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11. 28. 18:57ㆍ일반/금융·경제·사회
나약한 지성, 이어령(李御寧)
이어령 전 문화부장관을 ‘지성의 상징’이라 한다. 거의 8순이 다 된 나이이지만 그의 지적 호기심에 대한 정렬은 식을 줄 모른다. 20대 시절 부터 지금까지 수 많은 책과 수 많은 평론을 낸 바 있지만 그의 지적 탐구에 대한 정열은 수의를 입을 때까지 지속 될 것이라 말한다.
축소지향인의 일본인
이어령 전장관이 지은 책 중에 ‘축소지향의 일본인’이 있다. 그런데 이 책의 특징은 일본에서 먼저 출판 되었다는 점이다. 이후 한국어로 번역되어 우리나라 독자들에게 소개 되었는데, 일본어로 된 책이름은‘縮み志向の日本人’이었다.
이 책 역시 저자의 능숙한 일본어 실력과 일본의 문화와 역사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논리로 저술된 역작이다. 한 때 개인적으로 일본어 공부를 할 때 일본어 원본을 이용하여 공부한 바 있어서 여러 번 읽어 보았다. 그 중 가장 인상깊었던 이야기가 책의 말미에 언급된 축소지향인의 일본인과 확대지향인의 일본인에 관한 것이었다.
저자는 일본과 일본인들이 축소지향으로 나갔을 때 반드시 성공하였다고 한다. 그 이유로서 책이 집필 되던 시점이 1980년대 초반인데 그 때 당시 일본은 전자산업과 반도체, 자동차로 경제적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그런 성장의 배경으로서 저자는 일본인들의 장인정신을 들었다. 즉 오로지 한 분야에 전념하면서 대를 이어 가는 장인정신이 마이크로 분야의 전자대국, 기술대국이 되었다는 것이다. 반면 확대지향으로 나갔을 때 어떻게 되었을까.
일본과 일본인들이 확대지향으로 나간 경우가 두 번 있었다고 한다. 하나는 토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한 조선침략과 그에 따라 중국은 물론 인도까지 영토를 확대하겠다는 야심찬 계획이었고, 또 하나는 2차세계 대전 당시 아시아의 맹주가 되려 한 것이다. 그러나 두 번의 확대지향은 모두 실패로 끝나고 만다.
이를 두고 이어령은 책에서 일본인들이 장인정신으로 축소지향으로 나가면 성공할 것이지만, 힘으로 세계를 정복하려는 확대지향적인 제국주의는 반드시 실패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이와 같은 원본을 통하여 일본어 공부를 하였을 때 일본의 문화와 그들의 의식구조를 이해 할 수 있어서 이 책을 지은 저자 이어령에 대한 남다른 존경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처럼 지성의 상징인 이어령이 기독교로 귀의 하였다는 소식을 2007년 매스컴으로 부터 들은 바 있다. 그런데 ‘무신론자’이었던 이어령이 왜 기독교로 가게 되었을까. 이에 대하여 매스컴에서는 그의 딸 때문이라고 전한다.
왜 기독교로 가게 되었을까
이어령 전장관에게 딸이 있는데 그 딸의 ‘시련’이 결국 이어령으로 하여금 기독교인이 되게 하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인터넷 검색으로 그 내용을 확인 한 결과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찾을 수 있었다.
그에게는 딸 민아(장민아 변호사)가 있는데 그 딸에게 시련이 닥친 것은 1992년 갑상선암 판정을 받은 뒤부터입니다. 수술을 두 번 받았지만 암이 재발했고, 유치원에 들어간 작은 아들이 특수 자폐아동으로 판명이 나서 “지난 10년간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울지 않고 잠든 적이 거의 없었습니다”고 그는 고백했습니다. 아이를 치료하기 위해 하와이로 건너갔을 때 자신의 망막이 파열되어 시력을 잃게 될 것이라는 망막박리 판결을 받았습니다.
아버지 이어령 교수는 딸의 전화를 받고 급히 하와이로 가서 딸이 하와이 원주민들이 예배드리는 작은 교회를 가자고 하여 거절하지 않고, 아버지로서 딸을 위해 해주고 싶은 생각이 들어서 함께 교회에 갔습니다. 이어령 교수는 자신도 모르게 교회 바닥에 엎드려 무릎 꿇고 기도를 드렸습니다.
