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2. 25. 23:20ㆍ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발심수행장·수행법
중도(中道)의 자리
불자님들!
날씨가 많이 포근해 졌습니다.
몇 주 전까지만 해도 엄동설한 이었는데..
입춘이 지나고 우수까지 지나고 나니
과연 봄기운이 완연해 졌습니다.
오늘은 부처님의 가르침의 핵심인 중도(中道)에 대하여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 부처님께서 위없는 깨달음을 여신 후
최초로 교진여 등 다섯 수행자들에게 전법하러 갔습니다. 교진여등 다섯 수행자는 부처님이 설산에 7년간 수도할 때 궁에서 함께 따라온 시종들 이었습니다. 그들은 혹독한 고행주의자였습니다. 부처님도 그들과 함께 말로서는 표현할 수없는 혹독한 고행을 했습니다. 이렇게 고행을 한 이유는 몸을 고통스럽고 어렵게 할수록 몸을 조복 받아 정신은 맑아져서 결국 해탈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습니다. 그러나 혹독한 고행 끝에 부처님께서는 결국 쓰러졌습니다.
그리고 수자타의 우유죽 공양으로 기운을 차리시고 문득 한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육체를 혹사하여 육체를 조복 받으면 해탈할 수 있다는 생각에 집착하였구나! 그것은 한 쪽 생각밖에 하지 않고 있었구나! 이 육체가 없으면 도를 닦을 수가 없지 않은가? 육체를 혹독하게 혹사할 필요가 없다.” 이렇게 생각하시고 그 때부터 극단적 고행주의를 버리시고 중도의 길을 가시면서 얼마 후 위없는 큰 깨달음을 여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다섯 비구에게 다음과 같이 <중도의 법문>을 설하셨습니다.
“사문들이여! 이 세상에는 두 가지 극단의 길이 있는데 수행자는 그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말아야 한다. 두 가지 극단의 길이란, 하나는 육체의 요구에 자신을 내 맡겨버리는 향락의 길이고, 또 하나는 육체를 지나치게 학대하는 고행의 길이다. 수행자는 이 양 극단을 버리고 중도를 배워야 한다.”
부처님은 바로 이 중도의 이치를 깨달아 그것을 실천함으로써 열반을 성취하신 것입니다.
◇ 또 부처님은 수행 문제로 갈등을 겪고 있던 ‘소오나’라는 제자에게 거문고의 비유를 들어 중도를 깨우치게 하신 적도 있습니다. “거문고 줄을 너무 조이거나 너무 느슨하게 풀면 아름다운 소리가 나지 않고 줄을 알맞게 조이면 맑고 고운 소리가 나는 것처럼, 공부를 할 때도 너무 서두러거나 너무 느리면 안 되고 적당하게 정진하다 보면 좋은 결과가 있게 된다.”고 중도의 이치를 가르쳐 준 것입니다.
◇ 어제 저녁에 전화가 한통 왔습니다.
“스님! 저 과일가게 보살입니다. 오늘 너무 마음이 아프고 상해서 문을 닫고 목욕을 갔습니다. 너무 마음이 아프고 괴롭습니다. 저 지금 어떻게 해야 되나요?” 그 과일가게 보살님은 사람이 후덕하고 좋기로 소문이 났는데, 주변에서 어려움을 호소하면 자신의 돈을 빌려주기도 잘하고 또 다른 사람의 돈을 융통하는 데 소개도 잘 해주었습니다. 그렇게 십 수 년 간 잘 지냈는데, 작년에 자신의 돈을 사기 당했고 또 다른 사람을 소개까지 해주어 지금 큰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왜 이러한 결과가 나왔을까요? 물론 다른 사람의 이익을 위해서라는 명분도 있습니다만 그 분은 잠시 이자를 많이 준다는 것에 현혹이 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소개까지 시켜주었는데, 사기를 당해 돈을 받지 못하자 이제 자신에게 돈을 내어 놓으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스님! 세상에 이럴 수가 있습니까? 손위 시누이가 이자를 받을 수 있는 곳을
찾길래 마침 내가 거래하는 사람에게 소개를 시켜 준 것 밖에 없어요. 제가 돈 한 푼도 받지 않았어요. 내가 받지 못한 돈은 수 천 만원인데, 시누이가 받지 못한 돈은 5백만 원 인데, 아 글쎄 그 돈을 나보고 갚으라는 것입니다. 소개 시켜준 것 밖에 없는데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시누이 되는 사람이....”
