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12. 17. 05:12ㆍ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연기법(緣起法)대로, 기복불교와 유일신교의 극복을 위하여 - 법응스님의 피를 토하는 듯한 기고문
재가불자들은 종단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하여 잘 모른다. 하지만 교계 인터넷신문 등을 통하여 종단이 돌아가는 상황에 대하여 간접적으로 알게 된다. 그런 것들 중의 하나가 올해 하반기 뜨거운 이슈로 떠 올랐던 ‘종교평화를 위한 불교인 선언’ 소위 ‘21세기 아쇼카선언’일 것이다.
열린전리관과 전법의 원칙을 특징으로 하는 21세기 아쇼카선언의 초안문을 보면 여러모로 ‘반불교적’이고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을 져 버리는 ‘망불적인’ 선언이었다.
이런 선언문에 대하여 의식있는 불교인들은 적극적으로 반대의사를 표현하였고 마침내 종정스님의 말씀에 따라 선언이 유보되기에 이르렀다.
이처럼 불자들은 인터넷을 통하여 불교계의 돌아가는 사정을 알게 된다. 그런데 교계의 사정을 알면 알수록 점차로 비판적 시각을 갖게 된다. 한국불교를 대표하고 한국불교를 이끌어 가고 있는 종단의 모순과 위선, 불합리 등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피를 토하는 듯한 기고문
가장 청정하고 가장 순수해야 할 종교단체가 온갖 비리와 모순과 위선으로 가득찬 것이라면 마땅히 개혁해야 한다. 하지만 개혁대상이 개혁을 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성을 촉구하는 목소리는 매우 높다. 대표적으로 ‘법응스님’을 들 수 있다. 교계 인터넷신문에 기고한 스님의 글을 보면 현재 한국불교가 처해 있는 상황을 잘 알 수 있다.
법응스님은 기고문에서 종단의 문제점에 대하여 지적하고, 이에 대한 대책도 동시에 제시하였는데, 그 중에 하나가 ‘기복’에 대한 것이 있다. 스님은 기고문에서 한국불교의 기복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의견을 피력하였다.
여섯째, 기복 불교를 더 이상 좌시해서는 안 됩니다.
기복 불교를 100% 일소 할 수는 없으나 현재는 위험 수위가 분명합니다. 크고 작은 절 모두에서 온갖 명분의 기도가 판치니 교회인지 사찰인지 굿당인지 분간이 안 갑니다.
기복 불교의 창궐은 결국 총무원의 문제입니다. 총무원이 이를 바로잡지 않는다면 불교는 복이나 비는 종교이며, 깨달음과 구세대비는 그저 구두선과 장식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는 총무원과 승려의 무능을 만천하에 공개하는 것입니다. 49재의 제대로 된 의미와 시대적 재해석이 요구되는데 이에 대한 관심조차 없으니 문제입니다. 시급한 대책을 세워 주십시오.
(법응스님, [기고] 총무원장스님·도법스님·사부대중에게 공개편지_법응, 불교포커스 2011-12-08)
스님은 이 기고문을 쓰기 위하여 밤을 꼬박 세웠다고 하였다. 다섯 가지 문제점과 아홉 가지 대책에 대한 글을 읽어 보면 마치 피를 토하며 호소하는 듯하다. 그런 내용 중에 기복에 대한 것을 보면 한국불교가 처한 현실에 대하여 정확하게 지적하였다고 볼 수 있다. 더이상 기복화된 불교를 방치할 수 없다는 것이다. 글에서 지적한 기복화된 불교의 특징 두 가지는 ‘기도’와 ‘천도재’이다.
기도는 기독교 용어
기도의 경우 이는 기독교 용어에 가깝다. 실제로 기독교에서는 기도라는 용어가 매우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고, 예배할 때 기도로 시작해서 기도로 끝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처럼 명백히 기독교 용어인 ‘기도’라는 용어에 대하여 마치 불교의 전유물인 것처럼 무분별하게 사용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는 절에 가본 불자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사항이다. 입시철만 되면 수능과 관련된 기도에 동참하자는 현수막이 붙어 있고, 심지어 각종 법회에도 ‘기도’ 자를 붙이는 것을 잊지 않는다. 이런 기도는 큰 절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다.
