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독인의 불교말살 프로젝트

2010. 10. 17. 22:13일반/금융·경제·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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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말살 프로젝트”
복음전파의 목적지는 아프리카 · 인도와 아시아의 불교 국가
2008년 07월 03일 (목) 17:45:32 향 산 nagapura@paran.com

이 글은 2004년 영국 칼라일에 위치한 피퀀트 출판사에서 나온 폴 하타웨이의 저서 『불교국가 사람들 (Peoples of the Buddhist World)』에 대해 알렌 카가 스리랑카의 인터넷 사이트 랑카웹(LankaWeb)에 7월 1일 기고한 <Planning the Demise of Buddhism>을 옮긴 것입니다. 굵은 글씨로 강조한 부분과 본문의 소제목은 이해를 돕고자 역자가 표시했습니다. - 변역 향산 이병두

 영국 런던 -- 서구의 일부 제약회사들은 신약 개발과 마케팅에 수백만 달러를 쓰는데, 보건당국에서는 뒤늦게야 그 약에 위험한 부작용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금지조치를 취한다.

   
 

신약 개발에 들어간 투자금을 회수해야 하지만 더 이상 서구에서 그 약을 팔 수 없게 된 이 제약사들은 이 위험한 제품을 제3세계 국가에 팔려고 갖은 노력을 다 한다. 제3세계 국가에서는 건강 관련 이슈를 둘러싼 국민들의 자각 수준이 낮고 보건 문제에 무관심한 정부당국을 쉽게 해치울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기독교가 이와 비슷한 경우라고 말한다.

서구에서 많은 추종자를 잃고 난 교회들이 이제 다른 곳에서 기회를 엿보기 시작하고 있다. 물론 이슬람 세계는 난공불락이므로 논외로 한다. 심지어 가장 낙관적인 복음전도사들도 ‘무슬림들 사이에서 복음을 전파할 기회가 전무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확실한 목적지는 아프리카 · 인도와 아시아의 불교 국가들이다.

순전히 불교도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려는 목적으로 설립된 전도 조직이 현재 꽤 여러 곳 있다. 필리핀에서 활동 중인 ‘아시아 태평양 불교학 연구원(The Asia Pacific Institute of Buddhist Studies)’은 선교사들에게 불교 교리 · 불교 국가들의 언어와 다양한 불교 공동체 - 그들에게는 ‘적’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 관련 사회학에 심층적인 연구 과정을 제공하고 있다.

‘중앙아시아 우의회(The Central Asia Fellowship)’는 티베트인들 사이에 복음을 전파하려는 특정 목적에서 설립되었다. ‘해외 복음 전도회(The Overseas Missionary Fellowship)’는 '불교에 관해 권위를 인정받은 조직'이고 기독교인들이 불교 세계에서 효율적으로 활동하는 방법에 대한 강의 · 세미나를 열고 선물과 정보를 제공한다.

‘불교 연구를 위한 선라이즈 센터(The Sunrise Centre for Buddhist Studies)’와 ‘남아시아 네트워크(The South Asia Network)’는 둘 다 ‘불교도들을 복음화하는 데에 유용한 상세하고 정확한 최신 정보를 선교사들에게 제공하는 온라인 단체’다. 혹 이들을 우습게 여기는 실수를 범하지 않기를 바란다. 이들은 자그마한 규모의 일시적 활동 단체가 아니다. 이들은 대단한 동기를 갖추고 이 일에 전적으로 헌신하려는 사람들이 운영하는 조직으로, 규모가 크고 재정도 풍부하며 당당하다.

불교에 대한 이런 새로운 복음주의적 공격을 이끄는 지도자 중 한 사람이 최근 『불교국가 사람들(Peoples of the Buddhist World)』이라는 책을 출간했다. 453쪽에 이르는 이 책은 부탄 중부의 니엔파족에서부터 캄보디아 북부의 쿠이에족까지 그리고 러시아 극동 지방의 부리아트족에서부터 스리랑카의 싱할리족에 이르는, 아시아에서 불교를 신앙하는 316개 종족과 언어군에 관한 완벽한 프로필을 선교사들과 이 분야에 관심이 많은 기독교인들에게 제공한다.