“스님 ! 저 가슴이 너무 아파요. 지금 저 어떻게 해야 되나요?”이렇게 하소연을 하여 왔습니다. 그래서 먼저 따뜻하게 위로의 말을 먼저 했습니다.
“ 네 보살님 정말 많이 속상하겠습니다. 보살님 같이 인정 많고 훌륭한 분이 이러한 일을 당하게 되어 정말 마음고생 많으십니다. 그러나 보살님!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이일은 결국 보살님이 스스로 자초한 일입니다. 먼저 은행보다 몇 배나 높은 이자를 준다는 말에 속아 돈을 빌려준 것은 탐심 때문에 밝은 눈을 가린 탓이요, 또 그것을 시누에게 소개 시켜준 것은 지혜가 없는 어리석음 때문입니다. 그런데 나의 탐심과 어리석음으로 인하여 일어난 일임에도 화가 나서 속상해 하는 것은 더욱 어리석은 짓입니다. 보살님! 보살님 속이 상하면 누가 손해가 되나요? 나 스스로가 간이 상하게 됩니다. 지금은 나로 인하여 마음이 상한 시누를 위해 죄송하다고 하고 부처님께 참회 하세요. 나무아미타불 한번 부르고 부처님 잘못했습니다. 시누이 잘못했습니다. 또 나무아미타불 한번 부르고 잘못했습니다. 이렇게 큰 소리를 내어 한 동안 나무아미타불을 지심으로 외우다 보면 보살님의 지금 답답한 마음이 탁 트이고 후련해 질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내 탓임을 알면 지혜가 생겨납니다. 나에게 돈을 주지 않아 나를 아프게 하는 사람도 또 시누이도 전생에 내가 그들을 가슴 아프게 한 과보를 이생에 내가 받고 있다고 생각하세요. 그러면 억울할 것도 없고 가슴 아플 일도 없습니다.” 이렇게 차분하게 이야기를 하자 그 보살님은 “스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저에게 지혜의 눈을 뜨게 해주어 감사합니다.”라고 밝은 음성으로 전화를 끝냈습니다.
◇ 그렇습니다.
불자님들!
우리는 어떤 일이 자꾸 자기에 유리하다는 생각 또는 불리하다는 생각에 집착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그 한 쪽 끝을 달리다보면 위와 같이 고통스러운 일을 당할 수가 있습니다. 앞뒤 상황을 살펴보지 않고 자기에게 유리하다는 생각에 돈을 빌려주고 사기를 당한 것이나, 자신이 소개만 시켜준 것 밖에 없는데 나에게 ‘돈을 내어 놓아라.’고 하니 말도 안 된다는 것은 자기에게 불리하다는 생각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현명한 삶은 전후좌우를 잘 살펴서 양극단으로 가지 않게 하여야 합니다.
말이나 행동 그리고 생각이 모두 양극단을 떠나 중도(中道)를 향하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중도(中道)란 정 중앙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떠한 일이나 반드시 해야 할 최선의 길이 바로 중도인 것입니다. 그래서 중도(中道)란 상황에 따라 변화합니다.
외줄타기를 하는 사람의 경우를 생각해 봅시다. 외줄을 타는 사람은 무엇보다도 몸의 균형을 잘 잡고 평형을 유지해야 합니다. 만약 오른쪽이나 왼쪽으로 기우는 것을 내버려 둔다면 그는 떨어지고 말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인생도 결국 외줄을 타는 것과 같습니다.
◇ 불교는 이러한 중도실상(中道實相)을 바르게 깨달아 유와 무, 개인과 전체, 삶과 죽음, 기쁨과 슬픔, 그 어디에도 치우치거나 집착하지 않는 조화롭고 탄력있 는 역동적인 삶을 살아가도록 가르치는 종교입니다.
우리는 삶의 용수철이 탄성의 한계를 넘어 망가지지 않도록 불교정신 특히 중도의 이념에 항상 유념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항상 깨어있는 의식으로 자신과 대상을 어느 한쪽에도 치우치지 않게 주시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 주시하는 삶! 중도의 실상을 주시하는 삶이 바로 불교를 성공적으로 실천하는 길이 될 것입니다.
“중도(중도)란 어떤 상항에 가장 알맞은 최선의 길을 말한다.”
“주시하라! 깨어있어라! 중도의 눈을 가지고 주시하라! 깨어있어라!”
감사합니다.
나무 마하반야바라밀
<소리 없는 소리> 중에서... 서옹스님의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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