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래장 사상은 불교인가?

2011. 9. 10. 00:22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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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래장 사상은 불교인가?

 

 

 

 

 

  

 

논란의 열린진리관

 

종교평화선언 중에 가장 논란이 큰 부분이 열린진리관이다. 이는  불교의 진리만을 고집하지 않고 이웃 종교에도 진리가 있음을 인정하겠다는 것이다. 또 진리가 다른 것은 언어와 문법차이라고 설명하였다. 그렇다면 모든 진리는 같은 것일까. 불자들이 생각하기에 유치원 동화수준에 불과한 창조론도 진리가 될 수 있을까. 대체 왜 이런 발상이 나오게 되었을까.

 

불교계를 대표하는 스님들과 학자들이 수 개월에 걸쳐서 수 십차례 토론을 거쳐서 만들었다고 하는 선언문을 보면 모든 종교는 다 같은 것이다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단지 올라가는 길이 다를 뿐 한 봉우리에서 만나면 진리는 오로지 하나일 뿐이라는 주장으로 보인다. 그런 예로서 언어와 문법의 차이를 든 것이다.

 

()을 영어로 말하면 스노우(snow)’이고, 일본어로 말하면 유끼라는 것과 같은 설명이다. 이처럼 하나의 현상을 두고 문화와 언어의 차이에 따라 다른 것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사실 알고 보면 같은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선불교에서 말하는 불성사상에서 기반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대승열반경에 등장하는 일체중생 실유불성으로 대표되는 슬로건이 이번 종교평화선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음에 틀림 없다. 그런 불성사상은 여래장(如來藏, tathāgatagarbha)사상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그렇다면 여래장사상은 무엇이고 불성사상은 무엇일까.

 

 

여래장사상과 불성사상

 

여래장사상은 인도에서 발생된 사상을 말하고, 불성사상은 중국에서 발생된 사상을 말한다. 여래장 사상은 부처가 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고, 불성사상은 이미 부처가 될 성품을 타고 났다고 한다. 불성사상에 따르면 이미 우리들은 부처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 성품을 보기만 하면 성불하는 것으로 본다. 이는 중국인들의 현실주의가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인도에서 여래장 사상은 단지 가능성만 있어서 성불하기까지 무량한 세월이 걸리는 것으로 보지만, 이 사상이 중국으로 건너 왔을 때 현실을 중요시 하는 중국인들이 유교문화의 성품()’부처()’와 접목하여 불성(佛性)’을 만들어내게 된 것이다. 그래서 부처가 되는데 있어서 부처님이 보살로 수행한 것처럼 무량한 세월이 흐르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 생에서 성품만 보게 되면 성불이 가능한 것으로 본다.

 

이처럼 불성사상은 인도에서 발생한 여래장사상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데, 이런 여래장 사상은 불교가 아니라고 한다.

 

 

여래장 사상은 불교가 아니다!”

 

여래장사상은 불교가 아니라고 주장한 사람 중 한 사람은 일본불교 학자 마쓰모토 시로이다. 마쓰모토 시로는 자신의 여래장과 본각사상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여래장 사상은 차별적인 아트만론인 dha-tu-va-da를 구조로 한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불교의 본질인 연기설은 이 dha-tu-va-da와 동일하지 않다. 오히려 그것을 부정하기 위해 구상된 설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에여래장 사상은 불교가 아니다.”라는 주장이 성립하는 것이다.

 

(마쓰모토 시로, 여래장과 본각사상)

 

여래장 사상과 본각사상.docx 

여래장 사상과 본각사상.pdf 

 

 

일본불교학자 마쓰모토 시로는 논문에서 보는 바와 같이 여래장 사상은 불교가 아니다.”라고 명백히 주장하였다. 그 근거로서 여래장사상은 부처님이 발견한 연기법을 부정하고 성립된 힌두교의 아뜨만사상과 같은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연기법으로서 부처님당시의 브라만교를 비판하였다. 만물속에 내재하는것으로서 자아, 개아, 진아로 불리우는 보편적실재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연기법으로 설명한 것이다.

