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자에게 주는 글- 한 물건(一物) /성철스님

2010. 7. 16. 19:33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선불교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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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자에게 주는 글- 한 물건(一物) 

1. 한 물건(一物)


한 물건이 있으니 천지가 생기기 전에도 항상 있었고 천지가 다 없어진 후에도 항상 있다. 천지가 천번 생기고 만번 부서져도 이 물건은 털끝만치도 변동없이 항상 있다. 크기로 말하면 가없는 허공의 몇 억만배가 되어 헤아릴 수 없이 크다. 그래서 이 물건의 크기를 큰 바다에 비유하면 시방(十方)의 넓고넓은 허공은 바다 가운데 있는 조그마한 물거품과 같다. 또 일월(日月)보다 몇 억만배나 더 밝은 광명으로서 항상 시방세계(十方世界)를 비추고 있다. 밝음과 어두움을 벗어난 이 절대적인 광명은 항상 우주만물을 비치고 있는 것이다.

이 물건은 모두 명상(名相)과 분별을 떠난 절대적인 것이다. 절대라는 이름도 불일 수 없지만 부득이해서 절대라는 것이다. 한 물건이란 이름도 지을 수 없는 것을 어쩔 수 없이 한 물건(一物)이란 이름으로 표현하니 한 물건이란 이름을 붙일 때 벌써 거짓말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방의 모든 부처님이 일시에 나타나서 억천만겁이 다하도록 설명하려 해도 이 물건을 털끝만치도 설명하지 못하는 것이다. 자기가 깨쳐서 쓸 따름이요 님에게 설명도 못하고 전할 수도 없다. 이 물건을 깨친 사람은 부처라하여 생사고를 영원히 벗어나서 미래가 다하도록 자유자재한 것이다. 이 물건을 깨치지 못한 중생들은 항상 생사바다에 헤매어 사생육도(四生六途)에 윤회하면서 억천만겁이 지나도록 고생을 하게 되는 것이다. 아무리 작은 중생이라도 다 이 물건을 가지고 있다. 깨친부처나 깨치지 못한 조그마한 개미 벌레까지도 똑같이 가지고 있다. 다른 것은 이 물건을 깨쳤느냐 못 깨쳤느냐에 있다. 석가와 달마도 이 물건은 눈을 들고 보지도 못하고 입을 열어 설명하지도 못한다. 이 물건을 보려고 하면 석가도 눈이 멀고 달마도 눈이 먼다. 또 이 물건을 설명하려고 하면 부처와 조사가까 다 벙어리가 되는 것이다. 오직 깨쳐서 자유자재하게 쓸 따름이다.

 

그러므로 고인이 말씀하기를 ‘대장경은 모두 고름 닦아버린 헌 종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나는 말하노니 ‘팔만대장경으로써 사람을 살리는 것은 설비상으로써 사람을 살리려는 것과 같다’고 하겠다.

경전 가운데도 소승(小乘)과 대승(大乘)이 있으니, 대승경에서는 말하기를 ‘설사 비상으로써 사람을 먹일지언정 소승경법으로써 사람을 가르치지 말라’고 하였다. 그러나 대승경 역시 비상인 줄 왜 몰랐을까? 알면서도 부득이한 것이다. 그러니 여기에서 크게 정신차려야 한다.

오직 이 한 물건만 믿는 것을 비를 신심(信心)이라 한다. 석가도 쓸 데 없고 달마도 쓸 데 없다. 팔만장경이란 다 무슨 잔소리인가! 오로지 이 한 물건만 믿고 이것 깨치는 공부만 할 따름이요 그 외에는 전부 외도며 마구니들이다. 모든 사람들은 모두 다 염불해서 죽어 극락세계에 가서 말할 수 없는 쾌락을 받아도 그러나 나는 이 물건 찾는 공부를 하다가 잘못되어 지옥에 떨어져 억천만겁이 다하도록 무한한 고통을 받더라도 조금도 후회하는 생각이 없어야 한다.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오직 이 공부를 성취하고야 만다! 이러한 결심이 아니면 도저히 이 공부는 성취하지 못한다.

고인은 말씀하기를 ‘사람을 죽이면서도 눈 한번 깜짝하지 않는 사람이라야 공부를 성취한다’고 하였다. 나는 말하노나 ‘청상과부가 외동아들이 벼락을 맞아 죽어도 눈썹 하나 까딱않을 무서운 생각이 아니면 절대로 이 공부 할 생각을 말아라’고 하겠다. 천근을 들려면 천근 들 힘이 필요하고 만근을 들려면 만근 들 힘이 필요하다 열근도 못들 힘을 가지고 천근 만근 들려면 그것은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면 미친 사람일 것이다. 힘이 부족하면 하루바삐 힘을 길러야 한다.

