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받을 자격이 있는가?/무불스님

2011. 6. 6. 10:58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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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받을 자격이 있는가?/무불스님

 

 

인생이 무상(無常) 함을 알고 살아야 한다.

인생의 무상함 을 모르면, 오만과 무지함에 빠지기 쉽다.

 

모든 일의 실패와, 좌절, 그리고 안전사고는 무지 함에서 오는 결과가 많다.

무상한 인과(因果)를 모르면. 오만 방자하여,자기도 모르게 자신을 방종하게된다.

 

삶.에 복이 없다면 참으로 암훌할 것이다. 적은 복은 부지런 하고 검소함 에서온다.

큰 복은 나누고 배풀며, 봉사하고 사람답게 살줄 아는 자비롭고 지혜로운 삶에서 오게된다.

 

재물을 많이 가지고도, 마음이 좁아 비틀어저 불쌍하게 사는 사람이 있고.

조금 모자라고, 부족해도 나누어 가지며, 흡족하게 사는 사람이 있다.

복.중에 제일 큰 복.은 영원히 존재하는, 무루복(無漏福)이다. 써도써도 모자라고 부족함이 없는 복.

"생사불멸',을 아는 "무위복"이 제일 큰 복.이다.

 

제법종본래..상자적멸상 ..불자행도이 ..래세득작불.

(諸法從本來).(常自寂滅相)(佛自行道已)(來世得作佛)

 

우주만물이 본래 법을 쫓아 일어나지만  모든존재는 항상 적멸(寂滅)한 것이 본무사다.

불자가 이 도리을 알면, 래세에 반듯이 부처(天下大福)을 이룬다는 가르침이다.

 

정견(正見)뜻을 세워서 행.하면, "보시바라밀"이 되어지고.

                     본성(佛性)을 잘 돌보아 수행(공부)하는 것이 "성불(成佛)'부처를 이루게 된다.

 

나는 .부모로 부터 태어났으니,  늘 아버지 어머니는, 나의 가슴에 영원히 계신다.

가정을 을 이루니, 남편이 되고, 아내가 되어. 부부의 연(緣)으로, 자녀가 태어나니 부모가 된다.

 

부모님이 돌아가서도, 자식의 가슴에 살아 계시고, 남편이 죽어서도 아내의 가슴에 살아계신다.

자녀가 사고로 먼저 죽게 되면, 그 아픈가슴의 상처가  더 더욱 살아있게 된다.!

 

님은 가고 없어도, 늘 가슴에 남아 있는 상처.형상은 없어저도 늘 살아 있는 상처가

            "상주설법"이다.

"무상'(無常)이 이해되지 않으면, 그 터지는 슬프고 아픈 가슴을 치유할수가 없다.

 

잘산다는 것은, 아픔이 없는 삶.이요. 상처받지 않은 삶.을 말한다.

경제만을 우선으로. 정치는 당정간 의 의견이 경직되고 여.야가 싸우고.남과북의 긴장이 고조되고.

종교의 편향으로, 반만년 전통 종교를 무시하여 일어나는 편가르기가 "시화연풍"은 아니다.

 

친구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친구의 아픔을 나누어 가지고

                    남편의 상처를 어루만저 주는, 어머니 같은 아내가 '진정한 복(福)이 가지는 가치"다.

 

물질을 많이 가진다고, 복 받은  부자가 아니다.

마음과 마음을 나누어 가지지 못하면, 복.을 가지고도 복.을 받지 못하는 사람이다

 

온 가족의 식구가 의견이 화목하지 않은 가장은 복 있는 가정이 아니다.

아내의 가슴에, 남편의 가슴에,사랑이 듬뿍 담기지 않은면 그는 복.없는 사람이다.

동료나 친구의 가슴에, 속속들이 정(情)이 가는 그런 사람이,복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다.

 

 

 

 


 

 

* [함민복의 시로 여는 아침] 겁나게와 잉 사이

 

전라도 구례 땅에는

비나 눈이 와도 꼭 겁나게와 잉 사이로 온다

 

가령 섬진강 변의 마고실이나
용두리의 뒷집 할머니는
날씨가 조금만 추워도, "겁나게 추와불고마잉!"
어쩌다 리어카를 살짝만 밀어줘도, "겁나게 욕봤소잉!"
강아지가 짖어도, "고놈의 새끼 겁나게 싸납소잉!" 
지난봄 잠시 다툰 일을 얘기하면서도
"성님, 그라고봉께, 겁나게 세월이 흘렀구마잉!"

궂은 일 좋은 일도 겁나게와 잉 사이로 있고, 

여름 모기 잡는 잠자리 떼가 낮게 날아도 겁나게와 잉 사이로 날고
텔레비전을 보다가도 금세
"새끼들이 짜아내서 우짜까이잉!" 눈물 훔치는
너무나 인간적인 과장의 어법
내 인생 마지막 문장
허공에라도 비문을 쓴다면 꼭 이렇게 쓰고 싶다
"그라제, 겁나게 좋았지라잉!"

이원규는 길 위의 시인이다. 그는 도보로 만 리 길을 걸었다.

'한반도 대운하 건설 반대'를 외치며 4대강을 따라 100여일을 걸었고,

 전라도 새만금에서 서울까지 삼보일배를 하며 걷기도 했다.

 그는 길을 걸으며 겁 없는 사람들의 무분별한 개발논리에 희생되는

자연의 신음소리를 듣고 시로 옮겼다.

'겁나게'와 '잉'에는 어떤 의미가 배여 있을까.
나는 인간이 느끼는 겁이란 감정을 존중한다.  

만약 인간이 겁을 느끼지 않게 된다면 어떤 세상이 도래할까.

세상이라는 말도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겁 때문에 인간은 자신보다 우월한 존재를

두기도 하고 믿기도 하는 것 아닐까.

겁 때문에 그나마 평화도 유지되고 있는 것 아닐까.  

겁을 안 먹고, 신성한 겁을 저버릴 때 세상사에는 문제가 생긴다.  

겁을 모르는, 막돼먹은 사람을 일러

겁대가리 상실한 놈이라 비하하는 욕도 있지 않은가.

'잉'이란 종결어에는, "나는 그렇게 생각하는데 어떻소?"

하고 동의를 구하는 의미가 담겨 있지 싶다.

동의란 타인을 인정하는 데서 출발하는 것 아닌가.
그러니까 '겁나게'와 '잉'에는 겸손한 마음과 상대를 존중하는

마음이 녹아 있다고 보아도 될 것이다.

 

어감만큼이나 뜻이 아름다운 이 두 말 사이에서

우리가 살아간다면 세상은 보다 평화로워질 것이다.

 

- 5월 3일자 한국일보 '詩로 여는 아침'에서 옮겨온 글 -

 

 

 Chopin  'Nocturnes' Garrick Ohlsson, piano 1-7 이어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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