 

그런데 대승불교에서는 이 연기법을 다시 부정함으로서 자아, 개아, 진아로 불리우는 궁극적 실재가 있다고 주장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아뜨만에 대하여 부정하고, 그 것을 또 부정하였으므로 아뜨만사상이 부활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아뜨만사상의 부활

 

그렇다면 아뜨만사상은 어떻게 부활하게 되었을까.마쓰모토 시로교수는 아뜨만이 부활한 요인에 대하여 공사상을 들고 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공이라는 주장도 또 집착이다.’라는 이해는, 반드시 유()의 입장에 접근해 간다

 

(마쓰모토 시로, 여래장과 본각사상)

 

 

이는 진공묘유로도 설명될 수 있다. 공은 비우고 또 비워야 하는데, 그 비워야 하는 마음조차도 비워야한다고 한다. 그렇게 한 없이 천착해 들어가다 보면 진공이 된다고 한다. 그런데 그 진공은 비어 있는 것은 아니다. 비우고 또 비워서 ‘진공(眞空)’이 되면 그 진공 속에 존재 그 자체가 드러나게 되어 있는데 이를 ‘묘유(妙有)’라 한다.

 

강한 부정으로 대긍정이 되어 “산은 산이 아니었던 것이, 산은 역시 산이다”와 같은 식으로 되는 것이라 본다. 그래서 존재하게 되는 것으로 보는데, 이런 논리에 따르면 결국 모든 것은 결국 있다()”라고 본다.

 

이와 같은 공의 성질(공성)은 여래장사상에 영향을 주었는데, 마쓰모토 시로교수는 이를 다뚜와다(dha-tu-va-da, 기체설)’로 설명하고 있다. 그렇다면 기체설이란 무엇일까.

 

 

기체(궁극적실재, L)와 초기체(dharma, S)

 

여래장을 산스크리트어로 따타가따가르바( tatha-gata-garbha)라 한다. 이는 인도의 대승불교에서 유래한 명칭이다. 이 명칭이 중국에 건너오면 불성이 된다. 불성은 부처와 성품의 결합어이지만 산스크리트어로 붓다다뚜(buddha-dhatu, 불성)’라 한다.

 

여기서 다뚜(dhatu)라는 말은 마쓰모토 교수의 설명에 따르면, 놓는 장소곧 기체(locus)라 하고 영문[L]로 하였다. 즉 땅과 같이 기본이 되는 것으로서 궁극적 실재를 말한다. 그 기반위에 다르마(dharma)가 있는데 이를 유지되는 것이라 설명하고 초기체(super-locus)라 하고 영문[S]라 표시하였다. 그래서 기체(궁극적실재, L)와 초기체(dharma, S)의 관계는 다음과 같이 나타 낼 수 있다.

 

 

L S의 기체이다.
따라서 L S를 생기게 하는 [원인이다].
L은 단일이지만, S는 다수이다.
④ L
은 실재이며, S는 비실재이다.
L S의 본질(atman)이다.
S는 비실재이지만, L을 본질로 하기 때문에, L에서 생긴 것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 실재성을 가진다. 또는 실재성의 근거를 갖는다

 

(마쓰모토 시로, 여래장과 본각사상)

 

 

위 순서는 여래장사상에 대한 설명이다. 대지의 땅과 같은 개념은 기체(L)  모든 존재(S)가 나오는 근거가 된다. 그런 L은 오로지 하나인 것이고, ‘실재하는 것이고 더구나 ‘S의 본질(아뜨만)’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이론은 대승기신론에서도 보인다는 것이다.

 

 

대승기신론에서 본질과 현상

 

대승기신론은 여래장과 유식사상이 복합된 일심사상에 대하여 이를 본질현상이라는 두가지 관점에서 설명한다. 마음 가운데 본래부터 깨달음의 상태에 있는 마음 즉 진여는 대승의 본질을 보여주고, 인연따라 생멸하는 세속적인 마음은 대승의 본질이 환경과 조건에 따라서 변화하는 모양과 작용을 보여준다고 설명된다.

 

그런면으로 보았을 때 대승기신론에서의 본질은 기체(L)와 같은 것이고, 현상은 초기체(S)와 같은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이론은 고대그리스의 플라톤이 제창한 이데아론과도 유사하다.