이 책에는 각 그룹별 규모와 그에 따르는 상세한 와해 전략 · 스스로 불교도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의 숫자와 불교를 제대로 이해하고 실천하는 사람들의 숫자 · 언어 · 각 그룹의 강점과 약점 · 활용하는 방법 · 역사 개관 · 문화 그리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최선의 방법 등이 담겨 있다.

이 책은 이제까지 거의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을 찍은 매혹적이고 멋진 컬러 사진들로 가득 차 있다. 이들처럼 상냥하고 웃음을 잃지 않는 순수한 종족이, 그들의 신앙을 훼손하고 오랜 세월 간직해온 문화를 파괴하려는 결의를 다지고 세상물정에 밝은 선교사들의 손아귀 아래 놓여있다는 생각을 하면 한없이 슬프다. 하지만 하타웨이의 이 책은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의 별스런 신학을 살펴볼 수 있어서 흥미롭기도 하다.

서문에서 저자 하타웨이는 “수억 명의 불교도들이 복음을 접하지 못하고 지옥으로 행진하고 있다는 사실이 하느님의 가슴을 아프게 할까? 진실하고 영광스러운 ‘하늘에 계신 아버지’ 대신에, 수백만 명이 생명이 없는 우상을 숭배하는 것이 구세주 예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할까?”라고 묻는다.

   

복음 전도사들이 항상 그처럼 화를 내고 공격적이며, 자의식이 강하고 신경질적인 에너지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은 그리 놀랄 일도 아니다. 그들은 거의 매일 “우리 하느님은 사랑으로 가득 차 있지만, 심지어는 그분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는 사람들까지도 영원한 불지옥에 집어 던진다.”는 모순되는 믿음을 갖고 살아간다.

그것이 그들을 정신적으로 힘들게 할 것임에 틀림없다. 구멍이 뚫린 풍선을 빵빵하게 하기 위해 계속 공기를 주입시켜야 하는 사람처럼, 그들은 계속해서 “불교는 공허하고 아무 가치도 없는 우상숭배일 뿐”이라고 주장하지만, 실은 ‘이것은 진실이 아니다’는 사실을 제대로 알고 있다. 그 또한 그들을 정신적으로 힘들게 할 것이 틀림없다.

자신의 책 곳곳에서 저자 하타웨이는 서기 19세기에 선교사들이 마구 지껄여댔던 낡아빠진 거짓말 · 중상과 일부만 진실인 말들을 거듭 되풀이한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주류 기독교인들이 이미 100년 전에 포기했다.

『불교국가 사람들』; 아시아 불교국가 프로필 선교사에게 완벽 제공

하타웨이는 “다른 비기독교인들처럼 불교도들은 공허하고 의미 없는 삶을 영위하고 있으며, 실제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기 위해 기다리고 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그가 독자들에게 제공하는 통계자료들이 번번이 이것을 증명해주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리 놀랄 일이 아니다.

그는 일부 불교도 종족들이 수년 동안 매우 일사불란한 복음 선교 대상이 되었지만 자신들의 신앙을 고수하기로 선택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예를 들면, 네팔 케룽족의 32%가 복음을 들었지만, “극히 일부만이 그 복음의 메시지를 이해했다.” 하타웨이는 “미국의 침례교도들이 지난 수십 년 동안 버마의 토비안 지역에서 활동해왔지만, 그들이 개종시킨 사람들은 대부분 카렌족들이다. 그들은 토비안 사람들이 ‘복음에 천천히 응답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런 패턴은 오늘날까지도 계속된다”고 말한다.

기꺼이 자기를 희생하려는 헌신적 선교사들이 140년 동안 태국에서 선교활동을 펼쳤지만, 하잘것없는 숫자를 개종시켰을 뿐이다. 하타웨이에 따르면, 치앙마이에서 활동 중인 외국 선교사가 2천명인데, 이것은 치앙마이 시의 전체 기독교인 숫자보다도 많다.