조계사의 동지기도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조계종에서 조계종을 대표하는 절이 조계사이다. 그래서 일주문에 ‘대한불교조계종총본산 조계사’라는 현판이 붙어 있다. 한국불교를 대표한다는 사찰의 홈페이지(http://www.jogyesa.kr/user/jogye/index.action)에 들어가 보았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이 ‘동지기도’이다. 12월 22일이 동지이기 때문에 동지를 앞두고 이를 공지하기 위한 안내문이다. 그런데 ‘동지’ 글자 다음에 기도를 붙여 동지기도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대체 누구에게 기도한다는 것인가. 기도의 사전적 의미가 신적인 존재와 나누는 대화를 의미하는 것인데,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불제자들이 부처님 이외의 초월적 존재에게 고백하고, 간구하고, 감사하고, 찬송하고, 예배하여서 기도를 들어주면 예물을 바치겠다고 서원하는 것은 유신론적이고 타력적이어서 비불교적 행위라는 것이다.
입시철만 되면
기도 중에서도 입시철만 되면 가장 극성을 부리는 것이 입시와 관련된 기도이다. 자식이 잘 되기만을 소망하는 부모들이 절에 찾아와 부처님에게 빌고 또 비는 것이다. 절마다 고득점이나 합격을 기원하는 현수막을 내걸어서 불안에 떠는 부모들을 끌어 들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절에서는 이 기간동안 수입을 짭잘하게 올리고 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이런 기도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행위이다. 부처님이 다른 자식은 떨어뜨리고 내자식만 합격하게 하기를 바라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그래서 진정으로 부처님을 따르는 불제자들이라면 입시기도발원이라는 현수막을 걸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소망마저 버리라는 것은 아니다. 이도흠 교수는 교계신문의 연재 컬럼에서 다음과 같이 개선하자고 주장한다.
그렇다고 합격발원기도를 완전히 해체하라는 것이 아니다. 역사와 전통으로서 기복 불교까지 부정할 것은 없다. 절마다 사정이 판이하니, 정 없애기 어려우면 합격을 기원할 것이 아니라 수험생이 건강하고 정당하게 실력을 발휘하여 좋은 일을 할 수 있도록 이끌어 달라고 빌면 된다. “지금 공부하고 있는 불자 000가/ 늘 따스한 감성으로 온 생명들을 돌보고/ 늘 냉철한 이성으로 세상을 직시하고/ 늘 밝은 지성으로 보이지 않는 세계를 통찰하며/ 늘 맑은 마음으로 올바르지 않은 것에 맞서고/ 늘 깊은 마음으로 낮은 사람을 가여이 여겨/ 그를 부처로 이끌어 자신도 부처가 되기를 바라옵니다.”라고 발원하면 안 될까?
(이도흠교수, 기복성과 주술성-1, 법보신문 2011-11-16)
이도흠교수의 주장에 따르면 합격을 바라는 기도를 하는 것이 아니라 합격할 수 있도록 건강하고 정당하게 실력발휘 할 수 있도록 발원하자는 것이다. 이는 부처님과 수험생에게 부담을 주지 않는 것을 말한다. 한마디로 수험생에게 공부를 잘 할 수 있도록 ‘분위기’와 ‘환경’을 조성해 주는 것을 말한다. 부모가 절에 가서 청정하게 발원하는 것 자체가 공부를 더 열심히 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해 주기 때문이다.
천도재의 근거는
기도와 더불어 또 하나의 대표적인 기복행위가 ‘천도재’이다. 기도가 ‘기독교 따라하기’의 전형이라면, 천도재는 그 역사적 뿌리가 매우 깊어 기복의 대명사와도 같다. 이는 불교의 전래와 함께 천도재가 들어왔기 때문이다.
대승불교권 국가로 분류되는 한국불교는 한국의 역사와 전통을 같이 하고 있다. 하지만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의 입장에서 본다면 매우 비불교적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천도재라는 용어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천도재는 어떻게 생겨나게 되었을까. 홍사성님의 글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효도와 관련된 《부모은중경》이나 앞에서 읽은 《목건련경》 등은 역사적 사실과 관계없는 대표적인 위경이다. 이 위경이 부처님이 직접 설한 가르침으로 둔갑한 데서 모순이 일어난 것이다. 인도에서 찬술된 수많은 대승경전도 사상의 문제가 아닌 역사적 사실의 문제라는 점에서는 예외가 아니다.
(홍사성님, 불설과 비불설을 결택하자, 불교평론 2001-06-01)
홍사성님은 기복의 근거가 되는 경이 있다고 하였다. 이는 중국에서 만들어진 ‘위경’을 말한다. 천도재 역시 위경을 근거로 하고 있다고 하였다. 그런 위경 중의 하나로서 ‘목건련경’을 들고 있다.