자기를 낳아 길러준 가장 은혜 깊은 부모가 굶어서 길바닥에 엎어져 죽더라도 눈 한번 거들떠 보지 않는 무서운 마음, 이것이 고인의 결심이다. 제왕이 스승으로 모시려 하여도 목을 베이면 베였지 절대로 마음을 움직이지 않는 것이 고인의 지조이다.


사해의 부귀는 풀잎 끝의 이슬 방울이요 만승의 천자는 진흙 위의 똥덩이라는 이런 생각, 이런 안목을 가진 사람이라야 세상 영화를 벗어나 영원불멸할 행복의 길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털끝만한 이해(利害)로써 칼부림이 나는 소위 지금의 공부인과는 하늘과 땅일 것이다. 다 떨어진 헌누더기로 거품같은 이 몸을 가리우고 심산 토굴에서 감자나 심어 먹고 사는 최저의 생활로 최대의 노력을 하여야 한다. 오직 대도(大道)를 성취하기 위하여 자나깨나 죽을 힘을 다해서 공부해야 한다. 대를 위해서

소를 희생시키지 않으면 대는 도저히 성취하지 못한다.


사람 몸 얻기도 어렵고 불법 만나기도 어렵다. 모든 불보살은 중생들이 항상 죄 짓는 것을 보고 잠시도 눈물 마를 때가 없다고 한다. 중생이란 알고도 죄 짓고 모르고도 죄 짓는다. 항상 말할 수 없이 많이 지은 죄보(罪報)로서 사생육도에 돌아다니며 말할 수 없는 고생을 하게 된다. 따라서 사람 몸 얻기란 사막에서 풀잎 얻는 것과 갈다. 설사 사람 몸 얻게 된다 하더라도 워낙 죄업이 지중해서 불법 만나기란 더 어렵고 어렵다. 과거에 수많은 부처님이 출현하시어 한량없는 중생을 제도했건만 아직껏 생사고를 면치 못한 것을 보면 불법 만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알 것이다. 이렇게 얻기 어려운 사람 몸을 얻어 더 한층 만나기 어려운 불법을 만났으니 생명을 떼어놓고 공부하여 속히 이 한 물건을 깨쳐야 한다.

사람의 생명은 허망해서 믿을 수 없나니 어른도 죽고 아이도 죽고 병든 사람도 죽고 멀쩡한 살람도 죽는다. 어느 때 어떻게 죽을는지 알 수 없는 것이 사람의 생명이니 어찌 공부하지 않고 게으름만 피우리오? 이 물건을 깨치기 전에 만약죽게 된다면 또 짐승이 될는지 새가 될는지 지옥으로 떨어질는지, 어느 때 다시 사람 몸 받아서 불법을 만나게 될는지, 불법을 만나도 최상 최고의 길인 이 한 물건 찾는 공부를 하게 될는지 참으로 발 뻗고 통곡할 일이다.


이다지도 얻기 어려운 이 몸을 금생에 제도하지 않으면 다시 어느생에 공부하여 이 몸을 건지리오. 제일도 노력, 제이 제삼도 노력, 노력없는 성공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무슨 일이든지 노력한 만큼 성공하는 법이니 노력하고 노력할 지어다.



 

2. 상주불멸(常住不滅)
부처님께서 도를 깨치시고 처음으로 외치시되 ‘기이하고 기이하다. 모든 중생이 다 항상 있어 없어지지 않는(常住不滅) 불성을 가지고 있구나! 그것을 모르고 헛되이 헤매며 한없이 고생만 하니 참으로 안타깝고 안타깝다’고 하셨다.

이 말씀이 허망한 우리 인간에게 영원불멸의 생명체가 있음을 선언한 첫소식이다. 그리하여 암흑 속에 잠겼던 모든 생명이 영원한 구제의 길을 얻게 되었으니 그 은혜를 무엇으로 갚을 수 있으랴. 억만겁이 다하도록 예배드리며 공양 올리고 찬탄하자.


영원히 빛나는 이 생명체도 도를 닦아 그 광명을 발하기 전에는 향상 어두움에 가리워서 전후가 캄캄하다. 그리하여 몸을 바꾸게 되면 전생의 일은 아주 잊어버리고 말아서 참다운 생명이 연속하여 없어지지 않는 줄을 모른다. 도를 깨치면 봉사가 눈 뜬 때와 같아서 영원히 어둡지 않아 천번만번 몸을 바꾸어도 항상 밝아 있다. 눈 뜨기 전에는 몸 바꿀 때 아주 죽는 줄 알았지만 눈 뜬 후에는 항상 밝아 있으므로 몸 바꾸는 것이 산 사람 옷 바꿔입는 것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