 

 

이데아론의 본체와 현상

 

이데아론 역시 본체현상으로 설명된다. 원을 예로 든다면 기하학적으로 원은 완전 그 자체이다. 그러나 실재로 그려진 원은 ‘원본’으로서 원에 절대 같아 질 수 없다. 가까워 질 수는 있어도 원본 그 자체는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원본 그 자체를 이데아로 보는 것이다. 그래서 이데아는 ‘본체’이고 ‘실재’하고 ‘보편적’이라는 것이다.

 

반면에 본체가 드러난 것을 ‘현상’이라고 보는데 일종의 ‘복사본’이라 할 수있다. 이런 복사판은 ‘가상적’이고 ‘개별적’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불완전 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와 같은 이데아론은 신을 설명하기에 매우 안성맞춤이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플라톤의 이데아론을 차용하여 중세 기독교신학을 만들어 낸다. , 이데아 대신에 신을 집어 넣어 설명한 것이다. 이데아론의 본체와 실재와 보편성에 접목 되면서 그 신은 최고의 원인을 가지는 ‘창조신’이 되고, 항상 존재하는 ‘절대유’가 되고, 오로지 하나로서 존재 하는 ‘유일신’이 되는 것이다. 작은 부족국가의 신이 이데아론을 만나면서 ‘날개’를 단 것이라 볼 수 있다.

 

 

힌두교 아뜨만론의 불교버전

 

이처럼 기체와 초기체를 본체와 현상으로 보았을 때 대승기신론과 플라톤의이데아론을 적용한 기독교신학은 매우 유사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와 기체와 초기체, 본체와 현상으로 설명되는 다뚜와다(dhatuvada, 기체설)’는 아뜨만사상의 다름이 아니다. 어떤 궁극적 실재가 있어서 그곳으로 부터 다양한 현상()이 발생한다는 일원론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쓰모토 시로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와 같은 다뚜와다(dhatuvada)가 먼저 아트만(a-tman)론 즉 아설(我說)이라는 점을 말하고 싶다. 나는 여래장 사상이란 기본적으로는 힌두교 아트만론의 불교판(Buddhist version)에 다름 아니라고 생각한다. 곧 힌두교의 아트만론이 특히 대승불교 성립 이래 불교 내부에 침입하여 불교적 표현으로 위장하여 성립한 것이 여래장 사상이라고 본다 (따라서 남전불교에는 기본적으로 여래장 사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마쓰모토 시로, 여래장과 본각사상)

 

 

마쓰모토 교수는 여래장사상에 대하여 힌두교 아트만이론의 복사판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심지어 대승불교가 성립한 이후에 힌두교가 불교로 위장하여 침투한 사상이라고 의심하고 있다. 그런 여래장사상은 빠알리삼장에서는 결코 볼 수 없는 것이라 한다. 이는 빠알리삼장이 주류 불교로서 본류이고, 여래장 사상은 이교도로 부터 들어온 지류와 같은 것이라는 의미이다. 그래서 불교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여래=법신==상주==비변이법=비마멸법=자재

 

마쓰모토교수는 여래장사상이 불교가 아님을 증명하기 위하여 대승열반경에서 법현의 순다품(純陀品) 을 예로 들어 설명한다.

 

 

如來法身 非穢食身(大正藏 12, 860b11)

彼佛者是我義 法身是常義(大正藏 12, 862a13-14)

當知 我者是實 我者是常住 非變易法 非磨滅法 我者是德 我者自在(, 862a13-14)

當知 如來常住 非變易法 非磨滅法(, 865a9-10)

 

(마쓰모토 시로, 여래장과 본각사상)

 

 

위 한문문구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은 등식을 만들어 낼 수 있다고 한다.

 

 

여래=법신==상주==비변이법=비마멸법=자재

 

여래는 법신으로, 변이도 마멸도 하지 않는 상주인 아()이다.”라고 하는 것이다. 열반경에서 설해진 여래=법신=불성의 등식은 결코존재론적으로 중성(中性)’인 것이 아니라, 바로 존재론적인 실재영원불변의 아트만인 것이라는 주장이다.