목건련경에서
그렇다면 목건련경에서 부처님은 어떤 말씀을 하셨을까. 목건련경에 천도재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나복은 열심히 공부해서 신통제일의 목련 존자가 됐다. 목련 존자는 신통으로 어머니가 태어났을 천상을 두루 살펴보았으나 어머니가 보이지 않았다. 이상하게 여긴 목련이 부처님을 찾아가 여쭈었다. 부처님은 청제 부인이 살아서 인과를 믿지 않고 나쁜 업을 지었으므로 지옥에 떨어졌다고 했다. 목련이 신통력으로 지옥으로 찾아가니 과연 어머니는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을 받고 있었다. 목련이 부처님을 다시 찾아 뵙고 어머니를 구할 방법을 가르쳐달라고 애원했다.
(홍사성님, 불설과 비불설을 결택하자, 불교평론 2001-06-01)
홍사성님의 글에 소개된 목건련경의 일부에 대한 것이다. 경에서 부처님은 “7월 보름 스님들이 해제하는 날 우란분재를 베풀어라. 그러면 지옥에서 벗어날 것이다.”라고 말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것이 현재 한국불교에서 대유행하고 있는 천도재의 근거가 되는 문구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근거는 매우 중요하다.
시대적 요청에 따라
시민의 힘으로 당선된 박원순 서울시장이 강연에서 한 말이 있다. 공무원들이 매번 하는 세 가지 타령이 있다고 한다. 첫째는 “법률적 근거가 없다”는 것이고, 둘째는 “예산이 없다”는 것이고, 셋째는 “전례가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세 가지 조건 중에 어느 것 한 가지라도 걸리는 것이 있으면 아무 일도 추진할 수 없는 것이 공무원들의 일이라고 비판한 바 있다. 마찬가지로 종교에서도 경전을 근거로 하고 있다.
어느 종교이든지 경전을 근거로 하여 말을 한다. 특히 유일신교의 경우 경전에 근거하여 말하는 것이 일상화 되어 있는데, 어느 경우이든지 바이블의 ‘몇 장 몇 절’을 들먹이는 것이 이에 해당될 것이다. 불교 역시 경전에 근거하여 법문을 하는 것이 원칙으로 되어 있다. 이는 대승불교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대승불교의 경우 필요에 따라 그때 그때 경전을 만들었다는 사실이다. 인도에서 대승불교운동이 일어났을 때도 마찬가지고, 인도의 대승불교가 중국으로 전래 되었을 때 중국에서도 마찬가지이었다. 그래서 그 때 당시 중국에서 시대적 요청에 따라 만든 것이 중국의 위경이다. 천도재의 근거가 되는 목건련경, 우란분경, 지장보살본원경, 부모은중경 등이 해당된다.
가미니경에서
목건련경에서 부처님은 “7월 보름 스님들이 해제하는 날 우란분재를 베풀어라. 그러면 지옥에서 벗어날 것이다.”라고 하였다. 역사적으로 2,600년전에 실재 하였던 석가모니 부처님이 이와 같은 말을 하였을까. 하지만 부처님의 친설이라고 여겨지는 초기경전에 이와 같은 말은 없다. 그 대신 부처님은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다.
"가미니여! 저 남녀들은 게을러 정진하지 않고 그러면서 악한 법을 행하며, 열 가지 선하지 않은 업도[十不善業道], 곧 생물을 죽이고, 주지 않는 것을 취하며, 삿된 음행을 하고, 거짓말을 하며, 나아가 삿된 견해를 성취했다. 그런데 만일 여러 사람이 합장하고 그들을 향해 칭찬하고 요구했기 때문에, 이것을 인연으로 죽어서 좋은 곳에 가서 천상에 태어날 수는 없다.
가미니여! 그것은 마치 이 마을에서 멀지 않은 곳에 깊은 못이 있다. 거기에 어떤 사람이 큰 무거운 돌을 그 물 속에 던져 넣었다. 만일 여러 사람이 와서 저마다 합장하고 그것을 향해 칭찬하고 축원하면서 ‘돌아 제발 떠올라다오.’라고 말하였다. 가미니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 무거운 돌이 어찌 여러 사람이 저마다 합장하고 축원했다고 해서 이 인연으로 돌이 물 위로 떠오를 수 있겠느냐? ……“
“가미니여! 저 남녀들은 정진하여 부지런히 닦고 그러면서 묘한 법을 행하여, 열 가지 선한 업도[十善業道]를 성취하여 살생을 떠나고 살생을 끊고, 주지 않는 것을 취하는 것과 사음과 거짓말과 나아가 삿된 견해를 떠나고 삿된 견해를 끊어 바른 견해를 얻었다. 그런데 만일 여러 사람이 저마다 합장하고 그들을 향해 칭찬하고 요구했기 때문에, 이것을 인연으로 죽어서 악한 곳으로 가서 지옥에 태어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가미니여! 이른바 이 열 가지 선한 업도는 깨끗하여 자연히 위로 올라가 반드시 좋은 곳에 갈 것이기 때문이다. 가미니여! 그것은 마치 이 마을에서 멀지 않은 곳에 못이 있는데, 거기서 어떤 사람이 타락기름병[酥油甁]을 물에 던져 부수면 병조각은 밑으로 가라앉고 타락기름은 위로 떠오르는 것과 같다."
