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9. 17. 01:12ㆍ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2] 오직 마음에서 구할 뿐
그러므로 훌륭한 겉모습과 신통력을 얻으려고 애쓸 필요가 없습니다. 먼저 자신의 마음을 돌이켜 비추어 본성에 대한 믿음과 이해가 바르고 참되면 단견이나 상견의 편견에 떨어지지 않고, 선정과 지혜를 통해 모든 마음의 번뇌를 다스릴 수 있습니다. 만약 믿음과 이해가 바르지 못하면 수행을 해도 진전이 없고 끝내 공부가 뒤떨어질 것이니 이것이 어리석은 보통사람의 한계입니다. 이는 지혜로운 사람이 향할 길이 아닙니다. |
<해설>
수행을 하게 되면 그에 다라 신체의 변화도 생기고 또한 신통력도 생기게 됩니다. 그러나 이는 중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진지한 수행자는 그러한 것에 마음을 쓰지 않고 또 신통력이 있다고 해도 사용하지 않습니다. 지눌스님이 한결같이 강조한 것은 불교 수행에서 유일하게 중요한 점이 마음의 본성을 깨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마음의 본체가 생겨나거나 사라지는 것이 아님을 알면 사물이 영원하다거나 사라져 없어진다는 편견에 빠지지 않습니다. 또한 선정과 지혜를 통해 마음의 평정을 얻기 때문에 번뇌에 휩쓸리지 않게 됩니다. 치열한 수행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수행의 방향입니다. 옳지 않은 길은 가면 갈수록 목적지에서 더욱 멀어집니다. 그리고 수행의 바른 길을 알려 주는 것이 바로 마음의 본성에 대한 바른 견해를 갖는 것입니다.
교가(敎家)에서도 관법 수행의 효과를 자세히 설명하고 있지만, 교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관법 수행을 성인이나 닦는 것으로 여겨서 자신의 마음에서 찾으려하지 않고 오랫동안 배우고 닦지도 않으면서 그 효과만 알려고 합니다. 그래서 원효(元曉, 신라의 고승) 대사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일반 사람들은 관법 수행을 하며 마음이 있다고 인정하면서도 밖에서 이치를 찾는다. 하지만 이러한 관법 수행은 겉모습만 따르기 때문에 참된 모습과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멀어지게 된다. 이렇게 진리와 멀어짐으로써 삶과 죽음을 끝없이 반복하는 생사윤회(生死輪廻)의 괴로움을 벗어날 수 없게 된다. |
[해설] 관행(觀行)이란 지혜로써 대상을 비추어보는 수행으로 여기서는 마음의 본성을 관조하는 수행일반을 가리킨다. 그런데 마음의 본성은 자신의 마음 안에 있는 것이므로 밖에서 진리를 찾을 수 없는 것인데, 수행하는 사람들이 그것을 알지 못해 효과적인 수행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또 제대로 수행한다고 해도 눈으로 보이는 효과만을 노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까닭에 지눌은 원효의 말을 빌어 일반사람과 지혜로운 사람, 소승의 수행자와 대승의 수행자의 차이를 명확하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의 관법 수행은 이와 반대로 바깥의 모든 현상을 버리고 안으로 자신의 마음을 찾는다. 그래서 그것이 궁극에 이르면 마음의 이치까지 잊어 모두 잊고, 얻은 이치마저 다 잊으면 마침내 얻고자하는 마음까지 잊어버리게 된다. 그런 까닭에 ‘이치 없는 지극한 이치’를 얻을 수 있고, 마침내 진리로부터 물러나지 않게 되어 무주열반(無住涅槃, 자유롭고 거침이 없는 경지)에 머물게 된다. 도 소승 불교의 성인은 마음의 성품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미세한 망념이 아직 남아 있어서 그것으로써 마음이 사라져 없어지는 경지를 깨닫게 된다. 마지막으로 대승불교의 보살은 성품이 본래 생겨나는 것이 아님을 알기 때문에 미세한 망념을 떠난다. 그러나 마음이 아주 사라지는 것은 아니어서 참된 비춤과 지혜가 존재하므로 존재의 실상을 참답게 깨닫게 된다. |
[해설]
(1) 일반 사람의 관법수행은 마음이 안에 있다는 것을 인정은 하지만 부처와 보살에게 의존하고 성현의 가르침에서 진리를 찾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 수행으로는 아무리 열심히 해도 가르침의 틀(법집, 法執)에 매어있어서 윤회를 벗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2) 지혜로운 사람은 진리를 밖에서 구하지 않고 마음에서 찾을 줄 압니다. 그래서 궁극적으로 본질이 비어있다는 공의 마음이 되어서 마음이란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고 그렇다고 없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말로 규정되는 ‘마음의 이치’라는 것도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진리를 얻게 됩니다. 즉 마음의 생멸도 모두 연기의 법칙일 뿐입니다. 이것이 ‘이치 없는 궁극의 이치입니다.’