복음 전도사들 사이에서는 “태국은 선교사들의 묘지”라는 말이 있다고 한다. 라오까족 사람들의 21%에게 복음을 전했지만, 이 사람들에게 기독교는 아무런 충격도 주지 못하고 있다. 레모족 사람들의 42%에게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해왔지만, 그들이 갖고 있는 돈독한 불심과 고립된 채 간직해온 문화적 사고방식 때문에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물론 하타웨이 자신도 ‘고립된 채 간직해온 문화적 사고방식’에 깊이 젖어있으므로, “이 사람들은 자신들이 필요로 하는 감성적 · 지적 및 영적 자양물을 불교에서 주기 때문에 기독교도가 되지 않기로 결정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고려조차 않는다. 그러므로 그는 왜 수많은 불교도들이 그가 ‘저항적인 사람들’이라고 부르는 상태로 남아 있는지 그 이유를 설명해야만 한다. 그에게 그것은 두려움 · 지적인 게으름 · 탐욕과 무지 그리고 악마의 반대 때문으로 여겨진다. 또 다른 이유로는 잘못된 생각을 들고 있는데, 예를 들면 완전히 미망에 사로잡혀 있는 버마 북부의 파라웅족 사람들 사이에서는 “우리는 불교의 진리를 믿는다”는 믿음이 있다는 것이다.

물론 하타웨이도 매우 약아빠져 있어서, 전통적인 불교 사회의 안정되고 문화적으로 고결한 상태가 자신들이 복음을 펼치는 데에 주요한 장애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스리랑카와 캄보디아 등지의 내전은 선교사들에게는 말 그대로 ‘신이 보낸 선물’이다. 하타웨이는 네팔의 로빠족 사람들을 와해시키고 흩어지게 한 여러 차례의 대형 홍수를 ‘하나님이 내려준 기회’라고 한다. 죽어가는 동물들에게 달려드는 금파리들처럼, 복음주의 선교사들은 위급한 상황에 놓인 공동체 주위에 몰려든다. 자신들의 노력을 ‘구호 사업’과 ‘인도주의적 원조’로 위장하고 현지인들을 개종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비장의 작전을 모르는 서구의 수많은 순진하고 품위 있는 기독교인들이 ‘월드 비전(World Vision)’이나 그와 유사한 조직처럼, ‘개종시키는 기술’로 원조활동을 이용하고 있는 곳들에 돈을 내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그러나 대다수 불교도들이 선교사들의 메시지를 거부해왔지만, 다른 사람들은 거기에 굴복해왔다. 네팔 타망족의 31%는 이제 기독교인이 되었다. 몽골에는 1990년에 처음 선교사가 도착했는데, 채 몇 년이 되지 않아 주로 젊은이들 사이에서 수천 명을 개종시켰다. 이런 놀라운 성장이 이제는 매우 침체해졌지만, 이 나라에서 활동 중인 복음 선교단의 숫자는 크게 늘어나고 있다. 그런데 몽골리아에는 아직도 불교 관련 서적이 거의 없다.

스리랑카와 캄보디아 내전은 선교사들에게는 ‘신이 보낸 선물’

현재 중국에서도 기독교가 매우 빠르게 성장하여 새로운 개종자를 붙잡아둘 교회를 지어대기가 힘들 정도이다. 상냥하기로 유명한 태국과 라오스의 고산족들도 하나씩 하나씩 선교사들의 희생물이 되고 있다. 선교사들이 거두는 이와 같은 성공은 단지 선교사들이 그처럼 악랄하고 고집스럽기 때문이 아니고, 불교도들이 자신들에게 닥치는 위험에 대해 무관심하고 그 위험을 보는 데에 늑장을 부렸으며 효율적인 방법으로 그것에 대응하는 데에는 훨씬 더 늦기 때문이다.

태국에서는 거대한 불상과 탑에 금을 입혀 번쩍거리게 하는 의식에 수백만 달러를 쓰면서도, 불교 문학 · 종교 교육과 고산족 주민을 위한 사회봉사에는 거의 한 푼도 쓰지 않는다. 선교사들을 위해 ‘하나님이 내려 주신 또 다른 기회’는 승가 내부에 일반적으로 팽배해 있는 무기력한 태도이다.

이 책에서 선교사들과 비구들 양쪽의 정서에 대해 가장 잘 드러내고 있으며 동시에 가장 문제가 되는 부분은,  브라이언 루리가 버마 동북부의 샨족 거주지의 사원에서 지낸 네 달 동안의 경험을 설명한 곳이다. 그는 비구들을 개종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탐색하러 그곳에 갔는데, 이에 대해 매우 낙관하면서 그곳을 떠나갔다. 나는 그의 낙관이 전적으로 잘못된 것이 아닐까봐 두렵다. 루리가 머물렀던 사원의 주지는 그가 그곳에 머무르면서 성경을 교재로 사용해 비구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고, 그리스도의 생애에 관한 영화를 보여주고 나중에는 심지어 비구들을 위해 정기적인 성경 강좌를 열 수 있게 해주었다.