눈 뜨기 전에는 항상 업(業)에 끄달려 고(苦)만 받고 조금도 자유가 없지만 눈을 뜨면 대자유와 대지혜로써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우리의 실생활에서 보면 아무리 총명과 지혜가 있는 사람이라도 도를 깨치기 전에는 잠이 아주 들어서는 정신이 캄캄하여 죽은 사람같이 아무 것도 모른다. 그러나 도를 깨친 사람은 항상 밝아 있기 때문에 아무리 잠을 자도 캄캄하고 어두운 일이 절대로 없다. 그러므로 참으로 도를 깨쳤나를 시험하려면 잠을 자보면 스스로 알게 되는 것이다. 천하없이 크게 깨친 것 같고 모든 불법을 다 안 것 같아도 잠잘 때 캄캄하면 참으로 바로 깨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예부터 큰 도인들이 여기에 대해서 가장 주의하였던 것이다. 이것이 명(明)과 암(暗)을 초월한 절대적 광명이니 곧 사물의 성품(法性)이며, 불성의 자체이다.

상주불멸(常住不滅)하는 법성을 깨치고 보면 그 힘은 상상할 수도 없이 커서 비단 세속의 학자들만 설명할 수 없는 것이 아니다. 부처님께서 ‘내가 말하는 법성은 깨치고 보면 다 알 수 있을 것이니, 이것은 시방세계의 모든 부처님이 일시에 나서서 천만년이 다하도록 그 법성을 설명하려 해도 털끝 하나만치도 설명하지 못할 만큼 신기하다. 시방허공이 넓지만 법성의 넓이에 비교하면 법성은 대해 같고 시방허공은 바다 가운데 조그마한 거품같다. 허공이 억천만년 동안 무너지지 않고 그대로 있지만 법성의 생명에 비교하면 눈깜짝할 사이에 불과하다’고 하시니 이것이 시방의 모든 부처님의 설명이다. 이러한 거룩한 법을 닦게 되는 우리의 행복이란 어디다 비유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고인은 이 법문 한 마디 들으려고 전신을 불살랐으니, 이 몸을 천만번 불살라 부처님께 올려도 그 은혜는 천만분의 일도 갚지 못할 것이다. 오직 부지런히 공부하여 어서 빨리 도를 깨칠 때 비로소 부처님과 도인 스님들의 은혜를 일시에 갚는 때이니 힘쓰고 힘쓰라!
(계속)



이 글은 성철 큰스님께서 처음 출가한 승려들로 하여금 퇴보하지 않는 신심을 가지고 열심히 수행하기를 바라시는 마음에서 지어두신 글들을 청리한 것으로, 올 봄에 나온 성철스님 법어집인 「자기를 바로 봅시다」에 들어 있읍니다

 

 





      아내와 애인은 사진.글 / 청호 윤봉석 아내와 외식을 가면 삼겹살에 소주를 먹자고 하는데 애인과 외식을 가면 안심스테크에 와인를 마시자고 한다 똑같은 여인인데 아내는 서민의 입이고 애인은 부자의 입이더라 아내와 쇼핑을 같이 가면 재래시장에 가서 청바지에 티셔츠를 사달라고 하지만 애인과 쇼핑을 같이 가면 백화점에 가서 원피스를 고르더라 똑같은 여인인데 아내는 서민의 옷걸이고 애인은 재벌의 옷걸이더라 아내와 여행을 가면 버스를 타고 민박집에 자도 행복해 하는데 애인과 여행을 가면 택시를 타고 모텔에 자도 투정을 부리더라 똑같은 여인인데 아내는 길거리의 여자고 애인은 대갓집 마님이더라 하루일과를 마치고 만나면 아내의 첫인사는 피곤하지 않으냐고 묻지만 애인의 첫인사는 돈 많이 벌어왔느냐고 묻더라 똑같은 여인인데 아내의 사랑은 뼛속까지 스미지만 애인의 사랑은 수박 것 핥기 사랑이더라 아내는 잠자리에 손목만 주고 옆에 있는 것으로도 행복해 하지만 애인은 잠자리에 팔베개를 해줘도 껴안아 주지 않는다고 마음이 변했느냐고 투정을 부리더라 똑같은 여인인데 아내는 사랑을 조금만 받아도 행복해 하지만 애인은 사랑을 주어도 모자라다 갈증을 느끼더라 아내는 몸이 아프면 병원에 갈 차비를 서두르지만 애인은 몸이 아프면 짐을 챙겨 이별을 준비하더라 똑같은 여인인데 아내는 병원비를 준비하지만 애인은 보따리 싸기에 여념이 없더라 우리가 똑같은 사람인데 이렇게 상반되게 다른 것은 인간은 어떠한 환경에 따라 남을 바라보는 시선이 고아야 하며 세상을 긍정적인 사고로 바라볼 때 아름다운 세상이 만들어진다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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