(『中阿含經』3, 『大正藏』1, pp.439c-440c) (마성스님, 재가자를 위한 붓다의 교설(21) 가미니경(伽彌尼經))
마성스님은 글에서 본 가미니경의 일부내용이다.
초기경에서 부처님은 가미니의 질문에 대하여 매우 명쾌하게 말씀해 주셨다. 그것은 다름 아닌 자업자득(自業自得), 자작자수(自作自受)에 대한 가르침이다. 만일 그가 선업을 쌓았다면 선처에 태어날 것이고, 불선업을 쌓았다면 악처에 태어날 것이라는 말이다. 이는 자신이 지은 업에 대하여 다른 누군가가 선처에 나게 하거나 악처에 나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한다.
“돌아 제발 돌아 떠올라다오.”
가미니경에서 하늘의 신을 섬기는 자가 천상에 태어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무거운 돌을 연못에 가라앉혀 놓고 “돌아 제발 돌아 떠올라다오.”라고 기도하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이는 하늘의 신에게 기도하는 행위는 돌덩이에 기도하고, 나무에 기도하여 소원성취하려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이렇게 부처님은 어떤 대상에 기도하는 행위가 불합리하다는 것을 연못에 가라앉은 돌덩이가 떠오르게 하려는 것과 같고, 병속에 들은 기름이 가라앉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고 초기경에서 분명하게 말함으로서 기도를 ‘부정’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승경전의 부처님의 말씀과 초기불교경전의 부처님의 말씀은 180도 다르다는 것이다.
두 분의 부처님
초기불교의 가미니경과 대승경전의 목건련경을 비교해 보면 불교에는 두 분의 부처님이 계신 것으로 보여진다. 한 분의 부처님은 자업자득을 말하고 있고, 또 한 분의 부처님은 인과를 ‘무시’하고 있다.
가미니경에서 부처님은 철저하게 ‘개인이 지은 업이란 누가 대신 받을 수 없음’을 강조하고 있지만, 목건련경에서 부처님은 우란분재를 올린 공덕으로 어머니가 지옥의 고통에서 벗어 날 수 있다고 말함으로서 인과를 무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반된 내용에 대하여 불자들은 매우 당혹해 한다.
전세계가 글로벌화하고 정보통신과 인터넷시대로 특징지워지고 있는 현시대에 모든 정보는 오픈되고 공유되고 있다. 따라서 이제까지 알지 못하고 있었던 초기불교의 가르침을 접하게 된 불자들은 대승불교의 가르침과 비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부처님의 가르침이 정 반대라면 어느 것을 믿어야 할 지 당황스럽다는 것이다.
여기서는 이렇게 믿어라 말하고, 저기서는 저렇게 믿어라고 말한다면 부처님의 가르침은 일관성도 없고 동시에 신뢰성도 없다. 설령 그 가르침이 방편에 지나지 않은 것이라도 결론이 180도 다르다면 곤란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정반대의 현상을 대승경전 도처에서 보게 된다. 이는 모두 위경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이다. 위경은 부처님의 친설이 아니라 그 시대적 상황과 필요에 따라 만들어진 경전이다. 따라서 위경으로 인하여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이 왜곡되고 변질되었다면 이는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밀어내는 꼴’과 같다.
기복으로 먹고 산다는데
흔히 종교는 기복으로 먹고 산다고 한다. 이 세상에서 기복을 빼버리면 살아남을 종교가 거의 없을 정도라고 한다. 이처럼 대부분의 종교는 기복을 뿌리로 하고 있는데 이제까지 불자들은 기복이 당연한 것인 줄 알았다. 그래서 기복으로 대표되는 기도와 천도재를 방편이라는 이름으로 버젖이 행해 왔는데, 놀랍게도 부처님은 이를 철저하게 부정하였다는 사실이다. 이는 초기불교경전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인데 부처님의 가장 기본적인 가르침인 ‘연기법’에 근거한다고 볼 수 있다.