(무신론자 이어령 세례를 받다, 출처http://blog.daum.net/dongilch/17007421?srchid=BR1http%3A%2F%2Fblog.daum.net%2Fdongilch%2F17007421)
어느 목사의 블로그에 올려진 글이다. 시력을 잃게 된 딸과 손자의 장애를 보고서 ‘자신이 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음을 알고’ 자신도 모르게 무릎꿇고 기도하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기도의 효과가 있었는지 딸은 눈의 시력을 회복하게 되었고, 손자는 장애를 벗어 날 수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누구든지 이런 기적을 체험한다면 믿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더구나 기적을 보여 주면 믿겠다고 약속까지 하였는데 기적이 현실로 되었다면 세례를 받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신유의 은사
예로부터 모든 종교의 공통적인 현상 중의 하나는 ‘기적’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잘 믿으려 하지 않을 때 눈 앞에서 기적을 보여 주면 누구든지 믿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은 기적현상은 어느 종교 경전에나 공통적으로 등장 하고 있어서 신자들로 하여금 신심을 고취시켜 주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그런데 특히 기독교에서 유독 이와 같은 기적 현상에 크게 매달리고 있는 것 같다.
어느 개척교회 목사가 인터넷에 올린 글을 보면 ‘신유의 은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 목사는 개척당시 어려움에 처했을 때 간절히 바란 것은 자신에게도 신유의 은사를 베풀어 달라고 기도한 것이라 한다. 신유의 은사란 ‘병고치는 능력’을 말한다.
귀신을 내 쫓고 질병을 고치고 예언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신자들이 구름처럼 몰려 들 것이다. 이런 신유의 은사로 크게 성장한 교회가 많다고 하는 데 그 중 하나가 여의도에 있는 S교회의 J목사라고 한다.
천주교 역시 기적을 바라는데 있어서 개신교 못지 않다. 천주교의 ‘성인’이 되는 조건 중의 하나가 기적을 보여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유일신교 종교는 ‘초월적’이고 ‘초자연적’인 현상에 크게 의존 한다. 원인과 결과에 따른 ‘인과의 법칙’과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사고보다, 사람의 힘으로 어찌 할 수 없는 모든 현상을 유일신의 ‘은총’에 의존하려는 것이다.
불교에도 물론 기적이 없지 않을 수 없다. 이를 불교에서는 신통이라 한다. 경전에 따르면 부처님도 신통을 사용하여 이교도를 굴복시켰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러나 불교에서 말하는 신통은 수행과정에서 일어 나는 하나의 현상으로 본다. 사선정에서 성취된다는 천안통, 천이통, 신족통, 타심통, 숙명통 같은 것을 말한다. 그런데 이런 신통이 불교의 최종 목표인 해탈과 열반에 필수 조건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이런 초월적이고 신비한 현상은 수행하는데 있어서 하나의 장애로 본다. 그래서 도가 아닌 것으로 간주하고 마음(마라, 마구니, 악마)의 장난으로 보기 때문에 신비한 기적과 같은 현상은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보는 것이다.
사람들은 위기에 닥치면 한 없이 나약해진다. 더구나 자신의 힘으로 어찌 할 수 없이 강물에 휩쓸려 간다고 생각하면 썩은 ‘지푸라기’라도 붙잡고 싶어 하는 것이 보통사람들의 공통적인 심리이다. 그런 심리는 많이 배웠다고 해서, 나이가 많이 들었다고 해서 예외가 아니다.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지성의 상징이라는 이어령 역시 딸이 당하고 있는 시련에 아무 것도 해 줄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며 유일신 앞에 기도를 하게 된 것이 대표적 케이스라 볼 수 있다.
김정빈님의 글에서
그렇다면 지성의 상징이자 무신론자이었던 이어령은 자신이 ‘삶의 주인’이기를 포기하고 모든 것을 신에게 바치게 되었을까. 이에 대하여 미디어붓다에 연재된 김정빈님의 글을 참고하여 구성하였다.
공간의 관점에서, 지금 우리 눈앞에 세계, 또는 우주가 펼쳐져 있습니다. 그리고 나 자신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앞에 놓인 세계(나 자신을 포함)를 읽는 독도법(讀圖法)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일반적으로 읽는 법이고, 두 번째는 실존을 걸고 자신이 주체가 되어 읽는 법입니다(이 두 번째 독도법으로부터 부처님의 철학이 시작됩니다).
김정빈의 "지성의 상징 이어령의 기독교 귀의, 이성을 뒤로하고 믿음을 택한 사례" http://www.mediabuddha.net/detail.php?number=6365&thread=32r30
공간의 관점에서 본다면 우리 눈앞에 세계가 있고, 그 너머에 우주가 펼쳐져 있다. 그리고 나 자신이 그 안에 있다. 그런데 우리 앞에 놓인 세계를 읽는 방법은 두가지가 있다는 것이다. 하나는 일반적으로 읽는 방법이고, 또 하나는 자신이 주체가 되어 읽는 방법이다.
