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5. 21. 21:11ㆍ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금강경
고정된 어떤 모습으로 세상을 보지마라
지견을 낼 수가 없다는 그런 뜻이다.
지견(知見)이라고 하는 말은 일반적으로 불교에서 고견(高見).안목(眼目).
견해(見解)그런 뜻으로서, 뭔가 어떤 진리나 인생에 대한 특별한
지혜(知慧)나 안목을 가진 것을 이렇게 이야기 한다.
그래서 '저 사람은 지견이 높다.지견이 낮다,
인생이나 돈에 대해서 남다른 안목이 있다.'등의 표현을 한다.
인생사에 있어서 이렇게 남다른 안목이 있는, 그런 사람이 많아야 한다.
수보리야, 어떤 사람이 만약에 부처님이 아견(我見).인견(人見).
중생견(衆生見). 수자견(壽者見)을 설한다고 하면,수보리야, 어떠하냐?
이 사람이 불해여래소설의(不解如來所說義),내가 말한 바의 뜻을 이해하였는가?
불야(不也)니다. 세존이시여, 그렇지 못합니다.
이 사람은 여래의 설한 바를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니까 부처님이 아견.인견.중생견.수자견.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
그것들이 실제로 고정 불변하는 무엇인가 있어서 이야기한 것처럼,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어떤 스타가 인기가 뜰 때는 세상에서 정말
안하무인격으로 그렇게 자기가 제일인 양 그러다가,어느 날 인기가 떨어지면
안하무인격의 자존심이 어딘가 없어지고 마는 것, 본래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걸 안다. 잠깐 자신이 환상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을 아는 것, 본래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걸 안다. 잠깐 자신이 환상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을 아는 것,
그렇게 알고 보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런 문제를 부처님께서 자주 말씀하셨는데, 그렇다고 그것을 부처님이
인정하신다라고 말씀하셨다고 생각한다면,
부처님이 설 하신 바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하이고(河以故), 왜 그러냐?
세존이 설한 아견.인견.중생견.수자견은 곧 아견.인견.중생견.수자견이 아니고
그 이름이 그런 것이다.
이제 금강경의 마무리 단계다. 그 동안 제일 많이 이야기해온것이 뭐가 있는가?
천하의 명예와 부귀도 순간에 사라져가는 것이다.
잘난 체 하는 그때 그 시절의 환상이 고정 불변하는 것이 아니다.
사실은 아무것도 없다. 말로 하자니 아견.인견.중생견.수자견.지견 일뿐이다.
금강경을 이해할수록,읽으면 읽을수록 그 위대한 가르침이 참으로
기가 막히다는 것을 더욱 더 느끼게 된다.
아무리 읽고 생각하고 해도 그 맛이 가시지 않고 더 진하게 느껴져 온다.
진하디 진한 맛이 우러나는 부처님의 말씀이 경전이고,
그 중에서도 금강경이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여러번 읽는다고 맛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소설의 경우 두 세번을 읽지 못한다.
세번 이상 읽으면 맛이 안나.싱겁다.
영화를 아무리 잘 만들어도 3번이상 보면 신물이 난다.
그렇지만 금강경은 그것이 아니다. 부처님의 말씀은 그런것이 아니다.
그 오묘한 뜻과 가르침은 백분의 일 천분의 일도 제대로 맛을 못 본것이다.
한번 두번 읽는 횟수가 많아질수록 그 말이 우러나는 것. 갈수록 맛이 더한 것.
세속적인 것은 갈수록 맛이 감해지지만 부처님의 말씀은 갈수록
맛이 더욱 우러난다.
정말 어려서 불교를 만나고, 금강경을 이렇게 저렇게 읽고 강의하는 것이
수없이 많았지만, 할수록 더 많이 새로워지고 우러난다.
전혀 생각하지도 못한 맛이 또 나오고 한다. 계속 또 나온다.
만약에 세속적인 소설,그런것을 가지고 설명한다면 그건 맛이 없을것이다.
어떻게 자꾸 하겠는가?
부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것은,이 깨달은 분의 가르침이라고 하는것은,
보면 볼수록 자꾸 새로운 맛, 전혀 느끼지 못햇던 그런 느낌, 그런 안목,
그런 것이 자꾸 나온다.
수보리야,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한 사람은 어일체법(於一切法)에
응여시지(應如是知)하며,모든 일.모든 삼라만상.모든것에 대해서
이 깨달음,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한 사람은, 우리 모두에게 뭔가
인생에 대해서 관심이 있는 사람, 뭔가 불교에 관심이 깊은 사람, 삶에 발전
그런 것에 관심을 발한사람. 보리심을 발한 사람은 일체법에 대해 응당히
이와 같이 알고, 꼭 이와같이 보고.이과 같이 믿고 이해해야 한다.
'이와같이'라는 말은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가?
이와 같이 이해하라. 금강경에서 수만 번 나오는 이야기이다.