부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깨달은 것은 한마디로 연기법이라 볼 수 있다. 부처님이 연기법을 발견함으로 해서 불교의 교리가 형성되었는데, 이 연기법이야말로 불교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는 사성제, 팔정도, 십이연기 등의 핵심교리가 모두 연기법을 근거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연기를 보는자 부처를 볼 수 있다”라고 하였다. 그런 연기법은 어떤 것일까.
불자라면 당연히 알고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잘 모르는 것이 연기법이다. 그것은 이제까지 한국불교가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을 소홀히 하였기 때문이다. 대승불교의 가르침을 중하게 여기면서 정작 역사적인 부처님의 가르침을 소홀히 한 결과 앞서 언급한 목건련경에서와 같이 인과를 무시하는 결과를 낳게 되었고, 결국 기도와 천도재라는 기복불교로 발전되기에 이르렀다. 그 결과 한국불교는 불교라는 이름만 있을 뿐이지 내용을 들여다 보면 힌두교화 된 불교, 기독교화 된 불교로 변질된 것이다. 이것이 한국불교를 포함하여 대승불교에서 보는 현실이다. 그렇다면 이런 모순과 위선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조건적 발생의 법칙
이에 대한 해답은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을 잘 이해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연기법을 잘 이해하는 것이다. 연기법을 이해하면 기도와 천도재로 대표되는 기복도 극복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유일신교의 교리도 논파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연기법은 철저하게 인과에 따른 조건법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초기경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내가 증득한 이 법은 심원하고 보기 어렵고 깨닫기 어렵고 고요하고 탁월하여 사념의 영역을 초월하고 극히 미묘하여 슬기로운 자들에게만 알려지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경향을 즐기고 경향을 기뻐하고 경향에 만족해 하는 사람들은 이와 같은 도리, 즉 조건적 발생의 법칙인 연기를 보기 어렵다.
(아야짜나경-Āyācanasuttaṃ, 6브라흐마상윳따, 상윳따니까야 SN6)
부처님은 연기법에 대하여 조건적 발생의 법칙이라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다. 이런 연기법은 보기가 매우 어렵다는 것이다.
역류도(逆流道 : paṭisotagāmi)
부처님은 이렇게 어려운 법을 성취하고 난 다음에 부처님은 고민하였다. 과연 누가 이 어려운 법을 이해할 수 있을까에 대한 깊은 회의감이었다.
대체 어떤 법이기에 이해하기 어려운 법이라고 하였을까. 부처님은 경에서 독백처럼 다음과 같이 말하는 장면이 있다.
참으로 힘들게 성취한 진리를 왜 내가 지금 설해야 하나. 탐욕과 미움에 사로잡힌 자들은 이 진리를 잘 이해하기 힘드네. 흐름을 거슬러가고 오묘하고 심오하고 미세한 진리는 보기 어렵네. 어둠의 무리에 뒤덮인 탐욕에 물든 자들은 보지 못하네.
(아야짜나경-Āyācanasuttaṃ, 6브라흐마상윳따, 상윳따니까야 SN6)
부처님은 자신이 발견한 연기법에 대하여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중의 하나에 대하여 ‘흐름을 거슬러 가는’ 법이라고 본 것이다. 이는 역류도(逆流道 : paṭisotagāmi)를 말한다. 역류도란 세류에 반하는 것으로서 애욕과 탐욕에 물들어 있는 자는 연기법을 보기 어렵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연기법으로 논파한 것들
그런면으로 본다면 세류에 편승한 모든 것들은 세류도라고 볼 수 있다. “자아와 세상은 영원하다”고 말하는 영속론자들, “죽으면 모든 것은 끝이고 내생은 없다”고 말하는 단멸론자들을 포함하여 기도와 방편으로 일관하는 자들 역시 세류도를 추구하는 자들이라 볼 수 있다.
부처님은 세류에 편승하는 세류도는 진리가 아니라고 하였다. 그래서 세류도를 추구하는 자들의 견해를 삿된 견해로 간주하고 연기법으로 논파하였다. 대표적으로 상견을 가진 브라만교을 들 수 있다.
부처님당시의 브라만교는 오늘날 한국에서 득세하고 있는 유일신교와 유사한 종교이다. 이런 상견에 대하여 부처님은 조건없이 스스로 일어난다는 것은 있을 수 없고, 또 원인 없이 일어나는 것도 있을 수 없기 때문에 ‘거짓’이라 하였다. 모든 법은 조건화합에 따라 존재하기 때문에 창조론으로 대표되는 상견을 삿된 견해로 간주하여 연기법으로 논파한 것이다.