신에게 떠 넘기기
첫 번째 방법은 보통사람들이 ‘무심결에’ 세상을 보는 방법을 말한다. 그 방식대로 하면 “나는 세계의 일부로서 존재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 세상이 있어서 내가 태어 났고, 또 내가 태어 나기 이전에도 세상은 있었던 것이다. 이는 마치 어떤 이가 ‘자신이 없으면 회사가 잘 돌아가지 않을 것으로 걱정하고 장기출장을 다녀 왔는데, 막상 되돌아와 보니 자신이 없었을 때 보다 더 잘 돌아간 것을 보고 은근히 화가 났다라’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이처럼 일반적 방법의 세상보기는 나는 내 스스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부모님에 의해서 태어난 존재이고, 나는 이 세상의 후차적인 존재 즉, ‘종속적 존재’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관점으로 이 세상을 넘어 우주전체로 밀고 나가면 우주를 만든 ‘신’을 상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시간적으로 보았을 때 시간을 출발시킨 하나의 원인으로서 신을 상정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상정된 신을 하나의 시발점 내지 원인이라 생각하여 우리자신을 하나의 객체로 보고 , 구제 받아야 할 대상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삶은 문제의 연속이다. 수 많은 문제 중에 해결 되는 것도 있지만 해결되지 않은채 쌓여만 가는 문제도 있을 수 있다. 더구나 자신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해결 할 수 없는 문제 즉, 자식의 불행과 시련에 대하여 아무것도 해 줄 수 없는 ‘안타까움’과 ‘무력감’ 같은 것이다. 이와 같은 문제들에 직면하면 상처 받고, 무겁게 하고, 지치게 만든다. 한 마디로 삶이 힘겨워지는 것이다. 이럴때 인간은 종교에 의지 하게 되는데 다 해결하지 못한 어려운 문제들을 ‘신에게 떠 넘기는 것’이다. 지성의 상징이자 무신론자이었던 이어령도 이런 케이스에 해당되어 기독교의 세례를 받았을 것이다.
이 세상이란
세계를 읽는 두번째 방식은 자신이 ‘주인’이 되고, 자신이 ‘주체’가 되는 세계이다. 따라서 이성적으로 설득하지 못하는 것을 받아 들일 수 없게 된다. 즉 신이 주체가 되고 나가 객체가 되는 세계관을 받아 들일 수 없는 것이다. 바로 이 것이 ‘불교적 세계관’이자 ‘불교적 지혜’라 볼 수 있다. 그런 불교적 세계관은 ‘5온12처18계’의 세상으로 표현 된다.
5온12처18계의 세상이란 어떤 것일까. 부처님은 우리의 몸과 마음을 오온으로 ‘해체’하여 설명 하였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나가 있다”거나 “영원불멸의 영혼이 있다”거나 하는 ‘개념을 부수기 위해서’ 이다.
부처님은 우리가 인식하는 세상은 오로지 우리의 눈과 귀, 코,혀, 마음을 문으로 하여 외부 대상인 형상과 소리, 냄새, 맛, 감촉, 현상과 부딪칠 때 일어나는 마음이 ‘이 세상의 전부’라고 하였다. 이외 세상은 있을 수 없다고 다음과 같이 ‘단호하게’ 말씀하였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일체인가? 눈과 형색, 귀와 소리, 코와 냄새, 혀와 맛, 몸과 감촉, 마음(意)과 (마음의 대상인) 법, 이를 일러 일체라 한다. 비구들이여,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나는 이런 일체를 버리고 다른 일체를 천명할 것이다.’라고 한다면 그것은 단지 말로만 떠벌리는 것일 뿐이다. 만일 질문을 받으면 대답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 더 큰 곤경에 처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비구들이여, 그것은 그들의 영역을 벗어났기 때문이다.” (S35:23. 상윳따니까야)
부처님이 말씀하신 이 세상, 이 우주, 모든 것, 일체라는 것은 모두 내안의 여섯가지 감각기관(안이비설신의)과 여섯가지 감각대상(색성향미촉법)이 만났을 때 의미가 있는것이지 이를 떠난 세상은 의미가 없다고 말씀 하신 것이다.
따라서 내가 인식하지 못한 세상은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부처님은 거대한 우주론에 대하여 이야기 하지 않고 오로지 우리의 몸과 마음속에서 벌어지는 현상에 대하여만 이야기 한 것일까.
근심, 탄식, 고통, 절망
부처님이 우리의 몸과 마음을 분해하여 설명한 것은 고정된 실체가 없음을 보여 주기 위해서이다. 몸과 마음을 다섯무더기로 나누었을 때 나(我), 내것, 고정된 자아. 불변하는 영혼이 있을 수 없고 다만 오온의 상호작용으로서만 존재하는 ‘임시적인 나’, ‘일시적인 나’가 있을 뿐이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이다. 그런 나를 영원히 존재하는 것으로 ‘착각’ 하고 또 ‘집착’하고 살아 갈 때 모든 고통이 발생한다고 보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현상이 변하기 때문에 ‘무상’하고, ‘고통’스럽고 ‘무아’인 것을 아는 것이 불교적 지혜이다.