이렇게 주체로서의 찾는 마음과 객체로서 관찰되는 마음의 진리를 함께 잊는 것이 지혜로운 사람이 도달하는 궁극의 경지입니다.
무주열반은 무주처 열잔(無住處 涅槃)이라고도 하는 데, 생사윤회에 머물지 않고 그것을 벗어난 열반에도 집착하지 않는 대자유의 세계에서 중생에게 자비를 베푸는 경지를 말합니다.
(3) 소승불교의 수행자는 마음이 생겨나지도 않고 소멸되는 것도 아니라는 점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마음, 즉 망념을 없애고자 애를 쓰게 됩니다. 그래서 미세한 의식 작용으로 마음이 사라지는 경지를 체득하는데, 이러한 경지는 마치 허공과 같이 마음이 텅 비어 있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러한 소승불교의 열반은 몸이 죽으면서 의식작용까지 완전히 무로 돌아가는 회신멸지(灰身滅智, 몸도 지혜도 모두 사라진 상태)다. 여기서는 어떤 지혜와 자비도 솟아날 수 없다.
(4) 대승불교의 수행자는 마음이 본래 생겨남도 없고 사라짐도 없는 무생(無生)의 진리를 체득한 미세한 망념까지 떠나고 마음이 공(空)하면서 동시에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므로 지혜와 자비가 함께 있는 것입니다.
원효대사는 이와 같이 보통사람과 지혜로운 사람, 소승불교와 대승불교의 관법 수행의 차이를 조금도 남김없이 분별해서 드러내셨습니다. 그래서 관법수행에서 힘을 얻은 예와 지금의 현인들은 모두 자신의 마음에 도달해 망상이 본래 생겨나는 것이 아님을 알기 때문에, 근본적인 지혜와 뒤에 깨달은 지혜를 활용하는 데에서도 거침이 없고 있는 그대로의 실상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대승불교의 관법수행은 다른 관법 수행과는 길이 다른데 어찌 자신의 마음을 관조하지 않고 먼저 신통력만 찾으십니까? 그것은 마치 배를 부릴 줄 모르면서 물길이 험한 것만 나무라는 것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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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대승 불교의 진리는 곧 마음의 진리입니다. 예와 지금의 현인들은 관법을 수행해 마음의 본성을 깨쳤기 때문에 망상이나 번뇌가 일어나지 않고, 생각이 일어 난다해도 이에 얽매이지 않고 물들지 않아서 더 이상 끌려 다니지 않게 됩니다.
즉 망상이나 번뇌가 문제가 아니라, 그것에 물들고 끌려 다니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이렇게 마음을 관조하고 마음을 닦는 대승불교의 가르침 앞에서 신통력이란 진리의 그림자요, 껍데기에 불과한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바다 / 백석
바닷가에 왔더니
바다와 같이 당신이 생각만 나는구려
바다와 같이 당신을 사랑하고만 싶구려
구붓하고 모래톱을 오르면
당신이 앞선 것만 같구려
당신이 뒤선 것만 같구려
그리고 지중지중 물가를 거닐면
당신이 이야기를 하는 것만 같구려
당신이 이야기를 끊는 것만 같구려
바닷가는 개지 꽃에 개지 아니 나오고
고기비늘에 하이얀 햇볕만 쇠리쇠리하야
어쩐지 쓸쓸만 하구려 섪기만 하구려
바닷가에서 이야기를 하고 개지꽃(나팔꽃)을 보며 환하게 웃어주던
사랑했던 임에 대한 아련한 마음 저림이 담긴 아름다운 시다.
구부정하게 모래톱을 올라 바다를 보면 그녀가 보이는 걸까?
- 몽우 조셉킴(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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