 

 

자재천(自在天)이란

 

위 등식을 보면 부처가 최종적으로 자재천이 되어 버리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자재천은 원인을 갖지 않는다. 이는 연기법에 어긋나는 것이다. 그래서 테라와다불교의 주석서이자 수행지침서인 청정도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비판하였다.

 

 

이 정신-물질은 원인을 갖지 않은 것이 아니다. 만약 원인을 가지지 않았다면 모든 곳, 모든 경우, 모든 사람에게 이것이 동일한 상태로 일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자재천 등의 원인을 가진 것도 아니다. 정신-물질의 배후에 자재천 등이 없기 때문이다. 어떤 자는 정신-물질이 바로 자재천이라 한다. 자재천이라 부르는 정신-물질이 원인을 갖지 않은 것이 될 것이기 때문에 틀린말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반드시 원인과 조건으로부터 생겼다.

 

(청정도론, 19장 의심을 극복함에 의한 청정, 3)

 

 

우리의 몸과 마음이 원인없이 생겨나지 않았다는 말이다. 모두 원인과 결과에 따른 연기법으로 보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인을 갖지 않는 창조주가 창조하였다는 것은 틀린말이라는 것이다. 어떤 현상도 원인과 결과라는 연기법 없이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세상을 응시하는 주님

 

그런 자재천은 궁극적 실재라 불리우고 있고 동시에 모든 현상의 근원이라고 보고 있다. 그런데 자재천은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관자재보살과도 같은 개념이라는 것이다.

 

원인을 가지지 않은 채 모든 곳에 존재한다는 관자재보살은 산스크리트어로 ‘아발로키테스바라(Avalokiteśvara)’이다. 이에 대한 어원을영문판 위키피디아에서 보면 다음과 같다.

 

 

아바로키테스바라(Avalokitasvara)라는 이름은 다음과 같은 부분들이 모여져 만들어졌다. 동사적접두어 아바(ava)는 ‘아래(down)’를 의미한다. 로키타(lokita)는 동사 lok의 과거분사형인데, 여기에서는 능동형으로 사용되어 ‘보는 것(to notice, observe)’의 뜻이 된다. 마지막으로 이스바라(īśvara)  주님(lord), 지배자(ruler), 주권자(sovereign) 또는 대가(master)로서의 의미가 있다.

 

산스크리트어 음성 법칙인 산디(sandhi)의 조화법칙에 따르면 a+isvara는 ‘esvara’가 된다. 결합된 의미는 ‘응시하는 주인님(lord who gazes down (at the world))’을 의미한다. 단어 로카(loka: 세계, world)는 이름에서 빠져 있지만, 구절에 함축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출처 , 영문판 위키피다아, Avalokitesvara)

 

 

산스크리트어 아바로키테스바라는 여러가지 단어가 모여서 만들어진 이름인데 그 뜻은 ‘세계를 응시하는 주인님(lord who gazes down at the world)’이라 한다. , 관자재보살은 세상을 응시하는 주님인 것이다.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이란

 

우리나라는 대승불교권 국가로 분류된다. 삼국시대부터 전래된 불교가 대승불교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4세기 고려말 태고보우선사가 중국의 임제종을 도입한 이래 지금까지 임제종의 선풍을 유지하고 있다. 현재 조계종은 임제종을 계승하고 있고, 스님들은 모두 임제스님의 자손이라 볼 수 있다.

 

그런 한국불교에서 가장 강조하고 있는 것은 깨달음이다. 그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수단이 대혜종고스님이 강조한 간화선이다. 그렇다면 그 깨달음이란 어떤 것일까.

 

대승불교의 지침서와 같은 논서가 대승기신론이다. 마치 테라와다불교에 있어서 청정도론과도 같은 위치의 논서라 볼 수 있다. 하지만 500여페이지에 3권으로 이루어진 청정도론에 비하면 매우 얄팍한 책이다. 그런 대승기신론은 만여자 정도 된다고 한다. 거기에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에 대한 내용이 있다.

 

 

깨달음은 그릇된 생각과 관념이 사라진 마음의 본체를 말한다(所言覺義者謂心體離念)

 

(대승기신론, 깨달음이란, 서광스님의 현대심리학으로 풀어본 대승기신론에서)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은 마음의 본체를 말한다고 하였다. 이는 앞서 언급된 여래장사상에서 기체(dhatu)’와 같은 것이다. 모든 현상을 생겨나게 하는 궁극적 실재를 말한다. 따라서 대승에서의 깨달음이란 궁극적 실재와 합일하는 것이다.

