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다를 믿으라/응천스님

2010. 7. 6. 19:44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제불조사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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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은 능히 번뇌와 괴로움의 뿌리를 송두리채 뽑아버린다.
믿음은 능히 부처님의 공덕만을 지향하여 나아간다.

[화엄경]

 

믿음은 온 몸을 청정히 하며,
믿음은 힘이 견고하여 파괴치 못한다.

확고히 믿는다면

설사 마왕 파순이 부처님의 몸으로 변신하고 나타나
정답게 다른 가르침을 설한다 해도,

믿음의 힘으로 말미암아 이 바른 가르침을
티끌만큼도 깨뜨리지 못하게 할 것이다.

[보살장 정법경]

바른 가르침을 굳게 믿고,

믿음에 기뻐하면,
이것이 최고의 복이다.

[법구경]

믿음은 씨앗이요, 수행은 단비니라.

[잡 아함경]

믿음은 '보시'가 되어 나타나
마음에 인색함이 없게 하며,
믿음은 능히 '기쁨'을 낳아
부처 님의 가르침에 들게 한다.

믿음은 능히 '지혜'의 공덕을 증장시키며,
믿음은 능히
부처님의 경지에 반드 시 이르게 한다.

[화엄경]

믿음을 얻고 나서 마음이 물러남이 없어,
어지러워 지지 않고, 깨어지지 않고, 집착하지 않고,
근본자리 항상 지녀 부처님을 따른다면,
이 사람은 여래의 집에 살게 된다.

[화엄경]

잘믿으십시요,
두려워하지말고,의심치말고,이익을구하지말고

지금은 그저 붓다를...믿으십시요.

나무아미타불_()_

 

덕산 응천 스님

 

 

 

다겁생 짊어 온 貪慾不捨 이젠 그만 내려 놓아라

 
 
 
  지관 스님
 
 
 
 

 

 


지혜·용기 겸비해야 발심

부처님은 “중생제도를 위해 사바세계에 몸을 던지지 않은 곳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무량겁 동안 중생을 위해 고행정진한 부처님의 거룩하신 뜻이 있기에 오늘 이 자리도 있는 것입니다.

고행이란 정진입니다. 우리는 정진하지 않고는 뜻한 바를 얻을 수 없습니다. 공부를 게을리 하면 성적이 오르지 않아 진학하기 어렵습니다. 하물며 진리를 깨닫는데 있어서 뼈를 깎는 목숨 건 수행이 아니고는 어찌 이룰 수 있겠습니까? 원효 스님은 발심수행장(發心修行章)에서 “발심이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얻는 것이니 지혜와 용기, 의리 있는 마음이 발심”이라 하셨습니다. 자리이타의 마음을 내는 것이 발심이라는 뜻입니다. 발심은 불문에 들어서는 입문과도 같습니다. 발심을 내신 분들의 심처는 천차만별이겠지만 부처님 법이 좋아 그 법을 따라 살겠다는 마음을 낸 것 자체는 아주 훌륭한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다 같은 부처님의 제자입니다.

불가에서는 옛부터 사람 몸 받기 어렵고, 불법 만나기 어렵고, 정법 만나기 어렵다 했습니다. 비록 중생이라 하지만 그래도 사람 몸을 받았다는 것은 큰 복입니다. 천수경이나 금강경 개경게에서도 ‘무상심심미묘법 백천만겁난조우’(無上甚深微妙法 百千萬劫難遭遇) 라고 했듯이 이 법 만나기가 이토록 어렵습니다. 또한 법을 만났으나 정법 만나기도 어렵다 했습니다. 겉으로는 불법을 표명하나 사법을 행하는 이가 많습니다. 돈과 명예를 위해 불법을 판다면 그것은 불법을 말하고 있으나 정법이 아닌 사법입니다. 야보 스님은 “삿된 사람이 정법을 쓰면 사법이 되지만 올바른 사람이 삿된법을 쓰면 정법이 된다”고 하셨습니다. 봉은사는 유서 깊은 사찰로 정법을 펼치는 도량입니다. 여러분은 사람 몸 받아 불법을 만났음은 물론 이토록 훌륭한 정법 도량에 머물러 있으니 세 가지 모두를 구족했습니다. 여러분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부처님은 다겁생 동안 사욕고행(捨慾苦行) 하셨지만 중생은 다겁생 동안 탐욕불사(貪慾不捨)를 추구해 왔습니다. 원효 스님은 “모든 부처님께서 적멸보궁을 아름답게 꾸미신 것은 오랜 세월 동안 욕심을 끊고 수행하신 까닭이요, 수많은 중생들이 불타는 집에서 고통 받는 것은 끝없는 세월동안 탐욕을 버리지 못한 까닭”이라 하셨습니다.