정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서구의 불교도들은 이런 일을 ‘불교의 관용’을 드러내는 또 다른 사례로 여기며 칭찬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것은 자리를 잘못 찾은 관용일 뿐이다. 나는 그것은 실상 무지, 그리고 풍파를 일으키거나 전통적인 행동 양식에 위배되지 않는 모든 것들에 대한 무관심이 상가 내부에 그처럼 널리 퍼져있기 때문이라고 짐작한다.

비구들의 생각을 이해하는 전략의 일환으로 루리는 ‘친구들 - 비구들’에게 일련의 질문을 해보았다. “따르기에 가장 힘든 불교의 가르침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몇몇 비구는 “정오 이후에 음식을 먹지 않는 것, 알코올을 마실 수 없는 것”이라고 대답하였고, 한 사람은 “열반을 성취하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대와 관련된 한 가지를 바꿀 수 있다면, 어떤 것을 바꾸고 싶은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 중에는 “좀 더 강해지고, 키가 더 커지고, 코 모양을 바꾸고 싶고, 좀 더 하얀 피부를 갖고 싶다”는 것이 있었다.  “왜 출가해서 사원에 들어왔는지?”를 묻자, 비구들 중 단 한 사람도 진리, 선정이나 청정한 종교적 삶에 대한 관심을 언급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불교국가들에서와 마찬가지로, 그들은 ‘단지 그렇게 하는 것이 전통이기 때문에’ 출가하여 계를 받았던 것이다. 루리가 비구들에게 “어떤 이유로 승복을 벗을 수 있을까?”하고 물었을 때, “내 학생인 비구들은 절을 떠나 샨 독립군에 들어가 군인이 되고 싶다는 바람을 드러냈다. … 그들은 승려로서 다른 인간 존재는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모기 한 마리도 죽여서는 안 된다는 사실과 자기들의 말 사이에 모순점을 보지 못했다.” 루리는 “내가 얻은 대답들 중 극히 일부만이 불교에 관한 깊은 지식이나 순수한 종교성을 담고 있다는 점에 정말로 놀랐다”고 인정한다.

태국의 사원에서 8년 동안 생활해본 내가 “비구들이 한 대답 중 단 하나도 나를 조금도 놀라게 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게 슬프다. 오늘날 불교 사원에서의 생활은 기계적인 암기식 공부를 하고, 전통적 신앙을 별 생각 없이 받아들이며, 마음을 아연케 하는 의식을 끝없이 되풀이하고, 보시자인 단월들을 찾아다니고, 낮잠을 즐기는 것 정도로 이루어져 있다. 수많은 불교 공동체들이 전법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방해가 되는 자세를 견지하고 있고, 종교 교육은 열악하며 리더십도 보잘 것 없는데, 그들이 앞으로 얼마나 오랜 동안 그렇게 할 수 있을까? 무엇인가를 해야 하고, 그것도 지체하지 않고 곧바로 해야만 한다.

승가 내부에 팽배한 무기력... 하나님이 내려 주신 기회

하타웨이의 책 전반에서 거듭 되풀이되는 또 다른 중상 비방은 “불교도들은 악마에 대한 끝없는 공포 속에 산다”는 것이다. 이런 비난은 자신들이 좋아하지 않는 거의 모든 것들은 사탄과 그의 앞잡이들의 음모라고 보고 있는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에게서 오는 것으로, 이 정도면 그래도 괜찮은 편이다. 루리는 자신의 체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절들이 나를 위협했다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그곳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수많은 것들을 보았다. 몇몇 절에서는, 긴 이빨과 날카로운 발톱이 달린 무시무시한 조각상이 문을 지키고 있었다. 많은 절들의 주전을 지키는 것은, 계단 양쪽의 머리가 여러 개 달린 거대한 용상이다. … 절 바깥에 그런 상들이  있다면, 안쪽에는 무엇이 있을까? 나는 용과 같은 동물들이 살아나서 나를 해치려 할 것 같다고 상상했다.”

버마 오지에 사는 단순하고 배운 것 없는 고산족들이 악령에 대해 두려워하는 것을 나는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북 텍사스대학교 졸업생인 루리씨가 불교 사원을 장식하느라 사용되는 색 시멘트와 석고를 보고 놀란다.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을 겁주는 일이 이렇게도 쉽다니!