이처럼 연기법은 조건에 따른 법이기 때문에, 조건에 따라 법이 계속 일어남을 알게 되면 ‘영원함’이라는 삿된법을 논파할 수 있고, 또 조건에 따라 다음 법이 계속 일어나기 때문에 ‘단멸함’ 또한 있을 수 없어서 단멸이라는 삿된 법을 논파 할 수 있다. 따라서 연기법에 어긋나는 교설은 진리가 아니고 모두 삿된 견해가 되는 것이다.
십이지연기의 정형구
이와 같은 연기법에 따르면 기복으로 대표되는 기도나 천도재 역시 거짓이며, 위선이고, 모순이며, 삿된 법에 지나지 않는다. 왜 그럴까 그것은 연기법의 ‘조건’이라는 조건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십이지연기에서 설명될 수 있다. 십이지 연기에 대한 정형구는 다음과 같다.
수행승들이여, 연기라는 것은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무명을 조건으로 형성이 생겨나고, 형성을 조건으로 의식이 생겨나며, 의식을 조건으로 명색이 생겨나고, 명색을 조건으로 여섯 감역이 생겨나며, 여섯 감역을 조건으로 접촉이 생겨나고, 접촉을 조건으로 감수가 생겨나며, 감수를 조건으로 갈애가 생겨나고, 갈애를 조건으로 취착이 생겨나며, 취착을 조건으로 존재가 생겨나고,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남이 생겨나며,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고 죽음, 우울, 슬픔, 고통, 불쾌, 절망이 생겨난다. 이와 같이 해서 모든 괴로움의 다발들이 함께 생겨난다. 이것을 수행승들이여, 연기라고 부른다.
그러나 무명이 남김없이 사라져 소멸하면 형성이 소멸하고, 형성이 소멸하면 의식이 소멸하며, 의식이 소멸하면 명색이 소멸하고, 명색이 소멸하면 여섯 감역이 소멸하며, 여섯 감역이 소멸하면 접촉이 소멸하고, 접촉이 소멸하면 감수가 소멸하며, 감수가 소멸하면 갈애가 소멸하고, 갈애가 소멸하면 취착이 소멸하며, 취착이 소멸하면 존재가 소멸하고, 존재가 소멸하면 태어남이 소멸하며, 태어남이 소멸하면 늙고 죽음, 우울, 슬픔, 고통, 불쾌, 절망이 소멸한다. 이와 같이 해서 모든 괴로움의 다발들이 소멸한다.
(빠띳짜사뭅빠다경-Paṭiccasamuppādasuttaṃ-연기, 12니다나상윳따, 상윳따니까야 S12, 전재성박사역)
빠알리어
Paṭiccasamuppādasuttaṃ
Katamo ca bhikkhave, paṭiccasamuppādo? Avijjāpaccayā bhikkhave saṅkhārā. Saṅkhārapaccayā viññāṇaṃ. Viññāṇapaccayā nāmarūpaṃ. Nāmarūpapaccayā saḷāyatanaṃ. Saḷāyatanapaccayā phasso. Phassapaccayā vedanā. Vedanāpaccayā taṇhā. Taṇhāpaccayā upādānaṃ. Upādānapaccayā bhavo. Bhavapaccayā jāti. Jātipaccayā jarāmaraṇaṃ, sokaparidevadukkhadomanassupāyāsā sambhavanti.
Evametassa keval!assa dukkhakkhandhassa samudayo hoti. Ayaṃ vuccati bhikkhave paṭiccasamuppādo.
Avijjāya tveva asesavirāganirodhā saṅkhāranirodho. saṅkhāranirodhā viññāṇanirodho. Viññāṇanirodhā nāmarūpanirodho. Nāmarūpanirodhā saḷāyatananirodho. Saḷāyatananirodhā phassanirodho. Phassanirodhā vedanānirodho. Vedanānirodhā taṇhānirodho. Taṇhānirodhā upādānanirodho. Upādānanirodhā bhavanirodho. Bhavanirodhā jātinirodho. Jātinirodhā jarāmaraṇaṃ, sokaparidevadukkhadomanassupāyāsā nirujjhanti.
Evametassa keval!assa dukkhakkhandhassa nirodho hotī'ti.
(Saṃyuttanikāyo Dutiyobhāgo Nidānavaggo 1.Abhisamayasaṃyuttaṃ 1.Buddhavaggo)
빠띳짜사뭅빠다(Paticca-samuppada) 빠알리어 창송
음성 04-hymn-04.mp3(5분 40초) Paticca Samupada - Dependent Origination, sung by Visarad Srima Ratnayaka
십이지연기를 보면 조건에 따라 법이 일어나고 알 수 있다. 그래서 무명을 조건으로 형성이 생겨나고, 형성을 조건으로 의식이 생겨는데 가장 나중에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고 죽음, 우울, 슬픔, 고통, 불쾌, 절망이 생겨난다(Jātipaccayā jarāmaraṇaṃ, sokaparidevadukkhadomanassupāyāsā sambhavanti)”로 되어 있다.