고행이라 해서 일부러 고행할 필요 없습니다. 고행을 하더라도 목적이 있는 고행을 해야 합니다. 남이 이롭기를 바라며 내 자신이 좀 손해를 보고, 남이 하기 어려운 일을 자신이 하려하는 그 인욕이 고행인 것입니다. 노력을 해서 돈을 버는 것은 탐욕이 아닙니다. 노력도 하지 않고 얻으려 하는 것, 분에 맞지도 않는 것을 성취하려 하는 것이 탐욕입니다. 부처님의 삶과는 정 반대로 살아온 우리는 탐욕에 눈이 멀어 스스로를 옭아매고 있습니다. 부처님은 “물이 바다를 향해 흐를 때 뒷물이 앞 물 앞에 가기를 다투지 않는다.”했습니다. 경쟁과 투쟁만이 사는 길이 아닙니다. 이 도리만 알아도 우리는 자승자박에서 풀려날 것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미래를 예측하고 과거를 비출 줄 알아야 합니다. 고기가 낚싯대에 걸리는 것은 먹이에 눈이 멀어 먹이 속의 바늘을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먹이를 무는 순간 죽는 줄 모르는 겁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함부로 말하거나 행동하지 않습니다. 말 한마디 행동 하나가 어떤 영향을 미칠지 생각하고 언행을 합니다.

춘추시대 말기 제나라에 안영이라는 유명한 재상이 있었습니다. 당시 초나라 영왕은 안영을 초대해 놓고는 짓궂은 질문을 던졌습니다. 영왕과 안영 앞에는 포박된 한사람이 있었습니다. “저 사람은 제나라 사람인데 도둑질을 하다가 잡혔다. 제나라에는 도둑이 많습니까?”

물은 다투지 않고 바다 향해

안영이 대답했습니다. “남쪽의 귤이 북쪽에 가면 탱자(南橘北枳· 橘化爲枳)가 되는데 이는 땅과 기후의 영향 때문입니다. 제나라 사람들이 제나라에 있을 때는 도둑질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자랐는데 초나라 와서는 도둑질을 하니 이는 초나라의 풍토 때문인 듯싶습니다.” 영왕은 이후로 제나라를 함부로 넘보지 못했습니다.

적멸보궁에 계신 부처님은 아무나 친견할 수 없습니다. 실상과 현상이 둘이 아니요, 색과 공이 둘이 아닌 하나임을 알아야 볼 수 있으니 적어도 10지 보살은 되어야 가능합니다. 수행정진의 노력 없이는 절대로 볼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저 친견하기만을 기대한다면 그것은 씨앗도 심지 않고 열매 맺기를 바라는 욕심일 뿐입니다.

초발심 잃지 않으면 부처

우리의 마음은 본래 하나인데 착한 마음과 나쁜 마음이 생겨납니다. 어떤 마음을 내는지는 여러분 각자의 몫입니다. 부처님은 “마음은 한 뿌리이니 착한 마음을 내도록 하라”고 하셨습니다. 부처님 가르침대로 마음의 한 뿌리에서 착한 마음을 내고 지혜를 얻으려면 수행을 해야 합니다. 부처님 당시부터 마음이 산란한 사람에게는 수식관을, 탐욕심이 많은 사람에게는 부정관을 통해 마음을 닦아왔습니다. 우리는 간화선을 중심으로 한 수승한 수행법을 통해 마음을 닦아왔습니다.

우리 자신을 보십시오. 아무리 아름답고 멋진 사람이라도 걸어다니는 화장실에 불가합니다. 오장육보가 다 무엇입니까? 그러나 또 한편으로 보면 불성이 있는 고귀한 부처님입니다. 즉심시불(卽心是佛)이라 했지만 하루아침에 되는 것도 아닙니다. 다겁생 동안 쌓인 업장을 녹이는 일만 생각해도 뼈를 깎는 인내의 정진 없이는 성취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어렵다 생각하는 순간 수행과는 거리가 멀어지고 깨달음은 요원합니다. 불교에 입문한 순간이 발심을 낸 순간이요 초발심을 낸 순간이 변정각(初發心時便正覺)을 이루는 순간입니다. 처음 발심한 그 마음이 변치 않고 그대로 있으면 부처의 경지입니다.

수행을 통해 구경각을 이루는 것이 우리 선불교의 궁극적인 지향점이지만 여러분은 사회생활도 열심히 해야 하시는 분들입니다. 당장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 하지만 생활 속에서 부처님 법을 따르고 실천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혹자는 불교만 믿으면 일상생활을 할 수 없다 하는데 당치도 않은 말입니다. 육방예경(六方禮經)을 보십시오. 부모가 자식에게 해야할 도리를 비롯해 자식이 부모에게, 남편이 아내에게, 아내가 남편에게 해야할 기본 도리가 설해져 있습니다. 불법은 모든 사람의 근기에 맞춰 설해져 있습니다. 수행도 각자 근기에 따라 행할 수 있도록 모두 갖춰져 있습니다. 여러분의 초발심이 다소 퇴색됐다면 부처님 성도의 뜻을 헤아려 다시 한 번 정진의 발심을 내어보시기 바랍니다.

 

- 법보신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