『불교 세계 사람들』에서 아홉 쪽은 스리랑카의 토착 인종으로 오랜 동안 선교사들의 표적이었던 싱할리족들에 할애되었다. 거의 500년 동안 기독교와 가깝게 접촉해왔는데도 불구하고 싱할리즈의 4%만이 기독교 신자이다. 이것은 그 기간 동안 그들의 종교가 심각하게 불이익을 당해왔고 심지어 박해를 당해왔는데도 불구하고 그렇다. 이 튼튼한 불교 섬에서 별로 성공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복음주의자들을 난감하게도 하고 화나게도 한다.

1950년대 말 이래로 스리랑카의 가톨릭 교회는 자신들의 소수자적 지위를 암묵적으로 인정하고, 매우 많은 부분에서 불교식 생활에 적응하였으며 불교에 대해 탄력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불교도들을 가톨릭으로 개종시키려는 노력을 계속해 오고 있지만, 속내를 드러내지 않은 채 정중하고 예의바른 방식을 쓰고 있다. 그러나 1990년 복음주의자 조직들이 스리랑카에 밀물처럼 몰려들기 시작하면서 ‘안하무인’식의 태도를 보이고 있다. 아직까지는 이들이 개종시킨 사람들 대부분이 가톨릭 신자들 중에서 나왔지만, 물론 그들이 진짜 목표로 하고 있는 쪽은 불교도들이다. 그래서 비구들이 정부에 대해 개종을 금지하는 법률을 제정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정말 최선의 해결책일까?

자신들이 믿는 종교를 특히 외국인들이 ‘사탄과 같은 악마 숭배’라고 여기는 데 대해 싱할리즈들이 좋아하지 않는 것은 이해할 만한데, 이 나라에 머물고 있는 선교사들 대부분은 이런 식이다. 몇 해 전에 매우 존경받던 싱할리즈 비구가 세상을 떴는데, 불교도들 사이에서 진짜 슬픔이 쏟아져 나왔다. 이 비구의 다비가 있던 바로 그 시각에 콜롬보 교외에 위치한 하우스 처치 지도자가 불꽃을 쏘아 올렸는데, 이것은 스리랑카에서 사람들이 기쁨이나 기념할 만한 일을 표현하는 통상적인 방식이다.

자연스럽게 이 교회 근처에 살던 불교도들이 깊은 상처를 받았고, 이로 인해 폭력사태가 발생하지는 않았지만 아주 심한 말들이 오고갔다. 나는 이 교회 지도자와 현지인들이 대결하고 있는 상황을 우연히 목격하였다. 그 지도자는 자신이 쏘아올린 폭죽이 그 비구의 다비식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고집하였지만, 자기가 왜 폭죽에 불을 붙였는지 납득할 만한 이유를 댈 수 없었다.

이웃 주민들과 충돌하고 있는 동안 내내 그는 뻔뻔스러웠고 자신의 행동에 대해 사과나 변명을 하지 않았으며 사람들의 상처받은 감정을 경멸하고 있었다. 그는 ‘거칠게 다루어지거나 두들겨 맞아서, 복음주의자들이 그처럼 오랜 동안 갖고 싶었던 타이틀 - 주님을 위한 순교자라는 타이틀을 주장할 수 있게 되길 바라고 있는’ 듯한 분명한 인상을 그가 내게 주었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승가를 개혁하고 잘 조직하는 일이 불교를 살리는 길

하타웨이의 책은 스리랑카와 다른 나라들에서 불행히도 이제는 너무 일반적 현상이 되기 시작한 기독교도들에 대한 폭력 사건들을 특별히 강조한다. 물론 그런 부정적인 반응을 끌어들이는 사람들은 가톨릭이나 주류 기독교도들이 아니라 복음주의자들 뿐이라는 점을 그는 제대로 언급하지 않는다. 그리고 ‘사람들이 종종 복음주의자들에게 왜 그렇게 분노하는지?’ 이유를 그가 언급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다. 그들이 예의바르지 못하게 막무가내로 밀어붙이고 다른 사람들의 종교적 감정을 완전히 무시해버린다는 사실, 그것이 바로 그와 같은 폭력의 원인이다. 이것은 폭력을 너그럽게 봐주자는 것이 아니라, 단지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이유를 설명하려는 것이다.