 

그런데 궁극적 실재는 초기체라 불리우는 현상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인간도 현상이라고 볼 때 궁극적 실재와 합일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아()가 있어야 한다. 인간마다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아이다. 그 아를 개아(個我)’ 또는 아뜨만이라 한다. 아뜨만이 궁극적 실재와 합일 하였을 때 즉, 개아가 진아와 합일 하였을 때 대승불교적 깨달음으로 본다.

 

 

열반에 대하여 이야기 하지 않는 이유

 

한국불교에서는 깨달음은 강조하지만 열반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것은 한국불교가 여래장계열의 불교이기 때문이다. 여래장계열의 불교는 개아진아가 있어야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 하지만 존재가 소멸하는 열반을 이야기 할 수 없다. 열반에 이르기 위해서는 무아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마쓰모토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또 나의 견해에 의하면, 연기설은 무아설(無我說)을 함의한다. 즉 연기지인 각각의 법(dharma 속성) 즉 초기체(超基體, super-locus)는 그것이 소속되어야 할 기체(基體, dha-tu, locus)인 아(, a-tman)가 존재하지 않는 까닭에, 실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무명 등의 연기지는 소멸할 수가 있다.

 

(마쓰모토 시로, 여래장과 본각사상)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은 사성제이다. 사성제는 고통과 고통의 원인과 고통의 소멸과 고통의 소멸에 이르는 도에 관한 것인데, 이는 연기법에 근거한다. 연기법에 따르면 원인과 조건과 결과에 따라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만 있기 때문에 고정된 나가 있을 수 없다. 이렇게 나가 존재하지 않은 무아이기 때문에 아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기체(L) , 궁극적 실재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무아이기 때문에 열반을 실현할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무아를 기반으로 한 불교와 유아를 기반으로 한 불교는 종착지가 다름을 알 수 있다. 무아를 기반으로 한 불교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불교로서 열반이 목표이지만, 유아를 기반으로 한 불교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부정한 불교로서 열반이 아닌 궁극적 실재와의 합일을 목표로하는 깨달음이다.

 

유아를 기반으로 한 여래장계열의 불교는 무아를 기반으로한 연기법에 근거한 불교와 다른 불교이다. 이런 차이에 대하여 일본의 불교학자 마쓰모토 시로교수는 여래장은 불교가 아니고, 연기법이 불교라고 주장하였다.

 

 

기독교신학자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

 

마쓰모토교수의 논문에 따르면 여래장사상은 힌두교 아트만론의 불교버전(Buddhist version)’의 다름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그런 여래장 사상은 본체와 현상으로 설명될 수 있는데, 이는 기독교신학과 접목된 플라톤의 이데아론과도 매우 유사하다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불교를 연구하는 기독교신학자들은 이구 동성으로 참나는 하나님과 같은 것(오강남교수)이라든가, 궁극적 실재는 하나님(길희성교수)이라고 주장한다. 심지어 기독교와 불교는 같은것(이찬수교수)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열린진리관이 인정될 수 없는 이유

 

그런데 소위 21세기 아쇼카선언이라 불리우는 종교평화를 위한 불교인선언(초안)에서 열린 진리관 부분을 보면 본체와 현상이라는 측면에서 서로 같은 것처럼 보이는 대목이 있다는 것이다.

 

 

종교가 다른 것은 서로의 진리가 달라서가 아니라 진리를 표현하는 언어와 문법이 다를 뿐입니다.

 

(21세기 아쇼카 선언, 종교평화 실현을 위한 불교인 선언-초안, 열린진리관)

 

종교평화 실현을 위한 불교인 선언.docx 

종교평화 실현을 위한 불교인 선언.pdf

 

 

이와 같은 표현은  마쓰모토 교수가 여래장을 설명하기 위하여 사용한 기체와 초기체의 개념이 대승기신론의 본질과 현상, 그리고 이데아론에서 말하는 본체와 현상이 모두 같다는 것을 말하는 것 같다. 그렇게 본다면 21세기 아쇼카선언에 있어서 열린진리관은 맞을 지 모른다.