12연기에서 일반적으로
1) avijja 無明 무명 2) sankhara 行 형성 3) vinnana 識 의식 4) namarupa 名色 명색 5) salayatana 六入 여섯 감역 6) phassa 觸 접촉 7) vedana 受 감수 8) tanha 愛 갈애 9) upadana 取 취착 10) bhava 有 존재 11) jati 生 태어남 12) jaramarana 老死 늙고 죽음
로 알려져 있어서 열두번째가 노사로 되어 있으나, 초기경전에서는 늙음과 죽음뿐만아니라 우울, 슬픔, 고통, 불쾌, 절망이 함께 언급되어 있는 점이 독특하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모든 존재가 궁극적으로 괴로움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말한다. 이처럼 초기경전에서는 연기에 대하여 매우 구체적으로 실감나게 표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기복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다
조건에 따라 발생하는 십이연기를 보면 기복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어 보인다. 앞의 조건에 따라 다음 법이 곧바로 일어나기 때문이다. 지금 여기에서 합격기도를 한다고 부처님이 합격시켜 줄 수 없는 것은 조건이 맞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연못에 가라앉은 돌에 대하여 “돌아, 떠 올라라”라고 말하는 것과 하등의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지금 여기에서 죽은 자에 대하여 천상에 나게 해달라고 기도를 올리는 것 역시 천상에 태어날 조건이 성숙되지 않았다면 아무리 천도재를 여러 번 해주어도 천상에 태어 날 수 없을 것이다. 이는 철저하게 조건발생의 법칙인 연기에 따르기 때문이다.
이처럼 조건발생하여 법이 일어나는데 있어서 그 조건은 어떤 것이 있을까.
중유(中有, antarā-bhava)는 기복의 온상
기복으로 대표되는 기도나 천도재의 경우 조건을 무시하고 있다. 이는 원인과 결과라는 인과법을 무시하는 것과 같다.
기도와 천도재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먼저 일어나는 법과 다음에 일어나는 법 사이에 틈이 있어야 할 것이다. 천도재의 경우 그 틈을 이용하여 재를 올리는 것이다.
천도재를 대표하는 49재의 경우 사람이 죽었을 때 49일동안 ‘중유(中有, antarā-bhava)’상태를 유지한다고 한다. 중유란 새로운 몸을 받을 때 까지 어느 곳에서인가 머무는 존재를 말하는데, 이 중유를 인정하게 되면 조건발생하는 연기법이 무력화 될 뿐만 아니라 기복의 온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불교TV사이트에서 어느 스님이 법문한 내용에서 잘 확인할 수 있다.
새로운 몸이 확정 되기 이전에 우리가 염부시왕님에게 일생동안 7식작용에 의해서 지어 놓은 선업은 남김없이 염라대왕 업경대에 다 비추어져가지고 미래생으로 전해지게 하고, 나쁜 업이 좀 있다 하더라도 잘 봐 주셔가지고 “좋은 데로 잘 보내 주십시요” 하고 염부시왕님에게 부탁드리고 청탁하는 것이 49재입니다.
(49재 특강, 제23강 49재란무엇인가, 불교TV)
천도재에 대한 법문을 잘 하는 것으로 알려진 이 스님의 말에 따르면 천도재란 염라대왕에게 ““좋은데로 잘 보내 주십시요”라고 부탁드리는 것이라 한다. 이는 천도재를 지내는 것이 망자(죽은 자)를 위한 재가 아니고 염라대왕을 위하여 재를 모시는 것과 같다. 이를 두고 어떤 이들은 천도재를 지내는 것에 대하여 염라대왕에게 일종의 ‘뇌물’을 주는 것과 같다고 혹평하기도 한다.
“유전무죄(有錢無罪), 무전유죄(無錢有罪)”
이처럼 죽은 자가 일정기간 ‘대기’하고 있으면 그곳은 로비대상이 되기 쉽다. 이런 현상은 사회 곳곳에서 볼 수 있다.
군대의 경우 처음 입소하면 몇 일간 입소대대에 머물며 대기하게 되는데, 이때 집중적인 로비가 이루어져 좋은 곳으로 가는 경우가 많아서 사회문제가 된 경우도 있었다.