좀 더 극단적인 복음주의자들이 심지어 가끔씩 일부러 대결국면을 유발하는 것 또한 사실이다. 스리랑카의 복음주의자들이 발행한 소책자 두 권이 내게 있는데, 하나는 “촌락들은 ‘영혼을 위한 싸움터’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다른 하나는 “기독교도들은 ‘구원받지 못하였으면서도, 우리들에게 거세게 저항하는 사람들과 맞서 싸워 강제로라도 그들이 결정을 내리도록’ 해야 한다”고 말한다.

복음주의자들의 거칠기 짝이 없는 공격적 태도에 기분이 상하는 사람들이 불교도들만은 아니다. 기독교인으로 거듭난 한 중국계 태국인이 언젠가 내게 “로마 교황은 실제로 ‘반기독교 운동을 펴는 변절자’”라고 알려주며 그것을 증명할 성경 구절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나는 상식을 벗어난 그의 성서 해석학에 비웃을 것 말고 다른 수가 없었다. 그러나 독실한 가톨릭 신자가 그런 말을 들었다면 어떻게 느꼈을까?

하타웨이의 책에서 스리랑카 관련 항목은 잘 알려진 복음주의 선교사들인 티락 루파싱헤와 비자야 카루나라트나가 썼다. 그들은 스리랑카가 안고 있는 여러 재난들- 내전 · 높은 자살률 · 부패 · 폭동 등 - 을 신나게 떠들어대고, 이것을 ‘불교가 잘못되었다’는 증거로 제시한다. 그러고 나서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는 불의 · 억압과 종족적 증오로 받은 상처를 치료받을 수 있다. …  그리스도 안에는 잃어버린 나라 · 말 · 문화와 사람들을 되찾을 희망이 있다.”고 과감하게 주장한다. 이것은 사람들을 꼬드기는 ‘귀에 발린’ 약속이므로 일부 사람들은 기꺼이 귀를 기울여 들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선교사들이 복음화하려고 애를 쓰는 곳에서 항상 해온, “당신 나라는 왜 이리 혼란스러워! 당신들이 믿는 신은 실패해 왔어.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여, 그러면 모든 것이 좋아질 거요.” 등과 똑같은 낡아빠진 거짓 약속 · 공허한 약속임은 물론이다.

그러나 기독교가 사회적 문제를 푸는 일을 더 잘 할 수 있을까? 기독교는 북 아일랜드에 평화를 가져오는 데에 쓰라린 실패를 맛보았고, 실제로는 그 문제의 주요 원인이었다. 독일의 오랜 가톨릭과 프로테스탄 전통은 나치즘이 그곳에 뿌리를 내리는 것을 막지 못했다. 남아프리카의 네델란드 개혁 교회는 아파르트헤이드와 탄압 · 잔학 행위를 열렬히 지지하였다. 이른바 ‘성경 지대’라고 불리는 미국 남부에서는 복음주의자들이 우세한 데도, 그 지역이 미국에서 가장 가난하고 가장 인종차별이 심한 곳이 되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그리고 일요일마다 흑인과 백인들이 아직도 별개의 교회로 가서 “할렐루야! 주님을 찬양하되 당신들의 교회에서 찬양하라!”고 하는 것보다 더 분명하게 미국 남부에서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흑백 분리를 보여주는 것은 없다.

하타웨이의 책이 우리 불교도들에게는 최소한 긴 잠을 깨우는 모닝콜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승가를 개혁하고 스스로를 더 잘 조직하며 ‘우리들의 종교 - 불교’를 더 잘 알려고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 한, ‘아시아의 빛’은 꺼져버릴지도 모른다.

 

 

행복과 불행의 분기점

 

 



장미나무에는 아름다운 꽃도 있고 찌르는 가시도 있다.



어떤 사람은 "꽃나무에 이런 가시가 돋았담"


하며 불평하는가 하면


또 다른 사람은 "가시나무에 이렇게 아름다운


꽃이 피었구나"라고 감탄하기도 한다.

 



한 사람은 가시를,


한 사람은 꽃을 본 것이다.


한 사람은 나쁜 환경을 보고 고통스러워하고 한탄하며,


한 사람은 좋은 것을 발견하고 감사하고 기뻐한다.

 



감사란 행복과 불행의 분기점이다.


매사를 어떤 시각으로 보느냐는


우리 생에서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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