딱 명제를 세워 놓고 여래가 말한 이것, 이것은 곧 이것이 아니고
이름이 이것이다. 남편이라고 하지만 남편이 아니야. 말이 남편이다.
무엇이든 고정되어서, 치우쳐서 보지마라.
남자도 여자 일 할 수 있고, 여자도 남자 일 할수 있다.
거기에 치우쳐 있어서는 안 되고, 무엇이든지 자유자재(自由自材)하게,
어디에도 걸리지 않게 살 수 있는 가장 바람직한 일상적인 삶을 말하고자 한다.
그래 일체것에 그렇게 하라는 말이다.
일체법(一切法)에 대해서,모든 일에 대해서 그렇게 이해해야 한다.
이와 같이 알고, 이와같이 보고,이와같이 믿고,이해해서 불생법상(不生法相)이다.
고정된 모습으로서 이 세상을 보지마라. 법상(法相)을 내지 말라.
물 마시는 컵 하나를 들고 물도 담을 수 있고 먹물도 담을 수 있고
우유나콜라도 담을 수 있다.백방(百方)으로 나의 컵은 쓸 수 있는것.
그것을 알아야 된다는 것이다. 일체법에 대해서 그렇게 알라.
법상(法相)을 내지 말라. 법상이라고 하는 것은 복잡한 이야기는 그만 두고,
그냥 물 마시는 컵으로 인식하는 것, 이것이 컵에 대한 법상이다.
물컵 받침대라고 하면 고정되게 생각하는 것,그것을 법상이라 이름한다.
여자라고 하면 각자 나름대로 여자에 대한 관(觀)이 잡혀져 있는것.
그것이 법상이다.
법상(法相), 거기에 매여 있고 치우쳐 있으면 아니 된다.
그러면 제대로 아름다운 삶이 되지 못한다.그것을 내가 어떻게 하는가?
못할 것이 없지만,법상을 내니까 하지 못하는 것이 된다.
불생법상(不生法相),법(法),이라고 말하건대 곧 법이 아니다.
시명법상(是名法相),그 이름이 법상이다.
똑같은 논리 이다. 금강경에 수천 번 나온 말이다.
모든 것을 그렇게 이해하면, 뭐라고 할까?
사람이 온유해지고 아주 막힘이 없고 소견(所見)이 탁 트이고
그런 인격(人格)이 되어 갈 것이다.
- 무비스님
절망과 좌절 속에서 눈부신 행복이 숨어 있다.
행복이라는 나무가 뿌리를 내리는
곳은 결코 비옥한 땅이 아닙니다.
오히려 어떻게 보면
절망과 좌절이라는 돌멩이로
뒤덮인 황무지일 수도 있습니다.
한번쯤 절망에 빠져 보지 않고서
한번쯤 좌절을 겪어 보지 않고서
우리가 어찌 행복의 진정한
값을 알수 있겠습니까?
절망과 좌절이라는 것은
우리가 참된 행복을 이루기
위한 준비 과정일 뿐입니다.
따라서 지금 절망스럽다고
실의에 잠겨있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지금 잠깐 좌절을 겪었다고
해서 내내 한숨만 쉬고 있는
것은 더욱 어리석은 일입니다.
이부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힘겨움과의
절망과 좌절이라는 것이 설사
우리의 삶에 바윗덩어리와 같은
무게로 짓눌러 온다 하더라도
그것을 무사히 들어내기만 한다면,
그 밑에는 틀림없이
눈부시고 찬란한 행복이라는
싹이 고개를 내밀고 있습니다.
- 좋은 글에서
글에서
즐거운 삶을 만드는 다섯 마음
첫 번째
고난 속에서도 희망을 가진 사람은 행복의
주인공이 되고
고난에 굴복하고 희망을 품지 못하는
사람은 비극의 주인공이 됩니다.
두 번째
하루를 좋은 날로 만들려는 사람은
행복의 창조자가 되고
"나중에"라고 미루며 시간을 놓치는 사람은
불행의 하수인이 됩니다.
세 번째
힘들 때 손잡아 주는 친구가 있다면
당신은 이미 행복의 당선자이고
그런 친구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미 행복 낙선자입니다.
네 번째
사람에는 기쁨도 슬픔도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행복하고
슬픔의 순간만을 기억하는 사람은
불행합니다.
다섯 째
작은 집에 살아도 잠잘 수 있어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고
작아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좋은 글 중에서
♬배경음악: i love you♬
'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 > 금강경' 카테고리의 다른 글
원을 이루고자 한다면 금강경을 수지 독송하라 (0) | 2011.11.25 |
---|---|
우리말 금강경 (0) | 2011.11.11 |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라 (0) | 2011.03.26 |
체루비읍(涕漏悲泣) (0) | 2011.03.04 |
금강경 오가해 중에서 (0) | 2010.09.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