 

하지만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인 연기법에 따르면 열린진리관은 인정될 수 없다. 그것은 유아의 종교와 무아의 종교의 차이이고, 동시에 합일을 추구하는 종교와 열반을 추구하는 종교의 차이이기 때문이다.

 

 

     

      
      
        너는 네 세상 어디에 있는가 12월이다. 어느세 한 해의 마지막 달에 이르렀다. 지나온 날들이 새삼스레 되돌아보이는 마루턱에 올라선 것이다. 마르틴 부비가 하시다즘(유태교 신비주의)에 따른
        <인간의 길>에서 한 말이 문득 떠오른다. "너는 네 세상 어디에 있느냐? 너게게 주어진 몇몇 해가 지나고 몇몇 날이 지났는데,
        그래 너는 네 세상 어디쯤에 와 있느냐?" 이 글을 눈으로만 스치고 지나치지 말고, 나직한 자신의 목소리로 또박또박 자신을 향해 소리내어 읽어보라. 자기 자신에게 되묻는 이 몰음을 총해서, 우리는 각자 지나온 세월의 무게와 빛깔을 얼마쯤은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때때로 이런 물음으로 자신의 삶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세월은 오는 것이 아니라 가는 것이란 말을 실감할 수 있는 12월이다. 금년 한 해를 어떻게 지나왔는지, 무슨 일을 하면서 어떻게 살았는지 어떤 이웃을 만나 우리 마음을 얼마만큼 주고받았는지 자식들에게 기울인 정성이 참으로 자식을 위한 것이었는지 혹은 내 자신을 위한 것이었는지도 살펴 볼 수 있어야 한다. 안으로 살피는 일에 소흘하면, 기게적인 모표정한 인간으로 굳어지기 쉽고 동물적인 속성만 덕지덕지 쌓여 가면서 삶의 전체적인 리듬을 잃게 된다. 우리가 같은 생물이면서도 사람일 수 있는 것은 자신의 삶을 스스로 되돌아보면서 반성할 수 있는 그런 기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한 번 나직한 목소리로 물어보라. "너는 네 세상 어디에 있느냐? 너에게 주어진 몇몇 해가 지나고 몇몇 날이 지났는데 그래 너는 네 세상 어디쯤에 와 있느냐?" 이와 같은 물음으로 인해 우리는 저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울려 오는 진정한 자신의 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그리고 삶의 가치와 무게를 어디에 두고 살아야 할 것인지도 함께 헤아리게 될 것이다. 지난 10월 중순에 겪었던 일이다. 흙벽돌 찍는 일로 오후 늦게 이천에 있는 이당 도예원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이었다. 그날은 맑게 개인 상쾌한 가을 날씨였다. 방금 해가 넘어간 뒤라 도로의 차들은 미등을 켜고 달리는 그런 시각이었다. 구름 한 점 없이 맑게 갠 하늘, 그 하늘빛이 너무 고왔다. 어둠이 내리기 직전, 석양의 투명한 빛이 산자락과 능선을 선명하게 드러나게 했다. 부드럽고 유연한 그 산의 능선이 마치 우주의 유장한 율동처럼 느껴졌다. 언뜻 보니 산등성이 위에 초이틀 초승달이 실날같이 걸려 있었다. 능선 위에 펼쳐진 하는빛은 고요와 평화로 물들어 잇엇다. 시간이 흐르자 노을빛은 점점 희미해지고 어둠이 내려 이제는 산의 윤곽도 검게 굳어져 초승달의 자태는 더욱 또렷하게 드러났다. 여기저기서 어린애 눈망울 같은 초저녁 별이 하나 둘씩 돋아나기 시작햇다. 언뜻언뜻 이런 풍경을 차창 밖으로 바라보면서 서쪽으로 달려온 길이 그날 하루 중에서 가장 아름답고 감동적인 시간을 나에게 가져다주었다. 자연은 이토록 아름답다. 자연은 실로 신비롭다. 주어진 이런 아름다움과 신비를 일상의 우리는 그저 무감각하게 흘려보내고 잇다. 이롸 같은 아름다움과 신비를,
