법이며, 고통스러운 처지에서 즐거움을 맞이하는 길임에 틀림없습니다. 

 
 
- 불교의 가르침은 무엇인가 / 불교문화 -
 

 

여름에는 저녁을..!

- 오규원
 
여름에는 저녁을
마당에서 먹는다
초저녁에도 환한 달빛
 
마당위에는 멍석
멍석 위에는 환한 달빛
달빛을 깔고 저녁을 먹는다.
  
숲 속에서는 바람이 잠들고
마을에서는 지붕이 잠들고
 
들에는 잔잔한 달빛
들에는
봄의 발자국 처럼 잔잔한 풀잎들
 
마을도 달빛에 잠기고
밥상도 달빛에 잠기고
 
여름에는 저녁을 마당에서 먹는다
밥 그릇 안에까지 가득 차는 달빛
 
아, 달빛을 먹는다
초저녁에도 환한 달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