또 형무소에서 갇혀 대기하고 있는 자를 위하여 전관출신의 변호사를 선임하여 죄를 짓고도 무죄로 풀려나오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는데, 이런 경우를 흔히 “유전무죄(有錢無罪), 무전유죄(無錢有罪)”라 하여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마찬가지로 죽은 자가 49일 동안 대기하면서 그 죄가 무거울 경우 천도재를 지내주어 좋은 곳에 태어나게 해 준다면 이는 “유전무죄, 무전유죄”와 다름 없을 것이다.
이렇게 대기하면서 모든 문제가 발생된다. 그 대기기간동안 온갖 로비, 구명운동이 벌어지기 때문이다. 이는 모두 중유를 인정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부처님은 중유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연기법에 있다.
초기불교에 천도재가 없는 이유
연기법에서는 중유가 일어날 틈을 주지 않는다. 사람이 죽으면 틈 없이 다음 생이 시작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는 마지막 죽음의식이 일어날 때 다음 생이 시작될 ‘업(kamma)’이나 ‘업의 표상(kamma-nimitta)’ 또는 ‘태어날 곳의 표상(gati-nimitta)’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업이나 업의 표상 또는 태어날 곳의 표상을 조건으로 다음 법이 일어나는데, 그 때 생긴 법이 ‘식’으로서 삼세윤회를 설명하는 십이지연기에서 이를 ‘재생연결식(paṭisandhi-viññaṇa)’이라 한다. 십이지연기에서 “형성(행, 상카라)을 조건으로 의식(식, 윈냐나)이 생겨나며(Saṅkhārapaccayā viññāṇaṃ)”가 이에 해당된다.
이 과정을 보면 법이 조건에 따라 일어나고 사라짐만 있을 뿐이지 틈을 주지 않는다. 따라서 중유가 존재할 기반이 없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초기불교에서는 중유가 없기 때문에 천도재가 없는 것이다.
연기법대로 하면
유신론적이고 타력적인 기도와 유전무죄 무전유죄식의 천도재를 보면 한국불교는 초기불교와 비교하여 ‘퇴보’하였다고 볼 수 있다. 비록 기도와 천도재가 중생구제를 위한 방편이라고 주장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런 방편이 일상화 된 것이라면 이는 명백한 불교의 ‘퇴행’이라고 밖에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기도와 천도재는 인과를 무시하는 반불교적 행위이다. 부처님이 발견한 연기법에 따르면 조건에 따라 발생하는 법이 아니기 때문이다.
특히 천도재의 경우 타종교인들에게도 조롱거리로 전락한 듯 하다. 죄를 짓고도 천도재를 지내서 좋은 곳으로 보낸다는 것은 염라대왕에게 ‘뇌물’을 주는 것과 같아서 불교판 ‘유전무죄(有錢無罪), 무전유죄(無錢有罪)’로 보기 때문이다.
이렇게 비불교적이고 반불교적인 것들이 판을 치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불교에 대하여 ‘미개, 구식, 후진’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불교에 대하여 하여 전근대적인 것으로 간주하여 ‘전승의 대상’이라기 보다 ‘극복의 대상’으로 본 것이 근대 이후 지금까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불교의 전근대적이고 미개, 구식, 후진의 이미지를 벗어 던져버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불교에 대하여 근대적인 것이고 계몽, 신식, 선진이라는 이미지를 심어 주어야 한다. 그것은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에 충실하면 자동적으로 해결된다. 그 핵심은 연기법이다.
연기법대로 하면 기도와 천도재와 같은 방편은 발을 붙이지 못할 것이고, 상견이라는 삿된 견해를 가지고 있는 유일신교도 극복 할 수 있을 것이다.
2011-12-11 진흙속의연꽃
진흙속의연꽃 - 이 고뇌의 강을 건너
김광석 노래 13선
01. 광야에서 02. 그녀가 처음 울던 날 03. 그루터기 04. 나른한 오후 05. 나의 노래 06.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07. 너에게 08. 서른 즈음에 09. 어느 60대 노부부의 이야기 10. 외사랑 11. 이등병의 편지 12.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13.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
|
'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 > 불교교리·용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찰나 사이에도 세포는 죽고 사니 / 주 경 스님 (0) | 2011.12.23 |
---|---|
사념처관(四念處觀) (0) | 2011.12.17 |
주림을 달래고 몸과 마음을 바로 하는 탁발(托鉢)-법현스님 (0) | 2011.12.09 |
37조도법 사여의족·오근·오력 (0) | 2011.12.09 |
마음이 행복해 지는법 / 법륜스님 (0) | 2011.12.02 |