        그런 고요와 평화를 우리는 한 생애를 통해서 몇 번이가 바라보며 느낄 수 있는가. 우리들의 감성이 여리고 투명하던 시절에는 길섶에 피어있는 풀꽃 하나에도 발걸음을 멈추고 눈길을 주면서 그 아름다움과 생명의 신비에 감동을 하곤 했엇다. 하루해가 기우는 해질녘의 노을 앞에서 두 손을 모으고 싶도록 숙연해지기도 했었다. 이제 막 떠오른는 보름달을 보면 식구들을 불러 달을 보라고 소리치기도 했었다. 이 글에서 내가 시제를 굳이 과거형으로 '했었다'라고 표현한 것은 오늘날 우리들은
        그와 같은 자연의 아름다움과 생명의 신비 앞에
        무감각한 생물로 굳어져 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들의 생활형태가 산업화와 도시화로 혹은 정보사회로 치닫고 있을수록 사물의 아름다움과 생명의 신비는 우리네 삶을 떠받쳐주는 주추가 되어야 한다. 나라 안팎을 가릴 것 없이 세상이
        온통 부정과 비리와 폭력과 살육으로 뒤범벅이 되어 가는 것도 따지고 보면 아름다움과 생명의 신비를 등진 비인간적인 현대사회의 질병이다. 사람인 우리가 어떻게 사는 것이 과연 사람답게 사는 일인지,
        인류 역사가 시작된 이래 끊임없이 논의되어 왔다. 한마디로 가릴 수 없는 복합적인 사항이지만, 사물의 아름다움과 생명의 신비를 가까이서 지켜보고 느낄 수 있다면 오늘처럼 황량하고 살벌한 '인간 말종'을 우리 스스로 만들어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우리들 삶의 터전에 우리를 믿고 멀리서 찾아와 쉬어 가고자 한 손님인 철새들에게 함부로 총질을 해서 무참하게 살육을 일삼는 사람을 어떻게 자식을 낳아 기르는 일가친척을 거느린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이 땅에서 목숨을 지닌 생명체로서 함께 살아가고 있는 무고한 들짐승들을
        덫이나 올가미로 마구 잡아 멸종시키고 있는 이웃을 어떻게 같은 사람의 대열에 세울 수 있겠는가. 이 땅에서 새와 들짐승 같은 자연의 친구들이 사라지고 나면
        생물이라고는 달랑 사람들만 남게 되리라. 그때 가전제품과 쓰레기와 자동차와 매연에
        둘러싸여 있을 우리들 자신을 한번 상상해 보라.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그것은 사람이 아닐 것이다.
        지금까지 있어 왔던 생물이 아닌 괴물일 것이다. 감상과 감성은 발음은 비슷하지만 뜻은 다르다. 인간의 인식능력인 감성(感性)이 마비된다면 그때 우리는 온전한 인간일 수가 없다. 대상에서 받은 느낌으로 마음 아파하는 일을 감상(感傷)이라고 하는데 감성이 무디어지면 감상의 기능도 할 수 없다. 어떤 사물이나 현상 앞에 무감각하고 무감동한 것은 생물이 아니다. 경제만을 최고 가치로 여기는 현대사회에서는
        인간의 가장 은밀한 속뜰인 그 감성이 메말라간다. 다시 한 번 귀를 기울여 들어보라. "너는 네 새상 어디에 잇느냐? 너에게 주어진 몇몇 해가 지나고 몇몇 날이 지났는데 너는 네 세상 어디쯤에 와 있느냐?" -= IMAGE 19 =-
          가전충효님이 올린 글

          Ludwig van Beethoven
          1770 - 1827
          Cello Sonata No.1
          in F major, Op.5-1
          첼로 소나타 1번 사단조 Op.5-1

          Cello : Mstislav Rostropovich
          Piano : Sviatoslav Richter

           

          
          

           

           


           

           

           

          Ludwig van Beethoven Cello Sonata No.1 in F major, Op.5-1 1st Adagio sostenuto Allegro (17:53) Cello : Mstislav Rostropovich Piano : Sviatoslav Rich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