이처럼 불교적 지혜로 보면 자아, 영혼, 이 세상, 이 우주, 초월적 존재, 창조주 등 모든 이름 붙여진 것들은 모두 ‘개념’으로 보고 ‘실체가 없는 것’으로 본다. 따라서 불교적 세상은 철저하게 자신이 주체가 되어 바라 보는 세상을 말한다. 그런 세상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강조 하였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세상의 일어남인가? 눈과 형색을 조건으로 눈의 알음알이가 일어난다. … 귀와 소리를 조건으로 … 코와 냄새를 조건으로 … 혀와 맛을 조건으로 … 몸과 감촉을 조건으로 … 마노와 법을 조건으로 마노의 알음알이가 일어난다. 이 셋의 화합이 감각접촉이다. 감각접촉을 조건으로 하여 느낌이,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가, 갈애를 조건으로 취착이, 취착을 조건으로 존재가,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남이,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죽음과 근심.탄식.육체적 고통.정신적 고통.절망이 생긴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세상의 일어남이다.” (S35:107, 상윳따니까야 세상경)
사람들은 삶의 과정에서 근심하고 때로는 탄식하고 비통해 한다. 그 근본적인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 부처님은 이 모든 원인을 ‘무명’과 ‘갈애’ 때문이라 본것이다.
궁극적 행복이란
지금 육체적, 정신적고통을 받고 있다면 ‘과거의 요인’ 때문이다. 그 것의 가장 큰 원인을 ‘무명’으로 보고 있다. 단지 몰라서, 지혜가 없어서 과거에 저지른 행위에 대한 과보를 그 ‘업의 계승자’인 내가 지금 받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신이 그렇게 만든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신이 해결 해 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오로지 자신의 일인 것이다. 그렇다면 정신적 고통, 육체적 고통, 근심, 탄식, 비탄, 절망으로 부터 탈출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자기자신을 객체로 보는 사람들은 신에게 의지하겠지만 자기자신을 주체로 보는 사람들은 ‘갈애’를 일으키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갈애는 미래의 고통, 근심, 걱정, 비탄, 절망, 탄식의 요인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중생이 고통을 격을 수밖에 없고, 끊임 없이 윤회 할 수밖에 없는 요인을 ‘무명’과 ‘갈애’로 본 것이다.
부처님은 무명과 갈애만 제거하면 궁극적 행복에 이르는 길로 갈 수 있다고 말하였다. 그 궁극적 행복이 ‘닙바나(열반)’이다. 닙바나란 악업은 물론 선업도 지었다고 생각하지 않을 때 성취된다. 여기서 '선업을 짓지 않는다'는 뜻은 '댓가를 바라며 선행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업을 짓지 않고 죽었을 때 마음을 일으킬 수 없는 대상이 없어서 더 이상 재생(再生)할 수 있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아 ‘태어남이 없는 것’을 말한다.
태어남이 없다는 것은 더 이상 객관적인 ‘기세간’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더 이상 마음이 일어나지 않아 인식할 수 없다면 보통사람들이 생각하는 “이 세상이 있어서 내가 태어 났고, 또 내가 태어 나기 이전에도 세상은 있었던 것이다”라는 그런 세상이 아닌 것이다.
더 이상 마음이 일어 나지 않으면 이 세상, 이 우주도 만들어 지지 않기 때문에 마음의 소멸과 함께 모든 것이 소멸된다. 그런 상태가 닙바나인데 불교가 추구 하는 궁극적인 목표이자 궁극적 행복이다.
나약한 지성
누구나 삶의 과정에 있어서 문제는 계속 발생되고 그에 따라 근심, 탄식, 비탄, 고통을 겪는다. 이런 때 가장 일반적인 탈출 방법은 ‘신에게 떠 넘기기’이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스스로 주인임을 포기하고 이 세상을 객체적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신의 위치에서 이 세상과 우주를 주체적으로 본다면 탄식, 비탄, 절망, 고통을 해결하는 방법도 달라지게 된다.
지성의 상징 이어령 전장관은 수 많은 지식을 쌓았음에도 불구하고 딸의 시련과 그에 따른 기도 때문에 기독교인이 되었다. 그가 불교적 지혜가 있었다면 스스로 삶의 주인임을 포기하고 모든 것을 신에게 떠 넘기는 ‘나약한 지성’이었다는 소리를 듣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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